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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 - 서양

제국 - 알렉산더 대왕 ③ 헬레니즘(Hellenism)ㆍ헤브라이즘(Hebrism)

by 당대 제일 2022. 9.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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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레니즘 (Hellenism)"을 "인간 중심 문화"라고 한다면, "헤브라이즘 (Hebrism)"은 "신 중심 문화"라고 할 수 있으며, 서양 윤리 사상의 문화적 배경은 "아테네ㆍ예루살렘"에 의해 상징적으로 표현될 수 있다.

 

1.  헬레니즘 (Hellenism)헤브라이즘 (Hebrism)

• 헬레니즘 (HellenismㆍBC 330~ BC 30ㆍ그리스 문화 + 오리엔트 문화) : "그리스인처럼 행동하다ㆍ말하다"는 뜻의 "hellenizein (그리스어)"에서 유

"그리스 아테네"와 이를 계승한 "알렉산드로스 대제국"을 통해, 발전한 문화  /  고유한 "그리스 문화""오리엔트 문화"가 융합하여, 이루어진 세계주의적인 예술사상정신 등을 특징으로 하는 문화

• 헤브라이즘 (HebrismBC 323~ BC 146) : 고대 이스라엘 인의 종교와 구약 성서에 근원

"유대교"와 그들에게서 출발한 종교적이고, 금욕적인 기독교적 세계관  /  인간이 아닌 신(), "여호와에"게 절대복종하는 것을 삶의 근본이념으로 삼아, 하나님을 경배하며 모든 삶의 영광을 돌리는데, 내세에 대한 소망과 영적이고 금욕적인 사고방식이 포함

 헤브라이 (Hebrew) : 구약성서 야곱의 12명의 아들(아브라함이삭)의 자손으로, BC 1446년 출애굽하여, 40년간 광야 생활을 거치고, "가나안(팔레스타인)"을 정복한 사람들

 유대인 (유다사람) : BC 586, "바빌로니아(수도 바빌론(Babylon)수메르인과 아카드인들로 구성된 제국)""유다왕국"을 점령하여, 유다 민족을 본국으로 끌고 가서 노예로 만듬.

유대인

2.  헬레니즘 (HellenismBC 330~ BC 30그리스 문화 + 오리엔트 문화)

"헬레니즘"이란 말을 처음 사용한 것은, 1863년 독일의 역사학자 드로이젠(1808~1884)이 그의 저서 "헬레니즘 사()"에서 쓰면서 부터였다고대 "그리스인"들이 자기 나라를 "Helas"라 부른 사실을 바탕으로, 고대 "그리스 인"들의 문화와 그들의 이상, 생활양식 등의 정신적 근저를 "헬레니즘"이라 명명하면서, 유래된 "그리스 정신"을 지칭하는 개념이다대체로 "그리스 문화정신"을 가리키는 경우가 배적이다.

, 이 시대의 특징에 관해서도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그리스 문화"의 확대발전으로 보는 견해와 반대로 "오리엔트 문화"를 통한 "그리스 문화"의 퇴폐로 보는 등의 견해도 있으나, "그리스 문화""오리엔트 문화"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아, 질적 변화를 일으키면서 새로 태어난 문화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헬레니즘 시대"의 범위에 관해서도 여러 설이 있다. 먼저 그 시작을

"알렉산더 대왕""아시아 원정 출발(BC 334)에 두는 설    "페르시아"를 멸망시 (BC 330)에 두는 설     "알렉산더 대왕" 죽음 (BC 323)에 두는 설 등이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BC 330"알렉산더 대왕의 페르시아제국 정복"에서, BC 30년의 "로마가 이집트를 병합하기"까지의 300년간이 그 시대 범위로 간주된다

"헬레니즘 지역적 범위""마케도니아그리스"에서부터 대왕의 "정복지 전역(인더스 유역박트리아메소포타미아소아시아이집트)"까지 이다서방의 "로마"도 문화적으로는 "헬레니즘 문화권"에 든다고 생각하는 학자도 있으나, 일반적으로 "로마" 포함시키지 않는 것이 관례이다.

3.  헬레니즘 시대 (BC 323~ BC 146)

"알렉산더 대왕"이 사망한 BC 323년에서 "그리스" 심장부가 "로마"에 병합된 BC 146년까지의 기간을 "그리스 역사의 헬레니즘 시대"라 부른다.

학자에 따라, "알렉산더 대왕""페르시아 원정"을 시작한 BC 334년부터 약 300년간으로 보기도 한다(알렉산더 대왕알렉산드로스 3BC 356~323 (향년 32)재위 BC 336~323(13))

"알렉산더""서아시아의 시리아팔레스티나" 등을 정복하고, "메소포타미아이집트의 내륙"까지 진출했다. 이 동방 세계는 "그리스 폴리스"와는 전혀 다른 사회가 수천 년간 이어져, 고유의 문화를 간직하고 있었다"알렉산더"는 이들의 고유문화를 인정하는 동시에, 이곳에 "그리스인"을 이주시켜 살게 해 자연스럽게 "그리스 문화"를 전파시켰다. 이렇게 정복지의 고유 문화와 "그리스" 문화의 융합을 통한 새로운 "그리스풍 문화"가 탄생했는데, 이것이 "헬레니즘 문화".

BC 323"알렉산더"가 사망하고, BC 310, "알렉산더"의 친족이 모두 제거되었으며, "마케도니아" 장군들이 스스로 "알렉산더의 후계자임"을 자칭하면서 각자 자기의 세력권 내에서 ""의 호칭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런 혼란은 약 40년간 계속되다가 결국 3개의 헬레니즘 왕국으로 분열되었다.

이들 3국의 건국자는 모두 "알렉산더 대왕" 휘하의 대표적인 장군이었고, 국가들은 한결같이 "전제군주국"이었지만, "민족구성지리적 환경관습" 등은 서로 달랐고, "로마"에게 멸망되기까지 "헬레니즘 국가"로 존속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 이집트남부 시리아를 차지

셀레우코스 왕조 : 시리아에게 해 연안~ 힌두쿠시 산맥에 이르는 아시아 지역을 차지

안티고노스 왕조 : 잔존 마케도니아 왕국그리스 일부를 차지

"헬레니즘 시대"를 정치적으로는 크게 3기로 나눌 수 있다.

BC 323~ 280 : 알렉산더가 이룩한 제국의 분열과 일련의 새로운 여러 국가의 건설

BC 280~ 160 : 세력균형주변 지역에 대한 그리스 문화 및 그리스적 생활양식의 확대 / 철학과학의 우위 등을 특색으로 한 창조적 국면

BC 160~ 30 : 동방로마 문화의 영향으로 인해 정치적 쇠퇴자멸

4. 동방 원정에 따른 헬레니즘 문화 형성

"알렉산더" 자기가 정복한 땅에 "알렉산드리아"라고 이름 지은 도시를 70여개나 건설하였다고 한다.

이 도시들은 "그리스 문화" 동점(東漸)의 거점이 되었고, 알렉산더의 "동서융합 정책"은 새로운 문화를 탄생시켰는데, , "헬레니즘 문화"의 형성에 큰 구실을 하였다그의 문화사적 업적은 "유럽아시아아프리카"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하여, "그리스" 문화와 "오리엔트" 문화를 융합시킨 새로운 "헬레니즘 문화"를 이룩한 데 있다.

"헬레니즘"이 끼친 영향은 매우 큰데, "헬레니즘" 문화의 특색은 "세계동포주의""개인주의"이다얼핏 상반된 두 성격처럼 여겨지지만, 이는 실제로 "폴리스 문화"의 극복이라는 한 뿌리에서 나온 것이다, 고립된 "폴리스"를 뛰어넘어, 좀 더 큰 세계를 지향하는 것이고, "폴리스"라는 공동체 중심의 사고로부터 "개인 중심"의 사고로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한편으로는 "로마"를 통해, 서유럽으로 전해져서, 유럽 문화의 근간이 되었다오늘날 유럽 문화의 기원은 "헬레니즘""헤브라이즘"의 두 흐름이다한편으로는 "인도"에 영향을 미쳐, "간다라 양식"이란 예술 조류를 형성했다"간다라 예술"은 서역지방을 거쳐, "중국한국일본"에까지 전파되었다.

"알렉산더"의 원정으로, "동서 문화"의 융합이 이루어졌으며, 이러한 문화형태는 "헬레니즘" 문화권을 성한다.

"알렉산더"의 야심은 단지 무력으로 또는 영토적으로 동방세계를 원정하고, 지배하는 것이 아니었다그의 최종적인 꿈은 "그리스 세계""오리엔트 세계"를 인종문화적으로 통합하고자 하는 데 있었다이를 위해 "알렉산더"는 정복사업에 200여명의 학자와 예술가들을 대동하였다그리고 결혼정책을 써서, 스스로 "페르시아 여인(다리우스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였으며, 부하들에게도 이를 장려하였다.

그리고 종래의 편협한 "헬라 의식"을 청산하고, "세계동포주의(Cosmopolitanism)" 내세워, "마케도니아" 병사와 "아시아" 병사를 평등하게 대우하였다그리고 가는 곳마다 정복지에 "알렉산드리아"라는 이름의 도시들을 건설, 동서 문화의 융합을 꾀하였다.

"알렉산더" 대왕의 요절이후, "민족융합정책"은 실패로 돌아가고, 그가 건설한 대제국은 분열되었으나 세계 통합이라는 그의 꿈은 "헬레니즘 문화"의 전파로 일부 실현되었다여기서 "그리스"의 전기 작가 "플루타르크"의 말을 잠깐 빌려보자.

"알렉산더의 교화정책으로 히르카니아인은 결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아라코시아인은 땅을 경작하는 법을 배웠으며, 소그디아나인은 부모를 죽이지 않고 공경하는 법을, 페르시아인은 어머니와 결혼하지 않고 어른으로 모시는 법을 배웠다. 인도인은 그리스 신들에게 경외심을 품게 되었고, 스키타이인은 시체를 먹지 않고 매장하게 되었다."

"알렉산더"가 개척하고 닦아놓은 도로, 항구 등을 통해, 유럽과 아시아세계 사이에는 무역이 왕성했고 그가 개척한 식민지에는 "그리스 어그리스 문명그리스 식의 자유주의시민사상"이 전파되어 "리스"의 틀을 깨고,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알렉산더" 제국 곳곳에 건설했던 신도시는 대부분 그의 이름을 따서 "알렉산드리아(Alexandria)"로 명명되었는데, 70여 개에 이르는 이들 도시는 모두 교통의 요충지에 건설되었고, 이른바 "헬레니즘(Hellenism) 문화"의 발생과 분포가 바로 이 도시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헬레니즘"의 모습은 현대의 세계화와 비슷한 점을 가지고 있다"알렉산더"의 원정으로 인해, 각지의 문화가 융합되어 통합되고, 하나의 비슷한 모델로서 발전하는 상을 보인다이것이 서구역사의 바탕이 되는 "헬레니즘" 고유의 가치가 아닌가 생각한다"알렉산더"에 의한 이러한 문화의 통합이 바람직하든 아니든, "헬레니즘"이 역사상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오늘날에까지 영향을 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5. 헬레니즘 : 철학ㆍ문화ㆍ사회와 경제

철 학

"마케도니아""알렉산더 대왕"의 출현은 "그리스 철학"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알렉산더"가 건립한 대제국 밑에서 종래의 "도시국가(폴리스)" 중심의 정치철학이나 도덕철학이 그 의미를 잃고, "세계 국가(코스모 폴리스)"의 성격을 띠게 되어, 국가의 문제보다는 개인의 삶에 심이 집중되었다.

또한, "로마""카이사르""세계 통일(BC 46)"이 이루어진 후, "그리스"철학은 "아테네"에서 서쪽으로는 "로마", 동쪽으로는 "알렉산드리아"로 옮아갔다국운이 쇠잔해진 "그리스 인"들로서는 이론적 추구의 여유가 없어지고, 옛 철학이론을 현실에 적응시키는 "실천철학"으로 바꾸어 놓았다.

B.C 3세기에 "아테네"에서는 "키프로스" 출신인 "제논"이 창설한 "스토아학파""에피쿠로스학파"가 대립되었다"스토아학파""헤라클레이토스"의 철학과 "무욕의 생활"을 이상으로 했던 "키니코스학파(소크라테스 추종학파)"의 흐름을 받았고, "에피쿠로스학파""데모크리토스"의 철학과 "쾌락이 선이다"라는 "키레네학파(역시 소크라테스 추종학파)"의 흐름을 받았다이 두 학파는 모두 "인간의 목적이 행복에 있고, 인생은 자연에 따르는 생활에서 그 행복이 획득된다." 믿었으나, "스토아학파"는 그 행복이 금욕에 있다고 보는 데 반하여, "에피쿠로스학파"는 쾌락에 있다고 보고, 대립하였다

그러나 "스토아학파""아파테이아"이나, "에피쿠로스학파""아타락시아"는 다 같이 인간의 "정욕"으로부터의 해방을 뜻하는 비슷한 입장이라 하겠다한편, "엘리스"출신인 "피로"가 체계화한 회의론은, 원래 인간이란 사물의 참된 본질을 알 수 없으므로 헛된 판단을 중지하는 것이 좋다는 "판단중지" 내세워, 그것으로 "혼의 평안을 얻는 것이 참된 행복"이라는 입장이다"스토아학파""로마"에 가서, "네로 황제"의 교사였던 "세네카", 노예였던 "에픽테토스", "로마""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등의 학자들로 이어졌고, "에피쿠로스학파""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어머니 "플로티나" 같은 신봉자를 "로마"에서 얻었다.

동쪽 "알렉산드리아"로 뻗어나간 "그리스"철학은 동방의 "헤브라이 종교"와 접촉하여 이른바 "구제(救濟) 철학"으로 나타났다"알렉산드리아""유대인 필론""플라톤 철학""헤브라이 종교"의 결합을 꾀하여, 인간은 하나님 속에 머무는 행복을 위하여 자기의식에서의 탈출을 지향하였고, 세계와 하나님과의 중간자로서 "로고스신학"을 제창하였다.

"신플라톤주의자"라고 일컫는 "플로티노스는 알렉산드리아"에서 교육받은 "이집트 인"으로 후에 "로마" 가서 철학을 가르친 사람인데, 그는 "플라톤"에 따라 "최고의 것은 존재를 초월하는 일자(一者)"라고 보았다.

태양에서 광선이 비추어 나오듯, "일자(一者)"에서 "예지(nous)"가 유출되고, "예지"의 하부에서 "영혼"이 흘러나오고, "영혼" 다음에 "감각계"가 뒤따라 유출된다는 것이다이렇게 그는 "완전한 것에서 불완전한 것으로 내려오는 길"을 보여주었는데, 인간은 기도와 주술의 작용에 의해 반대 방향으로 향할 수 있어, "하느님과의 합일"을 이상으로 생각하였다.

313, "로마""콘스탄티누스 황제""그리스도교 보호"를 선포하고, "유스티니아누스 황제""플라톤" 학원을 폐쇄하자, 고대의 "그리스 철학""그리스도교 사상"으로 이어졌다이를 3가지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현세적 인간 중심

헬레니즘은 현세적이고 인간 중심적인 세계관이다 그리스인들은 예술정치철학등 모든 분야에서 인간의 가능성을 믿고, 육체적, 본능적인 것을 추구하였다. 그들은 이 인간세상을 아름답고 살기 좋은 곳으로 보고 현세에서의 즐거운 삶을 추구했다 피타고라스의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는 말은 헬레니즘을 적절하게 대변해 준다.

이성과 합리주의

B.C 5세기경, 그리스에서는 모든 영역에 걸쳐, 합리주의 정신이 정착되었다 "헬레니즘의 최고 이념은 사물을 존재하는 그대로 보는 것"이라고 한 Matthew Arnold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그리스인들은 이성에 의한 진리 추구에 모든 노력을 경주했다 그 결과, 앞 세대에 만연했던 인종차별, 혹은 계층상의 차별이 평준화되고, 경제상의 자유경쟁을 지하는 모든 전통이 폐지되었다. 뿐만 아니라 학문 및 예술의 활동도 초국가적으로 조직되며, 분상의 제약들도 없어지게 되고, 정신 영역에서도 분업의 원리가 확립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리스인들은 이성과 지성을 중시하게 되었고, 모든 현상에 대한 객관적이고 공정한 판단을 추구하는 합리주의적 능력을 지니게 되었다.

조화와 통일성

B.C 6세기에 이르러 그리스인들은 예술의 생명이라 할 수 있는 미()의 조화와 통일성을 중요시하는 "자율성" 원리를 발견하였다. 그 이전에는 통일성이라는 명제는 그다지 중요시되지 않았다 그리스인들은 이성과 결합된 미를 사랑하였고, 조화와 통일성을 추구했던 것이다. 그리스 사상이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에 잘 나타나 있고, 아폴로 신전에 새겨져 있는 "모든 일에 지나치지 말라"는 금언은 곧 조화와 통일성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헬레니즘"은 인간의 가치를 중시하는 한편, 합리적인 관점에서 객관화하였으며, 이를 탕으로 예술과 학문 등에 있어서 조화와 통일성을 추구하였다이러한 "헬레니즘""헤브라이즘"과 더불어 오늘의 문명과 문화를 지탱하는 커다란 힘이 되었다.

문 화

"헬레니즘 문화"란 한마디로 "그리스 문화""동방 문화"의 결합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그리스"의 합리적 정신과 "휴머니즘""고대 이집트"의 피라미드로 상징되는 자연과학이 중심이 된 문화를 창출하였다그리고 "알렉산더 대왕"의 통일 사업은 종족의식민족의식의 벽을 깨뜨려 버리고, 세계주의와 개인주의를 만들어 내었다.

"알렉산더 대왕"이 정복한 각지에 만든 새로운 "폴리스", 그 뒤 "셀레우코스 왕"들이 영내에 많이 만든 새로운 "폴리스"가 중심이 되어, "그리스 문화""오리엔트"의 오지까지 침투하였다그리고 "헬레니즘"세계에서는 간소화한 "그리스 어""공통어(코이네)"로서 사용되었다이 같은 "헬레니즘""로마"로 이전되어, "로마"말기 "기독교"가 체계화되어, 이른바 "기독교" 문화권이 형성되어, 이를 대체할 때까지 약 500여 년간 지속된다.

"헬레니즘 문화"의 특징은 무엇보다도 "자연과학"에서 잘 표현되었다일찍이 "이집트"에서 발달하였던 "기하학천문학"이 이 시대에 특히 되살아났다그리하여 "유클리드""평면기하학"을 발전시켜, 그가 만든 "유클리드공리"는 현대에까지 적용되고 있다.

"시실리""시라큐스"출신 "아르키메데스""아르키메데스" 원리인 중력과 부력의 법칙을 발견하였으며, "아리스타르코스"는 태양 중심의 "지동설"을 주장하였고, "에라토스테네스"는 지구의 반지름을 추정하였고, 1%의 오차밖에 없는 지구와 태양의 거리를 추정해 내었다미술에 있어서는 숭고한 정신적 미를 추구하는 "그리스적 경향"이 사라지고, 향락적 관능미가 등장하였다"코린트" 스타일의 미술이 발전하였다는 것이다.

이 시대에는 정복지의 신도시 건설과 더불어, "신전궁전극장도서관의사당목욕탕" 등의 건축이 성행하였다그 중 대표적인 것은 고대세계의 7대 불가사의의 하나로 그 높이가 400ft나 되는 "대 등대(Pharos)"가 있다여기에 더불어 인간의 형상을 딴 "신상"들이 많이 조각되었다"아프로디테"의 나체상은 이 시대의 여성미의 상징이며, "라오콘(Laocoon)군상"은 이 시대의 남성미의 상징이었다.

"헬레니즘 문화"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 문화"의 세계적 확산이라고 하는 점이다.

이것을 대변해 주고 있는 것이 "간다라 미술"의 출현이다"알렉산더 대왕"의 원정 때, 왕을 수행하였던 "그리스"의 조각가들은 조각술을 동방세계 특히 "인도" 달하였다이 때 "인도"에서는 "불교"라고 하는 새로운 종교가 성립되어 퍼져 있었다그러나 "불교"의 세계에서는 아직 "불상"을 만들지 못하게 되어 있는 이른바 "무 불상시대"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것은 "불상"을 엉터리로 만듦으로서, "부처님"의 위상을 손상시키는 것을 우려하였기 때문이다그러나 "그리스 조각술"이 소개되면서 그러한 우려는 사라지고, 특히 "카니시카 왕""불교"를 보호, 장려하는 한편 "불상"제작을 장려하였다.

그 결과, 지금의 "파키스탄 령""간다라"지방에서 "불교문화""그리스문화"의 혼합, 융화의 결실로 "불상" 한 형식이 이루어졌다이것은 대체로 "아폴론 형""소포클레스 형""불상"과 귀인들의 모습을 띠고 있는 보살상으로 표출되었다이 형식은 "중앙아시아"를 거쳐서, "중국한국일본"으로 전해졌다.

사회경제

"헬레니즘 제 왕국(諸王國)" 가운데 "마케도니아"는 국력이 가장 약하였으나, "시리아이집트"에는 "오리엔트 "의 강력한 군주국가가 성립되었다"이집트"는 지리적 조건이 좋고, 물산(物産)도 풍부하여, "헬레니즘 왕국" 중에서 가장 강력한 전제지배가 확립되었다전 국토의 소유권은 원칙적으로 "국왕"에게만 소속되었다"신하에게 주는 사여지(賜與地)병사에게 주는 봉토(封土)신전령(神殿領)" 등이 있었으나 이것도 점유권이 주어져 있을 뿐, ""은 언제라도 이를 회수할 수가 있었다""의 부()를 늘리기 위해서는 개간(開墾)이 필요했는데, 유력한 신하에게 토지를 주어 개간시키고 개간이 되면 다시 몰수한 실례도 알려져 있다.

농경지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왕료지(王料地)""왕의 농민"이라고 불리는, 이동의 자유가 없는 "노적(農奴的) 소작인"이 경작하였다상공업과 그 밖의 모든 산업경제는 "" 한 사람의 부를 위해 강력하게 통제되어, "제유식물(製油植物) 재배착유(搾油)와 맥주양조제염(製鹽)제지(製紙)"등 거의 모든 산업은 전매제였다"광업은행" 등도 모두 ""이 독점하고, 수입은 엄격하게 제한하였으며, 수출은 국내 소비를 채우고 남은 것만 "사인(私人)"이 행하였다.

"이집트"에는 "알렉산드리아나우크라티스프톨레마이오스" "그리스 풍""폴리스"가 셋 있었다이 중,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의 수도이기도 한 "알렉산드리아"는 상업항으로서 번영하였고, 또한 "무세이온대도서관" 등이 있는 "그리스 적" 학예의 중심지로, "없는 것은 눈()"이라고 할 만큼 번영을 누렸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수족이나 다름없는 "관료군(官僚群)""이집트"를 강력하게 지배하였는데, 고래(古來)의 토착 종교와 왕가의 극단적인 근친결혼과 같은 풍속, 습관 등을 그대로 유지하고, "이집트" 토착민과의 마찰을 피하여, 현명하게 통치하였다.

"신전"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감독하였으나, 토착민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신관(神官)"의 힘은 마침내 강력해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말기 왕권을 위협하였다그러나 "헬레니즘 왕국" 중에서는 가장 오랜 왕국으로, B.C 30"로마"에 합병될 때까지 존속되었다

"셀레우코스 왕조"가 지배한 "시리아"에서도 "오리엔트" 적인 "전제군주국"이 성립되었다그러나 그 지배영역은 "헬레니즘 왕국" 중 가장 광대하여, 호족(豪族)과 어떤 종류의 자치권을 가진 민족(유대인 등), 영내(領內)에 많이 만들어져 있는 "그리스 풍""폴리스"등 정치적으로 이질적인 요소가 많아, 지극히 복잡하였다자료가 부족하여 상세한 점은 분명치 않으나, 이곳에서도 전국토가 원칙적으로 왕의 소유였다.

그리고 "왕유지(王有地)""왕의 백성"이라고 불리는 "농노적 농민"이 경작하였다국토가 광대하고 정치적으로 복잡하였기 때문에 왕의 지배력이 고루 미치지 못하는 곳이 있어, "멀리 파르티아박트리아"와 서쪽의 "페르가몬"등이 독립하였고, B.C 64년에는 "로마"에 합병되어 그 속주가 되었다.

"마케도니아"에 관해서는 자료가 없어, 그 정치경제 등의 상세한 내용이 알려져 있지 않으나, "로마" 싸워 패하여, B.C 168"로마 령"이 되고, B.C 146년에는 "그리스"와 함께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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