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더 대왕 (Alexandrosㆍ알렉산드로스 3세ㆍBC 356~323 (32세)ㆍ재위 BC 336~323)"은 짧은 13년 동안의 재위 기간 (BC 336~323) 동안, "그리스ㆍ페르시아ㆍ인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하여, "그리스 문화ㆍ오리엔트 문화"를 융합시킨 새로운 "헬레니즘 문화"를 이룩하였고, 정복한 땅에 "알렉산드리아 (Alexandria)"라는 도시를 70개나 건설하였다고 한다.
◆ 알렉산더 대왕 (알렉산드로스 3세ㆍBC 356~323 (32세)ㆍ재위 BC 336~323)
"필리포스 2세"와 "올림피아스"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마케도니아"의 왕 (재위 13년)
• 국 적 : 마케도니아 왕국 (Kingdom of Macedonia) : 그리스 북쪽에 있던 고대 왕국
1. 평가
"마케도니아 왕국"은 "알렉산더 대왕"에 의하여 세계제국으로 세력이 신장되었고, 짧은 시기에 대제국은 멸망하였지만, 그로 인하여 "그리스"문화가 "유럽"과 "아시아" 및 "이집트"에까지 유포되었다. 통일국가를 형성한 "알렉산더 대왕"에 대한 군주예배는 후세의 "시리아ㆍ이집트", 그 밖의 여러 나라에서 지배자에 대한 신적(神的)권위의 계기를 만들었다. 그를 위대한 "정복자"와 "헬레니즘 문화"를 이룩한 창시자로 보는 반면에, 자신의 신성에 대해 "과대망상증"에 걸렸다고 보는 혹평도 있다.
그의 문화사적 업적은 "유럽ㆍ아시아ㆍ아프리카"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하여, "그리스" 문화와 "오리엔트" 문화를 융합시킨 새로운 "헬레니즘 문화"를 이룩한 데 있다. "그리스ㆍ페르시아ㆍ인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한 대왕으로, 탄생에 관해서는 "그리스"의 작가 "플루타르코스(영웅전 작가)"가 "올림피아스가 벼락이 배에 떨어지는 꿈을 꾸고 임신하였다"거나, "필리포스가 아내의 곁에 있는 뱀을 보았다" 등의 전설적인 이야기를 전한다.
오랫동안 그는 자신의 "신성 문제"에 골몰해 있었다. "그리스인"의 사고 속에서는 "신"과 "인간"의 경계선이 분명하게 그어져 있지 않았다. 전설에는 자신들의 업적으로 "신"과 같은 지위를 획득한 인간들의 예가 여럿 있었다. 알렉산더는 수차례에 걸쳐, 자신의 업적을 "디오니소스"나 "헤라클레스"의 업적과 비교해보도록 고무 받은 적이 있었고,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신성"에 대해 확신을 갖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이 인정하도록 요구하였고, 그것은 점점 심해져 결국, 정서적 불안정 상태에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알렉산더 대왕"은 "페르시아 제국"을 멸망시킨 뒤, 다시 동방으로 진군하였으나, "인더스 강 유역"에서 군대를 돌려 바빌론으로 돌아왔다(B.C 324). 그러나 그 다음해(B.C 323), "알렉산더 대왕"이 갑자기 병사하자, 아내와 자식은 모두 죽음을 당했다.
"디아도코이(遺將)"들은 서로 싸운 끝에 대왕이 남긴 영토를 분할하였다. "입소스 전투(B.C 301)","쿠르페디온 전투(B.C 281)"등을 거쳐, "디아도코이"의 세력 범위는 대개 결정되었다. 그러나 문화의 중심으로서 "아테네"가, 상업의 중심지로 "코린토스"가, 그리고 "에게 해(海)"의 섬 가운데서는 "델로스 섬"과 "로도스 섬"이 노예매매의 중개 무역지로서 번영한 것 외에는 쇠퇴일로를 걸었다. 그리고 최후에는 역시 "로마령(領)"이 되었다. 40여 년간 치열한 후계자 전쟁이 계속되다가, 결국 "알렉산더"의 대제국 영토는 결국 "마케도니아ㆍ시리아ㆍ이집트"의 3왕국으로 분열되어, "헬레니즘 3왕국"으로 분열하였으며, 결국 로마에 합병되었다.
① "마케도니아" 지방을 "카산드로스 (훗날의 안티고노스) 왕조"가 지배하는 "마케도니아 왕국"
작은 가부장적 군주국가로 전략ㆍ마케도니아에 관해서는 자료가 없어 정치ㆍ경제 등의 상세한 내용이 알려져 있지 않으나, 로마와 싸워 패하여, B.C 168년 "로마령"이 되고, B.C 146년에는 "그리스"와 함께 "로마"의 속주가 된다.
② "서아시아" 지방을 "셀레우코스 왕조"가 지배하는 "시리아 왕국"
"시리아ㆍ페르시아ㆍ메소포타미아"를 장악하고, "안티오키아ㆍ셀레우키아"등의 도시를 중심으로 경제권을 확보하여, "동서 문화 융합"에 공헌하였다.
③ "아프리카" 동북부 지방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지배하는 "이집트 왕국"
"페니키아" 및 "팔레스타인"을 장악하고, 상업도시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자연과학을 발전시켜, 후세에 큰 영향을 주었다.
④ 그리스 본토 : 아이톨리아 동맹ㆍ아카이아 동맹이라는 2개 도시동맹을 만들어 독립을 유지
2. 업적
① "마케도니아"의 발전
BC 12C에 북쪽으로부터 침입하여 들어온 "도리스인"이 이후 "마케도니아인"의 중심이 되었다. 전설에 따르면, BC 640년경 "아르고스"의 명문 자손인 "페르디카스"가 "일리리아 지방"으로부터 들어와, "마케도니아 왕국"을 창건하였다고 한다. "마케도니아"는 BC 6C기 중엽, "발칸반도 북부"에 정착한 이래, 작은 토착국가로 성장하였다. "아테네 인"들은 "마케도니아 인"을 "바바로이(야만인, 변경인)"라 호칭하며, 그들이 문화적으로 열등한 것을 표현했을 정도로 "마케도니아"는 "그리스"에 비해 후진국이었다. "마케도니아 인"들의 대부분은 스스로 "그리스인"의 친족이라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아테네"의 화려한 문화를 선망하며, "아테네"를 이상국가로 생각하였다. 그것이 그들 자신의 "바바로이" 상태에서 탈피하는 길이라고 생각하였고, 그들은 이것을 위하여 실력을 길렀다.
당시 "그리스"는 "페르시아"와 대치하고 있었다. BC 514~479년의 "페르시아 전쟁" 시기에는 "페르시아" 쪽에 가담하였고, "페르시아" 세력이 후퇴한 후로는 "그리스"와의 관계가 심각해져서, 정치적ㆍ군사적 충돌이 잦았다. BC 490년에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가, BC 480년에는 "크세르크세스 왕"이 재차 "그리스"를 침략했으나, "마라톤 전투"와 "살라미스 해전"에서 번번이 격퇴당했다. 그 후, 지루한 대치상태가 계속되다가, "폴리스" 사이의 분열로 인해 세력이 약화되자, 세력이 제법 강한 "폴리스"들조차도 점점 "페르시아"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스파르타"와 "테베"가 차례로 "그리스 반도"의 패권을 잡지만, 힘에서나 권위에서나 제국 일보직전까지 갔던 "아테네"의 빈 구멍은 메우지 못했다. 뚜렷한 구심점이 없이 "그리스" 전역이 혼란한 상황 속에서 돌연히 나타난 것이, 그때까지 일개 부족국가에 지나지 않았던 "마케도니아 왕국"이다. 미개인들이 사는 오지로만 알았던 "그리스" 북부 "마케도니아"가 B.C 4세기경부터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받아 차츰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아르케라오스 왕(BC 413~399)"은 군비를 확충하여 자위책을 강구하고, 안으로는 "아테네"의 문화, 사회제도 등을 수입하여 국력을 양성하였다. 이로써 이들은 그때까지도 지속되었던 정권의 불안정을 극복하여, "필리포스 2세(BC 359~336)"에 이르러서는 전국을 조직화하는데 성공, 드디어 그들 나름대로의 융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부친인 "필리포스 2세"는 내란을 진압해, 국력을 강화하였다 "필리포스 2세"는 젊은 시절 "테베"의 인질로 잡혀 있을 때, "그리스" 문화와 "에파미논다스"의 전술을 습득하였다. 이 전술은 당시 "테베"에서 사용하였던 전술로, "테베"가 이 전술을 써서 "그리스"의 주도권을 잡고 있었다. 귀국 후, "필리포스 2세"는 군대의 추대를 받아, 왕으로 즉위하였다.
특히 "필리포스 2세(BC 382~336)"때에는 귀족 세력을 누르고, 산림과 금광을 개발하여 재력을 기르고, "파랑크스(Phalanx)" 라는 장창 밀집부대를 편성하여, 차츰 사방의 여러 민족을 쳐서 그 영토를 넓혔다. 또 "테베"에서 배워 온 "에파미논다스의 전술"을 군사들에게 훈련시켜 강력한 군대를 양성하였다.
BC 4C 경, "그리스"가 흔들리자, "포키스 인"이 종교 동맹이 공유물인 "델피의 신령지"를 점령하여 동맹 제국간의 충돌이 일어났다. 이것을 빌미로 "필리포스 2세"는 "테베"의 원조 요청을 받아들여 "포키스 인"을 격파, "그리스" 여러 국가의 내정에 간섭하게 되었다. 그러나 "필리포스 2세"의 음모에 반대하는 동맹이 성립되고, 이 소식을 들은 "필리포스 2세"는 "장창 밀집대"를 동원하여, "그리스" 정예부대인 "신성대"를 거의 전멸시켰다.
"아테네"를 비롯한 다른 도시국가들을 이미 무력으로 굴복시키고, BC 338년, "그리스" 세계를 통일한다. 이로써 "필리포스 2세"의 "그리스" 지배가 시작되어, "폴리스"는 정치적 단위로서의 기능을 잃고, "코린트 동맹"이 조직되어, "필리포스 2세"를 맹주로 하는 통일국가가 형성되었다. "필리포스 2세"는 각 "폴리스"의 자유와 자치를 인정하며, "폴리스" 사이의 평화 유지와 "페르시아"에 대한 보복 전쟁을 결의하는 "코린트 회의(코린트 동맹)"을 열어, 자신이 의장이 되어 "페르시아 정벌"의 뜻을 밝힘으로써, "그리스" 전체의 단결을 꾀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뜻을 펼쳐 보지도 못하고, 신하에게 암살당하고 말았다.
② 10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대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원동력
비밀은 바로 "마케도니아" 방식의 "파랑크스(Phalanx) 제"에 있다. "파랑크스(Phalanx) 제"는 긴 창으로 무장한 "보병의 밀집 대형"에 의한 전술을 말한다. 또한, "그리스인"을 대거 이주시킨 것과 피정복지의 전통과 관습을 존중한 것도 큰 역할을 했다. 특히, 그는 스스로가 "다리우스 3세"의 공주를 왕비로 삼는 모범을 보이면서, "마케도니아"의 귀족들에게 "페르시아" 귀족 여성을 아내로 맞기를 권유했다. 그러나 이는 동서 여러 민족으로 구성된 지배층을 융합시키기 위한 것이었을 뿐, 대다수의 피정복민들은 강력한 "오리엔트식 전제군주제"의 희생자였다. 결국, 그의 통치의 본질은 "그리스 인"에 대해선 통솔자, "아시아 인"에 대해선 지배자로 군림하는 것이었다.
③ 알렉산더의 탄생
BC 356년, "알렉산더"가 탄생하였다. "필리포스 2세ㆍ올림피아스"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알렉산더 대왕ㆍ알렉산드로스 3세"이다. 그는 "페르시아 제국"을 무너뜨리고, "마케도니아" 군사력을 "인도"까지 진출시켰으며. 지역 왕국들로 이루어진 "헬레니즘 세계"의 토대를 쌓았다.
"필리포스 2세"는 "알렉산더"를 훌륭한 왕으로 키우기 위해, 당대 최고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가"마케도니아" 수도인 "펠라"의 궁정에 초빙되어, 그에게 3년 동안(13~15세) "윤리학ㆍ철학ㆍ문학ㆍ정치학ㆍ자연과학ㆍ의학" 등을 가르쳤으며, 스승의 영향으로 "철학ㆍ의학ㆍ과학적 탐구"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또한 부왕으로부터는 전술ㆍ행정 등의 실제적인 일을 배웠고, B.C 338년의 "카이로네이아 전투"에 직접 참가하였다. 그러나 "알렉산더"는 스승의 "그리스 우월주의"만큼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호메로스"의 시를 애독하여, 원정(遠征) 때도 그 책을 지니고 다녔으며, 학자를 대동하여 각지의 탐험ㆍ측량 등을 시킨 일, 또는 변함없이 "그리스 문화"를 숭앙한 일은 스승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한다. 즉, "아리스토텔레스"는 노예로서는 "아시아 인"이 적당하다며, 이들을 인간 이하로 취급하도록 교육했지만, "알렉산더"는 이후의 정복 전쟁에서 그 가르침을 따르지 않은 채, "포용정책"을 베푼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외에도 당대의 가장 명성 있는 스승들의 지도하에 "알렉산더"는 검술은 물론 운동ㆍ 사냥의 무예에도 탁월한 기량을 보였다. 문무를 겸비한 총명한 "알렉산더" 왕자는 누가 보더라도 뛰어난 왕이 될 소질을 갖추고 있었다.
B.C 336년, "필리포스 2세"가 갑자기 암살되자, "알렉산더"는 군대의 추대를 받아 19세의 젊은 나이로 왕이 되니, "그리스" 도시의 대표자 회의를 열고, 부왕과 같이 "헬라스 연맹의 맹주"로 뽑혔다. 그리고 나서 즉시 "필리포스 왕" 살해를 배후 조종한 혐의를 씌워, "린케스티스"의 제후들을 비롯해 경쟁자들과 반대세력을 전부 제거했다. "알렉산더"는 "코린트 동맹"의 총사령관의 지위를 이었으나, "테베"를 중심으로 "그리스"에서 반란이 일어난다. "알렉산더"는 즉각 "테베"를 포위 공격하여 도시를 철저히 파괴하고, 살아남은 "테베"시민들을 모두 노예로 만들어 버렸고, 이 단호한 조치에 "아테네"를 비롯한 "그리스"의 여러 "폴리스"들은 공식적으로 "알렉산더" 앞에 사죄하고 굴복하였다.
④ 페르시아 원정
"그리스" 내부의 문제가 정리되자, BC 334년, 늘 꿈꾸어 왔던 "페르시아 원정길"에 올랐다. 21살의 젊은 왕은 "보병(약 30,000)ㆍ기병(5,000)ㆍ그리스 동맹 연합군(7,000)"을 대동하고, "소아시아"의 연안을 향해 출발했다. 이렇게 시작된 원정은 "아프가니스탄ㆍ인도"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그가 죽을 때까지 11년간 계속된다.
당시 "페르시아"는 "다리우스 3세"의 통치하에 있었는데,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쇠약해져 있었다. 먼저, "그라니코스 강변"에서 "페르시아군"과 싸워 승리하고, "페르시아"의 지배하에 있던 "그리스"의 여러 도시를 해방하였으나, 사실상 그의 지배 아래 놓여 있었고, 그는 "칼라스"를 "헬레스폰토스" 지방 "프리지아"의 "사트라프"로 임명해, "페르시아 대왕"의 계승자로서의 권리를 주장했다.
"페르시아 원정"에 나선 지 1달이 지난, 5월에 "그라니쿠스 강"에서 치른 "페르시아"와의 1번째 전투에서 대승을 거둠으로, "소아시아"에서 "페르시아"지배의 중심지인 "사르데스"까지 진출할 수 있었다. "사르디스"와 그 밖의 땅을 점령한 뒤, "북(北)시리아"를 공략하였다. "소아시아" 지방의 "고르디온"이란 곳에 이르렀다. 그 지방에는 "신전 기둥에 매어져 있는 복잡한 매듭을 푸는 자가 아시아를 지배할 것"이란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었다. 그 전설을 들은 알렉산더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칼을 빼어 단숨에 매듭을 내리쳤다. 결국 그는 그 칼로 세계의 지배자가 되었다. 그가 신속하게 "소아시아" 연안의 "그리스 도시들"을 장악해 나가는 사이,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3세"는 자국의 군사력을 과신한 탓에 패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그리고 원정 2년째에 "이수스 전투"에서 알렉산더는 대승을 거둔다. BC 333년, "킬리카아"의 "이수스 전투"에서 "다리우스 3세"의 군대를 대파하였으며, 이어 "페르시아" 함대의 근거지인 "티루스(티로스)ㆍ가자" 등을 점령하였다. 그리고 "시리아ㆍ페니키아"를 정복한 다음, "이집트"를 공략하였다.
"나일강 삼각주"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했는데, 이 도시가 바로 "알렉산드리아"이다.
"이집트"에서는 "나일강" 하구에 자신의 이름을 딴 "알렉산드리아 시(市)"를 건설하고, 1,000km가 넘는 사막을 거쳐 "아몬 신전"에 참배하였는데, 여기서,"신(神)의 아들"이라는 신탁(神託)을 받았는데, 이후로 그는 "만인동포관(萬人同胞觀)"을 지니게 되었다. "이집트"에서의 유화정책으로 그는 "파라오"와 같은 예우를 받았으며, 신격화되었다.
"페르시아 왕"의 왕궁이 있던 "바빌론ㆍ수사ㆍ페르세폴리스ㆍ파사르가다이"가 그의 수중에 들어왔다. 이어서 "메디아"로 진군해, 수도인 "엑바타나"를 점령했다. BC 330년, 다시 군대를 돌려서 "메소포타미아"로 가서, "가우가멜라"에서 3번이나 "페르시아 군"과 싸워 대승하였다. 이때,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3세"는 도주하였으나, 신하인 "베소스"에게 죽음을 당하였다. 이 사건으로 "알렉산더"는 "페르시아"에서 왕위 찬탈자가 아니라, "페르시아 왕"의 원수를 갚은 은인으로 통하게 된다.
"알렉산더"의 "인도 침입"은 "인도사" 중에서 하나의 전환점이었다. 그러나 재미있게도 "인도"의 고대 문헌 중에는 "알렉산더 대왕"의 "인도 침입"을 자세히 묘사한 책은 1권도 없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는 "알렉산더"의 "인도 침입"에 대한 기록은 "그리스"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알렉산더" 이전까지 "인도"의 땅이 유럽의 정복자에 의해 정복되어진 일도 없었고 유럽 여행자가 "인도"를 방문한 일도 없었다.
BC 327년 5월, "알렉산더"는 "힌두쿠쉬 산맥"을 횡단하였다. 그는 현재 "파키스탄" 중북부의 산간 부족들을 무자비하게 정복하여, "인도"대륙으로 침입하는 전진기지를 건설하였고, "알렉산더"는 이 전투에서 승리한 후, 포로가 된 "뿌루의 왕"을 왕으로서 대접했고, 그를 그 지역의 "총독"으로 임명했고, 이후 "알렉산더"는 우기임에도 불구하고, 동진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고향을 떠난 지 오래된 병사들은 더 이상 미지의 땅으로 전진하기를 거부했고, 그에 따라 "알렉산더"도 퇴군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회군의 길을 "인더스 강"을 통해 바다로 나가는 방식을 택했다.
BC 326년 10월, 퇴군이 시작되어, 약 2,000척의 배가 강으로, 그리고 20,000명의 군사가 강의 연안을 걸어서 따라가는 형태를 취했다. 이 행군 중에도 "알렉산더"는 정복사업을 계속하여, 약 90,000명을 학살하였다. "인더스 강ㆍ아라비아 해"가 만나는 장소까지 진군한 "알렉산더"는 현재의 "카라치"지점에서 전군을 재정비한 후, "페르시아"로 돌아갔다. ""페르시아 제국" 내에서 일어난 "중앙아시아"지역의 반란 세력을 진압하고, "페르시아 인ㆍ그리스 인"의 융화정책을 추진했다. 그는 "페르시아"의 의상을 즐겨 입었고, "페르시아"의 제도를 대폭 수용했다.
"왕"을 배알하러 오는 신하들에게 "페르시아"왕실의 전제적인 알현의식을 행해야 했는데, 이 때문에 "마케도니아" 출신 귀족들로부터 "페르시아 식 전제 군주가 되려고 한다"는 불만을 유발하기도 했다. 비난이 쏟아졌지만, "알렉산더"는 이에 굴복하지 않았다. 그는 "빅트리아 귀족"의 딸을 아내로 맞이했고, 부관들과 그리스 병사들에게도 아시아계 여인들을 후실로 맞이하게 했다.
정복지 곳곳에 정치ㆍ군사 도시들을 건설하고 정비한 다음, "알렉산더"는 "인도" 원정을 계획했다. BC 327년 여름, "알렉산더"는 이제 "그리스 계 군병" 외에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된 군대를 거느리고 "인도"로 떠나, "간다라 지방"을 평정하고, "히말라야 산맥" 아래쪽에 사는 산악인들을 정벌한 뒤, "인더스 강"을 건넜다.
BC 326년, 그는 "히다스페스 강"을 건너, "인도 왕 포로스"와 최후의 큰 전투를 치렀다. 여기서 그는 승리를 기념하여, 새로이 2개의 도시를 세웠다. 저항 끝에 항복한 "포로스 왕"에게 "알렉산더"는 관용을 베풀어 그의 왕권을 인정해 주었고, 그는 "알렉산더"의 새로운 동맹자가 되었으며, 계속해서 진격한 "알렉산더"는 "히파시스 강"까지 나아갔다.
알렉산더는 계속하여 "바빌론ㆍ수사ㆍ페르세폴리스ㆍ엑바타나" 등의 여러 도시를 장악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는 여기서 "마케도니아 군"과 "그리스 군" 중의 지원자만을 거느리고 다시 동쪽으로 원정하여, "이란 고원"을 정복한 뒤, "인도의 인더스 강"에 이르렀다. 함대의 지휘는 "네아르코스"가 맡았고, 알렉산더가 탄 배의 함장은 "오네시크리토스"였다.
그러나 군사 중에 열병이 퍼지고, 장마가 계속되었으므로, 오랜 원정으로 병사들의 불만이 높아지자, 회군하기로 결정하고, 군대를 돌려, B.C 324년에 "페르세폴리스"에 되돌아왔다. 알렉산더가 10년 동안 정복한 곳은 서쪽으로는 "마케도니아", 동쪽은 "인더스 강", 남쪽은 "이집트"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이었다. BC 324년 봄, "페르시아 제국"의 수도 "수사"에 돌아온 "알렉산더"는 "민족 융합정책"을 한층 강화하여, 자신이 "페르시아"의 일부다처제 풍습에 따라, "아케메네스 왕조"의 공주 2명과 혼인을 하는 동시에, 자신의 측근 수십 명에게도 "페르시아"와 "메디아"의 귀족 여인들과 합동결혼식을 올리게 했다. 이민족과 혼인을 한 병사들에게는 후한 지참금을 주었다.
⑤ 알렉산더 급사, 제국의 분열
그러나 위대한 정복자 알렉산더의 죽음은 몹시도 급작스러웠다. BC 323.06월, "알렉산더"는 "아라비아 원정"을 준비하며 분주하던 중에 고열로 쓰러졌다. BC 323년, "바빌론"에 돌아와, "유프라테스 강"의 관개시설을 개량하고, "페르시아 만" 해안지방에 정착촌을 만드는 사업계획과 "아라비아" 원정을 준비하던 중, 장시간의 연회와 술잔치 끝에 갑자기 열병을 앓다가, 10일 후인 BC 323.06.13일 그의 나이 32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고 말았다. 그는 12년 8개월 동안 왕위에 있었다.
그가 죽은 뒤, 대제국 영토는 "마케도니아ㆍ시리아ㆍ이집트"의 세 나라로 갈라졌다. 알렉산더의 시신은 나중에 왕이 된 "프톨레마이오스"가 "이집트"로 빼돌려, 결국에는 "황금관"에 넣어 "알렉산드리아"에 안치했다. "이집트"와 그 밖의 "그리스"도시에서 그는 신과 같은 예우를 받았다. 그때까지 "알렉산더"에게는 직계 후손이 없었기 때문에, 왕의 측근들은 왕위를 놓고 치열한 다툼을 벌였다. 8년의 원정으로 통합한 "알렉산더 제국"은 부하 장수들의 다툼으로 곧 분열되기 시작했다. 속주들은 곧 "독립왕국"이 되었고, "셀레우코스"나 "프톨레마이오스" 같은 부관들은 앞다투어 왕을 칭하며, 제국을 분할 점령했다.
"알렉산더"가 급사하자, 왕위계승자로 대왕의 이복동생인 "아리다이오스"와, 아들 "알렉산드로스 4세(재위 BC 323~310,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왕비 로크사네 사이에서 출생)"의 공동통치가 군대 및 장군들에 의해 확인되고, "마케도니아"는 "안티파트로스"가 종전과 마찬가지로 섭정이 되어, 관리하도록 결정하였다.
이후 "왕족ㆍ근신ㆍ여러 장군들" 사이의 권력투쟁이 격렬하게 전개되어, "필리포스 3세"인 "아리다이오스"는 BC 317년에 태후 "올림피아스"에게 살해되고, "올림피아스ㆍ로크사네ㆍ알렉산드로스 4세"는 "카산드로스(안티파트로스의 아들)"에게 살해되어, "알렉산더 대왕"의 왕통은 단절되었다. "카산드로스"는 "테살로니케(필리포스 2세의 딸)"와 결혼하여, "마케도니아"의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그의 "마케도니아 왕국"은 1대에 끝나고, "안티고노스 1세"가 "마케도니아 왕"을 자칭하였고, 왕위는 그의 아들 "데메트리오스 1세ㆍ리시마코스ㆍ프톨레마이오스 케라우노스" 등으로 전전하여 내려오다가, "데메트리오스 1세"의 아들 "안 티고노스 2세 고나타스"에 이르러 확정되었다. 그는 여기에서 "안티고노스 왕가"를 확립하였다.(BC 272).
그의 사후 "필리포스 5세(재위 BC 222~179)는 "지중해" 세계로의 진출을 도모하였으나, "로마"의 동방진출정책과 충돌하 게 되었다.
그는 "마케도니아 전쟁(1차(BC 215~205)ㆍ2차(BC 200~197))"에서 패한 후, 국력 회복을 꾀하였으나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 그의 아들 "페르세우스 왕"도 부왕의 뜻을 이어, "반 로마 정책"을 취하여, "3차 마케도니아 전쟁(BC 171~168), "로마"와 다시 충돌하였으나, "로마군"에게 패배하여 포로로 잡혀감으로써, "마케도니아"는 멸망하고, "로마"의 속주(屬州)가 되었다.
이러한 분열로, 일부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은 상호 동맹을 체결하여 독립을 유지하기도 했으나, BC 146~ 30년 사이에 모든 "헬레니즘 세계"는 "로마"의 통치를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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