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 (Ancient Rome)"는 B.C 8C경, "이탈리아 중부"의 작은 마을에서 시작해 "지중해"까지 거대한 제국을 이룬 고대 문명이다. "고대 그리스ㆍ오리엔트ㆍ셈족ㆍ서유럽 켈트ㆍ게르만" 등을 지배했으며, "고대 로마"의 문화ㆍ법ㆍ군사 체제는 현대사회의 법ㆍ정치ㆍ전쟁ㆍ예술ㆍ문학ㆍ건축ㆍ기술ㆍ언어 분야의 기틀이 됐다.
1. 로마 제국 (B.C 27 ~ )ㆍ서로마 제국 (395~476)ㆍ동로마 제국 ( 395~1453)
① 사 회 : "수도 로마"는 당대 최대의 도시로 인구는 100만 명에 이르렀으며(19세기 당시 세계 최대의 도시였던 런던의 인구와 맞먹는다) 최소 추정치는 45만 명~ 최대 추정치는 140만 명이다.
"로마"의 공공장소는 발걸음 소리와 마차 바퀴가 덜걱거리는 소리로 시끄러웠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낮에는 도성에 마차가 드나들지 못하도록 금한 바 있다)
역사가의 추정에 따르면, 고대 "로마"의 인구 20% 정도가 "도심지"에 살았으며(로마가 지배하는 이탈리아 전체로는 기준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25~ 40%이다), 1만 명 이상이 "군사 정착촌"에 거주하여, 전근대 기준으로 매우 높은 도시화 율을 보였다. 대부분의 도심지에는 "포룸"과 "신전"과 비슷한 양식의 더 작은 건물들이 있었다.
② 군 사 : 초기 로마의 군대는 "추첨에 의한 징병제"였다.
그러던 것이 "로마"의 국가 규모가 점차 커지면서, "지원제"로 바뀌었고("마리우스"의 군제 개혁 이후), 마침 고도성장기의 "로마"에서 증가하고 있었던 "실업자의 구제책"으로 환영받았다.
"로마"가 "제정"으로 바뀌면서,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내전으로 엄청나게 커져있던 군대의 규모를 줄이고, 그때그때 필요할 때마다 편성하던 방식을 바꿔, "상비군 제도"로 개편했다. 이 "제정 로마의 상비군"은 국경 바깥의 이민족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 대부분 국경 부근에 배치되었다.
③ 계 급 : "로마사회"는 대단히 위계적이며, "계급"을 의식하는 사회였다.
최하층은 "노예(servi)", 그 위로 "피해방인(해방노예, liberti)", 그 위에는 "자유 시민(cives)"이 있었다. "자유 시민(cives)"은 또 일정한 계층으로 분류되었다.
"로마" 역사 초기 계층은 로마 창건을 이끈 100명의 "가부장 출신의 귀족"과 나머지 "평민"으로 구분할 수 있었다. 나중에 "공화정 시대"에 이 구분의 중요성은 떨어지게 되는데, 일부 "평민 가문"이 부유해져 정계에 진출했으며, "귀족 계급"이 몰락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귀족이건 평민이건" 누구나 자신의 가족에서 "집정관"에 오르면, "신귀족(nobilis, 新貴族)"으로 인정받았다. 가령 "가이우스 마리우스"나 "키케로"는 이런 유형의 "신인(新人, novus homo)"으로 이들의 후손은 귀족이 되었다.
그러나 "혈통 귀족"인 경우, 지속적으로 상당한 명성을 유지했으며, 여러 종교 관직에 임명될 수 있는 자격자는 "공화정"말기까지 "귀족 출신"으로 제한되었다. 계층 구분은 원래 "군역 할당"에 기반을 두었는데, "감찰관"이 정기적으로 재산에 따라 각 시민을 특정 계층으로 분류했다. 가장 부유한 집단은 "원로원 계급"으로, "정계"와 "군사"를 장악하고 있었다.
다음으로는 "기사 계급(equites)"으로 원래 이들은 군마(軍馬)를 부담할 수 있는 집단을 일컬었으며, 나중에는 유력한 "상인 계급"을 형성하게 된다. 하위 계급은 원래 "군사 장비 구입 수준"에 따라 정해졌으며, 최하로는 군에 입대시킬 아들 외에는 재산이 전혀 없는 "무산자(proletarii, 무산자를 뜻하는 "프롤레타리아"가 바로 이 말에 뿌리를 두고 있음)"가 있었다.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 이전에 이들은 군대에 들어갈 수 없었으며, 부나 사회의 인식 면에서 "피해방인"보다 약간 높은 집단으로 정도로 기록되기도 했다. "공화정 시대"에 투표권의 비중은 계층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시민들은 선거 지역구격인 "트리부스(tribus)"에 등록되어 있었다. 부유한 계층의 "트리부스"는 재산 수준이 낮은 "트리부스"보다 인원수가 적었으며, "무산자" 계층 전체에는 "트리부스"가 겨우 하나밖에 할당되지 않았다.
"투표"는 계급 순서에 따라 이루어졌으며, 전체 "트리부스"의 과반에 이르면, 투표가 종결되었으므로, 가난한 계급은 아예 "투표"를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로마"는 일부 동맹국에는 "라티움 인"의 권리를 보장했는데, 이 권리는 완전한 "로마 시민권"과 "외국인(peregrini)"의 중간 수준의 신분을 의미했으며, "로마법"이 이 지위를 "성문적"으로 보장했고, 이들 나라의 "최고 정무관"들은 완전한 "로마 시민권"을 얻었다.
"라틴 인"의 권리에는 여러 층위가 있는데, 주된 구분은 "투표권이 있는 시민권"(cum suffragio, 로마의 트리부스에 등록되어 트리부스 민회에 참여할 수 있었다)와 "투표권이 없는 시민권"(sine suffragio, 로마 정치에 참여할 수 없다)으로 나눌 수 있다. 일부 "로마"의 "이탈리아 동맹국"은 B.C 91~88년의 "동맹국 전쟁"이후 완전한 "로마 시민권"을 얻었다.
AD 212년, "카라칼라"의 칙령으로 제국내의 모든 "자유 시민"에게 "로마 시민권"이 부여되었다. 여성은 남성 배우자와 어느 정도 동등한 기본권이 있었으나, "완전한 시민"으로 인정되지 않았으며, 따라서 "투표"를 하거나, "정치"에 참여할 수 없었다.
④ 정 치 (원로원ㆍ로마의 민회ㆍ호민관ㆍ쿠르수스 호노룸) : 원래 "로마"는 각 부족에서 서로 돌아가면서 선출한 "왕"이 다스리는 나라였다.
"왕권"의 정확한 속성은 확실하지 않으며, 초기 "로마 국가"의 통일과 권력과 권위의 살아있는 상징은 "왕"이었다. 다만 "군사 분야"에서는 "왕"은 "절대적인 명령권(imperium)"을 행사했다. 또 "국가 종교"의 수장이기도 하였다.
"원로원"은 "왕"을 위한 자문 기구였으며, "쿠리아회"는 "왕"이 입안한 법을 정하고, 비준할 수 있는 "민회"였다. "공화정기"의 신분 투쟁으로 "로마"는 로마 특유의 "민주정"과 "과두정"이 혼합되었다.
"Republic(영어)"의 어원이 된 "Res Publica(라틴어)"는 "공공의 일"을 뜻하는 말이었다. "로마법"은 전통적으로 "민회"에서만 표결로 투표할 수 있었다.(트리부스회) 마찬가지로 "공직 출마자"도 "인민"이 선출했다.
그러나 "로마 원로원"은 자문 기능을 하는 "과두적인 정치 기구"였다. "공화정"에서 "원로원"에는 강력한 "권위(auctoritas)"가 있었으나, 기능상 자문 기구이므로 "입법권"은 없었다. 그러나 "원로원 의원"들은 매우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었으므로, "원로원"의 집단적인 의지에 맞서기는 힘들었다. "원로원 의원"은 "감찰관"이 명문 귀족 중에서 임명했는데, "감찰관"은 "부도덕한 행실"을 한 의원을 면직할 수도 있었다.
가령 뇌물을 받는다거나 혹은 "소 카토"가 "감찰관"이던 시절에 공공장소에서 자신의 아내와 포옹하는 행위가 바로 그런 경우에 속한다. 나중에 "독재관 술라"의 개혁으로 "재무관"은 자동적으로 "원로원 의원"이 되었다.
"로마 공화정"에는 엄격한 "관료제"가 없었으며, "세금"도 "징세 청부"를 통해 거두었다. "재무관ㆍ조영관ㆍ혹은 장관(praefectus)"등 "정무관"은 "본인 돈"으로 공무를 처리했다.
"시민 개인"에게 너무 많은 권력이 집중되지 않도록, "정무관"은 1년 임기로 선출되었으며, 동료 "정무관"과 권력을 분할하도록 하였다. 가령 평상시에는 최고 권력은 "집정관" 두 사람이 함께 보유했다. 비상시에는 "임시 독재관"을 임명할 수 있었다. "공화정"시대에 행정 체제는 필요할 때마다 수차례 개정되었다.
결국 "로마"가 크게 팽창하면서, "공화정"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제정 성립"으로 이어진다. "제정" 초기 정부는 "공화정"의 형태를 가장하였다.
"로마 황제"는 그저 "제1 시민(priceps)"일 뿐이었으며, "원로원"은 과거 "민회"가 보유하던 "입법권"과 모든 법적 권한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황제의 권력"은 점차 "전제 권력"으로 발전했으며, "원로원"은 "황제"가 임명하는 "자문 기구"로 전락하였다. "로마 제국"은 "공화정"시대의 행정 체제를 물려받지 않았는데, "공화정"에는 "원로원"외에 영속적인 행정 기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최고위 행정가ㆍ원로원 의원ㆍ자신의 친구ㆍ전문 법률가"등을 모아 조언을 구하였으며, "원로원 의원ㆍ기사ㆍ피해방인ㆍ심지어 노예"까지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공무원"으로 기용하여 "곡물ㆍ 수도ㆍ치안ㆍ법ㆍ재정" 등 일종의 행정 조직을 구성하였다.
⑤ 법 : "고대 로마"의 "법리와 사법"은 "12표 법(B.C 449)"에서 시작하여,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로마법 대전"으로 이어진다.
"로마법"은 "비잔티움 제국"시대에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으로 존속했으며, "서유럽 법"의 근간을 이루게 된다. 넓은 의미로 볼 때, "로마법"은 17세기 말, "유럽" 대부분 지역에서 적용되었다.
"고대 로마법"의 주된 구분은 "유스티니아누스와 테오도시우스 법전"에 수록된 대로 "시민법(Ius Civile)ㆍ만민법(Ius Gentium)ㆍ자연법(Ius Naturale)"이다. "시민법"은 "로마 시민"에게 적용되는 주요 "보통법"이다.
"도시 법무관(Praetor Urbanus)"은 시민들의 송사에 대해 "재판권"을 가지고 있었다. "만민법"은 외국인들이나 외국인과 "로마 시민" 사이에 적용되는 주요 "보통법"이다. "외국 법무관(Praetor Peregrinus)"은 외국인과 "로마 시민" 사이의 "송사의 재판권"을 가지고 있었다. "자연법(Ius Naturale)"은 일반적인 의미의 "자연법"을 포함하며, 외국인과 "로마 시민"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법이다.
⑥ 기 술 : 남 프랑스의 "퐁 뒤 가르", B.C 19년에 건설되었다.
"고대 로마"는 인상적인 기술적 업적을 남겼으나, 그 성과는 "중세 시대"에 잊혀지고 말았다. "로마"의 여러 실용적인 기술 혁신은 이전의 "그리스"의 것에서 받아들인 것이다. "로마"의 공학기술은 군사관련 기술과 더불어 "로마"의 우수한 기술 수준을 보여주는 중요한 분야이며, "도로ㆍ교량ㆍ수도관ㆍ목욕탕ㆍ극장ㆍ경기장"을 건설하는데 기여했다.
"콜로세움ㆍ퐁 뒤 가르(가르다리, 남 프랑스에 있는 수도교, 길이 370M, 높이 48M)ㆍ판테온 신전(지름 43.3M, 기단으로부터의 높이 21.6 M, 건물 본체는 구형공간이 돔 중앙에 있는 오쿨루스(지름 8.2M)를 통해 들어오는 빛에 의해서만 채광됨"등 여러 유적이 아직도 "로마"의 "공학ㆍ문화"의 증거로 남아있다.
"로마"는 "건축"으로 유명하였는데, "로마 건축"은 "그리스 건축"과 더불어 "고전 건축"으로 분류된다. 그러나 "로마 건축"은 "그리스"와 여러 가지 차이가 있는데, "로마"는 "그리스"의 엄밀하고 정격적인 "설계ㆍ비례"를 차용했다.
그러나 새로운 기둥과 주두의 배열 방식(오더)인 "복합식(composite order)"과 "토스카나식(Tuscan order)" 그리고 "에트루리아의 아치"에서 배워온 "돔" 외에는 "공화정" 말기까지 별다른 건축적 성과가 없었다.
B.C 1세기경, "로마"에서 "콘크리트"가 널리 쓰이게 되었다. "콘크리트"는 B.C 3세기 후반에 발명되었다. 이것은 "화산회"로 만든 강력한 "시멘트"로, "대리석"을 밀어내고 "로마"의 주요 건축 자재가 되었으며, 여러 건축 방식을 설계할 수 있게 되었다. 또 B.C 1세기에 "비트루비우스"가 아마도 역사상 최초의 완벽한 건축 저작인 "건축론"을 썼다.
B.C 1세기 말, "로마"는 B.C 40년경 "시리아(혹은 이집트)"에서 발명된 "취관(glassblowing)을 이용하게 되었다. "모자이크"는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가 "그리스 원정" 당시 견본을 가져오면서, 전래되었다.
남 프랑스의 "퐁 뒤 가르", B.C 19년에 건설되었다. "로마"는 수많은 "수도관"을 건설하여, 도시ㆍ산업 지역ㆍ농경지에 "물"을 공급했다. "로마시"에는 총 길이가 350km에 달하는 11개의 "수도관"이 있었다. "수도관"은 대부분 지하에 매설되어 있었으며, "아치 수도교"는 매우 적었다. 때로는 50m 높이 차가 있는 "수도관"이 연결되기도 했는데, 이 경우 "사이펀"으로 물을 끌어올렸다.
"로마인"은 위생 분야에서도 큰 발전을 이루었는데, 특히 "위생"과 사교 목적의 "공공 목욕탕(termae)"을 지은 것으로 유명하다. "로마"의 여러 가옥에는 "수세식 변기"와 "상수도"가 설치되어 있었으며, 도시에 "대하수도(cloaca maxima)"가 있어, 늪지를 배수하고, "티베리스 강"으로 폐수를 처리했다.
어떤 역사가들은 "상하수도의 납"으로 된 "수도관" 때문에, "납 중독"이 퍼져 출산율이 저하되고, "로마 사회"가 쇠퇴하면서, "로마 멸망"의 원인이 되었다고 추론하기도 했다.
그러나 "납 함유량"은 그렇게 많지 않았는데, "수도관"은 폐쇄되지 않아 계속 물이 흘러, 각 가정과 공공시설의 "배수구"로 빠져나갔으며, "수도꼭지"는 많이 쓰이지 않았다.
• 아피아 가도(Via Appia), 수도 로마에서 이탈리아 남부까지 연결된 로마 도로로 오늘날에도 멀쩡하다.
"콘크리트" 덕분에 튼튼한 포장도로인 "로마 도로"를 깔 수 있게 되었는데, 상당수 "로마 도로"는 "로마"가 멸망한지 1.000년 뒤에도 계속 쓰였다. 광대하고 효율적인 제국 전역의 도로망은 "로마"의 패권과 영향력을 크게 증대시켰다.
"로마 도로"는 전체적으로 50,000마일에 달하였고, 변방의 도로는 군사공병 기술자가 축조하였는데, 오늘까지도 건재하다. "비트루비우스 저서(12권 1장)"에 있는 공법을 보면, 맨 아래 기초로 큰 "돌 층"과 "부스러기 층"을 번갈아 깔고, 그 위에 "모래층"을 펴고, 맨 위에는 "다각형 큰 돌"의 상부를 깔아서, 평평하게 만들어 덮는 것이라고 한다.
원래 "로마 도로"는 "로마 군단"이 신속하게 이동하기 건설한 도로였다. 그러나 이 대로는 "로마"가 경제적으로 번영하는 데에도 일익을 담당했으며, 교역의 중심지인 "로마"의 위상을 굳혀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나왔다.
"로마 정부"는 "역참 제도"를 운영하여, 도로 일정한 간격마다 여행자들이 쉴 곳을 제공했으며, 필요한 지역에 다리를 건설하여, "24시간에 800km를 이동"할 수 있는 "파발 체제"를 마련했다.
⑦ 오락 활동
"로마"의 젊은이는 "뛰기ㆍ레슬링ㆍ권투ㆍ경주" 등 여러 가지 놀이와 체육을 즐겼다. 시골에서 부유층은 낚시와 사냥도 즐겼으나, 여성들은 이런 활동에 참가하지 않았다.
"로마"에는 "핸드볼"과 비슷한 구기 종목도 있었고, "주사위 놀이ㆍ보드 게임ㆍ도박"도 매우 인기 있는 오락거리였다. 부자들은 저녁 잔치에서 "음악, 춤, 시 낭송"과 같은 오락을 즐겼다.
평민들은 클럽이나 모임에서 비슷한 잔치를 열기도 했는데, 보통 오락을 즐기는 "저녁 식사"란 후원을 받아 선술집에서 여는 모임을 뜻했다.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장난감"을 가지고, 혹은 "목마 넘기"를 하며 놀았다.
"검투"는 인기 있는 오락이었다. "검투사"는 죽거나 혹은 여러 가지 시나리오에 따라, 갖가지 무기를 들고 "첫 피"를 볼 때까지 싸웠다. "클라우디우스 시대"에 "검투"의 인기는 절정에 이르렀는데, "황제"의 손짓으로 경기의 결과를 마무리 지었다.
영화에 나오는 모습과 달리, 여러 전문가들은 "검투사"를 죽이라는 "손동작"은 "엄지손가락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고 보고 있다. 그 손짓이 어떤 것인지는 아무도 확실히 모르지만, 어떤 전문가는 승자 쪽으로 주먹을 들어 올렸다가 "엄지손가락"을 위로 올려서 패자의 죽음을 명령했으며, "엄지손가락"을 들지 않고 주먹을 들어 올리면 살려주라는 뜻이었다고 보고 있다.
"동물"을 보여주는 것도 인기 있었는데, 외국의 "동물"을 데려다 사람들에게 보여주거나, "투수사"와 싸움을 시키기도 하였다. "죄수"나 "검투사"를 무장하거나, 맨몸으로 경기장에 놓고, "동물"을 풀기도 하였다.
"대 경기장(circus maximus)"도 "로마"에서 인기 있는 장소였는데, 주로 "경마"나 "전차 경주"를 벌이는 곳이며, 경기장에 물을 채워 "가상 해전"을 벌일 수도 있었다. 이 경기장은 385,000명을 수용할 수 있었으므로, "로마 시"에 사는 사람들 모두가 이곳에 왔을 것이다. "대 경기장"의 경주로 한가운데에는 각각 "7개의 커다란 달걀"과 "7개의 돌고래"가 있는 신전이 2개가 있었는데, 선수가 1바퀴 돌때마다 7개 중 하나씩 없애서 횟수를 표시했다. 스포츠 말고도 "대 경기장"은 "시장"과 "도박판"이기도 했다.
"황제" 등 정부 고위인사도 "대 경기장 경기"를 관람했는데, 경기장에 참석하지 않는 일은 무례한 일로 여겨졌다. "고위 인사ㆍ기사" 그 밖에 경기와 관련된 사람들은 가장 높은 곳의 "예약석"에 앉았다. "황제"가 특정 팀을 좋아하는 것도 부적절한 일로 여겨졌다. "대경기장"은 B.C 600년에 생겼으며, 1,000년이 넘도록 이어지다가, A.D 549년에 마지막 "경마 경기"가 치러진 후, 문을 닫았다.
⑧ 가 족 : "로마 사회"의 기본 단위는 "가족(가구)"이었다.
"가족"의 개념에는 "가부장(Pater Familias)ㆍ아내ㆍ자녀ㆍ다른 친척"이 포함되었다. "상류층"에서는 "노예ㆍ하인"도 "가족"의 일부를 이루었다."가부장"은 다른 가족 구성원에 대해, "절대권(patria potestas, 가부장권)"을 행사했다.
"가부장"은 "결혼"(보통 돈 때문)과 "이혼"을 결정할 수 있었고, "자식"을 노예로 팔 수 있었으며, "자손"들의 재산을 자신의 것으로 주장할 수 있었고, 심지어 "생사여탈권"까지 있었다. (그러나 B.C 1세기 이후에는 이 "생사여탈권"은 금지된다)
"가부장권"은 "성인"아들과 그 가족에 대해서도 행사할 수 있었는데, 아버지가 살아있는 한, 그 아들은 "가부장"으로 인정받지도, 자신의 재산도 가질 수 없었다. "로마" 역사초기에 딸은 결혼하면, 남편의 "가부장 수권(手權, Manus)"으로 넘어간다.
그러나 "공화정 말기"에 이르면, 이런 관습은 낡은 것이 되어, 여성이 친정을 자신의 진정한 가족으로 계속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로마인"들은 "남성계통"을 기준으로 혈통을 인정했으므로, 모든 자녀는 남편의 가족에 속했다. 서로 혈연관계가 있는 여러 가족의 집단을 "씨족(Gens)"라고 했다.
"가족"은 "혈통"이나 "양자 입적"으로 구성되었으나, 정치적ㆍ경제적 연대이기도 했다. 특히 "공화정"시대에 일부 "유력 가문(Gentes Maiores)"은 정계를 지배했다. 고대 "로마"에서 결혼은 특히 "상류층"사이에서는 낭만적인 결합이기보다는, 경제적ㆍ정치적 결합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가부장"은 보통 딸이 12~ 14살 사이의 나이일 때, "사위"를 구했다. "신랑"은 대개 "신부"보다 나이가 많았다.
"상류층"에서는 여자가 어린 나이에 결혼한 데 반해, "하류층"여성은 10대 후반이나 20대 초반에 결혼했다고 한다.
⑨ 교 육 : "공화정"초기 "로마"에는 "공립학교"가 없었다.
따라서 소년들은 "부모"나 "노예 교사(Paedagogi, 그리스에서 기원한 것)"에게서 읽고 쓰는 법을 배웠다. 이 시대 교육의 1차적인 목적은 젊은이에게 "농업ㆍ전쟁ㆍ로마의 전통ㆍ공무"를 가르치기 위한 것이었다.
어린 소년은 아버지와 함께 "종교ㆍ정치 활동"을 하면서, 사회생활을 다양하게 익혔다. "귀족 자제"는 16세 나이에 유력 정치인 밑에서 "정치"를 배웠으며, 17세부터 군대에서도 활동했다. (이런 관습은 "제정 시대"에도 일부 귀족가문 사이에서 계속되었다). B.C 3세기, "헬레니즘 나라"를 정복하면서, "그리스 문화"가 유입되어 교육 방식에도 변화가 생겼지만 "그리스"의 교육 방식과는 여전히 달랐다고 한다.
부모가 여력이 있으면, 7살 나이의 소년과 일부 소녀들을 집 밖의 "사립학교(Ludus)"로 보냈다. 이들이 11살이 될 때까지, "교사(Litterator 또는 Magister Ludi)"가 기본적인 "읽기ㆍ쓰기ㆍ셈법" 때론 "그리스어"까지 가르쳤다. 12살부터 학생은 "중등학교"에 가서, "교사(Grammaticus)"에게서 "그리스어"와 "로마 문학"을 배웠다.
16세가 되면, 몇몇 학생은 "수사학 학교"에 갔다(이곳 "교사(Rhetor)"는 대개 "그리스인" 출신이었다). 이 정도의 교육 수준은 "법조인"을 지망하는 학생들이 준비했으며, 이들은 "로마의 법"을 암기해야 했다. 학생들은 "종교 축제"나 "장날" 외에는 매일 학교에 갔으며, "여름 방학"도 있었다.
⑩ 문 화 : "7개 언덕"이 자리 잡은 "로마 시"는 "고대 로마"의 중심지였다. 이 도시에는 "콜로세움ㆍ트라야누스 포룸ㆍ판테온" 등 아치를 활용한 장대한 건물이 많았다.
"분수"에서는 수백 마일 길이의 수도관을 타고, 운반되어 온 신선한 "식수"가 솟았으며, "극장ㆍ체육관ㆍ도서관ㆍ가게ㆍ시장ㆍ상하수도"를 갖춘 "로마식 목욕탕"도 있었다.
"고대 로마"의 지배 영역 널리 "전원 별장(Villa)"와 같은 가옥 구조를 볼 수 있었다. 수도 "로마 시"에는 "팔라티누스 언덕"의 궁궐이 있었으며, 하층 평민이나 중류 기사계급은 도심지의 "아파트(Insulae)"에 살았다.
이런 곳은 "상류층 지주"들이 임대료 수입을 얻기 위해 지은 곳이기도 했는데, "콜레기움(Ccollegium)"이나 "선술집(Taberna)"이 생활의 중심이었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무료 곡물 배급"을 받으며, "검투사 경기"를 즐겼으며, "상류귀족의 피호민"으로 필요할 때, 도와주고 지켜주는 관계를 맺기도 하였다.
⑪ 종 교 : 최초의 "기독교 박해"는 A.D 64년 "네로 (루키우스, 5대, 54~68)"시대에 "로마 대화재"의 주범으로 "그리스도 교도"를 수색하면서 잔인한 고문과 태형을 가한 것이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인빅투스, 초대 동로마 황제, 43대, 284~ 305)"시대에 "기독교 박해"는 극에 달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 1세 (44대, 306~ 337, 콘스탄티우스 1세의 아들, "비잔티온"을 "콘스탄티노폴리스(이스탄불)"로 명명)" 시대인 313년에 "기독교"가 공인되어, "기독교"는 "로마 정부"의 지원을 받았으며, 지배적인 종교가 되었다.
A.D 392년, "테오도시우스 1세(51대, 392~395)"의 칙령으로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하여, 제국 내에서 "기독교"외의 모든 종교 숭배가 금지되었다.
초기 "로마 종교"는 최소한 "신"에 대해서는 글로 씌어진 이야기가 없으며, 기본적으로 하나의 신념 체계라기보다는 숭배의례이며, 의식(儀式)에 가까웠다. 그리고 종교의 목적은 의식을 통해 "신"을 불러내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요구하며 보답을 약속하는 일종의 거래였다.
"그리스 신화"와 달리 "로마의 신"은 인격화가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문ㆍ경계ㆍ꽃ㆍ곡물" 등에 서린 "정령(Numen)"을 숭배하였다. "로마"사람들은 모든 "사람ㆍ장소ㆍ사물"에 "신성한 혼(Genius)"가 있다고 믿었다.
"공화정"시대에 "로마 종교"는 "사제직"을 갖춘 엄격한 체제를 갖추게 되었으며, "사제"들은 "원로원 의원" 출신이었다. "국가 사제단(Collegium Pontificum)"은 종교 제문을 보관하고, 종교 의식을 감독하였으며, 가장 높은 성직자는 "최고 제사장(Pontifex Maximus)"으로 국가 종교의 수장이었다. "사제(Flamen)"는 여러 "신"의 의식을 치렀으며, "복점관(Augur)"은 "점"을 쳤다. "렉스 사크로룸(Rex Sacrorum)"은 "왕"이 축출된 뒤, "왕" 대신 종교 권한을 얻었다.
"그리스 문화"를 점점 접하게 되면서, 옛 "로마의 신"은 점차 "그리스의 신"과 동일시되었다. 그리하여 "유피테르는 제우스"와, "마르스는 아레스"와, "넵투누스는 포세이돈"과 같은 신으로 여겨졌다. 또 "로마의 신"은 각자 동일시된 "그리스 신"의 신화와 속성도 이어받게 되었다. "제정 시대"에 로마 사람들은 정복당한 민족들의 "신화"도 흡수하여, "외국 신"을 모시는 "신전"옆에 전통적인 "이탈리아 신전"이 있는 경우도 생겼다.
⑫ 예 술 : "폼페이ㆍ헤라클라네움"에서 찾은 "낙서ㆍ유곽ㆍ회화ㆍ조각"을 보면, "로마인"들은 대단히 성에 개방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로마"의 회화는 "그리스"의 영향이 보이며, 남아있는 작품은 대개 시골 별장의 천장과 벽을 꾸미는 "프레스코 화"이며, "라틴 문학" 이야기를 다룬 나무나 상아 등에 그린 그림도 있다.
"폼페이"에서 "로마"의 그림 몇 점이 출토되었는데, 이를 통해 예술사가들은 "로마의 회화사"를 4시기로 구분한다. "로마 회화"의 1번째 양식은 B.C 2세기 초~ B.C 1세기 초ㆍ중반까지 유행했다. 이 양식은 주로 "대리석"이나 "쌓은 돌"을 모방한 것으로, "신화"에 등장하는 인물을 묘사한 것도 있다.
2번째 양식은 B.C 1세기 초로, 건축물이나 풍경을 "3차원"으로 사실적으로 묘사하려 하였다. 3번째 양식은 "아우구스투스(B.C 27~ A.D 14)" 시대에 있었으며, 이전의 "사실주의"를 거부하고, 단순한 장식을 선호했는데, 작은 건물 모습ㆍ풍경ㆍ추상적인 디자인을 단색 배경 가운데에 놓았다.
4번째 양식은 A.D 1세기에 시작했는데, "신화"의 장면을 묘사하며, 건축물 모습이나 추상적인 문양도 남아 있다. 젊고 고전적인 비례를 쓰던 시기에 "흉상 조각"은 나중에 "사실주의"와 "이상주의"의 혼합으로 발전했다. "안토니누스 황조ㆍ세베루스 황조 시대"에 더욱 화려해진 "머리와 수염"이 유행하였다.
"부조 조각"도 발전했는데, 보통 "로마의 승리"를 묘사하고 있다. "라틴 문학"은 그 기원부터 "그리스 작가"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현존하는 몇몇 초기 작품을 보면, 초기 "로마의 군사적 승리"를 묘사한 "서사시"의 내용을 담고 있다. "공화정"기 로마가 팽창하면서, 저자들은 "시ㆍ희극ㆍ역사ㆍ비극"도 쓰게 되었다.
⑬ 음 악 : "로마의 음악"은 주로 "그리스의 음악"에서 나왔으며, "로마인"의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추수나 베짜기ㆍ결혼식이나 장례식ㆍ사랑이나 풍자" 등 일상생활과 관련된 여러 가지 노래가 있었으며, 부유한 가정에서는 저녁 식사 때, 음악이 연주되곤 하였다.
"로마 군대"에서는 "투바(Tuba, 긴 트럼펫)ㆍ코르누(Cornu, 프렌치 호른과 비슷하다)" 같은 악기를 써서 여러 가지 명령을 전달했으며, "부키나(Bucina, 호른이나 트럼펫으로 추정)ㆍ리투스(Lituus)"는 의전 행사에 쓰였다.
"투바(Tuba, 긴 트럼펫)ㆍ코르누(Cornu, 프렌치 호른과 비슷하다)"를 비롯하여, "물 오르간"은 "원형 경기장"에서 "검투"막간에 쓰여, "전차 경주와 검투"의 흥분을 고조하였으며, 극장에서도 "물 오르간ㆍ티비아이(Tibiae, 로마식 아울로스에 해당하는 더블 파이프)"이 쓰였다. "무언극"도 로마의 인기 있는 오락이었으며, "합창ㆍ기악ㆍ무용"과 함께 정기적으로 협연하였다.
제사나 축제 음악 등 "종교 의식"에도 대부분 음악을 이용하였는데, "희생 의식"에는 도살되는 동물의 울부짖음을 숨기기 위하여 "티비아이"를, "주신(酒神) 바쿠스" 제의에는 "심벌즈ㆍ탬버린"을 썼으며, 여러 의식에서 "방울"을 쓰거나 "성가"를 불렀다. 고대 저술가들은 유명한 "대연주가ㆍ큰 합창단ㆍ오케스트라" 및 웅대한 음악축제와 경연대회에 대하여 기록하였다. "로마"의 직업 음악가들은 협회를 만들어, 공적인 행사와 사적인 연회에 연주자를 보냈으며, 인기 있는 연주자에게 엄청난 연주비가 지불되는 것도 드물지 않았다.
여러 "황제"들이 음악을 지원하고 육성하였는데, 심지어 "네로"는 "음악가"로서 명성을 얻고자 하였으며 경연 대회에 직접 참가하기도 하였다. 어떤 음악사가는 음악이 거의 모든 공공 행사에 쓰였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또 음악은 오락 및 교육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는데, "키케로"나 "퀸틸리아누스"와 같은 저술가들은 "교양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음악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A.D 3~4세기에 걸쳐 제국이 경제적으로 쇠퇴하자, 이전의 큰 규모의 음악 활동은 중단되었다. 현재 "고대 로마"의 음악에 대해, 알려진 것은 그리 많지 않다. 여러 그림ㆍ일부 악기ㆍ수천 건의 문헌이 남아있지만, "로마 시대"의 "라틴어 악보"는 남아있지 않다. 그래서 음악사가들은 "로마"의 음악가가 음악 연주나 이론에 중요한 기여를 했는지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
⑭ 언 어 (라틴어) : "로마인"의 모국어는 "라틴어"로, 이 언어는 "이탈리아어 파"에 속하며, 문법상 낱말 배열이 상당히 자유롭고, 어간에 붙는 접사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라틴어 문자"는 "그리스 문자"에 기반을 둔 "에트루리아 문자"에서 나왔다.
현존하는 "라틴 문학"은 대부분 B.C 1세기부터 쓰인 매우 정제된 문어인 "고전 라틴어"로 되어 있으나, 실제 구어는 "민중 라틴어"로 "고전 라틴어"와는 문법과 어휘가 다르며, 심지어는 발음까지 상당한 차이가 있다.
"라틴어"는 "로마제국"의 주요 언어였지만, "로마인"이 공부한 대부분의 문학이 "그리스어"로 되어 있었으므로 교양 있는 상류층은 "그리스어"도 구사했다. 또 "제국"의 동부 지역에서는 "후대 비잔티움 제국시대"까지 "그리스어"가 "라틴어"대신 제1언어였으며,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죽은 뒤, "그리스어"는 "비잔티움 제국"정부의 공식 언어가 되었다.
"로마 제국"이 확장되면서, "라틴어"도 전 유럽으로 퍼졌으며, 세월이 흐르면서 "민중 라틴어"가 여러 지역에서 방언으로 갈라져, 수많은 "로망스 어"로 발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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