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만 가문 (Osman)"을 왕가로 하여 통치한 나라로, 현재 "터키"의 최대 도시인 "이스탄불"을 수도로 정하여, "동쪽- 아제르바이잔(카스피 해 연안 위치)ㆍ서쪽- 모로코ㆍ남쪽- 예멘ㆍ북쪽- 우크라이나"에 이르는 광대한 영역을 지배했던 제국이다.
1. 오스만 제국 (1299~ 1922ㆍ오스만 투르크ㆍ투르크 제국ㆍOttoman TurksㆍTurkish Empire) : 비잔티움 제국→ 오스만 제국→ 터키 임시정부
"메흐메트 6세"(재위 1918~1922)가 폐위됨으로써, 600년 "장수 제국"은 해체되었다.
"압뒬메지트 2세"도 1924년, "칼리프 제"가 폐지됨에 따라, "프랑스"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죽었다.
"아나톨리아(소아시아)"의 한구석에서 나온, "소ㆍ군후국"으로부터 발전한 "이슬람 왕조"인 "오스만 왕조"는 이윽고 "동로마 제국" 등, "남동 유럽"의 "기독교 제국ㆍ맘루크 왕조"를 포함한 "서아시아ㆍ북아프리카"의 "이슬람 제국"을 동시에 정복하면서, "지중해 세계"의 과반을 차지한 세계 제국인 "오스만 제국"으로 발전하였다. 18세기 이후, 쇠퇴하여, 그 영토는 다른 나라에 점령되거나 독립하여, 20세기 초반에 마침내 마지막에 남은 영토 "아나톨리아"로부터 새롭게 건국되어 나온, 국민국가인 "터키 공화국"이 되었다. 이 당시 식민지 지역의 종교는 "이슬람교"에 인해, 억눌리기도 했다.
• 왕 가 : 오스만 가문
• 표 어 : 불멸의 제국
• 영 토 : 동쪽- 아제르바이잔(카스피 해 연안 위치)ㆍ서쪽- 모로코ㆍ남쪽- 예멘ㆍ북쪽- 우크라이나
• 수 도 : 쇠위트(1299~1326)→ 부르사(1326~1365)→ 에디르네(1365~1453)→ 콘스탄티니예 (1453~1922, 콘스탄티노폴리스→ 이스탄불)
• 언 어 : 오스만 터키어 - "페르시아어ㆍ아랍어"의 어휘를 많이 차용
• 종 교 : 이슬람교
• 정 부 : 전제군주제(1299~1876ㆍ1878~1908ㆍ1920~1922) / 입헌군주제(1876~1878ㆍ1908~1920)
• 군 주 : 파디샤 (술탄) - 오스만 1세 (1299~1326)ㆍ메흐메트 6세 (1918~1922)
• 재 상 : 알라에딘 파샤 (1320~1331)ㆍ아흐메트 테브픽 파샤 (1920~1922)
• 역 사 :ㆍ성 립 : 1299년 ㆍ공백기 : 1402~ 1414 ㆍ1876년 헌법 : 1876~ 1878 ㆍ1908년 헌법 : 1908~ 1922 ㆍ무드로스조약: 1918.10.30 ㆍ해 체 : 1922.11.01
< 오스만 술탄 - 칼리파 >
• 형성기(1299~1359): 오스만 1세ㆍ오르한 1세
• 전성기(1359~1623): 무라트 1세ㆍ바예지드 1세ㆍ메흐메트 1세ㆍ무라트 2세ㆍ메흐메트 2세ㆍ바예지드 2세
• 칼리파 겸직 : 셀림 1세ㆍ쉴레이만 1세(대제)ㆍ셀림 2세ㆍ무라트 3세ㆍ메흐메트 3세ㆍ아흐메트 1세ㆍ무스타파 1세ㆍ오스만 2세
• 쇠퇴기(1623~1695): 무라트 4세ㆍ이브라힘 1세ㆍ메흐메트 4세ㆍ쉴레이만 2세ㆍ아흐메트 2세
• 멸망기(1695~1923): 무스타파 2세ㆍ아흐메트 3세ㆍ마흐무트 1세ㆍ오스만 3세ㆍ무스타파 3세ㆍ압뒬하미트 1세ㆍ셀림 3세ㆍ무스타파 4세ㆍ마흐무트 2세ㆍ압뒬메지트 1세ㆍ압뒬라지즈ㆍ무라트 5세ㆍ압뒬하미트 2세ㆍ메흐메트 5세ㆍ메흐메트 6세
• 술탄 폐위 후 : 압뒬메지트 2세
2. 술탄 (Sultan)
"오스만 투르크"의 역대 군주는 1453년 "콘스탄티노플"에 입성하기 전까지는 "서양의 Prince"에 해당하는 "술탄"으로 지칭되었고, "메흐메트 2세" 이후로는 "황제"라는 의미의 "PadishahㆍShahanshahㆍSultan of Sultansㆍ로마황제"등의 칭호를 사용했다.
"메흐메트 2세" 이후, "제정(帝政)"이 된 후에 기존의 "술탄ㆍ여술탄"의 칭호는 "황자ㆍ황녀"를 지칭하는 칭호로 사용되었으므로, "오스만 제국"의 역대 군주를 가리켜, "술탄"이라고 지칭하는 것은 관용적으로 용납되고 있으나, 엄밀히 말하면 잘못된 것이다.
3. 국 명
서양인이 "오스만 제국"을 "오스만 투르크ㆍ투르크 제국"이라고 불렀는데, 이것을 영어식으로 "Ottoman TurksㆍTurkish Empire"라고 표기하게 되었고, 한국에서는 이 표현을 그대로 따와, "오스만 투르크ㆍ투르크 제국ㆍ오스만 투르크 제국"으로 많이 불렀지만, 현재는 "오스만 제국ㆍ오스만 왕조"라는 표기가 일반적이고 "오스만 투르크"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오스만 제국"의 "군주(파디샤, 술탄)"의 출신은 "튀르크 계열"로, 궁정의 언어도 "오스만 터키어"로 불리는 "페르시아어ㆍ아랍어"의 어휘를 많이 차용한 "터키어"였지만, 지배 계층은 민족ㆍ종교에 관련 없이 다양한 지역 출신의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단순히, "튀르크 민족"의 국가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제국"의 실태에 대한 관점에서 보면, "오스만 튀르크"라는 호칭은 부적절하고, "오스만 제국"을 "터키"라고 부른 것은 외부로부터의 통칭에 지나지 않는다. "오스만 제국 황제"는 "무슬림"들에게는 "술탄"을 지향하고, 기독교인들에게는 "동로마 황제"를 지향함으로써 세계 군주를 지향했기 때문이다.
덧붙여 "오스만 제국"의 뒤를 잇는 국가인 "터키 공화국"은 정식 국호에 처음으로 "터키 (터키어: 튀르키에)"를 채용했지만, "오스만 제국"을 가리킬 때는 "오스만 제국"이라는 뜻의 "오스만르 임파라토를루"나, "오스만 국가"라는 뜻의 "오스만르 데블레티"로 표기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4. 건국과 확장
"오스만 제국"은 시조인 "오스만 1세"가 "아나톨리아(소아시아) 서북부"에 세력을 확립해, 신정권의 왕위에 올랐다고 여겨지는 1299년을 "건국 연도"로 하는 것이 통례이며, "술탄제"가 폐지되어, "메흐메트 6세"가 폐위된 1922년이 "해체 연도"로 여겨진다. 무엇보다 "오스만 왕조" 초기에 대해서는 동시대의 사료가 부족하고, 사실과 전설이 혼연하고 있으므로 정확한 건국 연도를 특정하는 것은 어렵다.
① 오스만 1세 : 시조
13세기 말, "동로마 제국"과 "룸 술탄국"의 국경 지대인 "아나톨리아 서북부"에 등장한 "유목부족장 오스만 1세"가 인솔한 군사 집단이 "오스만 제국"의 기원으로 보고 있다. 전설에 따르면, "오스만 가문"의 시조는 "쉴레이만 샤"로, 원래 "이란 서부ㆍ중앙아시아" 쪽에 있던 "튀르크멘(Türkmen) 유목민"의 "부족장"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몽골"의 침입으로 고향을 버리고, "아나톨리아"로 도피하여, "룸 술탄국"의 보호를 받다가, 후에 다시 돌아가려 했으나,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다가 익사해버렸고, 그 후 그의 아들인 "에르투으룰 가지"는 그대로 정착하여, "룸 술탄국" 편에서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을 수행해, 공을 인정받아, 오늘날 "앙카라" 인근에 봉토를 받고, "베이"가 되었다.
그의 아들이 바로 "오스만 제국"의 시조인 "오스만 1세"이며, 그는 "룸 술탄국"의 붕괴를 틈타, 독립하여 당대에 "아나톨리아"의 "동로마 잔존 세력"을 격파하고, 2대 술탄 "오르한 가지"는 "남동유럽"에 교두보까지 구축하여, "오스만 제국"의 위엄을 떨쳤다. 그들 "오스만 집단"은 주변의 "기독교" 세력이나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영주ㆍ군사 집단"과 싸우기도 하고 손을 잡기도 하면서, 점차 영토를 확대해나가, 나중에 "오스만 제국"으로 발전하게 되는 "오스만 군후국"을 건국하였다.
② 오르한 1세 (오스만 1세 아들)
1326년경, "오스만"의 뒤를 이은 아들 "오르한 1세"는 즉위하고 나서, 곧바로 "동로마 제국"의 지방도시 "부르사" 점령을 시작으로, "마르마라 해"를 넘어, 유럽 대륙에 다다를 때까지 영토를 확대하였다. "부르사"는 곧 "오스만 군후국"의 행정 중심지가 되어, 최초의 "수도"로서의 기능을 하게 된다.
1346년, "오르한 1세"는 "동로마 황제 요한네스 6세 칸타쿠제누스"와의 동맹을 계기로 "다르다넬스 해협"을 넘어, "발칸반도"의 "트라키아"에 진출, 유럽에서의 영토 확장을 개시했다.
③ 무라트 1세 (오르한 1세 아들)
"오르한 1세"의 아들 "무라트 1세"는 즉위하자마자, "콘스탄티노폴리스"와 "도나우 강" 유역을 잇는 중요 거점인 "아드리아노폴리스(현, 에디르네)"를 점령, 이곳을 "제2의 수도"로 삼은 것과 동시에, "상비 포병군 예니체리"를 창설하는 등, 국가 제도를 정돈하였으며, 1389년에는 "코소보 전투"에서 "세르비아 왕국"을 필두로 한 "발칸 제후국"들의 연합군을 물리쳤다.
④ 바예지드 1세 (무라트 1세 아들)
1396년, "무라트 1세"의 아들 "바예지드 1세"는 "불가리아" 북부에서 "니코폴리스 전투"를 벌여, 이 전투에서 "헝가리 왕국"을 필두로 한 "십자군"을 격파, 오히려 영토를 더 크게 넓혔다. 그러나 1402년, "앙카라 전투"에서 "티무르"에게 패배하였으며, 국내에는 왕자들 간에 후계 싸움이 일어나 제국의 확대는 일시적으로 멈추었다.
⑤ 메흐메트 1세 (바예지드 1세 아들)
1421년, "바예지드 1세"의 아들 "메흐메트 1세"는 "제국 재통합"을 성공으로 이끌면서 국력을 회복하였다.
⑥ 무라트 2세 (메흐메트 1세 아들)
그런 배경을 바탕으로 아들 "무라트 2세"는 다시 자국을 침공한 "십자군"을 물리치면서, 안정된 통치를 펼쳤다.
⑦ 메흐메트 2세 (무라트 2세 아들) : 동로마 제국ㆍ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1453년, 이렇게 국력이 다시 상승하자, 아들 "메흐메트 2세"는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략하여, 마침내 "동로마 제국"을 점령하였다.(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 이후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오스만 제국"의 수도로 다시 태어났다. "하기아 소피아"도 "첨탑 4개"가 첨가되면서, "모스크"로 개축되었다.
그리고 세월이 흐르면서, 서서히 "이스탄불"이라는 이름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대체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오스만 제국"은 15세기 말까지, 지상에서는 "발칸ㆍ아나톨리아"의 거의 모든 땅을 평정하고, 바다에서는 "흑해 북해안ㆍ에게 해 섬"들까지 세력을 뻗쳐, "흑해ㆍ에게 해"를 "오스만의 내해"로 만들기에 이른다.
⑧ 셀림 1세 : 이슬람 세계의 맹주
이러한 제국을 1512년에 계승한 "셀림 1세"는 "동로마 제국"에 이어서, "맘루크 왕조"까지 멸망시켜, "이집트ㆍ이라크 지역"까지 지배 영역을 확대하였으며, "맘루크 왕조"가 소유하고 있던 "이슬람교의 2대 성지"인 "메카ㆍ메디나"의 보호권마저 장악하여, "이슬람 세계의 맹주"로 군림하게 된다. (3대 성지 : 메카 카바 신전ㆍ메디나 신전ㆍ바위의 돔 사원)
게다가 그동안 "맘루크 왕조"의 비호 아래 있던, "아바스 왕조"의 후예로부터 "칼리파"의 칭호를 양보 받아, "칼리파"를 겸하게 되면서, "술탄 – 칼리파 제"를 창설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19세기 초반에 위조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은 아니지만, "이슬람 세계"에서는 "오스만 제국"이 그 중심이 된 것만은 확실하다.
⑨ 쉴레이만 1세 : 오스만 제국의 최전성기
제10대 군주 "쉴레이만 1세(재위 1520~1566) 때에 이르면, "오스만 제국"의 국력은 더할 나위 없이 막강해져 능히 다른 나라를 압도하기에 이르렀으며, 그 영역은 "중앙 유럽ㆍ북아프리카"에까지 확장되었다.
"쉴레이만 1세"는 즉위하면서, 우선 "베오그라드 정복"으로 "헝가리"에 진출하였다. 그리고 "로도스 섬"에서 "무슬림"에 대한 해적 행위를 벌이고 있던 "성 요한 기사단"을 쫓아내면서, "동 지중해"의 해상권을 장악하였다. 1526년, "모하치 전투"를 통해, "헝가리 군"을 격파, "헝가리"의 땅 대부분을 점령한다.
한편, 동쪽으로는 "사파비 왕조"를 공격하여, "바그다드"까지 손에 넣었으며, 남쪽으로는 "예멘"에 출병하여 "아덴"을 정복하였다. "신성 로마제국"과 대립하고 있던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와 동맹을 맺은 "쉴레이만"은 1529년, "신성로마제국"의 수도 "빈"을 1개월 이상에 걸쳐, 포위하였다.
비록 이 작전은 실패로 끝났지만, "오스만 군"이 "서유럽"내 깊숙이까지 들어와, 위협한 이 사건은 당시 서구국가들에겐 큰 충격이었다. 게다가 1538년, "프레베자 해전"에서는 "스페인ㆍ베네치아 공화국" 등을 위시한 "기독교 세계"의 연합함대를 대파시켜, "지중해 해상권"의 거의 대부분을 손아귀에 넣는데, 성공했다.
"쉴레이만"의 치세는 이처럼 훌륭한 군사적 성공 외에도, 건국 이래 "오스만 제국"이 형성해 온 국가제도가 완성단계에 이르러, 제도상의 파탄이 없었던 "훌륭한 이상의 시대"로 기록되기도 한다.
그러나 동시에 "쉴레이만"의 치세는 "국가제도의 전환기"가 시작된 때이기도 하였다. "쉴레이만" 이후, 전쟁터에서 "군주"가 앞장서서 출정하는 일도 없어졌으며, 정치조차도 거의 "재상"이 처리하게 된다. 또, "군사구조"를 전환하면서, "대포"로 무장한 포병인 "예니체리"를 핵심으로 한 "상비군"의 중요성이 대두하면서, 그 인원이 폭발적으로 증대하여, "유지비"가 날이 갈수록 늘어만 갔다. 그에 따라 기병인 "시파히 층"은 몰락해 갔다.
종래 이러한 변화는 "쉴레이만"이 죽고 난 후, 제국의 쇠퇴로 인식되었지만, 오늘날에는 오히려 제국의 "정치ㆍ경제ㆍ사회"의 구조가 세계적인 추세에 따라, 크게 전환되었다고 보는 시각이 일반적이고, "지중해 무역"이 쇠퇴하고, "대서양"이 크게 번성하자, "오스만 제국"의 무역이득이 줄어들어, 내정이 어려워지게 되고, "스페인"이 강대국이 됨으로써, "오스만 제국"의 지위가 낮아지게 됐다.
5. 국내 정치 혼란과 쇠퇴
"쉴레이만"이 죽은 지, 5년 후인 1571년, "레판토 해전"에서 "오스만"함대는 "기독교 세계"의 연합 함대에게 패하여, "지중해"의 패권을 상실했다.
그렇다고 해서 "오스만 제국"이 유럽 제국보다 열세로 돌아선 것은 아니며, 그 국력은 여전히 강대하였으며 또 "지중해"의 해상권이 순식간에 "오스만 제국"에서 벗어난 것도 아니었다.
"오스만 제국" 함대는 패전한 지, 반년 만에 동 규모의 함대를 재건하여, 1573년에 "키프로스 섬"을, 다음해에는 "튀니스"를 획득하였다. 1683년까지, "슬로베니아ㆍ아드리아 해 연안"을 제외한 모든 "발칸반도"지역을 지배하였다. 그러나 18세기부터 힘이 약해졌다.
1699년 "헝가리"를 잃고, 다음엔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의 여파로, "절대 군주"로부터의 "민주혁명"과 각 민족별 독립을 추구하는 세계적인 흐름 선상에서,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유럽 국가들이 땅을 되찾는 한편, "아랍인"을 비롯한 피지배 민족들의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1830년, "그리스"가 "왕국"으로 독립하고, "영국ㆍ프랑스ㆍ러시아"의 침략을 받는다.
"오스만 제국"은 이러한 제국 내외로부터의 도전에 제대로 대응할 수가 없었고, 결국 "유럽"측으로부터 "빈사 상태인 환자"라고 불리는 모욕을 받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에 대해, "오스만 제국"이 마냥 손을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1808년에 즉위한 "마흐무트 2세"는 군대의 서구화를 위해 "예니체리"를 폐지하고, "외무성ㆍ내무성ㆍ재무성"을 신설하여, 중앙정부의 권력 강화를 추진하였다. 그리고 "유럽"에 유학생을 대거 파견해, 인재 육성에도 힘을 쏟았다.
1839년, "압뒬메지트 1세"는 "개혁 칙령"을 공포한 이후, 전면적인 개혁정치를 실행에 옮겼다.
행정에서부터 군사ㆍ문화에 이르기까지, 서구적인 체제로의 전향을 도모하는 "탄지마트(Tanzimat가 그것이다.
"탄지마트 정책"에 따라, "오스만 제국"은 중앙집권적인 관료기구와 근대적인 군대를 확립함으로써, 서구형 국가로의 전환을 진행시켜 나갔다. 1853년, "러시아 제국"과의 사이에 "크림 전쟁"이 일어났지만, "영국"의 가담 덕분에 아슬아슬하게 승리를 거두었다.
이 당시, "영국"등의 지지를 획득할 필요성을 느낀 "오스만 제국"은 1856년에 "개혁칙령"을 발포하여, "비 무슬림의 권리를 인정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렇게 해서 제2단계에 들어간 "탄지마트"는 "종교법(샤리아)"와 서양 근대법의 절충을 목표로 새로운 법전 제정ㆍ근대 교육학교 개설ㆍ근대적 토지사유제도를 인정하는 토지법 시행 등 개혁을 착착 진행시켜 나갔다.
그러나 개혁과 전쟁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서구 열강으로부터 "거액의 차관"을 필요로 했다. 그래서 결국 서구인들의 "국내무역"을 더욱 확대하였으며, "제국"은 차츰 경제면에서 서구 나라들의 반식민지가 되어갔다. 그 결과, 유럽 경제와 농산품 수확량의 영향을 강하게 받게 된 "제국 재정"은 1875년, 서구 금융공황과 농산물의 흉작으로 말미암아 파산하고 만다.
"탄지마트"가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좌절로 끝나자, 제국에는 새로운 개혁이 요구되었다. 1876년, "대재상 미드하트 파샤"의 지도 아래, "아시아 최초의 성문헌법"인 "제국헌법(통칭 미드하트 헌법)"을 공포했다.
헌법은 "오스만 제국이 서구식의 법치국가이며, 제국의회 설치와 오스만의 신민으로서 무슬림과 비 무슬림은 완전한 평등을 누린다."는 것을 선언하였다. 하지만 헌법을 발포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878년에 "오스만 제국"은 "러시아"와의 전쟁에 완패하여, 실패로 끝났다. "오스만 정부"는 "러시아군"이 제국의 수도 "이스탄불" 서쪽의 "산스테파노"까지 진군해도 좋다는 허락을 내린다.
전제체제의 부활을 바랐던 "압뒬하미트 2세"는 "러시아"와 "산스테파노 조약"을 맺어, 강화하는 한편(이후 "산스테파노 조약"은 영국ㆍ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ㆍ독일 등의 유럽 열강이 개입하여, "베를린 조약"으로 대체된다), "비상사태"를 선포하여, "미드하트 헌법"을 폐지하였다.
이후, "좌파"는 국외추방이나 사형을 각오해야 했고, "압뒬하미트 2세"는 "피의 황제"로 불린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재정 파산 이후, 제국경제를 장악한 유럽의 여러 나라에 의한 자본 투하가 진행되어, 유럽의 문화가 빠르게 침투해갔다. 또한 서구의 공업제품과 경합하지 않은 섬유공업 등의 분야에서는 차츰 민족자본이 자라기 시작하고, 전제정치에 저촉하지 않는다는 조건 아래, 신문ㆍ잡지의 간행이 확대됨으로써, 훗날의 "헌정" 부활 이후 "민주주의ㆍ민족주의"의 등장을 준비했다.
1908년, "압뒬하미트 2세"는 "청년 투르크 당"에 의해 폐위되고, 1918년 어느 날 외롭게 죽음을 맞이한다.
"청년 투르크 당"은 "메흐메트 5세"를 황제로 모시고, "마드하트 헌법"을 부활하고 개정하였으며, 군비 경쟁에 돌입했으나, "모든 민족의 평등"이 "터키인으로 한정한 평등"으로 바뀌고, "아랍인"들을 비롯한 "피지배 민족"의 독립 열망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이것이 "제1차 발칸전쟁"의 원인이다. 이 결과 "알바니아"가 "터키"로부터, 독립하였다.
6. 제1차 세계대전 중, 동맹국으로 참전
"동맹국"은 "독일 제국ㆍ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ㆍ불가리아ㆍ오스만 제국ㆍ이탈리아 왕국"을 일컫는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전국"이 되어, "전범 국가"로 지목됨으로써, "세브르 조약"의 결과, 1914년 이전의 영토를 대부분 상실하고, "소아시아ㆍ유럽"의 일부만을 지니게 되었다.
그 이후, "그리스"한테 침공을 받아, 심각하게 위협을 받게 되는데, 한때는 국가의 존망이 위기를 겪기도 하였다.
그러나 1922년경부터, "케말 파샤 장군"의 지휘 아래, "그리스 군"을 "앙카라"에서 격파하고, 이어 도주하는 "그리스 군"을 "이스탄불"에서 다시 대파함으로써, "그리스" 영토 일부까지 실지를 회복하는 등, 그 영토가 "로잔 조약"으로, 현재의 "터키공화국"의 영토로 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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