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의 "무굴 (Mughalㆍ1530~1858) 제국"은16C초~ 19C 중반까지 현재 "인도 북부ㆍ파키스탄ㆍ아프가니스탄"에 이르는 지역을 지배한 "이슬람 왕조"로, "무굴 제국" 시기에 형성된 문화는 "인도 역사"에서 황금기를 누렸다. 특히 "건축ㆍ문학ㆍ음악" 등은 "힌두 문화"와 "터키-페르시아 계 문화"의 융합으로 오늘날 "인도"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1. 인도의 왕조
티무르 제국 (티무르)→ 로디 왕조(술탄)→ 수리 제국→ 아딜샤히 왕조→ 벵골 술탄국→ 데칸 술탄국→ 무굴 제국 → 마라타 왕국→ 두라니 왕조→ 영령 인도 (인도 제국, 영국 국왕 = 인도 황제)→ 하이데라바드 왕국→ 카르나틱 태수령→ 벵골 태수령→ 아와드 태수령→ 마이소르 왕국→ 바라트푸르국
"무굴 제국"은 "티무르 왕조"에 속한 "바부르 (1대)"로부터 시작되었다. "바부르 (1대)"는 원래 "인도"보다 "사마르칸트 지역"을 차지함으로써, "티무르"의 옛 영광을 되찾고 싶어 했다.
하지만, 2번에 걸친 시도에서, 오히려 고향까지 잃어버린 "바부르"는 차선책으로 "파니파트 전쟁"을 통해 당시 쇠락한 "델리"의 "로디 왕조"를 멸망시키고, "무굴 제국"을 세웠다.
그의 뒤를 이은 "후마윤(2대)"은 강력한 저항 세력인 "아프가니스탄 계"를 물리치고 영토 확장을 꾀하지만, 오히려 그들에 쫓겨, "아프가니스탄"을 거쳐 "이란"으로 도망갔다. 그 사이 "델리"는 "후마윤"을 물리친 "쉐르 샤가 수르 왕조"를 세웠다.
하지만 "수르 왕조"는 겨우 15년 만을 유지한 채, "이란"의 도움을 받은 "후마윤"에 의해 멸망당했다.
"후마윤"의 뒤를 이은 "악바르(3대)"는 "북인도 전역"을 차지한 뒤, 남부 "데칸 지역"까지 차지하면서, "마우리아 왕조" 이후 가장 넓은 지역을 차지하는 국가를 이루었다.
"악바르"는 영토 확장뿐만 아니라 "정치ㆍ경제ㆍ사회"의 전 분야에서도 "무굴 제국"의 확고한 토대를 마련했고 종교적으로도 "이슬람교" 이외의 종교를 포용하고자, "인두세"를 폐지하는 등 융화책을 취했다.
종교적 융화책은 "자항기르(4대)"와 "샤 자한(5대)"까지 이어지지만, "아우랑제브(6대)"가 다시 "인두세"를 부활시키는 등 "종교적 억압 책"을 실시하면서, 제국의 분열이 심화되기 시작했다.
한편, "무굴 제국" 시기에 "포르투갈"을 비롯한 유럽 열강의 본격적인 "인도 침입"이 시작되었고, "네덜란드"를 거쳐, "영국"이 "인도"를 차지함으로써, 1857년 "무굴제국"은 멸망했다.
2. 왕조의 명칭
"사자ㆍ태양"이 그려진 표장은 "차가타이 울루스"에서 사용했던 것이다.
"무굴 제국"의 공식 칭호는 "구르카니"로, 이는 "티무르 왕조"의 지배자들이 "칭기스 왕실"과의 결혼으로 "구르칸"칭호를 사용한데서 유래했다. 당대의 타국인들은 "무굴 제국"의 지배계층을 "차가타이인"이라 불렀다. 17세기 초, "무굴 제국"에 파견되었던 영국 최초의 공식 사신은 "무굴 제국"의 지배계층이 "무굴인"이라 불린다고 기록하였으며, 반세기 후 "인도"를 방문한 한 "프랑스인"은 "무굴 황제"들이 스스로 "칭기스칸의 후예"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무굴"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고 기록하였다.
"무굴 제국" 스스로도 지배계층을 "칭기즈칸의 후예"라고 칭했지만, 사실상 근접적인 연계성은 없었다. 당시의 중앙아시아 및 유목 제국들은 모두 공통적으로 "칭기스칸"의 계승을 자긍심 중의 일부로 여겨, 억지로라도 꿰맞추던 습성이 있었다.
"스티브 데일"은 "바부르의 왕조"가 "티무르"가문과 "차가타이"가문, 양자 모두를 계승했으며, 스스로도 그런 의식을 가졌기 때문에, "무굴 제국"의 지배 왕가를 지칭할 때, "티무르 무굴 왕조"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바부르의 왕조"가 "인도"로 들어온 "티무르 왕조"라 하여, 이를 "인도 티무르 왕조"라 일컫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스티븐 데일"은 이 명칭이 "티무르 가문"과 "차가타이 가문" 사이의 연관성을 표시해주지 못하기 때문에, "티무르 무굴 왕조"가 더 적합한 표현이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3. 역대 황제
① 1526~ 1530 : 바부르 (티무르의 5대 직계후손)
"무굴 제국"의 시조 "바부르(1대)"는 본래 "중앙아시아"를 지배했던 "티무르"의 5대 직계후손으로, 1483.02.14일 "우즈베크(Uzbek)"의 "시르 천(川)"상류 "페르가나"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왕국은 "중앙아시아 바다흐샨(Badakshan)"에 있는 "페르가나"의 조그마한 공화국으로 몰락하고 말았다. "바부르"가 "우즈베크 공화국"의 수장 "무함마드 샤이바니"로부터 11세 때부터 위협을 받아, 그는 줄곧 도망자 신세가 되었다.
이후 1494~1513년 동안, "페르가나 공화국"을 굳건히 하고, 빼앗겼던 "사마르칸트"를 되찾고, 나라를 세우고자 힘썼으나, 1491년과 1503년에 2번씩이나 "사마르칸트"를 정복하려고 했으나, "우즈베크 인"에게 밀려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세력이 부족해, 끝내 그의 본거지인 "페르가나"마저 적에게 빼앗기고 말았고, 1504년에 "바부르"는 "중앙아시아" 대신 "서북 인도 정책"에 전환점을 가지게 되었다. 그 해 "바부르"는 "카불"과 "간다라"를 점령하고, 이곳을 근거지로 하였다.
1513년, "바부르"는 "중앙아시아"지역을 정복하려는 꿈을 버리고, 시선을 남쪽으로 돌렸다. 1525년, "인도" 공격에 나섰다. 당시 "인도"에서는 "아프간"출신인 "로디 왕조(1451~1526)"의 "술탄"이 다스리고 있었다.
1526.04월, "델리"로 쳐들어가, "로디 왕조"의 "이브라힘 왕"을 "델리"북부의 "파니파트 전투"에서 격파했다. 이어 "바부르"는 "무굴 제국"을 건국했다. 그는 "델리"에서 "아그라(Agra)"로 밀고 들어가, 스스로 "인도의 파드샤"임을 선언하고, "페르시아" 식 양식의 정원을 만들었다.
이 즈음하여, "중앙아시아"의 "우즈베크 인"들은 정치적 혼란기를 맞이했는데, "바부르"는 이를 이용하기 위해 "후마윤"과 군대를 파견했으나 실패했고, 4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② 1530~1540 / 1555~1556 : 후마윤
제2대 황제인 "후마윤"은 "벵골ㆍ비하르" 지방에서 일어난 "아프간 계(系) 수르 왕조"의 "셰르 샤"에게 패하여, 1540년 "페르시아"로 도망쳤다. 1555년 "셰르 샤"가 죽은 뒤에, "사파비 왕조"의 힘을 빌려 "수르 왕조"를 공격하여, "델리"를 탈환한 뒤 "무굴 왕조"를 다시 부활시켰다.
③ 1556~ 1605 : 악바르 1세 (악바르 대제)- 정복사업과 사회 안정 추진
제3대 황제인 "악바르"의 치세 동안 "무굴 제국"은 크게 발전하였는데, 그는 주변에 대한 정복사업을 전개하였다. 그는 우선 "수르 왕조"의 잔당을 소탕하여, "북인도"에서 "무굴 세력"을 확고히 하였고, "라자스탄" 지방의 소국들과 동맹을 맺었다.
또한 그는 1573년 "구자라트"와 1576년 "벵골"을 점령하였고, 1580년대에 "인도 북서부의 펀자브"에서 "아프가니스탄의 카불"에 이르는 지역을 정복하였다. 1590년대에는 남으로 "고다비리 강" 유역과 북으로는 "카슈미르 일대"까지 장악함으로써, "무굴"의 영역을 크게 확장시켰다.
"행정" 면에서도 그는 종파를 가리지 않았고, "힌두교도"들을 회유하기 위해 브라만 계급층과 타협하고, "라지푸트 족"의 왕비를 맞아들였다. 모든 종교의 사상을 하나의 유일사상으로 묶어 장려하는 등, 종교에 관하여 "만인평화" 정책을 채택하였다. "비 이슬람교도"들에 대한 "인두세(지즈야)"등을 폐지하였다.
또한, 능력에 따라 관료를 임명함으로써, 지방 통치나 토지 측량에서 반발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이 외에도 사회의 악습을 철폐하는 등, 사회 개혁을 실시하였고, 문학과 예술을 보호하고, 교육과 학문을 장려했다.
④ 1605~ 1628 : 자한기르 (Jahangir)
제3대 "악바르"의 개혁과 정복활동은 4대 황제 "자한기르(Jahangir)"에게 계승되었다. 그는 "무굴 제국"의 황제들 중, 처음으로 "인도" 귀족출신 어머니를 두었고, "인도"에서 태어났다.
"시크교"가 그의 장남이 반란을 일으키게 획책했기 때문에, 그의 시대에 "시크교"와 "무굴 제국 정부"의 사이가 나빠졌고, 그 후 제국의 역사기간 동안, "시크교"와의 사이는 회복되지 않았다.
⑤ 1628~ 1658 : 샤 자한 1세
제5대 황제인 "샤 자한 1세"는 "관용 정책"을 유지하고, "영토 확장"을 계속해 영토를 넓혔다.3째 황후 "뭄타즈 마할"이 14번째 아이를 낳다가 죽자, 국력을 소진시켜가면서, "타지마할"을 지었다.
이뿐만 아니라, 자신의 이름을 딴 "수도 샤 자한 나바드"를 "델리"에 짓고, "카슈미르"에 777개의 정원을 지었다. "타지마할"은 심각한 국고 낭비였으며, 곧 국력도 쇠퇴하게 되어, 신임을 잃어서 그의 아들이 왕위를 가로챘다. "샤 자한"은 다른 곳으로 유배가 되고, 8년 만에 죽었다.
⑥ 1658~ 1707 : 아우랑제브 1세 (아우랑제브 대제)- 인도 제국 역사상 최대의 영토
결국 "샤 자한"이 "타지마할" 축조로 인해 민심을 잃은 것을 빌미로 40살의 막내아들인 "아우랑제브"가 "쿠데타"를 일으켜 황제가 됐다. 6대 황제가 된 "아우랑제브 황제"는 꽤나 야심만만하고 호전적인 군주였던지라, 즉위 직후 바로 "정복사업"을 시작했다. 제6대 황제인 "아우랑제브 1세"는 남부의 "비자푸르, 골콘다," 동부의 "오디샤"를 병합하였으며, "데칸" 지역의 여러 "이슬람 소국"들을 정복하여, "인도 제국" 역사상 최대의 영토를 이룩했다.
아우랑제브는 "힌두교도ㆍ시크교도" 국민들에게 철저한 "불관용 정책"을 실시했고, "아우랑제브"의 강압에 반발한 "힌두교도"들이 결성한 "마라타 동맹"의 반란으로 제국은 분열을 맞았으며, "시크교" 역시 그들의 "구루"가 "아우랑제브"에게 처형당한 이래, "무굴 제국"에 반발했다. "아우랑제브"가 분노하여, 남부 고원의 "마라타 동맹"의 게릴라들을 진압하자, "시크교도"들이 많은 북부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더구나 "아우랑제브"는 선대 황제들과 달리, 후사 문제를 제대로 수습해놓지 못한 채, "데칸고원"에서 전사해버렸기 때문에, 그의 사후 국정 역시 극심한 혼란 국면에 빠져들었다.
4. 쇠퇴와 멸망 (1707~ 1858)
"무굴 제국"은 여러 정복활동으로 인하여, 국가 유지를 위한 엄청난 재정난과 유지비에 감당해야 했으며, 이것은 특히 세금을 내는 소 영주들이나 일반 농민들이 부담하는 것이었다.
제6대 황제 "아우랑제브 1세"는 기존의 종교 융합정책을 포기하였고, 토후 세력과의 소모전을 무리하게 추진하면서, 중앙 정부의 통치권을 크게 약화 시켰다.
"아우랑제브 1세" 치세 말기에는 "비 이슬람교도"들에 대한 "인두세"를 부활하고, "라지푸트 족"에 대해서도 엄격한 정책을 취하면서, 높은 세금을 감당해야했던 소영주와 농민들, 심지어 궁정 귀족들까지도 정부에 대해 반감을 사게 되었다.
이에 따라, "펀자브 지방"에는 "시크교도"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1674년 "힌두교도"들이 서부 "데칸" 지방에 "마라타 왕국"을 세워, "남인도"에서의 영향력을 확대시키며, "무굴 제국"의 강력한 적대세력으로 등장하였다.
1707년, "아우랑제브"가 "데칸" 일대를 원정하던 중 사망하였고, 그가 죽은 후 강력한 군주가 뒤를 잇지 못한 채, 귀족들의 부패와 토후들의 반란이 계속 이어졌다.
제위(帝位) 계승을 둘러싸고 분쟁이 일어났고, 여러 각지에 반란 진압으로 인한 재정난과 "힌두 제후"의 할거 등으로 "무굴 제국"의 중앙 권력은 급속히 쇠퇴해졌다.
18세기 말에 이르자, "마라타 동맹","시크교도 세력" 그리고 일부 "라지푸트 소국"들은 "무굴"의 중앙 정부에 격렬히 대응하였으며, 이것은 무굴의 재정적인 수입과 영토를 감소시켰다.
즉 많은 수의 독립된 혹은 준 독립된 상태의 "토후 세력"들이 등장하였던 시기로, 대표적인 세력을 들자면, "데칸"지역에 기반을 둔 "하이드라바드 족ㆍ하이다르 알리 족", 사회ㆍ경제ㆍ군사 개혁을 실시하여 대체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으로 떠오른 "마리타 동맹", "펀자브"지방을 중심으로 한 "시크교도 세력", "델리" 중심지역의 "라지푸트", "자트 농민" 세력, 중북부 인도를 중심으로 한 "아와드 족" 등을 들을 수 있다. 이들은 대체적으로 "법ㆍ행정ㆍ사회ㆍ조세" 등의 정책을 새롭게 수립하여 개혁을 시도했으나, 총체적인 사회변화와 경제위기의 극복에 실패하였다.
1739년, "페르시아"의 "나디르 샤"의 "델리 침공"으로 "무굴 제국"은 빈껍데기만 남은 상태로 사실상 패망했다. 여기에 "인도"지역에 들어온 "영국(동인도 회사)"은 "인도 정복"에 발을 내밀게 되었다.
5. "영국 동인도 회사"의 "인도" 지배
① 배 경
15~16세기 동안, 유럽에서는 "신항로"의 발견한 이후, 각국에서 아시아 국가들과 교역하기 위한 무역기지를 확보하고자, "인도"의 각 지역을 점령하였다. 다른 나라들에 비해 뒤늦게 진출한 "영국"은 "동인도 회사"를 앞세워, "스라트 지역"에 근거지를 확보하면서 "인도"에 대한 침략경쟁에 뛰어들게 되었다.
② 전 개
18세기 초, "인도"에는 각 지방에서 "무굴제국"에 대항하는 여러 정권들이 등장하면서, 분열하였다. "영국 동인도 회사"는 이틈을 타서, "인도"에 대한 지배를 확대해 나가게 되었는데, 여기서 "프랑스"와 "벵골 지역의 지배권"을 두고 자주 세력 다툼을 벌였다.
특히 "영국"은 1757년 "플라시 전투"에서 "프랑스"를 이기고, "벵골ㆍ오디샤ㆍ비하르"를 지배하게 됨으로써 "인도 지배"의 기초를 다지게 되었으며, 이후, "영국 동인도 회사"는 "인도인"으로 구성된 유럽식 군인 용병인 "세포이"를 양성함으로써, "인도" 각지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영국"은 1799년 "마이소르", 1805년 "마라타 동맹"을 해체하고, 그 영토를 흡수하였다. 또한 1843년 "신드"를 합병하고, 1849년에는 "펀자브"를 병합하였다. "인도" 내에 "델후지 총독"을 둠으로써, "마라타"를 비롯한 "인도" 내의 소규모 "토후국"들을 흡수, 합병하였다. 또한, "영국 동인도 회사"는 자국 영국의 면직물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인도산 면직물"에 대한 수입 관세를 높이고, "영국산 면직물"에 대한 "인도"의 수입관세를 최대한 낮추는 정책을 시행하였다.
그 결과, "수공업"에 의존하던 "인도의 면직물 산업"이 무너지고, "인도"는 "영국"의 산업 발달에 필요한 "원료의 공급지ㆍ상품 시장"으로 전락되었다. "영국 동인도 회사"는 나아가, "인도인"을 고용하여 "면화ㆍ차ㆍ아편" 등 작물을 강제 지배하는 등, 농촌을 수탈했으며, 이에 "인도 민중"들의 "반영운동" 기운이 높아져만 갔다.
③ 인도 독립전쟁과 무굴제국 멸망 (세포이 항쟁 (유럽식 군인 용병))
1857년, "영국 동인도회사"의 인도 침략과 수탈에 대한 "인도인"들의 불만을 배경으로, "영국 동인도 회사"에 고용된 군인 용병들인 "세포이"가 반란을 일으킨 "세포이 항쟁"으로, "인도인"들은 "영국"의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특히, "세포이"들과 각 주둔지에서 "영국"에 반란을 일으킨 "인도인"들이 "델리"에 집결하여, "무굴 황제 바하두르 샤 2세"를 추대하여, 새로 정권을 수립하였다. 봉기는 점점 확대되어, 인도 북부전체로 퍼져나가게 되고, "영국"의 식민지배에 저항하는 "인도 독립전쟁"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 "세포이 항쟁 봉기"는 "영국 동인도 회사"의 수탈로 피해를 입은 "수공업자ㆍ농민ㆍ지주" 등 폭넓은 민중들이 참가하였다. 그러나 2년에 걸친 이 반란은 "영국 본국"으로부터 지원받은 "영국 동인도 회사"의 무력으로 진압되었다.
"세포이 항쟁"을 진압한 "영국"은 "동인도 회사"를 폐지하고, 탄압정책을 한층 강화하여, 그때까지 명목상으로만 남겨 두었던 "무굴 황제 바하두르 샤 2세"의 지위마저 폐위함으로써, "무굴제국"은 멸망하였다. 이어서, 1877년에는 "영국 국왕"이 "인도 황제"를 겸하는 "인도 제국"을 성립시켰다.
6. "무굴 제국 시대"의 경제ㆍ문화
① 경 제
"무굴 제국 시대"는 상업이 발달하고, 도시가 흥성하였으며, "화폐경제"가 크게 활성화 되었다. 광대한 영역이 하나의 통치권 아래 놓이면서, 법과 질서의 체계가 수립되고, 전국이 도로와 통신망으로 연결됨으로써, 부강한 제국을 형성하였다.
무역부분에서도 크게 발달했었다. "무굴 제국"의 수출품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면직물"이었다. "서아시아ㆍ유럽" 등과 매우 활발하게 무역이 진행되었는데, 특히 "포르투갈ㆍ네덜란드ㆍ영국" 등과의 교역은 "무굴 제국" 국내 산업의 발달에 커다란 자극이 되었고, 이를 통해 "인도"의 제품이 유럽 시장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그러나 17세기 말부터는 "경제"가 서서히 쇠퇴하기 시작하였는데, "토지의 산성화"로 인한 농업 생산력의 감소가 이 시기부터 뚜렷이 나타내게 된 것이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경작 기술이나, 농업 과학 등의 발전이 뒤따르지 못하였다.
반면 "매관매직"으로 인하여, 관리들 특히, "봉토의 토지세 징수권"을 가진 관리의 수가 점차 늘어나면서 이를 둘러싼 권력의 암투가 빈발하여, 곧 농민의 피폐와 직결되었다. 여기에 귀족 계층의 소비와 사치 생활이 이어져, 많은 경제력의 손실을 가져왔다.
또한, "무굴제국"의 끊임없는 영토 확장 정책으로 국가의 경제력은 막대한 낭비를 가져왔고, 사회변혁의 실패로 직계됨으로써, 과학 기술의 후퇴, "해양 산업ㆍ해군력의 취약" 등으로 쇠퇴하게 되었다.
② 종교ㆍ건축ㆍ언어
"무굴 제국"은 "이슬람교"가 국교였으나, "힌두 문화"와 융합하여, "인도-이슬람 문화"를 만들어 냈다. 16세기 초, "나나크"가 "힌두교"를 개혁하여, "시크교"를 만들었다. "시크교"는 "이슬람교"의 영향을 받은 "일신교"로 "우상ㆍ카스트 제도"를 철저히 부정하였다. "언어"에서는 "페르시아 어"가 공식 언어였으나, 군에서는 "힌디어ㆍ페르시아어ㆍ아라비아 언어"의 어휘를 섞은 말들을 사용하였다.
"건축"에서는 "무굴 제국"의 5대 황제 "샤 자한" 때, "타지마할"이라는 뛰어난 "묘당"을 세웠는데, "장식"에서는 "페르시아"의 세밀화의 영향이 보이는 것이 특징이다.
③ 미 술
"무굴 제국"은 "세밀화"가 크게 발달하였는데, 하나는 "민간 신앙"을 표현한 "라지푸트 회화"이고, 다른 하나는 "왕이ㆍ귀족"을 그린 무굴제국의 "궁정 세밀화"이다. "라지푸트 회화"는 16세기경에 "라지푸타나"에서 발달한 양식으로, 붉은 바탕에 빈틈없는 부조 모양의 구도를 가진 세밀화였는데, "힌두교"나 "민중 예술"에 기반을 둔 종교적인ㆍ신비적인 관념세계를 그린 것이 특징이다.
반면, "궁정 세밀화"는 "페르시아의 세밀화"가 인도 전통 수법인 "라지푸트 회화"의 영향 아래 발달한 것으로, 황제나 궁정 귀족들의 초상화와 생활모습 등을 소재로 삼았으며, 세필을 써서 색채를 선명하게 그린 것이다. 또한, "투시적 원근법"과 "음영"을 이용하여, 주제를 사실적이면서, 현실적으로 묘사하면서도 배경을 장식적으로 꾸민 것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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