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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 - 서양

제국 - 티무르의 저주ㆍ몽골 티무르 제국 (1370~1507)

by 당대 제일 2022. 9.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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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무르 (1336~1405ㆍ68세ㆍ별칭 : 티무르 이랑 (절름발이 티무르))" 전성기에는 북동쪽은 "동 튀르키스탄", 남동쪽은 "인더스 강", 북서쪽은 "볼가 강", 남서쪽으로는 "시리아ㆍ아나톨리아" 방면까지 이르러, 과거 "몽골제국"의 서남부 지역도 지배하였다.

 

1. 몽골 티무르 제국구르카니 (1370~1507)

"티무르""중앙아시아" 지역에 건국한 "이슬람 왕조"이다.

전성기에는 북동쪽은 "동 튀르키스탄", 남동쪽은 "인더스 강", 북서쪽은 "볼가 강", 남서쪽으로는 "시리아아나톨리아" 방면까지 이르러, 과거 "몽골제국"의 서남부 지역도 지배하였다창시자인 "티무르" 재위 중에 "티무르 제국"이라 불렸다.

시조인 "티무르"는 발라스부의 출신으로, 언어적으로 투르크 화하고, 종교적으로는 이슬람 화했다.

15C 후반에는 "사마르칸트헤라트"의 두 정권이 남았다.

결국 16C , "우즈베크의 샤이반 왕조"에 의해 정복당해, 모두 살해당하고, 멸망했다.

티무르

2. 티무르 (1336~1405향년 68별칭 : 티무르 이랑 (절름발이 티무르))

중앙아시아 지역의 "몽골 티무르 제국"의 건설자 (재위 1369~1405)군사 지도자"몽골 제국"의 부활을 주창하면서, "칭기즈칸"의 후예를 자처한 역사상 최고의 정복군주 중 1명이다 (2008, 미국의 밀리터리 잡지인 "암체어"에서 인류 역사상 위대한 장군 100명을 꼽았는데, "티무르" "칭기즈 칸알렉산드로스 대왕"에 이어 3위에 랭크되었다.)

"트란스옥시아나 (, 우즈베키스탄타지키스탄)에서 무장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스스로는 "칭기즈칸" 후예라고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이슬람교를 믿는 "투르크족" 출신이었다1번도 패한 적이 없는 "천재적인 장군"으로 알려졌지만, 젊을 때는 하인들을 데리고 도적질하고 싸움터에서 달아나거나, 항복한 다음 기회를 노려 배신하기도 했다.

"시스탄 전투"에서 오른발을 다쳤기 때문에 "티무르 이랑(절름발이 티무르)"이라고도 불렀으며, 전리품을 휘하 부족에게 나눠주기 위해 끊임없이 전쟁을 벌이고 살육과 약탈을 했다해마다 사방으로 원정하여 "코라즘"을 병합하였고, 동차가타이 칸국을 복종시켰으며, "카르토 왕조" 멸망시키고, 인도에 침입하여 델리를 점령하였다.

"우즈베키스탄""실크로드"로 잘 알려진 "비단길"이 있다. 13C "징기스칸"에 의해 철저하게 파괴되지만, 자칭 "징키스칸의 외손"이라던 "티무르""티무르 제국"을 세워 14~16C 동안 제국을 최대화했다"중앙아시아"는 허허벌판 사막이 대부분이지만, 위대한 정복자 "티무르"는 이러한 열악한 환경 속에서 제국을 꿈꾸며 죽을 때까지 전쟁에 임하여 영토를 확장한다실제로는 "징키스칸" 보다 더 넓은 지역을 정복하는데, "바그다드다마스쿠스델리앙카라모스크바중앙아시아 중동유럽(일부)아프리카(일부), 인도(일부)"까지 지배하였다.

3. 티무르 묘 : 구르 아미르 (왕 묘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

구르 아미르 (구르 "", 아미르 "")에는 "티무르"를 시작으로 아들, 손자 등 3대 제왕의 묘가 치되어 있는 가족묘이다묘는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 레기스탄 광장"에서 15분정도 걸어가면 볼 수 있다.

원래 이곳에는 "메드레세하나카"가 있었는데, 1404"티무르" 손자인 "무하마드 술탄(Muhammad Sultan)"전사하자, "티무르"는 그를 기리기 위해 이 장소에 묘를 건설했다묘는 불과 10일 만에 완성되었다고 한다.

묘는 1404년에 완성되었지만, 1년 후에 "중국() 원정"에서 급사한 "티무르" 자신도 이곳에 묻힌다.

"티무르"는 생전에 고향인 "사흐리삽스"에 잠들길 원했고, 그곳에 묘도 조성을 했었지만, 살아서는 세상을 호령했던 왕이었으나, 죽어서는 자신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구르 아미르" 옆에는 티무르의 스승인 "루하밧 묘"를 볼 수 있다.

"구르 아미르"에 비해 상당히 초라하지만, 나름대로 무슨 의미를 주는 것 같은 느낌이 있다.

티무르 묘

4. "아미르 티무르"의 저주

검은 돌로 된 "티무르 "에는 "무덤을 건드린 자의 나라에 전쟁의 악마가 닥칠 것"이라는 저주가 쓰여 있어, 아무도 관을 열지 못했다"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1.06, 소련 당국에 의해 처음 개봉돼 시신에 다리 장애가 있음을 발견했으나, 3일 후 "히틀러""소련 침공"이 개시됐고, 이에 두려움을 느낀 "소련"이 뚜껑을 납으로 용접해 다시는 열리지 않았다.

"티무르"는 절름발이였다"스탈린"도 젊은 시절, 심하게 고문을 당한 후유증으로 다리가 절름발이였다. "스탈인"은 위대한 장군이면서 같은 절름발이였던 "티무르"로부터 기를 받고 싶었던 것이다.

"스탈린"은 사망한 지 500년이 넘은 "티무르 제국의 왕 아미르 티무르"의 관을 꺼내라고 명했다"소련"의 사회주의 이념을 선전할만한 세계적 위인을 찾으려는 프로젝트 때문이었다"미하일 게라시모프(소련의 고고학자)"가 이끄는 발굴단은 "사마르칸트"에 묻혀있는 "티무르"의 유골을 찾아갔고, "티무르" 왕의 유골 발굴 현장을 카메라에 담았다.

"티무르"의 무덤을 파헤쳐 관을 열려 했지만, 꺼낸 관에는 "무덤을 건드린 자의 나라에 전쟁의 악마가 닥칠 것"이라는 저주가 쓰여 있었다한 노인은 이 저주에 대해 경고했지만, 발굴단은 이를 무시했다"스탈린"의 명령에 따라, 이들은 경고문을 무시한 채, "티무르 왕"의 유골을 꺼냈고, 다음 날 "모스크바" 유골을 운반하기로 했다그런데 놀랍게도 바로 다음 날, 정말 전쟁이 일어났다

"독일군""소련"을 침공한 것인데, "독일"의 갑작스런 공격에 "스탈린"은 아연실색했다두 나라는 불과 2년 전에 "소 불가침 조약"을 맺었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히틀러"가 약속을 깨고 "소련"을 공격한 것이다.

방심했던 "소련"은 무방비로 당할 수박에 없었고, 결국 400만의 독일군은 국경을 넘어, 소련 남부의 유전과 산업지대를 장악했다이후 "스탈린"은 불안감에 시달렸고, 결국 "티무르 왕"의 유골을 제자리에 돌려놓으라고 명령했다.

마침내 1942.12"티무르 왕"의 유골은 "사마르칸트"에 있는 무덤으로 되돌아왔다그 후 이틀 뒤, 소련은 "스탈린그라드"에서 대승을 거뒀다. 이는 전쟁이 시작된 이래 첫 승이었다독일군은 22만 명의 전사자를 냈을 뿐 아니라, "원수 파울루스"까지 항복하면서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패배했다. 이로 인해 전세가 역전된 "소련""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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