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병준 (宋秉畯ㆍ1857~1925ㆍ68세)"은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 후, "황제 양위 운동"을 벌여 친일 활동에 앞장섰고, "순종" 즉위 후 "이완용 내각"이 들어서자, "농상공부대신ㆍ내부대신"을 역임해 국권 피탈을 위한 상주문ㆍ청원서를 제출하는 매국 행위를 했다.
1. 송병준 (宋秉畯ㆍ노다 헤이지로ㆍ1857~1925ㆍ향년 68세ㆍ160~162cm 추정)
이완용과 함께 "친일파ㆍ매국노"의 수괴 대표ㆍ정미칠적 중 1인ㆍ얼자 출신ㆍ "한일합병 조약체결" 과정에서 "일진회"를 통해 역할ㆍ조선말기 무관ㆍ개화파 정치인ㆍ조선최초의 친일합작업자 1호ㆍ창씨개명 제1호(우암 송시열의 9대손ㆍ노론ㆍ은진 송씨)ㆍ "김옥균"의 암살범→ 동지로 변하면서, 친일파로 전환
• 출 생 : 조선 조선 함경남도 장진군 • 사 망 : 경성 자택 • 사 인 : 급사 (뇌일혈)ㆍ독살설
• 호 : 제암 (濟庵) • 별 칭 : 노다 (野田) 대감
• 자 녀 : 1남 3녀 (송종헌외 3녀) • 종 교 : 유교(성리학)→ 천도교(파문)→ 시천교(侍天敎)
• 가 족 : 부- 송문수 (宋文洙ㆍ율학훈도)ㆍ모- 기생 홍씨 → 얼자 출신 • 사위 (2째): 구연수 (을미사변 당시, 조선인 고위 협력자) • 손자 (3째 딸): 송재빈 (한국타이거풀스 사장)ㆍ송돈호 (부사장) • 수 상 : 1910 : 일본제국으로부터 훈1등 자작(子爵) 작위
조선 말기에 활동한 무관 정치인으로, "정미칠적" 중 한 사람이며, "한일합병" 조약체결 과정에서 "일진회"를 조직했으며, "한일신협약 체결ㆍ한일 합방"에 적극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한양에 왔다가, "민태호(민씨 척족의 거물)"의 눈에 띄어, "민태호" 애첩인 "홍씨" 집에서 일하게 되었고 1871년 무과에 합격하여, "수문장청"에 배속되었다. 1873년에 "도총문 도사ㆍ사헌부 감찰" 등을 지내다가 1884년 "갑신정변" 후, "김옥균"을 암살하는 밀명을 받고 일본에 건너갔지만, 오히려 "김옥균"에게 감화되었고, 그의 동지가 되면서 "개화파"가 되었다. 귀국하여 그 혐의로 투옥되었으나, "민영환(민태호 양아들)"의 주선으로 출옥하였고, "영월군수ㆍ흥해군수ㆍ은진군수ㆍ양지현감" 등을 역임하다가 체포령이 내려져 다시 일본으로 피신했다.
"노다"로 창씨개명 후, "야마구치현 하기(萩)"에서 양잠업에 종사하다가,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군 통역"으로 귀국하였다. 이때부터 "친일파"로 돌아서서, 귀국 즉시 "윤시병"과 함께 "유신회(維新會)"를 조직하고, "이용구"와 함께 "일진회"를 만들어 나라를 일본에 팔아먹기 위한 전초 작업을 시작하였다.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 후, "황제 양위 운동"을 벌여 친일 활동에 앞장섰고, "순종" 즉위 후 "이완용 내각"이 들어서자, "농상공부대신ㆍ내부대신"을 역임해 국권 피탈을 위한 상주문ㆍ청원서를 제출하는 매국 행위를 했다. 그 후 다시 일본에 건너가 국권 피탈을 위한 "매국 외교"를 하여, 나라를 팔아먹었다. 물론 "3ㆍ1운동"에 가담하지 않았지만, 일본 측에서, 미리 이러한 움직임을 감지하지 못했던 것을 보면, 밀고하지는 않은 듯 하다. 참고로 "손병희"는 "이완용"도 섭외시도를 했다.
1910년, "국권 피탈" 후, 일본으로부터 "훈1등 자작 작위"를 수여받았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이 되었으며, "자작"에 이어 1920년 "백작(伯爵)"에 올랐다. 1925.02.01일, 친일 실업거두 "한상룡(韓相龍)"이 주최한 연회에 참석한 뒤, 갑자기 사망하였다. "뇌일혈"로 인한 급사였다. 일설에는 "한상룡"이 주최한 연회에서 누군가에게 독살되었다는 설도 있다. 1919년 "3ㆍ1운동"을 조직하고 계획했던 민족대표들이 "송병준"을 섭외시도를 하기도 했다.
2. 부의 축적 - 권력을 앞세운 "재산 강탈형"
일제강점기, 많은 부를 축적하여 자산가가 되었으며, 부의 축적 과정은 "권력을 앞세운 재산 강탈형"으로 평가된다. 그리고 "일진회ㆍ시천교"의 재산을 사유화하여, 부를 쌓았다. 그러나 그의 재산은 1920년대 들어서 급격히 줄어들었다.
그는 돈을 밝혔으나, 의리ㆍ은혜를 몰랐다. 친구인 실업가 "김시현(金時鉉)"이 죽자, 재산관리를 맡게 되었는데, 재산횡령 혐의로 사후에 소송까지 당하게 되었다. "민영환"이 자결하자, 재산을 빼앗으려고 "민영환"의 부인을 협박하다가 물의를 일으켰다. 문제가 되자, "국민신보"에 "그것이 낭설이라고 보도하면, 사례하겠다"고 제의했다가, "국민신보" 마저 배신하였고, 결국 "국민신보"의 "이강호"가 폭로하게 된다.
일화로, "민영환"의 도움으로 감옥에서 석방된 덕이 있어서, "대한매일신보"에서 "을사조약" 때, 이런 논평을 내면서 "송병준"을 욕했다. "병준아, 네가 민충정(閔忠正) 문하에 들어가 여러 해를 지내어 충정공이 턱 끝으로 가리키면 네가 그대로 하며, 손끝으로 부르면 네가 "예 예"하던 놈이 아닌가"
※민영환 (1861~1905ㆍ을사조약(乙巳條約)시 자결ㆍ고모 : 명성황후ㆍ친부 : 민겸호ㆍ양부 : 민태호ㆍ백부 : 민승호ㆍ양조부 : 민치록ㆍ친조부 : 민치구)
3. 경 력
1871 (14세): 무과합격ㆍ수문장(守門將)ㆍ훈련원판관(訓鍊院判官)
1873 (16세): 오위도총부 도사(五衛都摠部都事)ㆍ사헌부 감찰(監察)
1876 (19세): 강화도조약시 접견사 수행원ㆍ구로다 일행 접대ㆍ일본의 무역회사 대창조 사주인 오오쿠라와 합작, 부산에 상관 개업 (조선 최초의 한일합작상회)→ 일본인의 앞잡이 노릇 시작
1877 (20세): 일본인과 상회를 차린 혐의로 투옥→ 민영환의 주선으로 출옥
1882 (25세): 임오군란시 가택 전소(1차)
1884 (27세): 갑신정변시 가택 전소(2차)ㆍ김옥균 암살 밀명으로 도일
1886 (29세): 김옥균과 통모한 혐의로 투옥(조선인 밀정 밀고)→ 출옥→ 흥해군수ㆍ양지현감 역임
1897 (30세): 체포령이 내려져 일본으로 망명→ "노다 헤이치로"로 개명ㆍ은신
1904 (31세): 러일전쟁 발발 후, 일본군을 따라 통역관으로 귀국→ "일진회"를 조직하고, 이용구의 "진보회(進步會ㆍ동학교도 중심)"와 통합ㆍ"유신회(維新會)"를 윤시병과 함께 조직
일본군 병참감 오오다니 소장 통역→ 용산지역 일본군사령부에 주보(酒保 : PX) 경영
1907 (40세): 고종의 "헤이그 밀사사건"이 실패 후, "고종황제 양위운동"에 앞장→ 1907년, 고종 퇴위 후, 노상에서 피습→ 1907년 이완용 내각시, 농상공부대신ㆍ내부대신→ 일본에 건너가서 국권피탈을 위한 매국외교
1910(42세): 한일병합 후, 일본제국으로부터 훈1등 자작(子爵)작위 수여,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한일병합조약의 원흉으로 몰려 여러 번 피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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