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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 5적 ② 이지용 (내부대신) 나라 판돈을 "도박"으로!

by 당대 제일 2022. 10.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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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용 (李址鎔ㆍ1870~1928ㆍ58세)"은 대한제국 황족 (고종 5촌 조카ㆍ고종과는 5촌 당숙부와 당질의 관계)ㆍ"흥선대원군"의 3째 형 "흥인군 이최응(李最應ㆍ1815~1882)"의 손자로, "광흥령 이희하(李熙夏)"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큰 아버지인 "이재긍(李載兢)"에게 입양되었다.

 

1. 이지용 (李址鎔1870~1928향년 58)

대한제국 황족 (고종 5촌 조카ㆍ고종과는 5촌 당숙부와 당질의 관계)ㆍ"흥선대원군"의 3째 형 "흥인군 이최응(李最應ㆍ1815~1882)"의 손자로, "광흥령 이희하(李熙夏)"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큰 아버지인 "이재긍(李載兢)"에게 입양되었다.

관료ㆍ"나라를 판돈으로 도박에 미쳤던 백작이었다."는 말도 전해진다ㆍ일제 강점기, "조선귀족 가운데서도, 가장 부유하게 살았다"는 말이 전해진다.

•  출 생 : 경기도 광주부 궁촌     •  사 망 : 조선 경성부       •  사 인 : 병사

•  호 : 향운(響雲)      자 녀 : 2 1 (이해충이해문)   

•  : 이옥경 (李玉卿) 혹은 이홍경(李洪卿 이옥경은 원래 성이 홍씨이나, 일본 풍습에 따라 남편과 같은 성으로 변경

•  수 상 : 1910, "1등 백작" 작위,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1910~1928)

이지용

1887년 문과에 급제하였고, 1895년 칙명을 받아 일본을 유람하고 돌아왔다."경상도감찰사ㆍ황해도감찰사ㆍ궁내부 협판"을 역임하다가, "궁내부(宮內部)ㆍ법부(法部)ㆍ경부(警部)대신 서리"를 맡고, 1901년 "주일 공사"를 지냈다.

1903.10월 무렵부터, 일본 측과 협상하여, "대한제국"이 "일본"을 돕도록 하는데 힘썼으며, 1904.02월, "외부대신"으로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로부터, "1만 엔"을 받고 "한일의정서" 조인에 협조했다.

후에 "법부대신ㆍ판돈녕부사" 등을 거쳐, 1905년 "내부대신"으로 "을사조약"에 찬성ㆍ조인ㆍ서명함으로써 "을사오적"의 하나가 되었다. "한일병합조약" 체결 후, 일본 정부로부터 "훈1등 백작" 작위를 받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다. 그는 자신의 행위를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항복한 "최명길"에 비유하며 정당화하려 했다.

그 후, 그는 "나라를 판 돈으로 도박에 올인했다"고 한다. 사망하기 직전, 유언으로 "일본에게 속았다"고 했지만, 이미 때는 늦은 뒤였는데, 이 후회가 "동아공영론"에 낚였다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단순한 신세 한탄인지는 알 수가 없다.

장남 "이해충"은 3명의 아들(이경주ㆍ이문주ㆍ이홍주)을 두고도 본가인 "광평대군 파"에서 항렬이 맞는 아이를 입양해 후계자로 삼았는데, 그가 "이영주"이다. "이해충"이 일찍 죽었기에 "이영주"는 "이지용"이 가지고 있던 "조선귀족 백작 작위"를 물려받았고, 열심히 친일 행위를 했다.

2. 일화 : 산홍 (명월관의 진주 기생)

1906년(광무10), "이지용"을 보고 마음을 빼앗겨, 천금을 내놓고, "소실"로 삼으려 하자, "산홍"은 큰소리로 "기생에게 줄 돈이 있거든, 나라를 위해 피 흘리는 젊은이에게 주라!"고 하였다 한다. 이에 "이지용"이 노하여, "산홍을 때렸다"고도 하고, "죽였다"고도 하는데, 확실하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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