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택 (李根澤ㆍ1865~1919ㆍ54세)"의 출사 계기는 1882년, "임오군란" 때, "충주"로 피신한 "명성황후 민씨"에게 싱싱한 생선을 진상함으로써, 눈에 들어 발탁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명성황후 민씨"가 환궁하면서 벼슬길에 들어섰다.
1. 이근택 (李根澤ㆍ1865~1919ㆍ향년 54세)
1910년, "한일 병합 조약"에 협조하여, "일본 정부"로부터 "훈1등 자작 작위"를 받고, "조선총독부 중추원"의 고문에 임명되었다. 일제 강점기 동안, 일가가 호화로운 생활을 했다ㆍ"한규설(1856~1930ㆍ조선 말기 무신)"과 사돈관계
원래 "이근택"은 "친러파"로 분류되는 인물이었다. "이용익"과 함께 "고종"의 군비증강정책을 이끌던 인물이었지만, "이근택"은 해군 양성을 주장했기에, 육군 양성을 주장한 "이용익"과는 서로 암살자까지 보낼 정도로 사이가 나빴다고 한다.
"이근택"은 일본의 군사 정보를 캐내기 위해, "대한제국 정보대"를 창설한 인물이기도 한데, "정보대"를 통해 일본에 대해 너무 많이 알게 되었고, "정보대"의 정보들이 너무 비관적이어서 점점 친일로 기울어가기 시작했다고 한다.
• 출 생 : 충북 충주
1865년, "성종"의 9남 "경명군"의 12대손인 "어영청파총(御營廳把摠) 이민승(李敏承)"의 아들로 태어났다.
출사 계기는 1882년, "임오군란" 때, "충주"로 피신한 "명성황후 민씨"에게 싱싱한 생선을 진상함으로써, 눈에 들어 발탁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명성황후 민씨"가 환궁하면서 벼슬길에 들어섰다.
1884년, 무과에 급제, "병조참판" 등을 역임한 뒤, 1897년 "대한제국" 수립 당시, "친위 연대 제3대대장"으로 정부 전복을 꾀하던 도중 발각되어,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풀려났다. 1887년, "민영기"의 노력으로 석방되었다. 1898년, "한성판윤ㆍ의정부 찬정" 등을 거쳤다.
"친러 반일적" 태도를 취한 그는 일제의 거듭된 회유ㆍ협박ㆍ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가 결정적으로 되어가자, 일본의 침략정책에 협조했다. 1904년, "한일의정서"를 추진ㆍ조인하게 했다. 1905년, 일제로부터 30만 원의 "기밀비"를 받고, 궁중과 정부의 기밀사항을 정탐ㆍ제보했다.
1905년, "법부대신 (현, 법무부 장관)ㆍ군부대신(현, 국방부 장관)"을 역임하였는데, "이완용"이 주도한 "을사조약 체결"에서 적극적으로 지지 의사를 밝힘으로서 "을사오적"이 되었다.
때문에 조선 민중들과 의사의 표적이 되어, 습격을 받거나 위협을 받았지만 살아남았고, 이후로는 "일본군"을 호위ㆍ대동하여 출퇴근을 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 때, "조선총독부"로부터 "훈1등 자작 작위"를 받았으며,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이 되었다.
"황현의 매천야록"에는 "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와 의형제를 맺고, "이토 히로부미의 의자(義子)"가 되어, 일본 신발까지 신고, 일본 수레에 앉아, 항상 일본군의 호위를 받으며 출입했다"고 한다.
2. 일 화 : 1905.11.17 - 제2차 한일협약 (을사조약ㆍ을사늑약)
"을사조약" 문서에 도장을 찍은 후, 집에 귀가하여, "우리 집안은 부귀가 지금부터 크게 시작될 것이니 장차 무궁한 복과 즐거움을 누릴 것이다"라고 말하며, 집안 권속들과 기뻐하였는데, 부엌일을 하는 하인이 고기를 썰다가, 이것을 듣고 칼을 도마에 치며, "자신이 역적에게 몸을 의탁하였다"고 큰소리를 치며 뛰쳐나갔고, 바느질하는 하인도 똑같이 꾸짖고, 밖으로 나갔다고 한다.
"황현의 매천야록"에는 부엌에서 일했던 여자 종이 본래 "한규설(1856~1930ㆍ조선 말기 무신ㆍ고종 때 우의정/좌의정/영의정ㆍ경술국치 때 일본 정부에 의해서 남작 작위가 수여되었으나, 끝내 거절)"의 노비였는데, "한규설 딸"이 "이근택 아들"에게 시집을 올 때, 따라온 "교전비"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이근택"이 대궐에서 돌아와, "내가 다행히도 죽음을 면했소."라고 하는 말을 듣고, 부엌에서 칼을 들고 나와 꾸짖기를, "네가 대신까지 되었으니, 나라의 은혜가 얼마나 큰데, 나라가 위태로운 판국에 죽지도 못하고, 도리어 내가 다행히 살아났다고 하느냐? 너는 참으로 개돼지보다도 못하다. 내 비록 천한 종이지만 어찌 개, 돼지의 종이 되고 싶겠느냐? 내가 힘이 약해서 너를 반 토막으로 베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다"라고 말하고, 옛 주인 "한규설"의 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 한규설 (韓圭卨ㆍ1856~1930ㆍ향년 74세): 무관ㆍ참정대신 (부총리 + 국무총리 직무대행)ㆍ을사조약 체결 시, 을사오적 / 을사삼흉과 다르게 끝까지 확실히 반대의 의견을 피력한 인물ㆍ체결 이후 외부적 압력으로 인해, "참정대신"에서 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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