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용 (李完用ㆍ1858~1926ㆍ68세)"은 "고종의 복심"이었으나, 을사오적(1905)ㆍ정미칠적(1907)ㆍ경술국적(1910)의 1명으로, "한일 합병 과정"에서 맺은 조약에서 "조선의 탁월한 협조자"가 되었다. 그는 "매일신보 (1919.05.30일)"에 "조선이 식민지가 된 것은 구한국이 힘이 없었기 때문이며, 역사적으로 당연한 운명과 세계적 대세에 순응키 위한, 조선민족의 유일한 활로이기에 단행된 것이다"라고 글을 썼다.
1. 이완용 (李完用ㆍ리노이에 칸요ㆍ1858~1926ㆍ향년 68세ㆍ162~164cm 추정)
명문가 양자 출신 (중추부 판사 이호준)ㆍ왕실과 사돈 (이호준이 흥선대원군과 사돈)→ 이완용 과거 급제(1882ㆍ24세) → 친미파 (1886ㆍ28세- 육영공원 입학ㆍ1887 주차미국참찬관 (당시 초대 주미공사 박정양) → 친미파ㆍ친 러시아파 (1895ㆍ37세) → 친일파 (1905ㆍ47세)→ 사망 (68세)
을사오적(1905)ㆍ정미칠적(1907)ㆍ경술국적(1910)의 1명ㆍ조선사편수회 고문ㆍ대한제국 외교관ㆍ조선귀족 후작(1919)ㆍ백작(1910)ㆍ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ㆍ이완용은 "고종의 복심"이었다. "고종"의 정책을 잘 이해하고, 잘 따라주었다. "아무리 나쁜 평화라도, 전쟁보다는 낫다. 이게 다 조선의 평화를 위한 것이다."는 말을 남겼으며, "3ㆍ1운동은 몰지각한 행동ㆍ항일운동은 국론분열을 일으킨다"고 생각했다.
• 사망 시 재산 : 땅 2,234m2 (여의도의 7.7배)→ 무상으로 빌린 국유지(군산ㆍ김제ㆍ부안)를 제3자에게 파는 방식이거나 1915~1917년 사이 일본대지주에게 매매 후, 현금으로 사채사업
• 출 생 :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 사 망 : 조선 경성부 옥인동
• 묘 지 : 전북 익산군 낭산면 낭산리 뒷산→ "훼묘 사건"으로 유골 화장
• 사 인 : 폐렴ㆍ천식 등의 합병증 (1909년, 이재명 칼에 찔린 후유증)
• 호 : 일당 (一堂) • 본 관 : 우봉 (牛峰ㆍ집성촌- 용인 판교) • 학 력 : 한성 육영공원 졸업
• 처 : 양주 조씨 (14세ㆍ홍문관 부수찬(종6품) 조병익의 딸) • 자 녀 : 3남 (이승구ㆍ이항구ㆍ이찬우)
• 가 족 : 생부- 이석준(李奭俊, 본명- 이호석(李鎬奭))ㆍ생모- 신씨(辛氏) / 양부- 이호준 (李鎬俊ㆍ흥선대원군과 사돈)ㆍ양모- 여흥 민씨
• 친 형- 이면용 (李冕用) 15살 터울의 큰형 / 이복 서형- 이윤용(첩의 아들이지만 형, 흥선대원군의 사위)
• 손 자 : 이병길 (李丙吉ㆍ1905~1950) 후작 이완용 손자ㆍ남작 이항구 1남ㆍ이완용의 후작 작위 승계 / 이병주 (李丙周ㆍ1913~ ? ) 후작 이완용 손자ㆍ남작 이항구 2남
• 수 상 : 대훈위 금척대수장ㆍ대훈위 이화대수장ㆍ대훈위 국화대수장(大勲位菊花大綬章)
일제에 적극 협력한 대가로 "조선 귀족(백작) 작위"를 받았고, 1919년에는 "후작"에 올랐다. 문과 급제 후, "수구파"로 "청나라 양무운동" 모델의 근대화를 추구했고, "신교육"을 받고, 미국으로 건너가 "주미공사"를 역임하는 등, 대한제국 내의 "미국 전문가"로서 내각 실세가 되어, 대미협상을 전담했지만, 정작 미국이 제 잇속만 챙기고, 대한제국의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자, 일시적으로 실각당하기도 했다.
"왕정"을 고수하고, 국제 사회에서 독립을 인정받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힘을 기울였다. 1905년, "러일 전쟁"에서 일본의 승리가 결정되자, "친일파"로 변신, 어전회의에서 "고종"을 협박해 "을사조약"을 체결케 함으로써, 일본 제국의 "대한제국 외교권 박탈"을 도왔다.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사건"을 빌미로 "고종"에게 퇴위를 강요하였고, "정미 7조약"에 서명하여 "행정권"을 일본 제국에 넘겼고, 1909년, 독단으로 "기유각서"를 교환, 대한제국 "사법권"마저 일본 제국에 넘겼으며, 1910년, 최종적으로 "한일병합 조약"을 체결하여, 철저히 일본 제국의 주구가 되었다.
일제시기에는 소위 "일선(日鮮)의 융화(融化)"를 내세운 일제의 각종 정책에 호응하여, 한국 황족과 일본 황족 간의 혼인을 성사시켰다. 또한 "3ㆍ1운동" 당시, 독립 투쟁을 비난하는 내용이 담긴 "경고문"을 3차례에 걸쳐 발표하면서, "만세 운동이 "불순 세력의 선동에 의한 무지한 백성들의 허망한 경거망동일 뿐이다"라고 비난했다.
민족대표 33인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던 "태화관"은 원래 매국노 "이완용의 별장"이었다. "이완용"은 강제병합 직후, 마당에 벼락이 떨어지자, 요정을 운영하던 "명월관"에 별장을 팔았고, 그 이후 "태화관"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태화관"이 헐린 자리에 들어선 것이 지금의 "태화빌딩")
2. 한일 합병 과정에서 맺은 조약에서 조선의 탁월한 협조자
① 1905.11.17 : 을사오적(乙巳五賊ㆍ5명ㆍ을사조약 찬성자)→ 외교권 강탈
불평등 조약(을사오적(乙巳五賊))→ 일본이 "대한제국 외교권"을 강탈ㆍ통감정치 실시→ "조선"은 국권을 강탈당한 채, 형식적인 "국명" 만을 가진 나라로 전락ㆍ조선 식민지화의 국제적 승인까지 얻은 상황에서 "고종"을 협박하고, "매국노"들을 매수 • 박제순 (외부대신)- 하야시 곤스케 (일본공사)ㆍ장소 : 덕수궁 중명전
※ 을사오적 (乙巳五賊)
• 이완용 (총리대신ㆍ학부대신ㆍ李完用ㆍ당시 50세) : "한일합방"의 주역ㆍ매국노의 대명사ㆍ을사오적ㆍ정미칠적ㆍ경술국적 중 1명으로 대한제국을 일본에게 바친 친일 매국노의 수뇌
• 이근택 (군부대신ㆍ李根澤ㆍ당시 41세) : "근황주의자"에서 "친일매국노"로 변신
• 이지용 (내부대신ㆍ李址鎔ㆍ당시 36세) : 나라를 판돈으로 "도박"에 미친 백작
• 박제순 (외부대신ㆍ朴齊純ㆍ당시 48세) : "을사조약 체결"에 도장 찍은 외교책임자
• 권중현 (농상공부대신ㆍ權重顯ㆍ당시 52세) : "친일"로 한평생 걸은 대세 영합론자
② 1907.07.24 : 한일 신협약 (제2차 을사조약ㆍ정미7조약ㆍ정미협약(丁未協約)ㆍ제3차 한일협약)
일본이 한국을 병탄하기 위한 마지막 조치→ 조선의 "내정권 (국방권 박탈)"도 합법적으로 장악ㆍ차관정치 실시 • 이완용 (내각 총리대신) - 이토 히로부미 (1대 통감ㆍ후작ㆍ이등박문)ㆍ장소 : 통감 사저
※ 정미칠적 (丁未七賊)
이완용(내각총리대신)ㆍ송병준(농상공부대신)ㆍ이병무(군부대신)ㆍ고영희(탁지부대신)ㆍ조중응(법부대신)ㆍ이재곤(학부대신)ㆍ임선준(내부대신)
③ 1910.08.29 : 한일병합조약 (한일합방조약)ㆍ경술국치 (庚戌國恥)ㆍ국권피탈 (國權被奪)ㆍ병탄늑약ㆍ한일합병조약ㆍ한일합방조약→ "일본"이 "한국의 국호"까지 박탈
이완용(내각 총리대신) - 데라우치 마사타케 (3대 통감) • 장소 : 남산 왜성대 (일본 통감 관저)
"이완용(내각총리대신)"과 "데라우치 마사타케(3대 통감)"이 형식적인 회의를 거쳐 조약을 통과시켰으며, 조약 공포는 08.29일에 이루어져, "대한제국"은 "일본 제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1910.08.16 : 비밀리에 총리대신 "이완용"에게 "합병조약안"을 제시하고, "순종"에게 수락을 독촉→ 08.22 : "이완용ㆍ데라우치 마사타케" 사이에 "합병조약"이 조인→ 조약을 체결한 뒤, 일제는 한국 민의 반항을 두려워하여, 당분간 발표를 유보ㆍ조약체결을 숨긴 채, 정치 단체의 집회를 철저히 금지하고, 원로대신들을 연금 → 08.29 : "순종"으로 하여금, 양국의 "조칙"을 내리도록 강요하였다.
※ 경술국적 (庚戌國敵)
이완용 (내각총리대신)ㆍ윤덕영 (시종원경)ㆍ민병석 (궁내부대신)ㆍ고영희 (탁지부대신)ㆍ박제순 (내부대신)ㆍ조중응 (농상공부대신)ㆍ이병무 (친위부장관 겸 시종무관장)ㆍ조민희(승녕부총관ㆍ이완용 처남)
④ "이완용"이 받은 조약의 대가 (현재 추산가치)
• 땅 : 1억 3천만 평 이상 (여의도 50배ㆍ256.5 만평 기준)
• 은사공채금 (은사금) : "조선 총독부"에서 양반들에게 "작위"를 내리며, "은혜로운 돈"을 내린 회유정책
• 박영효 : 28만 엔(약 56억)→ 1년 후 반납ㆍ박제순 : 10만 엔(약 20억)ㆍ이완용 : 15만 엔(약 30억)→ 친일파 1위 (조약 체결 후, 곧 관직을 사퇴한 "이완용"은 "조약문 5번 조항"의 혜택으로, 일본 정부로부터 "훈 1등 백작(伯爵)"의 작위ㆍ잔무처리수당 60여 원ㆍ퇴직금 1,458원33전ㆍ총독부의 은사공채금 15만 엔을 지급받았다.
• 1910년 조약 체결 후, 이완용이 받은 금액 : 계 151,518 원 (조선엽전 약 7,576 만 닢) (당시 일본돈 10원 = 조선엽전 5천 닢과 동일가치ㆍ1만원 = 현재 2억→ 약 30억ㆍ당시 10원 = 쌀 1가마 값ㆍ노동자 1명 월급 = 쌀 1~2말에 불과했음)
3. "이완용"의 무덤ㆍ유골은 어디에 있나?
1926년, "이완용"은 "전북 익산군 낭산면 낭산리"의 뒷산에 묻혔다. 죽기 전, 미리 조선의 최고지관들을 섭외하여, 매국 행동에 대한 앙갚음으로 인한 "묘소 훼손"이 두려웠던지, 첩첩산중의 누구도 찾아오기 힘든 명당자리를 찾게하고, 위장무덤을 6개나 만들어 시선을 분산시켰다. 지관들은 "전북 익산군 낭산면 낭산리"에 위치한 명당자리를 찾았는데, 산맥의 모습이 "선녀들이 목욕을 하고있는 형상"이라고 불리는 8대 명당자리였다. 해방 이전에도 "훼묘 사건"이 종종 있어, "일본 순사"가 묘를 지켰다. < 파묘 (破墓) 전, 훼손된 이완용의 무덤 >
해방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훼묘 사건"이 끊이지 않자, 급기야 1979년 증손자인 "이석형"이 "파묘(破墓)"하고, 유골은 화장하여, "장암천"에 뿌렸다. 나라를 팔아먹고, 일본에게 받은 작위인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 2위 대훈위 우봉 이공지구 李公之柩"라고 씌여진 그의 "관 뚜껑"은 동네 주민들이 가져갔다가, "원광대 박물관"에 기증했다.
이후에, 역사학자 "이병도 (李丙燾ㆍ1896~1989)"가 "10만원"에 사서 불태워 버렸다. 이후 그의 묘 터는 "채석장"으로 바뀌어서, 그나마 옛 흔적조차 사라져 버렸다.
※ 이병도 (李丙燾ㆍ1896~1989ㆍ향년 93세) : 역사학자ㆍ서울대 문리학과 교수ㆍ문교부장관
이마니시 류(금서룡ㆍ今西龍)의 수제자ㆍ조선사편수회(조선총독부 산하)촉탁)에서 수사관보(1925.08~ 1927)ㆍ조선사편수회 촉탁ㆍ역사학자ㆍ문교부 장관(1960)ㆍ서울대 문리과 교수(1946)ㆍ서울대학원장(1954)ㆍ"윤치영"(내무부장관)의 처남ㆍ손자- 이장무(서울대학교 총장)ㆍ이건무(문화재청장)ㆍ그의 "한국사연구 방법론"은 "조선사편수회"에서 일한 경험으로, "식민사학"의 영향을 받았고, 그로 인해 후학들에게도 "식민사학"을 전수하는데 앞잡이 노릇을 했다.
4. "이병도"가 "이완용 관 뚜껑"을 불 태운 이유ㆍ"이병도"의 조부가 "이완용"이라는 주장
역사학자 "이병도"는 같은 본관(우봉(牛峰))인 "이완용" 때문에 평생토록 시달렸다. 실제로 항렬은 2단계나 다르고, 촌수로 따지면 30이 넘어간다. 일설에, "할아버지가 이완용이다"라는 주장이 항간에 떠돌고 있으나, 손자 "이건무(국립중앙박물관장)"의 해명에 따르면 "손자 이장무"에 의하면 "이완용과는 500년 전에 갈라진 집안으로,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다만 "이봉구(이병도 부친)"가 "이완용의 자택 집사"로 일했으며, 덕분에 "이병희(이병도 형)"은 당대의 명필로 통하던 이완용의 서체까지 빼닮았다"고 한다. 또한 일부 재야인사들은 "이병도가 이완용의 관 두껑을 태웠다"는 사실을 들어, "이완용의 후손임을 숨기기 위한 행위"라고 주장한다.
1979년, "이완용의 관 뚜껑"은 "묘"를 이장할 때, 나온 부장품 중 하나로, "원광대 박물관"이 소장중인 것을 "이병도가 개인연구에 쓴다고 가져가서는 불태워 버렸다"는 기사가 있다. 이병도를 변명하는 입장의 이야기로는, "관 뚜껑을 없앤 게, 어차피 조리돌림 당할 관을 자기 손으로 태워서 아예 없애는 게 낫다"고 판단했지 않았냐고 말한다.
< 이병도의 변명 >
먼 일가죠. 촌수로 따지면 한 30여촌 될 것입니다. 더구나 이완용은 양자이지요. 우리 문중에 증조부 뻘 되시는 "이호준"이란 분이 계신데, 그분의 자손이 없어서 양자를 들일 욕심을 갖고 있었답니다. 그래서 관상쟁이를 대동하고 돌아다니신 모양입니다. 그러다 전라도 익산에서 이완용을 만났는데, 관상쟁이가 하는 말이, "이 아이는 큰일을 할 인물이다"라고 하더랍니다. 그래 그분이 양자를 삼아, 우리 문중 사람이 된 것이에요.그러나 나와는 별 상관이 없는 사람이지요.
나의 할아버지 "함"자가 "이태용"이고, "이완용"과 같이 "용"자 돌림이었어요. "아버님(이봉구)"께서는 당시 "충청도 수군절도사"였습니다. 큰 벼슬도 아니고, 지금의 해군 장교쯤 되는 자리입니다. 그리고 그 벼슬도 이완용과 관계돼서 된 것은 아닙니다. 매국노는 매국노입니다. 나도 내가 쓴 "국사대관"이란 책에 사진을 싣고, "망국의 군상들"이라고 적어 놓았습니다.
"이완용"은 글씨는 아주 잘 썼습니다. 명필이요 재사였지요. 이것은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이에요. 하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인데. 설사 그 시대적 상황이 그러했더라도 망국의 주역이 된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그런 일이 있으면, 관직을 버리고 나오던지 했어야죠.
"이완용"의 후손들과는 왕래가 전혀 없어요. 다만 내가 "서울대 교수"로 있을 때, 그의 아들 "이병길"이가 "형님, 형님"하고 찾아왔기에, 꼴이 안 되어 점심을 몇 번 사준 적이 있지요. 그 후 "이병길"은 전쟁 때 죽었어요. 그 후손들은 미국에 가 있다고 얘기 들었어요. 그리고 한 번은 "원광대학교 박물관"에 간 일이 있는데, 아, 글쎄 그곳에 "이완용의 관 뚜껑"이 있지 않아요. "이완용"이 죽자, 나중에 그 후손들이 "망국의 주역"이라 하여 화가 나, 무덤을 파헤쳐서, 관을 다 불태웠다는 얘기는 들어서 알고 있었는데, 그 관 뚜껑이 거기에 있지 않겠어요? 그래 "아, 우리나라의 창피한 매국노의 관 뚜껑을 왜 박물관에 두냐"하고, 문중 사람 사업가인 "이 모씨"와 의논하여 그 관을 "10만원"을 주고 샀어요. 그래 서울에 가져와, 불태워 버렸습니다.
5. 1909년 : 의사 "이재명"의 테러
"고종"이 퇴위하고, "순종"이 즉위하자, "이완용"은 "망국노ㆍ역적"이라는 질타를 받았고, "반(反)이완용 시위ㆍ이완용 화형식"이 곳곳에서 거행되었다. 1909.12.22일 낮, "명동성당 정문" 근처에서 "이재명"에게 칼에 찔려,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이완용"은 칼에 "왼쪽 폐"가 관통됐는데, 마침 일본인 치료목적으로 파견 와 있던 "일본인 외과의사들"과 당시의 최신의료기술을 총동원, 구사일생으로 약 2개월간의 입원 치료 끝에 살아났다. 다만 이때부터 얻은 "폐" 쪽의 지병이 "천식ㆍ폐렴"으로 발전, 죽는 날까지 추워질 때마다 크게 고생했고, 결국 그로 인해 사망하게 된다.
"이완용"은 17일에 사망한 "벨기에 황제 레오폴트 2세(콩고 인종학살 주범)"의 명동성당 추도미사에 참석하기 위해 인력거에 올랐다. 성당 정문 근처에서 군밤장수로 변장하고 기다리던 "이재명이 "이완용"을 덮쳐, 그의 복부와 어깨 등을 순식간에 3차례 찔렀지만, 인력거꾼이 앞을 막아 실랑이를 벌이는 통에, 치명상은 입히지 못했다.
방해자마저 제압하고, 인력거에 앉은 "이완용"을 재차 찌르려 했으나, 근처 "일제 헌병"의 칼에 넓적다리를 맞고, "대한독립만세"를 부른 뒤, 체포됐다. 인력거꾼 "박원문"은 자상(刺傷)을 입고, 그 자리에서 절명, 체포된 뒤에도 재판정에서 "몸을 바쳐 나라를 구하라"고 외치는 등 법정투쟁을 계속하였다. 이듬해 9월, "이재명"은 "이완용에 대한 살인미수 혐의 및 박원문을 살해한 죄"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 이재명 (李在明ㆍ1890~1910.09ㆍ향년 20세)ㆍ평북 선천ㆍ일명- 수길(秀吉))
1904년 "대한노동이민회(大韓勞動移民會)"의 "하와이 이민모집"에 응모하여, 미국에서 수년간 노동에 종사했으며, 1909년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암살을 계획하다가, "안창호"의 만류로 그만두었다.
6. 이완용의 "성추문"
"이완용"은 슬하에 "3남 (이승구ㆍ이항구ㆍ이찬우)"을 두었다. "매천야록(梅泉野錄)"에 의하면, "이완용"이 "의사 이재명(李在明)"의 칼을 맞고 입원 중, 자신을 간호하던 맏며느리 "임건구"와 간통을 하여, "장남 이승구"가 자살하였고, 며느리는 "이완용"이가 "첩"처럼 데리고 살았다는 "패륜적 성추문"이 기록되어 있다. (매천야록(梅泉野錄): 재야문인ㆍ유생 학자"인 "황현"이 1864~1910년까지의 역사를 "편년체"로 쓴 기록물)
7. 이완용의 손자들 (이병길ㆍ이병주)
• 이병길 (李丙吉ㆍ1905~ 1950): 남작 이항구 1남ㆍ후작 이완용 장손자ㆍ이완용의 후작 작위 승계
• 이병주 (李丙周ㆍ1913~ ? ): 남작 이항구 2남ㆍ후작 이완용 손자
1945년, 해방 후 "이완용"의 가족ㆍ후손들은 가는 곳마다,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당하거나, 돌팔매를 맞고 다녔다. 장손 "이병길"은 "6ㆍ25전쟁" 때 행방불명되었고, 둘째 손자 "이병주"는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이기지 못하고, 1962년 "일본"으로 밀항해, 아예 "일본인으로 귀화했다"고 한다. 또한 큰 증손자 "이윤형"은 남은 재산을 정리해서, "캐나다"로 이민을 가는 등, "이완용"의 직계후손은 거의 뿔뿔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① 후작 이병길 (후작ㆍ李丙吉ㆍ이당(二堂)ㆍ1905~ 1950ㆍ향년 45세)
이완용의 손자ㆍ남작 이항구의 장남ㆍ이완용의 후작 작위를 물려받았다ㆍ일제 강점기 조선귀족ㆍ본적- 경성부 종로구 옥인정 (현, 서울 종로구 옥인동)
원래는 "이완용"의 차남인 "이항구"의 장남이나, 젊어서 죽은 "백부 이승구"의 호적으로 입적되어, "이완용"의 장손이 되었고, 부유한 환경에서 자라, 일본에 유학했고, "재산 관리"에도 밝아 재산을 많이 모았다. 1937년, "조선귀족들"로 구성된 "동요회 이사장"이었고, 그해 "중일 전쟁"이 발발하자, "국방헌금"을 모아 헌납하였다. 개전 이듬해인 1938년에는 "조선총독부"가 전쟁 지원을 위해 결성한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에 발기인이자 참사로 가담하였고, "배영동지회 이사ㆍ조선임전보국단 이사ㆍ국민총력조선연맹 참사" 등을 역임했다. 1945년 광복 후, "반민족행위처벌법"에 의해 체포된 바 있으며, 1950년 "한국전쟁" 중 실종되었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에서 발표한 "반민족행위자"에 "이완용(조부)ㆍ이항구(부)"와 함께, "3대"가 모두 선정되었다.
② 이병주 (남작ㆍ李丙周ㆍ1913~ ?)
이완용의 손자ㆍ남작 이항구의 차남ㆍ이항구의 남작 작위를 물려받았다ㆍ일제 강점기 조선귀족ㆍ본적- 경성부 종로구 옥인정(현, 서울 종로구 옥인동)
"일본 도쿄 가쿠슈인 고등과"를 졸업했으며, 1935.04월 당시에는 "일본 정부"로부터 "귀족 사자(嗣子)"로서, "종 5위"에 서위되어 있었다. 1939.10.05일에 설립된 합자회사인 "부영기업사 대표"를 역임했으며, 1945.06.01일 아버지 "이항구"가 받은 "남작 작위"를 승계 받았다. 광복 이후, 1949.07.26.일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에 송치되기도 했으며, 1962.09.21일 "일본 국적"을 취득했다. 1983.04.27.일, "대한민국 국적상실로 인해, 호적에서 제적되었다"는 기록만 있을 뿐, 그 이외의 행적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에서 발표한 "반민족행위자"에 "이완용(조부)ㆍ이항구(부)"와 함께, "3대"가 모두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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