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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 5적 ⑤ 이완용 ② 흥선대원군과 사돈?ㆍ독립문 글씨ㆍ고종 복심

by 당대 제일 2022. 10.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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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용 (李完用ㆍ1858~1926ㆍ68세)"은 변신의 귀재로, 명문가 양자 출신 (중추부 판사 이호준)ㆍ왕실과 사돈 (이호준이 흥선대원군과 사돈)→ 이완용 과거 급제(1882ㆍ24세) → 친미파 (1886ㆍ28세- 육영공원 입학ㆍ1887 주차미국참찬관 (당시 초대 주미공사 박정양) → 친미파ㆍ친 러시아파 (1895ㆍ37세) → 친일파 (1905ㆍ47세)가 되었다.

 

1. 관계 : 흥선대원군과 이호준 (양부ㆍ큰아버지ㆍ흥선대원군과 사돈)의 교분  "조대비"에게 접근

"대원군" "이호준 (이완용의 양아버지)"도 교분을 쌓게 되는데, "이호준"은 첩에게서만 아들 (이윤용)이 있었고, 실부인에게는 아들이 없어, "이완용"을 양자로 맞이하였다 대원군은 "이완용이윤용(이완용의 이복 서형)" 형제를 신임하여, "이윤용"에게 자신의 첩이 낳은 서녀를 시집보내 사위로 삼았다.

훗날 "이완용이윤용" 형제는 "친일파"가 되는데, 그 빌미를 대원군이 만들어준 셈이었다. 대원군은 "이호준"을 통해, "조성하(이호준 사위)조영하(사촌 동생)"와도 접촉하였는데, "조성하 조영하" "도정궁 경원군 이하전"이 사사된 후, 왕위계승 후보자를 찾지 못하던 "조 대비(신정왕후익종(순조의 세자)의 비)"에게 대원군을 소개하고, 들을 통해 종친이라는 명분으로 "조 대비"에게 접근하게 된다.

( 이하전 : "헌종" , 유력한 왕위계승 후보자였으나, "안동 김씨" 세도 기간 중 "철종"에게 "이 나라 조선이 전주 이씨의 나라인가, 안동 김씨의 나라인가"는 항의를 하였다가 결국 문제가 되어, 끝내 역모로 몰려 사사되었다.)

2. 1896독립문 (獨立門) 설립 :  "이맛돌 상단" 앞뒤로  한글ㆍ한자 글씨로 "독립문"이라고 새긴 글씨 = "이완용" 글씨

"독립문" 1896(건양1), 미국에서 돌아온 "서재필"이 조직한 "독립협회" 발의로 "고종"의 동의를 얻어 3,825원을 모금해, 1896.11.21 "정초식"을 거행하고, 1897.11.20일 완공했다"독립협회"는 조선시대 중국 사신을 영접했던 "모화관(慕華館)의 정문"으로, 조선 사대주의 구태의 징으로 지목됐던 "영은문(迎恩門)"을 허물고, "독립문"을 설립하도록 뜻을 모았다 "독립협회 위원장"을 맡았던 시절에는 "독립신문"의 가장 큰 후원자였으며, 그야말로 "독립협회" 내 핵심요인 중 1명이었다.

1999년, 출간된 "이완용 평전"이라는 책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조금은 당혹스럽게 받아들일 만한 사실 하나가 있다"독립" 상단 앞뒤에 한자와 한글로 "독립문"이라고 새겨진 글씨가 "이완용"이 쓴 것이 100% 확실하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글씨체가 굵고, 힘 있는 "이완용"의 전형적인 필체이며, 당대 제일의 명필로서 이미 궁중의 여러 전각 현판을 쓴 경력이 있다는 것이 그 근거였다.

또한 "이완용"은 그 당시 "독립협회의 발기인" 가운데 보조금을 가장 많이 냈고, "위원장"으로서 "독립문 건립 사업을 주도했다"는 것도 다른 이유였다그런데 참으로 언짢은 얘기일 수도 있겠지만, 이 주장은 사실일 가능성이 짙다.

"동아일보(1924.07.15.일자)"에는 "내동리 명물"이라는 연재물이 수록되어 있고, 때마침 "독립관과 독립문"을 다룬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들어있다.  "교북동 큰길가에 독립문이 있습니다. 모양으로만 보면 불란서 파리에 있는 개선문과 비슷합니다 이 문은 독립협회가 일어났을 때, "서재필"이란 이가 주창하여 세우게 된 것이랍니다 그 위에 새겨있는 "독립문"이란 세 글자는 "이완용"이가 쓴 것이랍니다 "이완용"은 다른 "이완용"이가 아니라, 조선귀 족 영수 후작각하올시다."  이상의 사실에서 "독립협회" ""으로부터의 "조선 독립"과 이를 가능케 해준 "일본"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를 함께 표한 것이, "독립문의 독립기념임"을 알 수 있다.

3. 이완용은 "고종의 복심"이었다. "고종"의 정책을 잘 이해하고, 잘 따라주었다.

명문가 양자 출신 (중추부 판사 이호준)ㆍ왕실과 사돈 (이호준이 흥선대원군과 사돈)→ 이완용 과거 급제(1882ㆍ24세) → 친미파 (1886ㆍ28세- 육영공원 입학ㆍ1887 주차미국참찬관 (당시 초대 주미공사 박정양) → 친미파ㆍ친 러시아파 (1895ㆍ37세) → 친일파 (1905ㆍ47세)

"명문가 양자 출신"으로, 과거시험에 급제한 이완용은 "가문의 명망왕실과의 사돈관계"에 더해 "고종의 마음을 잘 읽는다."는 이유로 "고종"의 신임을 받았다그가 "고종"을 잘 파악했다는 점은, "고종"이 좋아하는 나라를 이완용도 좋아한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고종" "미국"을 좋아했다. "미국" "조선"과 거리가 멀어서, "조선 영토"에 대한 욕심이 없으므로 조선의 독립을 지켜줄 거라는 믿음이 "고종"의 심리를 지배했다"짝사랑"이라 할 만한 "고종의 미국 사랑"을 간파한 이완용은 처음에는 "친미파"의 길을 걸었다.  "육영공원"에 입학해 영어를 배운 것도, 대표적인 "친미파"가 되어, "고종"의 신임을 받기 위해서였다.

"이완용 평전- 김윤희 저(경원대아시아문화연구소 연구 교수)" 이렇게 말한다"이완용은 미국에 대한 고종의 생각을 이미 읽고 있었고, 미국통이 된다면 고종에게 매우 유용한 인물이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세상의 변화와 고종의 의중을 알았던 그에게 육영공원 입학은 새로운 기회였다." 

이완용은 나중에는 "친미파 겸 친 러시아파"로 활약했다"고종" "미국"에 대한 짝사랑을 간직하면서도, 1895년 이후로 "러시아"에 급격히 기우는 모습을 보고, "친미친러"로 살짝 전환한 것이다"고종" "미국"의 도움을 받고 싶었으나, "미국"은 도울 생각이 없었다그래서 "러시아" 쪽에 도움을 구하면서도, "미국 짝사랑"을 버리지 못했다이완용은 이런 의도를 간파했기에, 기존의 "친미"에다가 "친러"를 살짝 얹었던 것이다.

이완용이 "친일파"로 전향한 것은 조선왕조 멸망 5년 전인 "1905"이다"러일전쟁" "러시아의 패배"로 확정되면서, "일본"이 단독으로 조선을 장악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됐고, 여세를 몰아 "일본" "조선의 외교권"을 강탈하는 "을사늑약(을사보호조약)" 추진했다조선 무대에서 경쟁했던 "청나라" "청일전쟁 패전"으로 물러나고, "러시아" "러일전쟁 패전"으로 물러났으므로, "을사늑약이 어렵지 않게 관철되리라는 것"과 조만간 "조선이 국제법적으로 일본의 수중에 들어가리라는 것"이 이 시기에는 어렵지 않게 예상될 수 있었다.

이처럼 누가 봐도, "조선이 일본에 넘어갈 것"으로 예측되는 상황에서, 이완용이 갑자기 "친일파" 변신했는데, "친미파"가 되고, "친러파"가 될 때처럼, 이번에도 이완용은 "고종"의 태도를 보면서 전향을 결심했다. 그는 "일본의 강압" 앞에서 "고종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간파했다

"고종" "친일"로 돌아선 것은 아니지만, "일본" 때문에 흔들리는 것을 보면서 이완용은 친일을 결심했다"이완용 평전 (김윤희 저)"에서, "흔히 변신의 귀재라고 불리는 이완용이 최종적으로 친일파로 돌아선 것은 바로 이때라고 한다."라면서, "을사늑약"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서술했다"이완용은 을사조약 대책회의에서도 고종의 의중을 정확히 파악하려고 애썼다.

을사조약 대책회의 과정을 보면, 그는 조약을 거절할 수 없는 상황에서 고종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살폈고, 고종이 자신에게 원한 역할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려고 했다." 이런 상황은 "고종 실록(1905.12.16일자)"에 정리돼 있다"이토 히로부미" "을사늑약 요구"에 당황한 "고종"은 그 해 11.15일 각료들을 불러 대책회의를 열었다어느 누구도 뾰족한 대책을 내놓지 못하자, "고종"은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일단 미뤄보자"고 말했다.

이때 "고종"을 유심히 관찰하던 "이완용의 입" 밖으로 튀어나온 한마디가 있다이 한마디가 "고종"의 마음을 흔드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만약 폐하의 마음이 단호하셔서, 끝까지 흔들리지 않는다면 다행입니다 하지만 부득이하게 허용해야 한다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당신이 끝까지 반대한다면 다행이지만, 과연 그럴 의지가 있느냐는 말이었다의지가 없다면, 차선책을 강구해야 하지 않느냐는 말이었다"그냥 체결해버리는 게 어떨까요?"라는 메시지와 다를 바 없었다"고종"은 답변하지 못했다. 그러고는 "조약체결" 여부를 각료들에게 일임해 버렸다정확히 말하면, "이완용한테 일임한 것"이다. 결국 "을사늑약"은 통과됐다.

이처럼 이완용은 1905년 연말, "고종"의 눈치를 봐가며, "친일파"로 변신했다"고종" "친일"로 돌아선 것은 아니지만, "일본" 앞에서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면서, 돌아섰다"친미파친러파"가 될 때는 "고종"보다 한 발 뒤에 있었던 데 비해, 이번에는 한 발 앞섰다는 점이 달랐을 뿐, "고종"의 눈치를 살펴가며, 결단을 내렸다는 점은 동일하다.

그 뒤 이완용은 나머지 5년 동안, "아주 진하게" 친일을 했다"일본" "조선 강점"을 확실하게 도왔다. 그래서 "대표적 친일파"로 기억될 수 있었다그렇게 하면서도, 그는 최소한의 "핑계거리"를 만들어뒀다"주군" "일본" 앞에서 흔들릴 때, "친일파"로 변신함으로써, 자기 행동을 정당화할 핑계거리를 만들어둔 것이다. "주군의 의중"을 반영하는 "친일" 전향인 것처럼 보일만한 여지를 만들어둔 것이다.

핑계거리를 만들어두든 않든, "이완용의 친일 행각이 잘못됐다"는 점만큼은 불변한다중요한 것은 이완용 역시 오늘의 "철새 정치인들"처럼 변절을 합리화할 명분을 만드는 데, 신경을 썼다는 점이다이완용도 "대의명분에 신경을 썼다"는 사실에 유의하는 것은, 우리시대 사람들이 정치인의 입에서 나오는 화려한 대의명분에 속지 않도록 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4. 1905.11.17 : 을사조약 (乙巳條約) 체결 즈음, 가치관

이완용이 내린 결론과 정치적 결단은 이랬다"일본은 한국 문제 때문에 2번이나 큰 전쟁을 치러 이제는 러시아까지 격파했으니, 한국에 대해 무엇인들 못하겠는가. 그런데도 일본 천황과 정부가 타협적으로 일을 처리하려고 하니, 우리 정부도 일본의 요구에 응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많은 유생들이 을사오적 이완용을 처벌하라며,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렸는데, 그는 "시국에 따라, 종묘사직을 지키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으며, 조선의 외교권은 힘을 키워 다 도로 찾으면 된다."고 항변했다고 한다.

5. 부정적 평가

 "과연 무엇을 위한 타협이었나?"라는 근본적 의문이 존재한다.

나라가 없이, "왕실"이 무슨 소용이며, 대다수 "양반들" 역시 일반 국민과 마찬가지로 구차하고, 고생스러운 삶은 마찬가지였고, 더욱이 "일제"에 착취당하며,  "강제징용종군위안부" 등으로 학대당하게 될 백성들의 삶은 애당초 "왕실친일파들"의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일본러시아"의 틈바구니 속에서, "조선 독립"을 놓고 이리저리 애썼던 것만은 사실이나, 그에게 있어서, "독립"이란 "근대적국민 국가로서의 독립보다는, 왕실 보존과 안위 문제로서의 독립"이란 의미였다.

예로, "미국"을 끌어들이려 온갖 수를 다 썼지만, 정작 "미국"을 본받아야 했던, "참정권공화정보통교육노비 철폐" 등은 전혀 도외시했다또한, "근대적 의회 정치"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 내거나, "국가"로서 세계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가장 기본적 조건인 "근대 헌법 제정" 등에 전혀 한 일이 없다특히 "이완용"  "수구파들"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내놓은 "헌법(대한국 국제大韓國 國制)"이라는 것은 "왕권의 전통적 절대성"만을 강조한 내용으로, 국민 모두를 아우를 지지합의를 이끌어낸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했다.

 "근대 개혁" "정부 주도"로 하려했음에도,  동력이 될 "국가 예산국가 재산세수 확보"에 아무 일도 한 일이 없다.

수백 년간 "면세"를 누려온 "양반들"특히 온갖 혜택을 독점한 "문벌 세도가들""왕실" 종친들에게 사사로이 주었던 "국가 전매사업" 근대화에 방해가 되는 사회 구조를 놔두고, "이완용" 등 수구파들이 한 짓은 각종 이권을 "열강들에게 헐값에 넘기는 일" 뿐이었다여기서 받은 얼마간의 돈은 "왕실 재정과 일부 정부 요인들"에게 도움은 됐을지언정, 이권을 넘겨 열강들이 마구 "국부"를 유출해 가는 바람에, 정부 재정과 국민의 삶은 더욱더 피폐해져 갔다.

게다가 일본에 나라를 판 후, 그 대가로 불어난 "이완용"의 재산은 현재 추산 수조 원에 달했고, 가진 땅만 1 3천만 평이 넘었어도, "을사조약 체결" 직전, 변명처럼 떠들었던 "나라가 다시 부강지면, 그 때가서 국권을 되찾으면 된다."는 말을 실현하기 위해, 한 일이 전혀 없었고, 역사와 후대에 전혀 본보기가 되지 못했다.

 리더십으로는 "대한제국 정부 내각" 내에서조차, 합의를 이끌지 못하고, 정적(政敵)들만 자꾸 만들어 냈다.

"이완용"이 젊은 시절, "주미 공사관"에 있을 때부터, 수십 년간 그를 지켜봐왔던 "윤치호"는 다음과 같은 인물평을 그의 일기에 남겼다"나는 이완용을 대단히 싫어한다 그의 특권의식야비한 교활성과 음흉함그와 같거나, 열등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고집스럽고, 권세 있는 사람들에게는 굴욕적일 만큼 복종하는 태도, 이 모든 것이 나로 하여금 그에게 편견을 갖게 한다 이완용은 철저한 기회주의자요, 변절주의자, 아부주의자였다고 할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이완용은 초창기 독립협회의 의장이었다 독립협회의 구성원이 대부분 우습지만, 일본과 가까운 사람들이 많았지만, 말이다."

6. 긍정적 평가

 굳은 의지의 인물당대 최고 평판의 서예가

신중히 생각해서 결정을 내리며, 1번 결심한 일은 반드시 성취하는 의지가 굳은 인물이라는 평이 있다"육영공원"에서 처음 접해보는 영어와 서양 학문들 이었을 텐데도 매우 우수한 학습 능력을 보여줬다당대 최고 평판의 "서예가"이기도 했으며, 실제로 "독립문 현판"을 직접 쓰기까지 했다.

"독립협회 위원장직"을 지낸 시절, 각종 국민계몽활동에 열심이었고, "독립신문"을 대대적으로 지원하기도 했다. 그리고 "독립문 설립"에 앞장서, "독립의지"를 국내외에 알렸던 과거가 있었고, 당시에 한해서는 "그의 독립의지가 진심이었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특히 "아관파천" 이후, "러시아"의 각종 이권 요구를 막아낸 "이완용" "서재필" "독립신문 (1897.11.11일 자 논설)"을 통해, "이완용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나라를 위해, 외국에 이권을 넘겨주는 것에 반대했다"면서, "대한의 몇 째 아니 가는 재상"으로 극찬하고 있다.

"이완용"과 동시에 과거에 급제했던 "서재필" "갑신정변 주동자"로 부인젖먹이 아들까지 죽임을 당하고, "미국"으로 도망가 갖은 고생을 다했었고, 당연히 "수구파"의 좌장격인 "이완용"에게 감정이 좋지 않았을 터였음에도 칭찬한 것이다 물론 "이완용"이 이후, "서구식 참정권"을 주장하는 "개화파 계열 독립협회원들"을 공격하고, 이내 협회 내 모든 간부직에서 자진 사퇴하자, 둘 사이의 틈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었으며, "수구파들" 대동하여, "친일 개화파들"과 작당하여, 임금백성을 속이고, "일본"에 나라를 팔아 먹자, "서재필" 증오와 멸시를 보내게 된다.

 왕통(王統)의 단절 차단

"이완용" 일단, "조선의 문을 닫은 장본인"이고, "일본"을 끌어들인 것은 맞으나, 그가 있었기 때문에, "왕통(王統)의 단절" 만은 면했다그가 "일본"과 교섭한 결과, 일제시기에도 "이왕 직(李王 職)왕세자부(王世子 附)" 등을 통해서 "왕실의 명맥만은 유지"가 되었으며, "왕족" 대부분이 "조선인 귀족으로서 일제시기에도 생활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는 데는 평가가 일치한다.

과거 "대한제국"의 지배층들 역시 일본에 귀순한다는 조건으로, "귀족 작위"를 받게 했고, 멸문을 당하 하지는 않았다. , 조선은 망했어도 "왕실" 만은 남긴 것이다이는 그의 "일본"에 대한 기민한 외교적 대응이 효과가 있었고, "이토 히로부미" 등 일본 내 온건파들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최소한의 것들은 얻어냈다. 그래서 ""이 보는 앞에서, 태연히 나라를 넘기는 "조약 문구"에 서명을 했음에도, 실제로 "고종" 모두 그를 특별히 경원하거나 내치지 않았고,  "순종" "이완용"이 와병하는 동안 갖가지 위문품을 보내기도 했다(죽기 하루 전날, "오늘이 고비"라는 소식을 들은 "순종" "적포도주" 1상자를 이완용의 집으로 보냈다)

 역사의 희생자책임 있는 관료

같은 친일파 "박중양(朴重陽)" 1945년 해방이후, "이완용" "역사의 희생자"라며, 변호하였다그를 "매국노"라 매도하긴 쉽지만, 국가가 위급존망한 때, 지도자가 되어 "이완용" 같이 깔끔하게 일처리를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하였다 이어 "폭풍노도와 같은 대세를 항거하는 것은 어차피 불가능한 일이었고, 국난을 당하여 분사(憤死)하는 자가 있을지라도 그것이 사상계의 자극은 될 지언정, 부국제민(扶國濟民)의 방도는 아니다하물며 관직을 사퇴하고 도피하는 것은 무책임한 자의 행동일 뿐이다."라며, "이완용"이 모든 악역을 자처했다고 변호했다.

그는 "누구라도 이완용과 동일한 경우의 처지가 된다면 이완용 이상의 선처할 도리가 없을 것이다." "이완용은 단순히 매국노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이는 "을사조약" 때나, "경술국치" 이후 관직을 내놓았던 일부 양심 인사들, 또한 그들을 존경하던 사람들과 엄청난 논쟁거리가 되었다.

 가치관

"김명수(이완용 조카이완용 비서)" "이완용 사후 1주년"을 기리기 위해, 1927년에 저술한 책 "일당기사(一堂紀事이완용 호- 일당(一堂))" 내용 중에서 "이완용의 가치관"이 어땠는지를 엿볼 수 있다

"나는 20세 때에 한학(漢學)을 숭상하고, 산림학(山林學)에 종사했으나, 존도숭유(尊道崇儒)의 풍이 퇴색하고 외국과의 교통이 확장되어 서양과의 교제가 절실하여, 하루아침에 머리를 깎고 구미(歐美)로 갔다 최초에는 조선인이 목적으로 하는 문과에 합격했다 당시 미국과의 교제가 점차 긴요한 까닭에, 신설된 육영공원에 입학했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갑오경장 후, 을미년에는 아관파천 사건으로 노당(露黨· 친러파)의 호칭을 얻었고, 그 후 러일전쟁이 끝날 때 전환하여, 현재의 "일파(日派친일파)" 칭호를 얻었다 이는 때에 따라 적당함을 따르는 것일 뿐, 다른 길이 없다 무릇 천도(天道)에 춘하추동이 있으니, 이를 "변역(變易)"이라 한다. 인사(人事)에 동서남북이 있으니, 이것 역시 "변역"이라 한다 천도, 인사가 때에 따라 변역하지 않으면, 실리를 잃고 끝내 성취하는 바가 없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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