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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 • 현대사)/친일파 • 안중근 • 이토히로부미 • 총독부

을사 5적 ⑤ 이완용 ④ 비서 이인직ㆍ혈의누ㆍ소설가

by 당대 제일 2022. 10.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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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의 누"를 쓴 소설가 "이인직 (李人稙ㆍ1862~1916ㆍ54세)"은 "이완용"의 후원을 받으며, 그의 비서 역할을 수행했으며,  "일본ㆍ한국의 강제병합을 모의하는 밀담"을 나누는 등 "일제강점기의 서막"을 연 인물이다.

 

1. 이인직 (李人稙1862~1916향년 54)

이완용 비서ㆍ친일행위자ㆍ일본 육군성 조선어 통역관ㆍ경학원 사성(經學院)ㆍ언론인(대한신문사 사장ㆍ국민신보(일진회 기관지) 주필ㆍ만세보(천도교 기관지) 주필)ㆍ소설가(혈의 누ㆍ최초의 신소설ㆍ낙관적 개화주의ㆍ한 문구 배제ㆍ현대소설을 태동시키는 초석)

1907.07월, 재정적 이유로 "만세보(천도교 기관지)"가 폐간되자, "조중응"의 후원으로 "대한신문사(친일 이완용 내각의 기관지)" 사장으로 임명→ 이후 "이완용"의 후원을 받으며, 그의 비서 역할을 수행→ "일본한국의 강제병합을 모의하는 밀담"을 나누는 등 "일제강점기의 서막"을 연 인물

•  출 생 : 경기도 안성    •  사 인 : 신경통        •  : 국초(菊初)

학 력 : 도쿄정치학교(청강생)→ 관비 유학생으로 전환        •  스 승 : 고마츠 미도리(일본 통감부 외사국장)

•  작 품 : 혈의 누(1906)ㆍ귀의 성(1906~07)ㆍ은세계(1908)ㆍ치악산(상편ㆍ1908)ㆍ모란봉(1913ㆍ혈의 누의 하편에 해당ㆍ미완성으로 종료)

이인직

1909.12월, "이완용(총리대신)"의 밀명을 받고, "일본"으로 건너가 이른바 "한국병합 문제"와 관련된 "일본 정계ㆍ여론 동향"을 정탐하였으며, 이어 스승인 "고마츠 미도리(일본 통감부 외사국장)"을 비밀리에 만나, "일본ㆍ한국의 강제병합을 모의하는 밀담"을 나누는 등 "일제강점기의 서막"을 연 인물로 평가되며, "친일 정객" 내부의 권력 쟁탈 과정에서, "일진회"가 주도하는 "합방"을 반대하기 위해, "조중응(趙重應ㆍ1860~1919ㆍ고위관료ㆍ친일반민족행위자)"와 함께 활동하였다.

1910.08월에도, "이완용"의 심복으로, "고마츠 미도리"를 만나, "한일합병"을 비밀리에 교섭하였고, 이 교섭을 토대로 "이완용ㆍ데라우치 마사타케 총리" 사이에, "합병조약"이 1910.08.16일부터 체결되기 시작하여, 08.22일 정식 조인되었다. (배후의 공로자임에도 불구하고, 흔한 작위도 받지 못했다)

※ 경학원 (經學院ㆍ1887년 국립교육기관이었던 성균관이 개칭된 이름) : 조선총독부 직속기구ㆍ조선총독부가 "성균관"의 기능을 정지시키고, 총독부의 정책ㆍ이념을 홍보하는 것을 주된 업무로 하는 기구로, "사성"은 "경학원"을 실질적으로 운영하는 가장 중요한 직책

"한일합병" 후, "경학원 사성(司成)"으로 선임되어, 1916.11월(사망 시)까지 재임하며, "고등관" 수준의 대우를 받았으며, "한일 병탄"을 뒷받침하는 논리를 유포한 "경학원 잡지"를 편찬을 담당하는 등, "유교 계열"의 대표적인 친일 인물로 활동했다. 1913.12월부터 일제의 식민통치를 홍보 지지하는 "경학원 잡지" 창간 때부터 1916.11월 사망할 때까지 "편찬주임"을 겸임하여, "경학원 잡지(1~11호)" 편찬 겸 발행인이었다. "경학원 잡지"를 편찬하는 한편, 지방순회강연을 다니며, 일제의 식민통치를 찬양ㆍ홍보하고, 전국 유림의 동향을 시찰하는 등 식민통치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였다.

1915.11월, "함남" 등지를 시찰하고 강연하면서, "일제의 식민통치를 덕치"라면서, "모든 분야가 발전하는 은택을 입었다"고 미화하였다. 1915.11.10일, "경학원 간부ㆍ강사 18명"이 "일본 천황 즉위식 축하 글"을 지어, "총독부"에 바쳤는데 "천황의 덕을 극히 칭송하고, 충성을 다짐"하는 내용의 글이었다. 1916.11.03일, "경학원 간부ㆍ강사 19명"이 "일본 태자를 세우는 예식의 헌송문"을 지어, "총독부"에 바쳤는데, "조선인들이 천황의 신민이 된 것을 기쁘게 여긴다."는 내용의 글을 썼다. 1916.11월, 그가 죽자, "총독부"는 "병합 당시"의 공로에 대한 상여금으로 "450엔의 장례비"를 교부했다.

2. 생 애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우다가, 1896년 "조중응(趙重應ㆍ1860~1919ㆍ고위관료ㆍ친일반민족행위자)"와 함께 일본으로 망명해, "도쿄정치학교"에 청강생으로 들어갔다가, 1900.02월 "관비 유학생"으로 정식 입학하여, 1903.07월 졸업하였다. 재학 시절, "고마츠 미도리(일본 통감부 외사국장)"에게서 배웠다. "신문기자" 양성에 힘을 쏟는 "도쿄정치학교" 방침에 따라, 졸업한 뒤 1901.11월 "미야코 신문"의 견습생으로 들어가, "몽중방어ㆍ조선 문학 과부의 꿈ㆍ조선인의 신년축하ㆍ설중참사ㆍ잡보 한국잡감ㆍ한국 실업론" 등을 연이어 게재했다. 귀국한 뒤, 1903.05월, "신문을 창립한다."는 취지의 "한국 신문 창립취지서"를 발표했다.

• 1904.02월 : "러일전쟁"을 수행하는 "일본 육군성 제1군사령부" 소속 "판임대우 통역"으로 임명되어 "러일전쟁"에 동원되었다가, 6월 해임되었다.

• 1905년 : "러일전쟁 공훈심사"에서 일본군을 위한 통역업무에 진력을 다한 공적을 인정받아, 심사위원 전원일치로 "공로 갑"을 받아, "은사금 80원"을 받았다.

• 1906.02월 : "국민신보(일진회 기관지)" 주필06: "만세보(천도교 기관지)" 주필 - "손병희오세창" 등이 "일진회"에 대항하기 위해 만든 것

• 1907.07월 : 재정적 이유로 "만세보"가 폐간되자, "조중응"의 후원으로 "대한신문사(친일 이완용 내각의 기관지)" 사장으로 임명되었다.

• 1908.03월 : "이완용 내각"의 "중추원 부찬의"로 임명되었으나, 곧바로 신병상의 이유로 사직07: 7"원각사(圓覺社개화기의 사설극장광화문 새문안교회 자리)"가 개장하자, 대표

• 1909.11월 : "경성 한자신문사" 주최로 거행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추도회"에 "대한신문사 사장" 자격으로 참석하여, "추도문" 낭독

3. 1906 - 혈의 누 ("피눈물"이라는 의미ㆍ일본어의 문법 적용ㆍ "혈루"가 옳은 말)

"이인직"은 "구술체ㆍ묘사체"의 혼종을 보이며, "객관묘사ㆍ심리묘사"의 뛰어난 기량 등을 선보여 주목할 만한 "신소설 작가"로 평가받는다. 이는 "어문의 구술성ㆍ시각성"을 "근대식 서사"를 통해 구현하고, "전근대의 주술성"에서 벗어나 "근대의 합리성"으로 전환하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서구식 문명개화론 사상"을 기반으로 하여, "제국주의적 오리엔탈리즘"을 담고 있는 등 비판의 여지가 많다.

① 개 요

1906.07~ 10월까지 "만세보"에 연재됐던 작품으로, "신소설"이라는 새로운 문학 장르이다. 이 소설 이전에도 여러 가지 "신소설"이 있었으나, "혈의 누"가 문학적인 수준이나 가치로 보아, 한국 문학사상 "최초의 신소설"로 평가된다. "조선"에서 "청일전쟁"을 도발한 "일본"에 대한 비판보다는 오히려 "일본군인"은 고아를 돌보는 좋은 사람인 양 미화하는 등 "친일성"이 농후하다. 물론 이는 당시 아시아 지식인들이 "메이지 유신"으로 발전한 일본에 대해서 유학생을 보내기 운동을 할 정도로 경탄하고 있었던 시대상과 무관하지 않다. 다만, 이를 시대상으로 보기에는 "이인직의 의도"에 대한 검증은 필요하다.

"혈의 누"는 단순히 순수문학으로 접근하기 어려우며, "이완용의 비서"로서의 그를 생각할 때, "혈의 누"는 "일본제국주의의 선전국장" 격으로서의 "이인직"의 조선인들에 대한 각성을 촉구하는 내용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옥련이 미국에서 유학하여 지식인으로 성장한다."는 설정도 당시 "윤치호ㆍ안창호" 등의 지식인들이 "예수교를 믿는 나라들은 모두 부강한 나라"라면서, 스스로 "개신교 신자"가 되는 등 서양을 "대한제국의 발전모델"로 생각하던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다.

"상편"은 "만세보" 연재로 끝나고, "하편"에 해당하는 "모란봉"은 "혈의 누"가 발표된 지 7년 후인, 1913.02~ 6월까지, 63회에 걸쳐 "매일신보"에 연재되다가, "미완성"으로 끝났다. 두 작품은 학자에 따라, 독립된 작품으로 보기도 하나, "혈의 누" 끝에 "하권"이 이어질 것을 예고했다. "상편 종"이라 쓴 점과 "매일신보"에 "혈의 누"라는 제목이 비관적인 것 같아, "모란봉"으로 고쳤음을 밝힌 점으로 미루어, "상ㆍ하편"으로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청일전쟁" 중, 한 여인이 가족을 찾아 헤매는 장면을, 이전 소설의 "순차적ㆍ평면적 서술"과는 달리, 인과관계에 의한 "입체적인 서술방식"으로 그려냈다.

② 1906 - 혈의 누 : 외세에의 찬양

"조선"에 "청일전쟁"을 불러들인 "봉건제도"를 비판하고, "신교육ㆍ신문명"을 받아들일 것ㆍ자주독립ㆍ자유연애 사상을 강조한 작품이다. "청일 전쟁"을 배경으로, 10년 동안이란 시간의 경과 속에서, "한국ㆍ일본ㆍ미국"을 무대로, 여주인공 "옥련"의 기구한 운명에 얽힌 개화기의 시대상을 그리고 있다. 이러한 시대 현실의 반영을 통해서, "자주 독립ㆍ신교육ㆍ신 결혼관" 등의 주제 의식을 보이고 있다. "청일전쟁" 중,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혼자 남게 된 "옥련"이 "일본인 군의관"의 도움으로 유학 가서 "구완서"라는 청년을 만나고,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서 "신여성이 된다."는 줄거리이다.

"청일전쟁"으로 혼란스러운 "평양"에서, 7살 난 "옥련"은 부모를 잃고, 헤매다가 부상을 당한다. 그 뒤 "일본인 군의관 이노우에"에게 구출되고, 일본에 있는 그의 부인에게 보내져 학교도 다닌다. 그러나 "이노우에"가 전사하자, 개가를 꿈꾸는 부인은 "옥련"을 구박한다. 집을 나와 방황하던 "옥련"은 나라를 부강하게 하기 위해, 유학 가려던 "구완서"라는 청년을 만나 함께 "미국"으로 간다. 한편 "모란봉" 근처에서, 남편과 딸을 잃고 헤매다가, 실의에 빠진 "옥련 어머니"는 "대동강"에서 투신자살을 기도했으나 구출되고, 아버지는 구국을 위해, 외국으로 유학 간다. "옥련"은 "미국"에서 "고등소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한 자신의 기사를 본 아버지와 만난 뒤, "구완서"와 약혼한다. "평양"의 어머니는 죽은 줄만 알았던 딸로부터 편지를 받고 기뻐한다.

 1913 - 모란봉 : 혈의 누의 하편에 해당미완성으로 종료"의병"을 무지한 폭력 집단으로 비하

3. 다른 작품

① 1906~07 - 귀의 성 (상ㆍ하) : 양반에 대한 평민들의 허황된 복수, 내용이 가장 방대하다.

무기력한 양반가문의 "본처"와 평민층의 딸인 "첩" 사이의 갈등을 매개로, "봉건적 가족제도"의 불합리성과 몰락하는 양반계급의 무력한 면을 보여준 작품. 참신하지는 않으나, 신분상승에 대한 갈구ㆍ치밀한 구성ㆍ객관적인 사건 전개 등을 지니고 있다.

② 1908 - 은세계 : 외세에의 찬양

부패ㆍ학정으로 양민을 수탈하는 양반관료에 대한 "평민 최병도"의 현실고발과 반항을 보여준 작품.  반봉건 의식이 강한 "최병도"가 봉건 관료에게 수탈당하기를 거부하다 맞아 죽는 전반부와 "최병도"의 자식인 "옥순 남매"가 미국에 유학 갔다가 귀국하여, 반민중적이고 사대주의적 태도를 보여주는 후반부로 나누어져 있다.

소설에 등장하는 "최병도ㆍ김관일ㆍ강동지ㆍ최병도" 등은 조선 말기에 형성된 평민층의 전형이며, 그들은 개화사상을 깊이 인식하고, 봉건관료의 학정에 강하게 저항한다.  이들을 통해, 조선 말기의 사회경제적 갈등을 구체적으로 그려내고, 반봉건 문명개화 사상을 주장했으나, 봉건사회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주역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봉건관료 체제에 대한 맹목적인 부정과 근대문물제도에 대한 무조건적인 긍정에서 결국 "친일개화론"으로 기울어지는 한계를 보여준다.

③ 1908 - 치악산 (상ㆍ하) : 상- 이인직, 하- 김교제가 지음

계모를 둘러싼 고부간의 갈등, 갑오개혁 이후의 신ㆍ구사상의 대립, 미신타파 및 하층계급의 반발 등을 내용으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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