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12.22일 낮, "명동성당 정문" 근처에서 "이재명 (李在明ㆍ1890~1910.09.13ㆍ향년 20세)"에게 칼에 찔려,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이완용"은 칼에 "왼쪽 폐"가 관통됐는데, 마침 일본인 치료목적으로 파견 와 있던 "일본인 외과의사들"과 당시의 최신의료기술을 총동원, 구사일생으로 약 2개월간의 입원 치료 끝에 살아났다.
1. 이재명 (李在明ㆍ1890~1910.09.13ㆍ향년 20세)
독립 운동가ㆍ불과 약관의 나이로 이완용을 처단하려 했으나, 실패 후 형장에서 순국ㆍ1909.12.22일, "종현 천주교회당(鍾峴 天主敎會堂ㆍ서울 명동성당)" 앞에서 "벨기에 국왕 레오폴 2세 추도식"에 참석하려는 "이완용 처단" 실패
• 출 생 : 조선 평안도 선천군 • 사 망 : 일제 강점기 경성부 경성감옥
• 사 인 : 사형 (경성감옥 형장 (현, 서대문형무소)) • 거 주 : 평남 평양 → 하와이 주 호놀룰루 → 대한제국 한성부
• 학 력 : 평남 평양 일신보통학교 졸업 (日新學校) • 종 교 : 개신교
어릴 때 "평남 평양" 이주 후, 개신교계 사립학교인 "일신학교(日新學校)"를 졸업했다. 1904년, "하와이"로 "노동 이민"을 떠났지만, "을사늑약ㆍ한일신협약" 체결 뉴스를 듣고, 1907년 귀국, 마침 전국적으로 비밀리에 조직되고 있던 암살 조직에 가입해, "이토 히로부미" 등 일본 주요 인사들과 "이완용ㆍ송병준ㆍ이용구" 등 매국노들의 처단을 결의했다.
1909.12.22일, "종현 천주교회당 (鍾峴 天主敎會堂ㆍ현 서울 명동성당)"에서 "벨기에 국왕 레오폴2세 추도식"이 있었다. "이완용"의 참석 정보를 미리 입수하고, 군밤장수로 변장한 그는 인력거를 타고 오는 "이완용"을 칼로 수차례 찔렀으나, "인력거 꾼(박원문)"에게 가로막혀 미처 뜻을 이루지 못했다.
다급하게 "인력거 꾼"을 칼로 찌르고, 자신에게서 떼어낸 후,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가 일본 순사의 군도에 넓적다리를 맞고 체포됐다. (명동성당 입구에 의거 터가 표석으로 표시돼 있다) 그를 가로막은 "인력거 꾼"은 곧 절명했으며, "이완용"은 갈비뼈 사이로 폐를 찔리고 치명상을 입은 듯 했으나, "대한의원 (현, 서울대학교병원 전신)"으로 후송돼, 일본인 의사들이 집도한 외과 수술로 겨우 목숨을 건졌다.
"이완용"에 대한 살인 미수와 "박원문"을 살해한 혐의로 곧 재판정에 섰으며, 공판에서 일본의 악행을 꾸짖고, "이완용을 찌른 것이 의거이며, 다만 박원문이 죽은 것은 우발적인 것이었음"을 스스로 변호했다. 다음은 일본을 꾸짖은 내용이다.
"나는 흉행이 아니고 당당한 의행을 한 것이다. 이 일에 찬성한 사람은 2000만 민족이다. 왜법(倭法)이 불평하여 나의 생명을 빼앗기는 하나, 나의 충혼은 빼앗지 못할 것이다. 나는 죽어 수십만 명의 이재명으로 환생하여, 기어이 일본을 망하게 하고 말겠다."
1910년 갓 20살을 넘긴 그는 사형 선고를 받은 후, "경성감옥 형장"에서 순국했으며, "송병준ㆍ이용구" 등 다른 매국 인사들의 암살을 준비 중이던, "이동수ㆍ조창호ㆍ김정익" 등 11명의 관련자들도 중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2. 1909년 : 의사 "이재명"의 테러
"고종"이 퇴위하고, "순종"이 즉위하자, "이완용"은 "망국노ㆍ역적"이라는 질타를 받았고, "반(反)이완용 시위ㆍ이완용 화형식"이 곳곳에서 거행되었다. 1909.12.22일 낮, "명동성당 정문" 근처에서 "이재명"에게 칼에 찔려,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이완용"은 칼에 "왼쪽 폐"가 관통됐는데, 마침 일본인 치료목적으로 파견 와 있던 "일본인 외과의사들"과 당시의 최신의료기술을 총동원, 구사일생으로 약 2개월간의 입원 치료 끝에 살아났다. 다만 이때부터 얻은 "폐" 쪽의 지병이 "천식ㆍ폐렴"으로 발전, 죽는 날까지 추워질 때마다 크게 고생했고, 결국 그로 인해 사망하게 된다.
"이완용"은 17일에 사망한 "벨기에 황제 레오폴트 2세(콩고 인종학살 주범)"의 명동성당 추도미사에 참석하기 위해 인력거에 올랐다. 성당 정문 근처에서 군밤장수로 변장하고 기다리던 "이재명이 "이완용"을 덮쳐, 그의 복부와 어깨 등을 순식간에 3차례 찔렀지만, 인력거꾼이 앞을 막아 실랑이를 벌이는 통에, 치명상은 입히지 못했다.
방해자마저 제압하고, 인력거에 앉은 "이완용"을 재차 찌르려 했으나, 근처 "일제 헌병"의 칼에 넓적다리를 맞고, "대한독립만세"를 부른 뒤, 체포됐다. 인력거꾼 "박원문"은 자상(刺傷)을 입고, 그 자리에서 절명, 체포된 뒤에도 재판정에서 "몸을 바쳐 나라를 구하라"고 외치는 등 법정투쟁을 계속하였다. 이듬해 9월, "이재명"은 "이완용에 대한 살인미수 혐의 및 박원문을 살해한 죄"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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