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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 • 현대사)/사건

사건- 1897.11 : 독립문ㆍ매국노 "이완용"의 글씨?

by 당대 제일 2022. 9.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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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문 (獨立門ㆍ1897.11.20)"은 사대외교(事大外交)의 상징인 "중국의 국사신 (使臣)"을 영접하던 "모화관 (慕華館)"의 정문인 "영은문 (迎恩門)"을 허물고, 그 자리에 세운 것으로,  한국 근대사에서 하나의 분수령을 이룬 19C 말의 "자주민권자강운동"의 한 기념물이다.  "이맛돌 상단", 앞뒤로 한글ㆍ한자 글씨(독립문)은 "이완용"이 썼다.

1. 독립문 (獨立門1897.11.20서울 서대문구 현저동 941사적 제32(1963년 지정)

"이맛돌 상단", 앞뒤로 한글ㆍ한자 글씨(독립문)은 "이완용"이 썼으며, 좌우에 태극기를 조각한 현판석을 달아놓았다.

"갑오개혁 (1894~1896ㆍ내정개혁, 제도개혁을 추진하였던 개혁운동)" 이후, "자주독립의 결의"를 다짐하기 위해 세운 기념물이다. 이 기념물은 "독립협회" ""으로부터의 "조선 독립"과 이를 가능케 해준 "일본"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를 한 "기념물"이<  면적 : 2,715.8 M2ㆍ높이 : 14.28 Mㆍ너비 : 11.48 M  > 

1896년(건양1), 미국에서 돌아온 "서재필 (徐載弼ㆍPhilip Jasonㆍ1864~1951ㆍ86세)"이 조직한 "독립협회" 발의로, "고종"의 동의를 얻어, 뜻있는 애국지사와 국민들의 광범위한 호응을 받아, 3,825원을 모금해, 1896.11.21일 정초식을 거행하고, 1897.11.20일 완공했다.

독일 공사관의 스위스인 기사가 설계했으며, 당시 서양건축의 조영경험이 있던 "목수 심의석 (沈宜碩)"이 공사감독을 맡아, "중국인 노동자"를 고용해 만들었다.  설계자가 당시 우리나라에서 많은 건물을 설계한 러시아인 "사바틴"이라는 설도 있다. 

프랑스의 "개선문"을 본떠 만들었지만, 쌓는 방법은 우리나라 전통기법을 사용했다.  무지개문 좌우의 받침기둥ㆍ모서리의 귓돌ㆍ꼭대기의 난간만이 서양식을 따르고 있을 뿐이다. 화강석으로 쌓은 이 문은 중앙에 "홍예문"이 있고, 왼쪽 내부에서 옥상으로 통하는 돌층계가 있으며, 문 앞에는 사적 제33호인 "영은문주초(迎恩門柱礎)" 2개가 서 있다.

45x30㎝ 크기의 화강암 1,850개를 쌓아 만든 이 문은 가운데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虹霓門)"이 있고, "홍예문"의 가운데 이맛돌에는 조선왕조의 상징인 "오얏꽃 무늬"가 새겨져 있다. 내부 왼쪽에 옥상으로 통하는 돌층계가 있으며, 꼭대기에는 "돌난간"을 둘렀다. 

2. "이맛돌 상단" 앞뒤로  한글ㆍ한자 글씨로 "독립문"이라고 새긴 글씨 = "이완용" 글씨

1999년, 출간된 "이완용 평전"이라는 책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조금은 당혹스럽게 받아들일 만한 사실 하나가 있다"독립문" 상단 앞뒤에 한자와 한글로 "독립문"이라고 새겨진 글씨가 "이완용"이 쓴 것이 100% 확실하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글씨체가 굵고, 힘 있는 "이완용"의 전형적인 필체이며, 당대 제일의 명필로서 이미 궁중의 여러 전각 현판을 쓴 경력이 있다는 것이 그 근거였다.

"이완용"은 친일 행적으로 제명당하기는 했지만, 건립 당시 "독립협회 초대 위원장 겸 보회장"으로 활동하면서, 총 모금액 3,000여 원(15천만 원) 중에서 독립협회 안에서는 최고액인 100(500만 원) 기부했을 정도로 독립문 건립을 주도한 인물이었다. 그런데 참으로 언짢은 얘기일 수도 있겠지만, 이 주장은 사실일 가능성이 짙다.

"동아일보(1924.07.15.일자)"에는 "내동리 명물"이라는 연재물이 수록되어 있고, 때마침 "독립관과 독립문"을 다룬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들어있다.  "교북동 큰길가에 독립문이 있습니다. 모양으로만 보면 불란서 파리에 있는 개선문과 비슷합니다 이 문은 독립협회가 일어났을 때, "서재필"이란 이가 주창하여 세우게 된 것이랍니다 그 위에 새겨있는 "독립문"이란 세 글자는 "이완용"이가 쓴 것이랍니다 "이완용"은 다른 "이완용"이가 아니라, 조선귀 족 영수 후작각하올시다."

독립문

3. 불편한 "독립문"의 진실 :  우리가 생각하는 그 "독립문"이 아니다.

이것은 "독립협회" ""으로부터의 "조선 독립"과 이를 가능케 해준 "일본"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를 한 "기념물"이"독립문"이 청나라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해준 것에 대해, 일본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건립된 것이다.

1890년대의 "독립"과 1910년 이후의 "독립"은 그 의미가 엄연히 다르다.  지금도 독립운동 탄압의 현장인 "서대문 형무소 자리"에는 "독립공원"이 조성되어있으며, 바로 옆에는 "독립문"이 있어서, "독립"의 의미를 구분하는데 혼란을 주고 있다"서대문 형무소 자리"에서 독립문 쪽으로 내려다보면, "31 독립선언 기념탑"이 있다이 탑 아래로 오른손에는 "독립신문"을 들고 선, "서재필 동상"의 뒷모습이 보인다"독립문"을 세우고, "독립신문"을 창간하였으며, "독립협회"를 결성한 민족의 선각자라 일컬어지는 "재필"에 대한 추앙은 대단하지만,  다시 평가 받아야 할 인물이다.

"갑신정변"이 실패한 후, "서재필""일본군"의 도움을 받아 일본으로 탈출한다여기까지가 그가 "서재필 (徐載弼ㆍ1864~1951ㆍ86세)"로 살아온 날들이다이후로는 철저히 미국인 "필립 제이슨 (Philip Jason)"으로 살아간다.

"주진오 교수(상명여대)""서재필이 쓰기나 말하기 모두에 걸쳐 모국어를 거의 잊어 버렸다는 점에 랐다"고 기록하고 있다. "주 교수"의 글에 따르면, 그가 조선 정부에 의해 추방될 당시 "귀국 정부가 나를 필요 없다고 하여, 가는 것"이라 했다" 고 한다그에게 있어 조선은 "내 나라"가 아니라 "너희 나라"인 것이다.

1896, "중추원" 외부의 미국인 고문으로 귀국한 "필립 제이슨(서재필)"과 정부대신 "이완용" 등은"독립신문"을 창간하, 그 첫 사업으로서 "나라의 독립을 기념하는 독립문"을 건설하기로 한다그렇다면 당시의 조선이 국권을 상실하기 전이라, "자주 독립국"이었음이 분명한데, 왜 "독립"이라는 말을 썼을까? 그 이유는 2가지.

중국사신을 맞이하던 사대의 상징인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다는 점 "독립문" 건설이 결정된 날, 독립협회가 "조선이 몇 해를 청의 속국으로 있다가 하느님의 덕으로 독립하였다."고 기뻐한 사실이다.

"독립협회""조선독립을 기념할 근거"""이 청일전쟁에서 패배한 뒤, "일본"과 맺은 "시모노세키 조약"에 두고 있다조약문에는 "조선에 대한 종주권 포기"를 공식적으로 천명하고 있다결국 "독립협회"가 감사한 "하느님""일본"인 셈이다이 점은 1898.08,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에 왔을 때, 독립협회가 그를 "한국의 독립에 큰 공이 있는 사람"이라고 극찬한 데서도 알 수 있다.

상식적으로 독립협회는 "외국 의존을 반대하는 애국자들이 모여, 나라의 자주 독립을 표방하여 결성"한 것이다그러나 간판 격으로 내세우는 "이상재주시경"을 빼면, 거의 모조리 친일인사가 장악하고 있었다는 실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한일병합"이 있은 지 열흘 뒤, 일본은 조선 침략에 공이 큰 자들에게 돈과 귀족작위를 주게 되고, 거의 모든 "독립협회"의 간부들이 "일본의 합방공신으로 인정받았다"는 사실에서 독립협회의 실체가 드러난다"독립협회"가 나라의 운명이 기울던 구한말, 서구의 선진 사상을 소개하고 나라를 근대화하는데 사적으로 어떤 공헌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국정 국사교과서에 서술된 것처럼 "자주독립자유민권자강개혁운"을 한 것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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