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협회 (獨立協會)"는 최초의 근대적인 "사회정치단체"로 "민권ㆍ참정권"을 주장하던 "서재필" 등의 "개화파"와 정부의 외세 의존 정책에 반대하는 "지식층" 등이 참여하여, "지주ㆍ자본가"의 입장에서 개화를 추진하여, "민중계몽단체ㆍ근대적인 정치단체 및 근대적인 정당"으로 발전하였다.
1. 독립협회 (獨立協會) → 만민공동회 (萬民共同會)ㆍ관민공동회 (官民共同會)
초기에는 사교클럽 형식으로 출발하여, "고급 관료들"이 대거 가담하는 등 각 계파가 혼재되어 있었으며, "일반시민" 계층보다는 고급 관료들이 주도하는 "사교모임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이후에 "집권 관료층"이 이탈해간 반면, "신지식인 계층"이 점차 전면에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1898.11월 정부의 외곽단체인 "황국협회" 등의 무고로 "이상재ㆍ남궁억" 등 독립협회 간부 17명이 검거 투옥되고, "황국협회"의 사주를 받은 10,000여 명의 "보부상"들이 "독립협회"를 습격했다. "고종"은 칙령으로 "양회 해산"을 명령하였다.
"독립신문 한국 최초의 신문ㆍ순한글과 영어로 발간"을 창간하고(1896.04.07), "독립협회"를 창립했다.(1896.07.02) 처음 300부를 찍었던 "독립신문"은 이내 발행부수 3,000부가 넘는 신문으로 발전했고, 10여명으로 시작된 "독립협회"는 이내 4,000명이 넘는 회원을 가진 큰 단체로 발전하면서, 국민적 개혁 운동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게 된다. "독립신문"은 근대적 여론 형성의 기틀을 마련했다. 4면 가운데 3면은 한글 전용 "독립신문"으로 편집하고, 마지막 1면은 영문판 "The Independent"로 편집하였다.
내부적으로는 민중 스스로 인권과 참정권을 주장하게 하고, 대외적으로는 "자주국"을 표방, 독립문 건립과 독립공원 조성을 목적으로 "독립협회"를 창설하였다. 1897년에는 서대문구에 청나라로부터의 독립을 기념해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독립문"을 세웠다. 학생들에게 토론과 타협을 가르치는 "협성회"를 산하 기관으로 조직, 후원하였다.
1897년부터는 종로에서 각계각층이 참가한 "만민공동회"를 열어 국민들의 애국심을 높였다. 1898.10월, "한성부 종로" 네거리에서 "관민공동회"를 조직, 시국에 관한 6개 조의 개혁 안을 "고종"에게 건의하는 것을 시작으로 적극적인 혁신운동을 전개하였다.
• 일 시 : 1896.07.02~ 1898.12.25 (고종의 해산 명령) 1898.11월, "황국협회(정부의 외곽단체)"등의 무고로 "이상재ㆍ남궁억" 등 "독립협회" 간부 17명이 검거 투옥되고, "황국협회"의 사주를 받은 1,000여 명의 "보부상"들이 "독립협회"를 습격했다. "고종"은 칙령으로 "양회 해산"을 명령하였다.
• 성 격 : 시민사회단체ㆍ사교클럽 형식으로 출발하여, "민중계몽단체ㆍ근대적인 정치단체ㆍ근대적인 정당"으로 발전
• 강 령 : 충군애국(忠君愛國)ㆍ자주독립
• 목 적 : 내부적 - 민중 스스로 인권ㆍ참정권을 주장ㆍ자주국임을 표방ㆍ독립문 건립(1897년)ㆍ독립공원 조성
• 구 성 : 고문 (서재필)ㆍ회장 (안경수)ㆍ위원장 (이완용)ㆍ위원 (8명ㆍ이상재)ㆍ간사원 (10명ㆍ남궁억)
독립협회(최초의 근대적 시민단체) 결성 : 이상재ㆍ윤치호ㆍ이승만ㆍ남궁억
독립협회 지도자 : 윤치호ㆍ이상재ㆍ박정양ㆍ양기탁ㆍ이승만ㆍ이동녕
독립신문 필진 : 박영효ㆍ윤치호ㆍ이승만ㆍ유길준ㆍ신채호ㆍ이상재ㆍ박정양ㆍ이완용ㆍ주시경ㆍ박중양 → 직업이 없어 고민인 "김규식"을 영입, "취재기자"로 고용
• 회 원 : 2,000→ 4,000여 명 (회원 자격 : 독립문 건립 보조금을 내고, 가입에 찬성한 자)
• 활 동 : 자본주의 열강의 주권침탈과 지배층의 중세적 인권유린이 계속 자행되는 가운데, "주권독립운동ㆍ민권운동ㆍ개화자강운동"을 전개하였다.
• 토론회ㆍ강연회를 열어, "국민 계몽 운동"도 전개 / 토론회 내용 : 국민계몽을 위한 주제뿐 아니라, 당시 정부정책을 비판하는 내용
• 1896.11 : "청 사신"을 접대하던 "모화관(慕華館)"을 "독립관"으로 개칭하여 집회장으로 사용 → 1897.02 : 고종의 환궁 성사 (아관파천 1896.02~ 1897.02) → 1897.11 : "청"으로부터의 자주 독립을 상징하는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독립문" 건립 → 1897년부터 : "종로"에서 각계각층이 참가한 "만민공동회"를 열어, 국민들의 애국심을 높임 → 1898.10월 : "한성부 종로 4거리"에서 "만민공동회"를 조직, "시국에 관한 6개 조"의 개혁 안을 "고종"에게 건의하는 것을 시작으로 적극적인 혁신운동을 전개
본래 "개화파 (정동파)"에 속하는 "서재필"을 중심으로 "이상재ㆍ이승만ㆍ윤치호" 등이 주도했고, "이완용ㆍ안경수ㆍ박정양" 등 이른바 "정동 구락부"라 불린 "친미ㆍ친러" 성향의 정부 고위관료들도 참가했으며, "남궁억ㆍ안창호" 등의 지식인들도 참여하였다. 1896.02월 결성되었다가 활동이 지지부진했던 "건양협회 (김윤식)"를 흡수하여 규모를 키웠다.
"개화파"는 "청나라"가 종주권을 주장하던 시기에 "반청(反淸)" 입장에 섰으며, "일본ㆍ미국ㆍ러시아ㆍ프랑스" 등에 우호적이며 서구의 문물을 적극 수용해야 된다는 견해를 제기하였다. "갑신정변(1884)"에 가담했다가 실패하여 미국으로 망명했던 "서재필"은 1894.12월 정부의 사면령이 내려지고, 1895년 "박영효ㆍ유길준" 등의 권고로 1895.12월 하순, 11년 만에 귀국한다. 이에 "윤치호ㆍ이상재ㆍ유길준" 등은 적극 동조했다.
귀국 직후, "서재필"은 백성이 나라의 주인이며, 백성들이 정치에 참여할 권리가 주어져야 한다고 역설하고, 백성들이 정치에 참여하려면, 우선 말과 글, 국내외 사정을 알아야 되므로 신문을 발간할 것을 주장하여 1년만인 1896년에 독립신문을 발간한다. 그러나 독립신문의 발간 외에도 말과 글, 국내외 사정을 안다고 해도 백성들 스스로가 자기 권리를 주장하지 않는다면 누구도 백성들에게 권리를 주지 않으며, 자유와 권리는 공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며 조정과 관청을 향해 민중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기관을 만들 것을 역설했다.
"서재필"은 "회장 직ㆍ위원장 직"을 고사하다가, "이완용"이 "전북도 관찰사"로 나가면서 회장 직을 떠맡게 되었다. 1897.02월, "아관파천" 이후, 계속 "러시아 총영사관"에 머물러 있던 "고종"에게 환궁할 것을 호소하여 이를 결행하게 하였다. 그러나 "독립신문"을 통한 "민주ㆍ민권" 사상의 보급 활동이 큰 힘을 발휘하여, 조정의 대신들에 대한 탄핵운동 등 지도자의 정부에 대한 비판ㆍ비난이 격화되자, 당시 회장으로 있던 "이완용"이 "전북도 관찰사"로 부임한 것을 계기로 대다수 정부관료 회원들이 탈퇴하였다. 이어 "고문"으로 있던 "서재필"이 회장이 되어, "독립협회"를 운영하였다.
2. 황국협회 (皇國協會)
1898.06.30일, "고종황제"에게 충성하기 위해, "보부상"들을 내세워 조직한 정치ㆍ경제 단체이다. "갑신정변"이 실패하면서 "혜상공국"은 유지되었으며, 1898년 "황국협회"가 만들어지면서, 보부상 관리의 업무는 "혜상공국"에서 "황국협회"로 이관되었다.
"독립협회"와 마찰을 빚었으며, 정부의 지원을 받기도 했다. 19C 조선 정부는 전국적인 조직망을 지닌 "보부상" 조직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보부상을 총괄하는 관청을 만들었다. 이에 1866년에는 "부보청"이 설치되었고, 그것이 1883년 "혜상공국"으로 이어졌다. "혜상공국"은 1884년 "갑신정변" 당시 급진 개화파들이 14개조 개혁 정강에서 없어져야 할 관청으로 지목하였다. 그 이유는 "혜상공국"이 당시 집권층이었던 "민씨 세력"의 권력 강화에 이용되고, 그들의 재정기반을 돕는 구실을 하였기 때문이다.
3. 발전 과정
"독립협회" 활동은 대체로 4시기로 구분되며, 각 시기마다 운동의 목표ㆍ주도세력에 차이가 있다.
① 제1기 : 1896.07~ 1897.08
"청"으로부터의 자주독립을 상징하는 "독립공원ㆍ독립문ㆍ독립관 건립" 등을 목표로 "서재필"의 주도 아래 활동하던 창립시기이다. 창립 주도세력은 • 갑오개혁 당시의 집권관료 세력들로, 서재필을 귀국시켜, "독립신문"의 창간을 지원해준 "건양협회(建陽協會)" 세력 • 외국 외교관이나 선교사들과 교제를 가진 "외교계 관료세력"으로, "서재필ㆍ윤치호ㆍ이상재ㆍ이완용" 등 "정동구락부(貞洞俱樂部)" 세력 • 개별적으로 서구근대사상에 접하면서, 개화정책을 추진하던 "중견실무 관료층" 등이었다.
② 제2기 : 1897.08~ 1898.02 : "서재필ㆍ윤치호"의 주도로, "토론회ㆍ강연회"를 개최하여, 일반 민중을 계몽하던 시기
• 임원진 : 회장(안경수)ㆍ부회장(이완용)ㆍ서기(정교)ㆍ회계(권재형/이근영) 등, 토론회 주 내용은 국민계몽을 위한 주제뿐 아니라, 당시 정부정책을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 집권 관료층이 이탈해간 반면, 신지식인 계층이 점차 전면에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협성회 (協成會ㆍ배재학당)ㆍ광무협회 (光武協會ㆍ경성학당 학원 등) 학생전위대"를 통하여, 대중 동원 체제를 확보하는 등 "정치운동 준비기"라고도 할 수 있다.
③ 제3기 : 1898.02~ 09월 : "구국선언상소(救國宣言上疏)"를 기점으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민의"를 국가정책에 반영하도록 한 시기
• 반대세력인 "황국협회(皇國協會)"도 등장하였다. 회장(이완용)ㆍ부회장(윤치호)ㆍ서기(남궁억)ㆍ회계(이상재/윤효정/제의/정교/양홍묵/이건호)ㆍ 사법위원(안영수/강화석/홍긍섭) 등이었다.
1898.03.11일, "이완용"이 "전북 관찰사"로 전직하게 되자, "윤치호"가 회장대리로 선출되었다. 05.14일 "서재필"이 출국당하고, 07.17일 "이완용"이 "외국에 대한 이권 양여문제"로 제명 처분되었다.
이권침탈ㆍ내정간섭 반대 등 "자주국권운동"과 전근대적인 압제와 수탈로부터 신체와 재산권의 자유획득을 위한 "민권운동ㆍ의회설립운동" 등이었다. 이때의 운동은 정부와 대립관계가 아니라, 협력관계 속에서 사업을 추진하였다. 지회설립 요구에 따라, "공주ㆍ평양 지회"를 인가하였으며, "박문협회(博文協會ㆍ인천)ㆍ찬양회(贊襄會ㆍ부인단체)ㆍ황국중앙총상회(皇國中央總商會ㆍ시전상인)" 등의 자매단체가 등장하였다.
④ 제4기 : 1898.09~ 12월 : "독립협회"의 공식기구보다, "만민공동회"를 중심으로 활동하였으며, "관민공동회"를 주관하여, 개혁내각의 수립과 의회개설이 가능하게 된 시기였으나, "정부의 기습공격"을 받아 해산된 시기
• 회장 (윤치호)ㆍ부회장 (이상재)ㆍ서기 (박치훈/한만용)ㆍ회계 (이일상)ㆍ사법위원 (남궁억/정교)ㆍ평의원 (20명), 회원은 4,000여 명에 달하였다. 인구 3,000명 이상인 중소도시에 학식과 재산이 있는 자가 청원할 때, 설립을 인가한다는 "지회인가조례(支會認可條例)ㆍ지회세칙(支會細則)"을 만들어, 각지에 "지부"를 설립하였다. 이 "지회"는 이후, "지방 계몽운동"의 주류가 되었다. 자매단체로 "보신사(保信社ㆍ소상인 금융업자)ㆍ취영회(聚英會ㆍ배재학당)" 등이 설립되기도 하였다.
4. 사상ㆍ활동 : 주권독립운동ㆍ자유민권운동ㆍ자강개혁운동
"독립협회운동"은 대외에 "자주적인 군주주권국가"를 지향,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며, 그것은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막으려는 "미국ㆍ영국ㆍ일본"으로 연결되는 세계질서 속에서 "반(反)러시아적 입장"을 견지하는 자세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한편 "민권운동"에서는 "중세적 압박"으로부터의 해방을 추구하였으며, "경제개혁운동"에서는 "지주자본"을 "산업자본"으로 전환시켜, "자본주의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독립협회운동"은 이후, "계몽운동"의 기반으로 작용하였다.
① 주권독립운동
대외적으로 자주성을 견지하며, 대내적으로는 황권의 확립과 강화를 포함하는 군주주권국가의 확립을 목표로 한 정치개혁운동으로 나타났다. "독립신문ㆍ독립협회 회보"를 통하여, 독립의 의미와 필요성, 나아가 독립국민으로서의 자세를 계몽하는 한편, "독립문ㆍ독립회관ㆍ독립공원" 등을 만들어, 대중들의 독립의식을 높여나갔다.
이는 몇 백 년 지속된 종래의 "화이론적(華夷論的)세계관ㆍ사대주의적 질서관"에 기초한 "청나라"로부터의 속국적인 상태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위하여, 국가체제와 국민의식을 독립국의 체제로 바꾸려 한 것이다. 또한 국가체제를 "황제국"으로 바꿈으로써, "독립국"의 체제를 갖추기 위하여 정부에 "칭제건원(稱帝建元)"을 요구하였다. 이는 당시 사회여론과도 부합되는 것으로서 정부가 이 건의를 받아들임으로써 "대한제국"이 성립된 것이다.
이권양여(利權讓與) 반대운동이다. "청일전쟁" 이후, "자본주의" 열강의 한반도 침략은 종래의 "상품판매 단계"를 넘어, "철도부설권ㆍ광산채굴권ㆍ산림벌채권ㆍ조차지(措借地)/군사기지 확보" 등의 이권쟁탈을 하면서 국가의 주권을 침해하자, 이에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러시아의 부산 절영도(絶影島) 석탄고기지 조차요구 저지ㆍ일본의 절영도 석탄고기지 회수ㆍ한러은행 철거ㆍ러시아의 목포(木浦)/증남포(甑南浦) 조계(租界) 매수 저지ㆍ프랑스의 광산이권요구 반대ㆍ 독일의 금광이권요구 반대"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② 자유민권운동 : 인권 운동 + 참정권 운동
• 인권 운동 : "천부인권(天賦人權) 사상"을 근거로, 한 국민의 생명 및 재산권의 보호를 목적으로 한 운동으로서 오랜 "전제군주제" 및 "양반관료"의 무제한적인 수탈로부터 국민을 보호하려는 운동이었다. 서구시민사상의 영향을 받은 이 운동은 "백성마다 얼마만큼 하나님이 주신 권리가 있는데, 그 권리는 아무도 뺏지 못할 권리"라 하였다.
"양반노비제도ㆍ관존민비ㆍ남존여비" 등 차별적인 신분제도와 불평등한 사회질서를 철폐하고자 하였다. 또한 백성의 재물은 법률 외에는 취하지 않아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구체적으로 "독립협회 회원"에 대한 정부의 구속 및 재산몰수에 대하여 법률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처벌할 수 없다고 강력히 항거하여 효과를 거두었으며, "갑오개혁" 때 폐지한 "참형(斬刑) 제도ㆍ연좌법(連坐法)"을 부활하려 했을 때, 강력한 반대운동을 벌여 이를 저지시켰다.
• 참정권 운동 : 구체적인 모습은 "의회개설운동"으로 나타났다.
"독립협회"가 정부에 제출한 "의회 설립안"은 일종의 "상원 설치안"으로, "갑오개혁" 때 내각의 자문과 법률의 심의제정기관으로 만들었으나,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던 "중추원"을 강화하여 의회의 구실을 하게 하자는 안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하의원이라는 것은 백성에게 정권을 주는 것이다.(중략) 무식하면 한 사람이 다스리나 여러 사람이 다스리나 국정이 그르기는 마찬가지요, 무식한 세계에는 군주국이 도리어 민주국보다 견고함은 고금 사기와 구미 각국 정형을 보아도 알지라."라며, "하원 설치"는 반대하였다. "중추원관"을 50명으로 하되, 절반은 "관선(官選)", 절반은 "민선"으로 하며, "민선의원"은 모두 "독립협회 회원"으로 충당할 것을 주장했다.
③ 자강개혁운동 (자강을 위한 경제개혁운동)
• 전통적인 "농업편중의 경제체제"를 개편하여, "상공업" 주도의 "자본주의적인 산업경제체제"로 전환시키려하였다 • 공장제 공업의 육성ㆍ자유로운 무역ㆍ국내 상업/광산 등 각종 산업개발ㆍ기술교육ㆍ은행설립 등을 장려하였다.
특히 선진 기계기술ㆍ방적사를 도입하여, "방직공업"을 주도산업으로 한 "산업혁명"을 수행하려고 하였으며, 소요자본은 "민간자본"을 주로 하고, 정부의 재정자금을 부차적으로 하여, 충당하려 하였다. 여기서 "민간자본"은 "지주자본"이었다. 이들은 "지주제"를 재편ㆍ강화하는 동시에, 미곡수출을 확대하거나, "농지개발ㆍ서구농업기술의 적극적 수용ㆍ상품작물의 재배" 등을 통하여, 생산력을 발전시킴으로써, 지주들의 자본축적을 가능하게 하여, "산업자본"으로 전환시키고자 하였다.
한편 "수입품"을 국내에서 제조ㆍ생산함으로써, 상업을 진흥시킬 것을 주장하는 등 "소상품생산자"의 성장ㆍ보호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였으나, "대기업ㆍ대상인 중심의 경제체제"를 지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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