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07.23일, 일본군 약 1,000여 명이 "경복궁"을 기습한다. "경복궁" 내에는 500명의 조선군이 있었는데, 숫자는 적지만 "독일제 총"으로 무장한 정예 병사였는데, "동학농민군"을 상대하기 위한 파병이 있어서, "경복궁" 내에는 500명의 조선군만이 남아 있었다.
1. 갑오왜란ㆍ경복궁의 변ㆍ일본군의 경복궁 강제점령ㆍ갑오사변ㆍ제2의 임진왜란
1894.07.23일, 일본은 "경복궁"을 강제 점령함으로써, 조선의 정국을 전환시켰다.이후 "교정청"을 폐지하고, "흥선대원군"을 내세워, "김홍집 (교정청 출신)"과 친일인사로 "갑오개혁"에서 내정을 간섭하자 "동학 농민군"은 외세를 몰아낼 목적으로 다시 봉기하여, 서울로 북상하였다.
"경복궁"을 점령한 뒤, "일본"은 "흥선대원군"과 입궁, "고종"을 무력으로 위협하여, "청나라"를 쫓아내고, "김홍집"을 중심으로 한 "갑오개혁"을 실시하여, 강제로 "조선"을 개혁했다. 일본은 조선 정부를 붕괴시키고, "청일전쟁"에 협조할 수 있는 친일 정권을 탄생시켰다.
• 일 시 : 1894.07.23일 새벽 4:20~ 7:30분
• 장 소 : 경복궁ㆍ함화당 (향원지 남쪽에 있는 침전 일곽)ㆍ건춘문 (동쪽 문)ㆍ영추문 (서쪽 문)
• 피 해 : 조선군 - 30여 명의 사망자ㆍ일본군- 경미
• 결 과 : "갑오왜란" 이후, 일본은 자국에 유리한 "갑오내각"을 조직하면서, "갑오개혁"을 추진했다.
일본은 1894년 "청"과의 대치 국면에서 조선의 농민반란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내정 개혁이 필요하며, 일청 양국의 "공동간섭론"을 주장했다. 그러면서도 "청"과의 전쟁 준비를 서둘렀다. 일본은 지속적으로 파병해 10,000여명의 병사와 9척의 병선을 인천에서 서울까지 배치했으며, 요충지에 행영(行營)과 포대를 구축해 전쟁 발발에 대비했다.
조선이 "청나라"와 그동안 맺었던 조약 등을 모두 파기한 후, "청나라"에서의 독립선언을 하라고 요구하였는데, 이는 조선을 독립국으로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조선에서의 "청나라의 종주권"을 박탈함으로써, 조선정부를 일본에 종속시키고자 한 것이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1차)"에서 패배를 거듭하던 "조선정부"는 1894.07.12일, "농민군"의 폐정개혁에 관한 요구를 받아들이고, 1894.06월 "전주화약"을 맺었고, "청ㆍ일" 양국군의 철병을 요구했다.
그러나 "일본"은 "조선"에 출병한 일본군을 조선에 남겨두기 위한 구실로, 조선의 "내정개혁안"을 만들었다. "조선정부"는 외국의 간섭 없이, 조선의 내정개혁을 실행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교정청"을 신설하여 자주적인 개혁을 추진하고자 했다. 이에 대해 "일본 정부"는 "경복궁 쿠데타"를 일으켰다.
2. 사건의 진행
1894.07.23일, "경복궁"을 점령한 뒤, "고종"을 인질로 삼아, "청나라"를 쫓아내고 강제로 "조선"을 개혁할 방안을 생각해 냈다. 명령을 받은 "오시마 요시마사"는 "여단 병력"의 군사를 이끌고, "경복궁"을 포위한 뒤, 새벽 4:20분 일제히 "경복궁"을 향해 돌격하여, "경복궁"을 완전히 점령하였다.
이후 "일본 공사 오토리 게이스케"는 "흥선대원군"과 입궁했는데, 그를 내세워, "경복궁 점령"을 정당화하기 위해서였다. "경복궁"이 무력화 되고, "고종"의 신변까지 확보한 "일본"은 더 이상 무서울 게 없었다. 일단 "흥선대원군"을 내세워, "군국기무처"를 설치한 후, "김홍집"을 포함한 "친일내각"을 새로 수립하였다.
1894.06월, "전주화약(동학농민운동 때, 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하고 청ㆍ일본군의 철수와 폐정 개혁을 조건으로 정부와 체결한 조약)"이 맺어지자, "조정"은 농민군들이 해산했으니, "청나라 군ㆍ일본군"에게 돌아갈 것을 요구하였다.
"청나라"는 "일본"에게 동반철수를 요구하였지만, "조선"에 영향력을 뻗칠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일본군"은 물러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러시아"도 "일본"에게 조선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했지만, "일본"은 이런저런 핑계를 해가며, "러시아"의 요구마저 묵살하고, 오히려 "조선"에 추가병력을 파병시킨다.
이후, 조선에 대한 "일본"의 내정간섭이 점점 심해지기 시작했고, 급기야 "일본 공사 오토리 게이스케"가 "고종"에게 10여 조항에 이르는 "내정개혁안"을 제시했는데, 이것은 "일본군" 파병과 내정간섭을 정당화하기 위한 구실에 불과했다.
이후 "청나라"에게 함께 "조선"의 내정 개혁을 실시하자고 제의했지만, "청나라"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러자 "일본"은 "청나라"를 조선에서 쫓아내지 않는 이상, "조선"을 자신들 입맛대로 고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치밀한 계획을 생각해낸다.
바로 "내정개혁이 시급하다"는 명분으로, "경복궁"을 점령한 뒤, "고종"을 인질로 삼아 "청나라"를 쫓아내고 강제로 "조선"을 개혁할 방안을 생각해 낸 것이다. 즉, "일본"은 "고종"의 입을 빌려, "청나라"를 조선 땅에서 내쫓으려고 한 것이다.
1894.07.23일, 일본군은 새벽 "용산"에 있던 1,000명의 병력을 "경복궁"으로 진군시켰다. 일본은 "그쪽에서 먼저 발포해서 이에 맞서 싸워, 일본 군대가 조선 군대를 물리치고 성문을 열고 진입했다"고 주장했다.
"서대문 밖 아현"에 주둔한 일본군 보병 21연대 제2대대는 "소좌 야마구치 게이조"의 지휘 아래 새벽 03:30분 행동을 개시했다. 2대대는 "서대문"을 거쳐, "경복궁 영추문(서쪽)"으로 향했다. 일본군은 "영추문"에 도착해, 공병소대를 통해서 다이너마이트로 대문을 파괴하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대문이 견고해 폭파는 실패했다. 다급해진 일본 군대는 도끼로 대문을 파괴하려 했지만 또다시 실패했다. 결국 일본 군대는 긴 장대를 벽 꼭대기에 걸치고 벽을 넘어갔다.
새벽 5시경, 안과 밖에서 톱으로 빗장을 절단하고, 도끼로 대문을 부수고 겨우 "영추문"을 열 수 있었다. "영추문" 진입 후, 제2대대 7중대는 함성을 지르며, 곧바로 "광화문"으로 나아가 수비하는 조선 병사를 쫓아내고 "광화문"을 열었다. 그 다음 "건춘문(동쪽 문)"으로 나아가 안에서 문을 열었다. "건춘문"을 통해 들어온 제2대대 6중대는 북쪽 문인 "춘생문ㆍ신무문" 등으로 진격했다.
"춘생문"으로 향하던 6중대가 대궐 북부 외곽에 이르자, 북쪽 소나무 숲에서 조선군이 사격을 개시했다. 북쪽에서 격렬한 총성이 벌어지자, 5중대도 즉시 "건춘문"에서 성벽 안쪽을 따라 북진했다. 5중대가 지원하자, 처음에 6중대에 맞서 저항하던 조선군은 북쪽 대궐 성벽을 넘어 "북한산" 방향으로 도피했다. 오전 7시 반경 양쪽의 총격이 멈췄다.
전투가 시작되자, "고종ㆍ명성황후"는 "함화당"에 있었다.(함화당 : 경복궁 옹화문 안ㆍ향원지 남쪽에 있는 침전 일곽ㆍ7칸 건물로 팔각지붕 형태ㆍ외국 사신을 접견하는 장소)
"고종ㆍ명성황후"가 숨어있는 "함화당"에 온 일본군은 "고종"에게 나오라고 소리쳤고, 나오지 않자, 칼까지 빼들고 협박하였으며, 결국 "고종"은 "함화당"의 문을 열었다. 이때 "조병직(외무독판)"은 "오토리 공사"와의 대화를 요청해, "옹화문" 안에서 회담을 진행했다. 그런데 "대대장 야마구치"는 "옹화문" 안에 있던 조선 병사의 무장을 해제시키고, 오전 9시경 "옹화문" 주위에 일본 초병을 배치해 경계하게 했다.
어쩔 수 없이, "고종"은 1894년 "함화당"에서 "총리대신ㆍ궁내부대신ㆍ각 아문 대신"을 접견하고, "갑오개혁"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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