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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 • 현대사)/사건

사건- 동학 이란? ( 천도교ㆍ東學 )

by 당대 제일 2022. 9.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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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東 學)"의 근본사상은 "인내천(人乃天)"으로, 이것은 "인본주의"를 강조하면서, 성실ㆍ신의로써 새롭고 밝은 세상을 만들자는 외침이었으며, 어지러웠던 나라를 구하고자 하는 사상이었다.  또 모든 사람은 평등함을 주장하였다.

 

1. 동학 (東學)

 교 리 : 인내천후천개벽시천주

: 동경대전 (최제우 저)용담유사(최제우 저)해월신사 법설의암성사 법설 

 깃 발 :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 "일본서양" 세력을 배척하고, ""를 내세운다.

•  "유불선(儒佛仙)"의 장점을 융합하여, 인간 중심을 내세운 종교나라와 시대의 모순을 고민하는 보국(保國) 종교          •  "민족자주인간존중만민평등"을 바탕으로 한 "민본주의" 사상

•  사상

   -  인내천 (人乃天) - 사람이 곧 하늘이다. 만민평등(자주적 평등의 민족 사상)

   -  시천주 (侍天主) - 절대자인 천주를 내재적으로 모신다.

   -  사람을 한울처럼 섬겨라나라를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라널리 민중을 구제하라

•  왕조 사회의 쇠망을 예언하고, "후천개벽(後天開闢, 조선 후기의 봉건제도가 무너지고 만민이 평등한 세상이 온다)의 새 시대가 도래 한다."는 이상향을 제시하였으며, 당시 서양과 일본의 침략에 대한 "척양왜(斥洋倭)"의 자주적 저항 의식을 서민들의 마음속에 불어 넣었다.

 

2. 동학의 역사

• 1860  :  최제우 (1824~1864ㆍ39세)가 상제(上帝)의 음성을 듣고, 상제로부터 병을 고칠 수 있는 "영부(靈符)"와 세상을 다스릴 수 있는 "조화(造化)"를 얻었다고 한다.  (최제우 → 해월 최시형 → 의암 손병희)

1861  :  1년 동안 깨달은 것을 정리하고, 체계화하여 "동학(東學)"을 창시했다. 당시 널리 전파되고 있던 "천주교""서학(西學)"이라고 부르는 것에 맞서, "동학"이라고 이름 붙인 것이다.

1863  : 영남호남충청도경기도까지 교세가 급속도로 확대되었고, 신도가 3,000여 명에 접소가 13개소에 다다랐다고 한다.

1864  :  "동학"의 교세가 크게 확장되자, 이를 두려워한 조정은 "최제우""경주 용담정"에서 포하여 "대구 감영"으로 압송한 후, "사도난정(사악한 가르침으로 세상을 어지럽힌다)" 목으로 "대구 장대(반월당 근처)"에서 효수하게 된다.

< "매천야록"을 쓴 "황현"의  "오하기문(梧下記聞)"에 따르면 >

"처음 동학에서는 그 무리를 "()"라고 불렀는데, "법포(法布)""서포(徐布, 西布)"로 나뉘었다.

"법포""최시형"을 받드는데, "법헌"이라는 "최시형의 호"에서 이름을 따왔다 "서포""서장옥"을 받드는데, "수원"사람으로 "최시형"과 함께 "교조 최제우"를 따라 배웠다 "최제우"가 죽자, 각기 자기 도당을 세워 서로 전수하면서, 이를 "포덕"이라 하였다 이들은 "동학"이 궐기할 때, "서포"가 먼저 일어나고, "법포"가 뒤에 일어나기로 약속하였기 때문에 "서포"는 또 "기포(起布)"라 하고 "법포""좌포(坐布)"라 불렀다 "전봉준"이 주동하여 일어날 적에는 모두 "서포"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3. 동학의 분열 (북접ㆍ남접) → 천도교ㆍ일진회

동학교조 "최제우"가 잡혀 죽은 후, 크게 "2개 파"로 갈라졌다하나는 "최시형" 계열이고, 다른 하나는 "서장옥" 계열이었지만, 두 파벌 모두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한다동학농민전쟁 실패 후, 다시 내분을 거듭하다가, "천도교일진회"로 분열되기에 이른다.

• 북접 (법포ㆍ좌포- 충북 보은ㆍ논산ㆍ충북 이북지방 파벌) : 최제우의 적통직계를 자처하는 집단

• 서포ㆍ호서 남접 (충북 청주ㆍ충남 지방 파벌) : "북접 최시형"에서 이탈한 집단

• 남접 (전라 남ㆍ북도 파벌) : 본래 "서포"에서 떨어져 나온 집단

 

① 북접 (법포ㆍ좌포- 충북 보은ㆍ논산ㆍ충북 이북지방 파벌) : 최제우의 적통직계를 자처하는 집단

"최시형" 계열 손병희(최시형의 2째 사위)손천민ㆍ1차 봉기 때, "북접"은 참가하지 않았다.

"남접""3차 봉기"를 준비하자, "북접""남접 농민군"을 공격하려고까지 했다. 그러다가 1894.10, "최시형"이 제자들의 간곡한 설득에 참여하게 되었다.

"충북 보은군논산군" 일대에 영향력을 미쳤다. "오지영 (당시 동학 주요지도자)"의 진술에 따르면, "최시형은 "호남 전봉준""호서 서장옥"은 나라의 역적이고, 사문난적이다" 규정하고, 동시에 "남접"의 농민군을 칠 예정이었다. 당시 "남접"의 지도자인 "김개남" 등은 조선 정부를 부정하고, 스스로 "개남국왕(開南國王)"이라 칭하였다 "최시형""전봉준 역시 조선 정부를 부정하고, 새 나라를 세우려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기도 했다

"최시형" 이하 "북접 지도부""포교의 자유"를 얻는 데에만 관심이 있었다.  1차 봉기 때에도 "북접"은 참가하지 않았는데, "남접"과 달리 "중농 이상"이 많아, 개혁에 관심이 없었다 "북접"의 목적은 "최제우"의 명예 회복과 동학의 포덕 자유 허용"이 목적이었다 "북접"은 최대한 "정치적 문제"에서 회피하려 했고, "흥선대원군"과 연결을 탐탁하지 않게 생각하였다.

 서포ㆍ호서 남접 (충북 청주ㆍ충남 지방 파벌) : "북접 최시형"에서 이탈한 집단

"서장옥"의 성을 따서, "서포"라 불렀다. "남접" "서포"의 한 갈래였다 "서장옥" 계열 (농민군 남접 3대 지도자) 전봉준김개남  (전봉준과 대립)손화중 (전봉준에 우호)

"북접"에서 "급진적"이라는 이유로 파면당한 이들 일부가 가담해 왔는데, "남접"의 근거지인 "라도" 보다는 "서포"가 활동하는 "충남 아산보령 지역"이 더 가까운 데 있었기 때문이었다.

• 서장옥 (徐璋玉ㆍ본명- 서인주 (徐仁周)ㆍ?~1900ㆍ승려ㆍ충북 청주ㆍ충남에 있던 서포 지도자)

"최시형"에게서 떨어져, "남접"을 창의 전봉준김개남손화중의 스승 / "불교 승려"였던 인연으로, 거병 시에 "산사의 승려들"의 동원이 가능하였다. 당시 도주였던 "최시형"과 동문이었으므로, 일반 "접주"였지만, "최시형"의 제자들에 비해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 전봉준 (全琫準ㆍ전영준(全永準)ㆍ1854~1895ㆍ향년 41세ㆍ전북 태인(泰仁)ㆍ몰락한 양반 출신)

"남접"의 지도자온건파 지도자조선의 농민운동가동학의 종교 지도자ㆍ별명- 녹두장군 (綠豆將軍), (150cm)가 작아 붙여진 별명이다. (녹두가 콩나물 보다 작음)

• 손화중 (孫華仲ㆍ1861~1895ㆍ전북 정읍ㆍ고창지역 동학농민운동 지도자)

• 김개남 (金開南ㆍ본명- 김도강(道康)ㆍ1853~1894ㆍ한학자ㆍ전북 정읍ㆍ남원 부대)

"개남(開南)"이란 이름은 혁명과정에서 "조선의 남쪽을 새로 열자"는 뜻으로 개명했다고 한다.ㆍ조선 정부를 부정하고, 스스로 "개남국왕(開南國王)"이라 칭하였다"전봉준"에게 호응하면서도, "흥선대원군"을 섭정으로 올리는 것과, "근왕주의적인 사상" 가졌던 점을 못 마땅히 여겨, "전봉준"과 수시로 충돌하였다.

승려의 참여 :  "서장옥"불교 승려"였던 인연으로, 거병 시에 "산사의 승려들"의 동원이 가능하였다.

"원평""남접 호남세력""서포"의 연합 집회에 "불갑사의 인원(仁原)운사의 우엽(愚葉)백양사의 수연(水演)"등 호남지방 승려들이 참가했고, 그밖에 "충남 산사"의 일부 승려들도 "서포"에 가담하였다.

남접 (전라 남ㆍ북도 파벌) : 본래 "서포"에서 떨어져 나온 집단

"남접" "전라도 지역"에서 일어났던 "동학 농민군"으로, 처음 거병한 집단이다 "남접"의 최고 지도자는 "손화중"이었으나, "손화중전봉준김개남" 각각을 최고 지도자로 하는 파벌로 나뉘어 있었다.

"남접""전라도 지역"에서 일어났던 "동학 농민군"으로, 처음 거병한 집단이다.

"남접"의 최고 지도자는 "손화중"이었으나, "손화중전봉준김개남"을 최고 지도자로 하는 파벌로 나뉘어 있었다.

본래 "남접"의 지도자는 "손화중" 등 소수였으나, "손화중""전봉준"에게 일부 지역을 통솔도록 "대장군" 직을 맡겼고, "전봉준" 일파와는 견해나 노선이 다른 "김개남 일파"는 독자적으로 움직인다. 전투 후반으로 갈수록 "남원의 김개남 부대""전봉준 일파"와는 달리 독자적 행동을 하였다. "전라남북도"에 영향을 미쳤으며, 지도자들은 현지 출신 "접주"보다는 "고창태인전주옥구" "전라북도 북부서부" 출신들이 많았고, "경북 성주군칠곡군경남 하동군" 지역도 "남접"의 세력권이었다.

< 전봉준 공초에서 : 김개남은 내가 왕사(王事)에 협력하자고 권고했지만 끝내 들어주지 않았다. 그러하기에 처음에는 상의한 바가 있었지만, 끝에는 결단코 상관하지 않았다.>

3. 남접의 분열 ( "남접" 내에서도 이견이 나뉜다)

"대원군"의 식객 출신이었던 "전봉준"을 비롯하여 "폐정개혁외척세도가 퇴출대원군 옹립"을 목적으로 했던 "남접 온건파""조선왕조" 자체를 부정한 "김개남 일파(남접 강경파)"는 갈등하게 된다.

"조선왕조" 체제는 인정하고, 외척 세력과 부패한 탐관오리들만 퇴치할 것을 주장하던 "전봉준 일파" "조선왕조" 자체를 부정하는 "김개남 일파"와 갈등하였고, 이는 "동학농민군 내부의 파벌 갈등, 알력"으로 발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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