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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 현대사)/사건

사건- 1894.07.25 : 청ㆍ일 전쟁 (→ 시모노세키 조약→ 신해혁명)

by 당대 제일 2022. 9.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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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 전쟁 (淸日戰爭)"은 "청나라ㆍ일본 제국"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벌인 전쟁으로, 동아시아에 대한 주도권은 "중국"으로부터 "일본"으로 옮겨졌으며, "청나라" 조정과 "중국" 중심의 "중화사상"에 치명타를 주었으며, 이러한 경향이 이후 "신해혁명"으로 이어졌다.

 

1. 청일전쟁 (淸日戰爭1894.07.25~1895.04.17)시모노세키 조약신해혁명

중일갑오전쟁 (中日甲午戰爭 중국)일청전쟁 (日淸戰爭일본)1차 중일 전쟁 (First Sino- Japanese War서양)이라고도 부른다.

"청나라"의 퇴보무력함을 여실히 드러내고, "양무운동"의 한계를 보여준 전쟁이었으며, 일본의 "메이지 유신" 이후의 근대화가 "중국의 양무운동"에 비해, 성공적이었음을 증명하였다동아시아에 대한 주도권은 "중국"으로부터 "일본"으로 옮겨졌으며, "청나라" 조정과 "중국" 중심의 "화사상"에 치명타를 주었으며, 이러한 경향이 이후 "신해혁명"으로 이어졌다.

일 시 : 1894.07.25~ 1895.04.17 (첫 전투 : 07.25선전포고 : 08.01)

장 소 : 만주한반도타이완황해 일대

결 과 : 일본제국의 승리 시모노세키 조약체결 (청나라의 요청일본 주도1895.04.17)  청은 조선의 "완전무결한 독립"을 인정한다  종래에 구미 각국이 갖고 있던 통상 특권을 일본에게도 부여한다  청은 배상금 2억 량(일본 화폐 3억 엔)을 지불한다  청은 요동 반도(랴오둥 반도)만주타이완 섬(대만)펑후 제도(팽호열도타이완 해협 상의 군도, 90)"를 일본에 할양한다.: 청일전쟁으로 "대만"을 병합 (1895~ 1945)

영 향 : 일본의 주도하에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 "청나라"는 조선이 완전한 자주독립국임을 확조선에 있어 "일본"의 국제적 위치를 확립시켜 주었다 일본의 주도하에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만주타이완 섬펑후 제도(타이완 해협 상의 군도, 90)" 할양하여, "대만"을 병합하여, 1895~ 1945년 까지 지배하였다 그 결과, "청나라"는 무력함이 드러나, 세계열강에 의한 "청나라 분할" 경쟁이 더욱 노골화되었고, 본은 더욱 적극적으로 "조선 침략"의 야욕을 표시하며, 필연적으로 "러시아" 세력과 충돌을 일으키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 "요동반도""러시아프랑스독일""삼국 간섭"으로 반환되었다.

교 전 : 청나라 (광서제) : 일본제국 (메이지 천황)   병 력 : 일 본 : 24만 명 / 청나라 : 63만 명 (북양군벌북양함대)   피 해 : 청나라 : 전사 (35,000 )일본 : 전사( 1,132 )

청일전쟁

2. "일 전쟁" 종료 후, 조선의 상황

"명성황후""러시아"의 힘을 빌려, "일본 세력"을 몰아내고자 하였다.

이에 "일본"은 큰 위협을 느꼈고, 1895.10.08일에 "일본공사 미우라"가 지휘하는 일본군의 2개 대대가 "명성황후"의 침소인 "건청궁"에 난입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고종"에게 "왕비 폐출 조서"서명을 강요하며 위협하였으나, "고종"이 거부하자, "세자"에게 칼을 휘두르는 등의 만행을 저질렀다일본은 "조선"을 압박하여 "을미개혁"을 실행하였으나, 민중들의 반발로 무산되었다.

1896.02, "고종""러시아 공사관"으로 이동한 "아관파천"을 감행하여, "조선" 내에서 "일본 세력"은 감소하였고, 이듬해 "고종""덕수궁"으로 환궁하여, "대한제국"을 선포하기에 이른다또한,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의 사상가인 "후쿠자와 유키치"는 출정한 일본군 병사들을 상대로, "이대로 곧장 중국으로 쳐들어가, 3(성경길림흑룡강)을 점령하여 일본의 수중에 넣고, 북경까지 진공하여, 보물과 고서적 같은 귀한 재보들을 약탈하라"는 내용을 담은 글을 연일 신문에 발표하기도 했다.

3. 발생 과정 (1894)

06.01 : "동학농민군"이 한양으로 진격 조선 정부는 "청나라 조정"에 반란군 진압을 요청

06.06 : "청나라""톈진조약"에 따라, "일본"에 파병을 통보 /  2,460여 명의 "청나라 군" 당일 보내졌다.

06.08 : "조선청나라"는 항의하였으나, 4,500명의 "일본 군""제물포"에 상륙하였다.

06.11 : "동학농민운동(2차 봉기)" 종료

06.13 : "무쓰 무네미쓰(일 외무대신)" 이 기회를 "청나라"의 영향력을 제거할 기회로 판단  조선에서의 일본군의 지휘를 담당한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 공사"에게 가능하면 오랫동안 조선에 남을 것을 전달

06.22 : "일본"으로부터 추가 병력이 조선에 도착

07.03 : "오토리 공사"가 조선의 정치 체제를 바꿀 것을 제안 보수파의 반대로 무산

07.07 : "청나라 주재 영국 대사"에 의해, "청나라일본" 간의 중재가 있었으나 결렬

07.19 : "일본"의 연합함대(해군의 거의 모든 선박으로 구성)가 전쟁에 대비

07.23 : "일본"이 한양에 진입, "경복궁"을 점령하고 새로운 "친일 내각" 구성 새 내각은 "청나라"와의 모든 조약을 파기하고, "일본군"에게 "청나라 북양군"을 조선에서 몰아내도록 허가

4. 배 경

1603, 일본은 "에도시대"를 열고 쇼군(將軍)의 통치가 200년간 계속되었으나, 미국의 간섭으로 1854 쇄국정책이 끝나고 시장을 개방하게 되었다1868"메이지 유신""막부시대의 몰락"에 이은 수년간, 일본인들은 일본이 봉건의 상대적인 후진 사회에서 근대 산업 국가로 변모하는 것을 목격하였다일본은 각 국에 대표단과 학생들을 파견하여, 서양의 예술과 과학을 배우고 모방하려 하였다.

또 일본은 "사할린 섬쿠릴 열도둥베이"에 급속히 세력을 확대하고 있던 "러시아 제국"을 경계하여, 이를 막기 위해 "조선 침략"의 야욕을 드러내었다당시의 "조선"은 쇄국상태로, 주변의 사회 정세에 무지하여, 일본에서 일어난 개혁의 의도에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정치의 실권을 취하고 있던 "흥선대원군"은 전통적으로 유지되어오던 청나라와의 외교관계를 제외한 모든 서양일본과의 통상수교를 거부하였고, 결국 통상수교는 전혀 진행되지 않았다.

한편, "청나라""아편전쟁태평천국운동" 등의 소요를 거치며 크게 쇠퇴하여 있었고, 이를 타개하 위하여, "양무운동"을 전개하였고, 그리하여 서양의 신식 문물과 무기를 받아들였다그러나 "양무운동"은 보수파의 반발과 서양의 겉모습을 모방하는데 그쳐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5. 조선에서의 충돌

일본은 신흥 "제국주의국가", 관심을 조선에 돌렸는데, 이는 일본에게 이익과 안전을 위해서 매우 중요한 일로, 먼저 조선을 합병식민지화하여 그 이권을 차지해야 한다고 보았다한반도에 다른 나라의 군대를 주둔시키는 것은 일본의 안전에 해가 되며, 따라서 일본은 수백 년간의 청나라의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해제하여, 조선을 무방비 상태로 만들고자 하였다또한, 일본은 조선의 석탄과 철광이 일본의 확장 일로에 있는 산업 기반에 도움이 될 것임을 인식하였다.

조선은 그 시대에 청나라에 조공을 바쳐왔으며, 보수파는 청나라와의 관계를 유지하기를 원했고, 개화당들은 일본과 서방 국가들과의 연대를 확립하기를 원했다아편 전쟁과 청불 전쟁의 두 차례의 전쟁을 치른 후, 청나라는 약해졌고 서양 열국의 간섭과 잠식에 저항할 수 없었다.일본은 이를 조선에서 청나라 대신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기회로 여겼다.

조선의 쇄국주의자와 일본이 관련된 몇 가지 사건과 대립이 있은 후, 조선은 일본의 강요로 1876.02.27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여 일본에 문호를 개방하고, 대외적으로 청나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해야 했다수구파는 1882년 임오군란으로 청나라에서 파견한 위안스카이의 도움으로 재집권하게 되는데, 과정에서 개화파뿐만 아니라, 일본 영사관이 불타고 영사관 위병과 민간인 중에 사상자가 나왔다.

이로부터 청나라와 일본 군대 사이에 전투가 발생하였고, 결국 1885"톈진 조약"이 체결되었다

조선으로부터 군대를 철수시킨다    조선의 군대를 훈련시키기 위한 훈련교관을 보내지 않는다   변란 등의 중요 사건으로 어느 한 쪽이 파병할 경우, 상대방에 통보해야 한다.

하지만 이후에도 청나라는 조선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시도를 계속하였다그 사이의 시기인 1884, 친일 성향의 "급진 개화파"가 일본의 힘을 빌려, 유혈충돌을 통해 몰아내는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3일 만에 실패로 돌아갔다.

6. 전쟁 초기

1894, "갑신정변"을 주도한 친일 개혁세력인 "김옥균""홍종우"에게 상하이에서 암살되었다일본은 유해를 일본으로 가져가려고 했으나, 청나라가 이를 막고 청나라의 전함에 실어 조선으로 보냈고, 선에서 그는 다시 "능지처참"되었다일본 정부는 이를 직접적인 "모욕"으로 받아들였다

김옥균

이러한 상황은 1894"동학농민운동"의 봉기에 조선이 "청나라"에 지원병을 요청하였을 때에 더욱 심해졌다"청나라""톈진 조약"에 따라, 파병 사실을 "일본"에 알렸고, "원세개"를 특명전권대사로 임명하여 2,800명의 병력을 보냈다.

일본은 내부의 정치적인 문제의 해결을 위해, 원정군인 "오시마" 휘하의 8,000 병력을 조선으로 보냈다이들은 조선의 항의에도 1894.06.09일 이후 인천에 상륙, 07.23일 고종 임금이 거하는 "경복궁"을 점령하였고, "흥선대원군"을 내세워 "군국기무처"를 설치하고, 조선의 내각을 "김홍집박정양민영달" 등의 친일 인사로 교체하여 "갑오경장"을 실시하였다.일본은 더 많은 병력을 조선에 파견하였다그러나 일본과의 국교가 단절된 "청나라"는 조선의 새 정부를 인정하지 않았고, 양국 간의 분쟁이 시작되었다.

원세개위안스카이 (袁世凱1859~ 1916향년 56)

중국 청나라 말기의 무관(武官)중화제국 제1대 황제북양군(청나라 정규군)창설군인정치가ㆍ배신의 귀재중화민국 제2대 대총통(1- 쑨원3- 리위안훙(려원홍1~2 부총통)ㆍ"청 말기"에서 "신해혁명(1911)" 직후까지, 중국 정치사에서 중요한 인물이다.

7. 진행 과정

1894.07.25 : 풍도 해전

1894.07, 조선 내의 청나라 군대는 약 3,000~3,500명 정도였으며, "아산만"을 통해서만 병력을 보충할 수 있었다. 일본의 목표는 우선 "아산"의 청국군을 봉쇄하고, 일본 육군으로 포위하는 것이었다

07.25, "아산" 근해를 순찰하던 순양함 "요시노나니와아키츠시마"로 구성된 "일본 제1유격대""청나라 순양함 제원호군함 광을호" 마주쳤다이들은 "아산"으로 물자를 나르는 또 다른 청나라의 군함 "조강호"와 만나기 위해 아산을 떠나 있었다1시간의 전투 끝에, "광을호"는 화약고가 폭발하여 암초에 좌초되고, "제원호"는 탈출하였다.

청나라에는 "런던의 인도차이나" 증기선박회사 소유의 2,134톤급 영국 상선 "가오슝호(高陞)"가 있었는데, 청나라가 군대를 조선으로 수송하기 위해 대여한 것으로, "골즈워디(Galsworthy) 선장"64명의 승무원으로 운영되고 있었다1,200명의 군사와 보급품과 장비가 적재되어 있었으며, "조강호"와 함께 조선으로 향하고 있었다청나라 고문인 "하네켄 소령(독일 포병장교)"도 승선하고 있었고, 07.25일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토고 헤이하치로 선장"이 지휘한 "순양함 나니와호"2배를 가로막았다군함은 결국 포획되었고, 일본은 "가오슝호""나니와호"를 따를 것과 승선한 유럽인들은 "나니와호" 옮겨 탈 것을 요구하였다.4시간의 협상 끝에, "토고 선장"은 사격할 것을 명하였다영국 상선 "가오슝호(高陞)"의 침몰은 일본과 영국간의 외교적 분쟁을 일으켰으나, 폭동에 대한 국제법으로 처리되었다.

1894.07.28 : 평양 전투

친일 내각으로부터 "청나라 군대"를 몰아낼 권한을 부여받은 "오오시마 요시마사"는 약 4,000명의 일본 여단을 이끌고, "한양"에서 아산만까지 이동하여, 아산과 성환(, 천안시 서북구 성환읍)에 주둔한 3,500명의 청나라 군대와 대치하였다.

07.28 : 양측 군대는 아산 외곽에서 다음날 아침까지 전투를 벌였다. 청나라 군대는 점차로 병력을 잃어, 평양으로 후퇴하였다. 청나라 군대의 사상자는 500명에 달하였으나, 일본군 측은 82명에 불과했다.

08.01 : 공식적으로 청나라와 일본간에 전쟁이 선포되었다.

08.04 : 이전에 조선에 남은 청나라의 병력들은 평양으로 철수하였고, 청나라로부터 파견된 병력과 합류하였다. 13,000~ 15,000명의 수비군은 일본군을 저지할 것을 기대하면서 대대적으로 전투에 대비하였다.

09.15 : 일본군은 여러 경로로 평양에 모여들었다. 일본군은 평양을 습격하여 청나라 군대를 항복시켰다. 어쨌든, 폭우와 어둠을 이용하여 잔존 병력은 평양을 빠져나와 의주로 향했다. 청나라군은 사망자 2,000명에 부상자가 4,000명에 달했으며, 일본군은 5~ 6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09.16 : 아침에 일본군은 평양에 입성하였다. 평양 전투 이후로 일본은 조선의 내정을 간섭하였고, 조선의 물자와 노동력이 일본군에 제공되었다. 이로부터 농민 봉기가 발생하였다.

1894.09.17 : 황해 해전 (청일 전쟁에서 가장 규모가 큰 해전)

1894.09.17, "청나라의 북양함대" 일본의 함대와 압록강 하구에서 맞서 싸웠으며, 청나라측은 화력이 우위에 있었음에도 선원들의 경험과 기동력의 열세로 참가한 10대의 군함 중 5척이 침몰, 3척이 파손되었으며, 850명이 사망하고, 500명이 부상하였다. 반면, 일본군은 4척 파손에 사망자 90, 부상은 200명이었다이로써 일본군은 제해권을 확보했으며, 4,500명의 청나라 군대가 압록강 부근에 상륙하였다"북양함대""여순항"으로 피신하였다.

1894.10.24 : 압록강 전투

평양에서의 격퇴로 청나라 군대는 조선의 북부를 떠나, 압록강가의 요새에 방어태세를 갖추었다일본군은 병력을 보충한 후, 10.10일 빠른 속도로 만주로 진격했다10.24일 밤, 일본군은 몰래 압록강을 건너 부교를 띄웠다10.25일 오후, 단둥 동쪽 호산의 주둔기지를 공격하였다오후 10:30, 청나라 군대는 방어 위치를 버리고, 다음날까지 단둥으로 후퇴하였다.

야마가타 장군이 지휘하는 제1군은 단둥을 향해 북쪽으로 진격하여 사망 4, 부상 14명의 희생만으로 중국 영토에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다"가쓰라 다로"3사단은 서쪽으로 도주하는 청국군을 쫓아 요동 반도의 도시들을 점령하였다"오오야마 이와오"가 이끄는 일본 육군 2사단은 요동반도 남쪽 해안에 상륙하여 도시들을 점령하였고, 여순항은 일본군에 포위되었다.

1894.11.21 : 여순 함락 (여순 대학살 사건)

11.21일까지, 일본군은 "여순항"을 점령하였고, 12.10일까지, "요동의 건양"이 일본군 1사단에 점령되었다일본군은 여순에 거주했던 수천 또는 2만 명의 시민들을 학살하였는데, 이를 "여순 대학살"이라 한다.

1894.11 : 우금치 전투 (동학 농민군 전봉준과의 전투)

동학 농민군은 "전봉준의 남접손병희의 북접"이 연합하여, 수만의 병력이 되었다1894.10, 관군이 지키던 "공주 감영"을 점령하기도 하였으나 곧 조선 관군과 일본군에 패하였고, 11월의 "우금치 전투"에서는 1만여 명 중 500명 만 살아남는 등 크게 패하였다12월 말에는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 지도자들이 체포되었다.

1895.02.12 : 웨이하이 요새 함락

"북양함대""여순항"을 거쳐 "웨이하이 요새"로 피신하였으나, 일본 육군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웨이하이의 전투"는 육군과 해군이 동원되어, 1895.01.20~ 02.12일까지 23일간 진행되었고, 일본군에게 함락되었다일본군은 남쪽과 북쪽으로 진격하여, 1895.03월에는 "북경"이 바라보이는 곳에 진지를 구축하였다.

1895.03 : 동중국해 점령

1895.03.26, 일본군은 "타이완" 부근의 "펑후 제도(澎湖諸島)"를 희생자 없이 점령하였고, 03.29 "가바야마 스케노리" 지휘 하에 "타이완"에 상륙, 점령하였다. 이에 따라 "동중국해"는 사실상 일본의 영역처럼 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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