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모노세키 조약"은 "청일전쟁 (1894.07.25)"에서 승리한 "일본제국"이 "청나라"와 맺은 청ㆍ일간 강화조약이며, 이 조약을 통해 "일본"은 식민지를 소유한 "제국주의 국가"가 되고자 하였다.
1. 시모노세키 조약 (일청강화조약ㆍ하관조약 (下關条約)ㆍ마관조약 (馬關條約))
1895.03.20일부터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 시"에서 열린 "청일전쟁의 강화회의"로 체결된 조약으로, 조약은 5개 항목으로 "청나라"의 조선에 대한 간섭을 물리치고, "일본"이 조선과 만주까지 지배력을 뻗칠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몇 년 뒤, 조선에서는 "청나라"가 물러나고 "명성황후"의 요청에 지원받는 "러시아"가 새로 들어와, 일본의 "조선 지배욕"을 방해하게 된다.
• 일 시 : 1895.04.17 • 체 결 : 이토 히로부미 (일본제국)ㆍ이홍장 (청나라)
• 청은 조선이 완결 무결한 자주 독립국임을 확인하며, 일본과 대등한 국가임을 인정한다.
• 청나라는 랴오둥 반도ㆍ타이완 섬ㆍ펑후 제도 등 부속 여러 섬의 주권 및 그 지방에 있는 성루ㆍ 병기제조소 등을 영원히 일본 제국에 할양한다.
• 청국은 일본국에 배상금 2억 냥을 지불한다. 조약 발효 시점부터 7년 이내에 총 8회에 걸쳐 배상금을 분납하고, 기일을 지키지 못하면, 5%의 연체 이자를 지급한다. (당시 일본 돈으로 환산하여 3억 6천만 엔이었고, 이것은 청나라의 3년 치 예산ㆍ일본의 4년 반 치 예산에 해당하는 엄청난 액수)
• 청국의 사스ㆍ충칭ㆍ쑤저우ㆍ항저우의 개항과 일본 선박의 장강ㆍ부속 하천의 자유통항 용인, 일본인의 거주ㆍ영업ㆍ무역의 자유를 승인한다.
※ 이토 히로부미 (1841~ 1909.10.26ㆍ67세ㆍ이등박문(伊藤博文)ㆍ본명- 하야시 도시스케)
조선 병탄 작업 완성자ㆍ에도시대 후기 무사 (조슈번사)ㆍ일본제국 헌법학자ㆍ일본제국의 초대 내각 총리대신(1대ㆍ5대ㆍ7대ㆍ10대)ㆍ조선통감부의 초대통감 역임ㆍ메이지 유신이후, 정부의 요직을 거쳤으며, 일본제국 "헌법" 기초를 마련ㆍ추밀원 의장(1대ㆍ3대ㆍ8대ㆍ10대)ㆍ귀족원 의장ㆍ작위 : 백작 (사후 공작으로 추증)
※ 이홍장 ( 1823~1901ㆍ77세)
후에 권력은 "원세개 (위안 스카이ㆍ1859~1916ㆍ56세)"가 세습ㆍ부국강병을 위한 양무운동 주도ㆍ여러 한족계 민병단(회군)을 이끌고 있던 중, "태평천국의 난"에 스승인 "증국번"과 함께 난을 평정ㆍ조정에 등용 → 증국번 사후, 청나라의 한족계 대신이 되어, 북양대신의 자리에 오른다 → "북양대신"은 본래 남양대신과 함께 청나라의 군권을 쥐고 있는 자리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조정 유일의 실력자 위치 → "북양대신"이 되면서 그의 군은 "북양군"이라 불리게 된다.
2. 3국 간섭
"청일 전쟁(1894.07~ 1895.04)"에서 승리한 "일본 제국"이 "요동 반도"를 점령하자, "러시아 제국ㆍ독일 제국ㆍ프랑스 공화국"이 "일본 제국"의 철수를 요구하여, 관철한 사건
• 일 시 : 1895.04.23
• 내 용 : 요동 반도 철수 요구 (러시아 제국ㆍ독일 제국ㆍ프랑스 공화국)
• 결 과 : 요동 반도 반환ㆍ대신 추가 배상금 요구 (3천만 냥 (약 4,405만 엔) )
"청일 전쟁"에 승리한 "일본"이 요구한 대로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된 뒤, 6일이 지난 1895.04.23일 일본에 주재하고 있던 "러시아 제국ㆍ독일 제국ㆍ프랑스 공화국"의 대사들은 "일본 외무차관 다다스"를 방문하여, "요동의 반환"을 요구하였다.
"일본"은 혼자서 3국과 대결할 수 없었으므로, 요구를 받아들여, 05.05일 "일본"은 "3천만 냥(약 4,405만 엔)" 추가 배상금을 조건으로, "요동 반도"를 반환하는 수정 조약을 체결하였다. 05.05일, "일본 외무성"은 "요동반도 환부회답서"를 "일본 주재 삼국공사"에게 전달했다. 일본은 "요동반도"를 포기하는 대신, "청국"으로부터 배상금 3천만 량(약 4,405만 엔)을 추가로 받기로 했다.
3. 러시아의 입장
"러시아"는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주도권을 쥐기 시작한 때부터, "동아시아" 지역에서 일본이 팽창정책을 추구하는 것을 경계하였다. "러시아 제국"이 특히 경계한 것은 "일본의 팽창주의"로 인해, 한반도와 남만주가 일본의 식민지가 될 경우, "청ㆍ일본제국"이 연합하여, "러시아"에 대항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1895.04.11일, "러시아"는 "청일전쟁"의 결과에 대한 특별 각료 회의를 열고,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러시아는 북중국의 현상을 이전의 상황으로 회복시키는 데 노력한다. 일본에게 남만주를 병합할 의도를 단념하도록 제의한다. 일본이 의도를 단념하지 않을 경우 러시아는 자국의 이해에 따라 자유롭게 행동할 것이라는 점을 주지시킨다."
4. 러시아의 프랑스ㆍ독일ㆍ영국에 공동행동 요청
"러시아"는 각료회의의 결과에 따라, "프랑스ㆍ독일ㆍ영국"에 공동 행동을 요청하였다. "러시아"와 동맹 관계에 있던 "프랑스"는 즉시 "러시아"를 지지하였고, "러-프 동맹"의 약화를 원하던 "독일"도 "러시아"의 입장을 지지하였다. 한편, "영국"은 "러시아"의 남진을 막는데, 일본이 유용할 것이란 점과 청일전쟁 결과, "청나라"가 개방한 시장에 개입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간섭에 반대하였다.
5. 결 과
"3국 간섭"의 대가로 "러시아"는 "만주ㆍ동청 철도부설권"을 따내고, 1898년 "여순ㆍ대련의 조차권"을 얻었다. "일본"은 아시아에서 차지하던 지위를 위협받게 되었고, 그만큼 "조선"에 대한 영향력도 줄어들게 되었다. "조선"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은 감소되었고, "러시아"의 영향력이 증대되었다.
이를 틈타, "고종"은 "아관파천"을 통해, "러시아"의 힘을 빌려서, 일본을 떨쳐내고자 하였다.
한때 친일로 기울던 "민씨 일파"도 태도를 바꾸어, "러시아"에 접근하였다.일본의 내정 간섭에 저항하고, 1894.07월에 "박영효"를 비롯한 많은 친일파를 몰아냈다. "박영효" 등은 다시 일본으로 망명했고, "이노우에"는 사태에 책임을 지고 일본으로 소환되었다. 한편 일본 내에서는 열강의 간섭으로 인해, 자신들의 전리품을 빼앗겼다는 여론이 팽배하였다.
당시 "잡지 일본인"을 발행하던 "미야케 세츠레이"는 다음과 같이 토로하였다. "결과적으로 모든 것은 국력의 문제로 귀착된다. 국력이 다른 나라의 간섭을 물리칠 수 있다면, 어떠한 굴종도 감수할 필요가 없다. 이제부터 우리는 와신상담하여 하루 속히 국력을 배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본"의 이와 같은 인식은 결국 "군국주의의 실행"으로 이어졌다. 군비 확장에 박차를 가한 일본은 1904년 "러ㆍ일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3국 간섭"으로 인해 늦추어졌던 "제국주의 정책"을 다시 획책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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