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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 • 현대사)/사건

사건- 1894.02 : 동학 농민 운동- 2 : 주요 전투ㆍ진행 내용

by 당대 제일 2022. 9.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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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금치 전투 (牛禁峙)"에서 "동학 농민군"은 결정적인 타격을 입게 되는데,  전투에 동원된 회선포ㆍ기관포ㆍ야포는 모두 관군이 가져온 것이지만, 전투 지휘를 주도한 지휘관은 "일본 육군 후비 보병" 중대와 동행한 "19대대장 미나미 고시로 육군 보병 소좌"였다.

 

1. 주요 전투

황토현 전투 (1894.05.11): 관군을 무찌르고 첫 승리를 거둔 전투진주로 진격

장 소 : 전북 정읍 황토현 일대

결 과 : 동학 농민군의 대승리

지휘관 : 농민군- 전봉준손화중김개남최경선

병 력 : 농민군- 4,300명 / 진압군- 1,300- 감영군(700)향군(600)

황룡천 전투 (1894.05.27) : 동학 농민군의 승리

전주성 전투 (1894.05.31)

이인 전투

금구태인 전투

전투

우금치(개금티) 전투 (1894.11.20.~ 12.10): 충남 공주시 금학동~ 주미동 사이에 있는 고개

 대전투로 농민군의 결정적 패배농민군 해산진압 원인 ( 농민군은 "동학농민전쟁"의 가장 큰 전투이자, 승패의 분수령이 된 결전의 전투에서 패배)

•  장소   공주 우금치 일대        •  결 과   :   동학 농민군의 대패동학농민운동의 진압

•  지휘   농민군- 전봉준(남접)손병희(북접)

 농민군  :   20,000명 : 남접(10,000)북접(10,000)

  진압군  :     5,200명 : 조선군(3,200)일본 제국군(2,000)- 미국제 기관총 보유

"조선 조정""농민군"이 밀고 들어오자, "일본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하였다이에 "전봉준김개남손화중손병희" 등이 다시 "2차 봉기"를 일으켰다1894.06, "일본""경복궁 쿠데타"를 일으켜, "친일 정권"을 세우고, "이노우에 가오루"를 새 공사로 임명했으며, "전봉준" 9월에 농민군 4,000명을 이끌고, "삼례"에서 "일본군"을 몰아낸 뒤, "남접""북접"의 연합을 시작했다.

"전봉준""공주수원서울 북상로"를 선택하고, "남원"에 주둔한 "김개남"과 합류할 것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이에 10월에 "김개남" 대신, "북접 손병희""논산"에서 합류하여, 20,000명의 군세가 되었다20,000(남접-1북접-1)의 농민군을 이끌고, "공주"를 총공격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조선 조정일본군""신정희허진이규태이두황" 등에게 3,200명의 "관군""미나미"가 이끄는 2,000명의 "일본군"을 이끌고 맞섰다"농민군""조일 연합군"11.20~23일까지 "공주 이인포효" 등지에서 "1차 접전"을 벌였고, "성하영윤성영"의 공격으로 "농민군"은 크게 패배해, 후퇴했다.

"전봉준""김개남"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김개남""청주 전투"에서 크게 패한 뒤, 도움을 주지 않았다"농민군""곰티검상 마을곰내하고개주미산" 방면을 공격했다"금강" 건너 "유구" 쪽에서 맞섰으나, "홍성 농민군""세성산 전투"에서 패배해, 후퇴했다"농민군"은 다시 진열을 정비하고, 12.05"남접북접 연합군" 20,000명이 "공주 우금치"를 향해 돌진하면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농민군""무너미 고개""이인" 쪽에서 맞서, "관군"을 밀어 붙치고, "조일연합군""모리오 마사이치 대위"가 지휘하는 "일본군""우금치 옆 벱세울 앞산"에 주둔케하고, "우금치금학동곰티효포 봉수대""조선 관군"을 배치했다"농민군"은 이곳을 집중 공격했으나, 고갯마루 150M 앞까지 "조일연합군"의 우세한 무기의 포탄과 총탄이 비 오듯 쏟아져 내려, 더 이상 진격하지 못했다.

"조선관군 이기동조병완""농민군 좌측우측"을 공격해, "농민군"은 큰 사상자를 내고, "공주" 동남쪽 봉우리로 후퇴했다"농민군" "봉황산"으로 진격해, "공주 감영"을 공격하려 했으나, "하고개금학골 골짜기"에서 "관군"의 공격으로 실패했으며, 이로써 "농민군"4일 간의 "2차 접전"에서도 패배했고, "전봉준""군인이서상인"들에게 지지를 크게 얻지 못했다.

"조일연합군"12.10일에 "노성"주둔 "농민군"을 공격해, "농민군""대촌 뒷산소토산"으로 계속 후퇴해 사기까지 떨어졌다음력 12, "전봉준"은 체포되고, 이후 "조일연합군""호남"일대의 "농민군 대 학살전"이 일어났다.

"우금치 전투 (牛禁峙)동학농민군"의 패배 요인

보유 무기의 심각한 열세 연합전선 실패로 인한 병력 분산  훈련받지 못한 농민군과 지휘 부족 등

김개남

2. 진행 (요약)

발생 배경

1882년 이후, 각종 사회 혼란과 정부의 부패로 민심이 동요하던 가운데, "고부군수 조병갑"의 횡포가 도화선이 되어 "농민운동"을 야기하였다1882, 구식군대 폐지와 관련하여, 5군영에 소속되었던 군인들에 의해 "임오군란"이 일어났으며, 이어 1884년에는 "개화파""갑신정변"이 일어난다.

"임오군란" , "흥선대원군"이 반란세력을 등에 업고 궁중에 들어와 대권을 장악했다가, "청군" 의해 납치되었고, 1884"갑신정변" , 궁중을 습격한 "개화세력"이 정권을 장악하였으나, "청군" 의해 밀려남으로써, 왕권은 크게 실추되었다뿐만 아니라, "청나라일본"이 변란을 계기로 "조선"에 진주해, 세력 다툼을 벌여 조선의 자주권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게 되었다.(톈진 조약을 파기시킬 만큼 강력"민씨 정권"에서 "청군"을 끌어들여 "개화파"를 진압하자, "일본"은 일본대로 "청나라가 조선을 무력으로 점령한다."는 이유를 내세워, "조선"에 병력을 대대적으로 파견하였다.

"임오군란갑신정변" 이후 "고종민씨 정권""친청정책"을 펼치면서 새로운 국면을 모색했지만 급격하게 변화하는 동북아시아 정세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해, 혼란은 점차 가중화되었고, 전국 곳곳에서 "반봉건반외세"의 기치를 내건 민란이 끊임없이 이어졌다급기야 1894.03"동학혁명"으로 폭발되어, "관군""농민" 사이의 전면전으로 발전하였다.

고부군수 조병갑 (탐관오리)의 탐학

1892, "전봉준""접주"로 있던 "전라도 고부군""조병갑"이란 자가 "군수"로 영전하여 왔다"조병갑"은 농민들에게 과중한 세금을 부과하는 것은 물론, 무고한 사람의 재물을 빼앗아 갈취하고 이에 대항하는 사람들에게는 가차 없이 형벌을 가하였다.

"전라도 고부군"은 본디 비옥한 땅으로 저수지가 하나만 있으면 충분했다그러나 "조병갑"은 농민들에게 억지로 저수지를 짓게 한 다음, 물 값을 받았고, "음란한 죄화목하지 못한 죄" 등 여러 죄명을 씌어 벌금을 받아냈다또한 그는 아버지의 "선정비신도비"를 세우는데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세금액수를 인상하여 1,000냥의 돈을 거둬들이기도 했고, 또 주민들에게 갖가지 죄를 뒤집어 씌워 20,000냥이라는 엄청난 돈을 벌금으로 긁어냈다게다가 "대동미"를 대신하여 돈을 거두고, "만석보"라는 저수지를 만든답시고, 700석을 착복하기도 했다

한편 "조병갑""중앙 조정"에 뇌물을 바쳤다. 그 뇌물은 의례적인 것으로, 뇌물을 바치지 못하는 "군수현감부사관찰사"는 얼마 못가서 파직되거나, 정부에 막대한 돈을 헌납하는 자를 "군수현감부사관찰사"로 임명하면 자리를 내놓아야 했기 때문이었다조병갑의 학정이 심해지고, 세금이 인상되자, 주민들의 불만은 가속화되었다.

"고부" 주민들을 대신하여, "전창혁(전봉준 부친)"은 관청에 ""를 신청하는 탄원서를 제출했고, 형문을 가하여 귀가한지, 1달 만에 "장독"으로 죽게 된다.

"학정"에 시달리다 못한 "고부" 주민들은 "한문교사 전봉준"을 선두로, 1893.1112(고종30), 2차례에 걸쳐, "군수"에게 "감세 탄원서"를 제출하였으나. "조병갑"은 진정서를 제출하려고 온 "농민 대표"를 붙잡아 하옥시키고, 고문을 가하는 것으로 "탄원서"에 대한 대답을 대신했다이에 "전북도 관찰사"에게도 탄원서를 보냈지만, 응답이 없었다.

"탄원진정"으로 아무런 효과를 보지 못한 농민들은 "결국 힘으로 군수를 내쫓아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고, 이에 일부 농민동학도들은 무기화약을 준비한다이후 농민의 일부가 "동학도"들과 함께, "한성"으로 입경하여, "탐관오리 처벌부패 정치인 파직 민생 구휼"을 청하는 상소를 올린다.

1893.12~ 1894.01월에 올린 "동학도농민군"의 상소 중, "최시형의 탄핵 상소"에 의해, "경상도 관찰사조병식(2품 문관직, 각 도에 1명씩 파견, 지방통치의 책임을 맡았던 지방 최고장관), 영장 윤영기(지방내륙군의 중추인 속오군(束伍軍)의 최상 책임자)" 등이 파직되긴 했으나, 이후 고관들은 농민들의 "상소문"을 검열하였고, 사태는 나아지진 않았다.

1차 봉기 (고부 봉기)자진 해산

1894.02.15,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에 "고부군 동학도농민군"들이 농기구(쟁기낫 등)을 들고 집단으로 무장 시위를 벌였다이들의 움직임은 곧 "중앙 정부의 탐관오리"들에 대한 분노로 향했다.

"보국안민폐정개혁"을 기치로 내건 농민들의 기세가 걷잡을 수 없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대원군"이 기회를 이용, 동학 농민군과 접선하여, 손자인 "이준용"을 추대할 계획을 세운다.

1886, "흥선대원군""민씨 정권""조러 조약" 체결하자 불만을 품은 위안스카이(원세개)결탁하여, "차남 이재황(고종)"을 옹립하고 재집권하려다가 실패하고, 1894"동학혁명"이 일어나자 농민세력과도 연합하려 하였으나, "동학농민운동"이 실패로 돌아가 실현되지 못하였다.

"대원군이준용""민씨 정권"의 부패정치와 지방에 파견된 탐관오리들에 대한 반발을 주목했다"동학군" 중에는 "전봉준"과 같이 "대원군"의 문하에 출입하던 인물들도 있었고," 폐정개혁대원군 추대민씨 외척세력 척결개화파 척결"을 외치는 목소리도 강력했다.

2차 봉기

한편 정부에서는 "안핵사(按覈使지방에 어떤 일이 터졌을 때, 그 일을 조사하려고 보내던 임시 벼슬) 용태"를 보내, 이들을 위로하고 탐관오리 처벌을 약속하자, "1 동학군"은 저절로 자진 해산하였다그러나 "안핵사 이용태""1 봉기""동학도의 반란"으로 규정하고, "동비들의 뿌리를 뽑겠다."고 선언, 반란 관련자들을 "동비(東匪)"라 하여, "동학도"로 취급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동학"과는 상관없는 "전북, 충남" 지역의 농민들을 "동학도"로 몰아, "역적죄"로 처벌하였다"안핵사 이용태"의 강경책에 분개한 "전봉준"과 농민들은 이에 굴복하지 않고, 총기류농기구 등으로 무장한 뒤, "무장(茂長)의 김개남손화중" 등과 함께 봉기하였다

이것이 "백산 봉기3월 봉기" 등으로도 불리는 "2차 동학 농민 운동"이다.

"전봉준"을 총대장, "김개남손화중""장령(將領)"으로 삼은 농민군은 1894.03() 하순에 "백산" 모여 궐기한 뒤, "전주성"을 점령한다."동학군""고부 황토현(, 전북 정읍시 덕천면)"에서 "감영 군대"를 물리쳐, "황토현 전투"에서 "관군"을 모두 격파했다.

당시 조정에서는 "전라도 병마절도사 홍계훈""초토사(전란내란이 발생했을 때, 이를 해결하기 위해 특별히 지방에 파견했던 관원)"로 임명하여, "봉기"를 진압하도록 하였다"정읍흥덕고창무장" 등을 점령한 농민군은 05.27(04.23), "장성 황룡촌 전투"에서 "초토사 홍계훈"이 이끄는 정부군을 상대로 승리하였다.

 05.31(04.27) 농민군은 "전주성"으로 입성하였다1894.03.21., "고부"에서 봉기한 지 3, "전주성"을 점령한 농민군은 ""에게 군사주둔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전주화약" 맺고 해산했다.

전주 화약"청 일" 양국군의 주둔

사태가 확산되자, "고종명성황후"는 당황해 하였다. "고종민씨 세력"""에 원병을 청하였고, ""이 응하자, "일본" 역시 "텐진조약"을 빌미로 군대를 동원하였고, 이처럼 외세가 개입하자, "농민군관군"은 회담을 통해 "화의"를 약속하고 싸움을 중단하였다하지만 "조선"에 진주한 "" 양국군은 돌아가지 않았다"일본"""에게 조선의 내정 개혁을 함께 실시하자고 제의하였지만, ""은 이 제의를 거절했다.

그러자 "일본"은 단독으로 "민씨 정권"을 몰아내고 "흥선대원군"을 앉혀, 꼭두각시 정권을 탄생시켰다그러나 "흥선대원군"이 고분고분 따르지 않자, "일본"은 철수하지 않고 도리어 "경복궁"에 무단 침입, "흥선대원군 내각"을 실각시키고, "친일 내각"을 세웠다.

"김홍집어윤중박영효서광범" 등을 중심으로 한 "친일 내각""일본"의 입김 아래 일련의 개혁조치를 취했는데, 이것이 갑오경장(갑오개혁)이다그 뒤 개혁추진 기구로서 "군국기무처"가 설치되었고, "김홍집"이 중심이 되어, 내정 개혁이 단행되었다그런데 이것이 "일본군"이 사주한 것으로 알게 된, "동학농민군"은 반발, 다시 봉기를 계획한다.

3차 봉기

"일본"은 이처럼 단독으로 "조선 내정개혁"을 단행함과 동시에,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청군"을 공격하여 승리한 뒤, 정식으로 ""에 선전포고를 하여, "일 전쟁"이 발발하였다.

1894.07월에 시작된 "일 전쟁"2달 만에, 구미 열강의 지지를 등에 업은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그 때부터 본격적으로 "조선 정복"을 위해 "내정 간섭"을 시작하였다

이 때문에 해산되었던 "동학군" "외세 배격"을 기치로 내걸고 다시 소집되어, "대일 농민전쟁"을 감행했다봉기한 농민군은 "전봉준"의 지휘 하에 "공주성"으로 다가들었다.

농민군의 최종 목표는 "서울"로 쳐들어가, 부패한 정치가들과 외세를 몰아내고, 나라를 바로잡는데 있었다"교조 신원운동"에서 "고부 봉기", 그리고 "2차 봉기"까지 "전봉준농민군"은 오직 그 날을 위해 달려갔으나, 하지만 "관군일본군"의 화력에 밀린 농민군은 패배하여, "동학농민군"의 봉기는 실패로 아가고 말았다.

전쟁 실패

12.10(11.14) 새벽, 적의 기습공격을 받고, "농민군""논산"으로, 다시 "전주"로 후퇴했다.  전열을 가다듬어, "원평, 태인"에서 결전을 벌였지만, 역시 패배했다"전보운"은 직속부대만 남기고, "농민군"에게 해산명령을 내렸다.

곧이어 "정부군" 측의 "소탕작전"이 시작되었다이들은 죄 없는 "양민"까지 마구잡이로 체포학살하고 마을을 잿더미로 만들었으며, 부녀자를 능욕했다그동안 쌓아 올린 농민적 사회경제의 기반은 여지없이 무너져나갔다.

"백양사"에 숨어 동정을 살피던 "전봉준""정부군"이 살육에 정신없는 틈을 타서, 직속부대를 ""로 잠입케 하고, 3명의 부하와 함께 "순창"으로 갔다"동학군"과 싸움에서 승리한 "관군일본군" 연합군은 "전봉준을 생포하면, 막대한 상금을 준다."는 포고문을 내걸었고, "전봉준""정읍순창" 등지를 전전하며, 몸을 숨겼다.

그러나 과거 자신의 부하였던 "김경천"의 밀고로 체포되어, 12.28(12.02)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한편 "김개남" 등 일부는 "태인 산내면 종송리"에 있는 "매부 서영기"의 집에 숨어 있다가, "친구 임병찬" 고발로 "전주"에 있는 "강화영"의 중군인 "황헌주"에게 잡혀, 불법으로 "전주 서교장"에서 처형당했으며, 나머지 인사들은 시골에 숨어살거나, 술주정꾼 행세를 하면서, 겨우 의심을 피해 생존하였다.

"농민전쟁"의 실패와 함께, "농민군"을 이용하여 "명성황후"를 타도하고, "이준용"을 추대하려던 "흥선대원군"의 재집권 기도도 수포로 돌아갔다

1907, "고종"의 특지로 "북접 최시형" 등 일부는 신원되었다그러나 "전봉준김개남" 등은 1910(융희4)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도 복권되지 못하였다일부 농민군은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산중에 은신하거나, "항일 의병 전쟁"에 흡수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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