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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 • 현대사)/사건

사건- 1894.02 : 동학 농민 운동- 1ㆍ천도교 (東學)→ 청일 전쟁 발발

by 당대 제일 2022. 9.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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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東學) 농민운동"은 1894년, 동학지도자ㆍ동학교도ㆍ농민들에 의해 일어난 "민중의 무장봉기"로, "제1차 농민봉기"는 기존 정부에 대한 불만을 가진 농민들이 주도한 "무장개혁 운동"으로서, 기존의 "민씨 척족 정권"을 무너뜨리고, 개혁하자는 운동이었다.

 

1. 동학(東學) 농민운동ㆍ동학농민혁명ㆍ동학혁명ㆍ갑오 동학농민전쟁 → 청일전쟁 발발

1- 1894.02.15 : 고부 봉기 (전북) 고부군수 조병갑 (탐관오리) 탐학

2- 1894.05.11 : 백산 봉기 (전북)3월 봉기 이용태 (안핵사)"동비(동학비적)"로 규정 총대장 (전봉준- 서당훈장)장령 (김개남손화중) 전주화약

3- 1894.10 - 삼례 봉기(전북)9월 봉기

장소  충청도전라도

구호  보국안민제폭구민 유교적인 충군애민 사상

깃발  척왜양창의 (斥倭洋倡義) : 일본 세력과 서양 세력을 배척하고, ""를 내세운다.

목적  탐관오리 처벌민씨 정권 축출부패한 집권층 타도 (반봉건적반외세적 농민항쟁) 항일 의병전쟁독립운동적인 성격으로 변모1894년 가을, "항일 의병적인 성격"으로 변화하는데, "유영익(서울대 교수)"가을의 동학봉기는 일본군을 쫓아낼 목적으로 궐기한 구한말 최초의 본격적인 항일 의병운동이었다"고 하였다. (1911년 조선인구 :  1,380x 0.9x 0.5 (남녀)x 0.4(청장년) ≑  250)

결 과  동학농민군이 초기에 우세했으나, 결국 실패 (30~ 40만 명의 희생자 발생)청일전쟁의 발발

동학농민군  :  전봉준최시형(2)손병희(3)김개남손화중이방언

 조선군  고종이용태홍계훈조병갑이기동

 청나라  :  광서제이홍장정여창등세창      일본국  메이지 천황야마가타 아리토모

전봉준

"동학 농민군"의 일부가 "흥선대원군과 내통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조선 조정(민씨 내각)" "민군" 제거할 목적으로, "명성황후"2차 봉기 때에 "청군"을 끌어들였고, 3차 봉기 때는 "일본군"을 끌어들여, 교전케 하였다. (청군과 일본군을 번갈아 끌어들여, 결국 농민운동진압 후, "청일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

"2차 봉기" 때에는 "전주 화약"을 체결하였지만, 3차 봉기 때는 "관군연합군조선관군청군일본군" 화력을 당해내지 못하였다"교조 최제우"의 신원 외에도 기존 조선 양반관리들의 탐학부패사회 혼란에 대한 불만이 쌓이다가, 1882(고종19) "전라도 고부군"에 부임된 "조병갑"의 비리남형이 도화선이 되어 일어났다.

"부패 척결내정 개혁동학 교조 신원" 등의 기치로 일어선 "동학농민군" 중 일부는 "흥선대원군이준용" 등과도 결탁했다"전봉준""대원군"을 반신반의 하면서도, "명성황후민씨 세력"의 축출을 위해, "대원군"과 손을 잡았고, "대원군" 역시 "명성황후"의 제거를 위한 무력 집단이 필요했기에, "동학 농민군"과 제휴하게 된다"농민군" 중 일부는 "탐관오리 처벌개혁" 외에 "대원군의 섭정"까지도 거병의 명분으로 삼은 바 있었다.

당시 "전라충청경상도" 각지에서 많은 "접주"들이 항거하여 봉기하였으나, 그 규모는 소수였고, "전봉준 부대"만이 대규모로서, 호남의 5천명을 이끌고, "일본군" 수만 명을 상대로 항전을 벌였으나 전략 미숙과 병기류를 충분히 갖추지 못하여, 마침내 "일본군"을 끌어들인 "조선조정 관군일본군 연합군" 의해 패하고 말았다.

마침내 음력 11, "전봉준" 등은 "순창"에서 체포되어, "한성부"로 압송된 후, "일본 공사" 또는 "조선 의금부"의 재판을 받고, 이듬해 1895년 음력 3월에 사형되었으며, 이후 "일 연합군"에 의해 호남 일대에 "농민군 대학살 전"이 일어났다. 이로써 거병한 지, 1년 만에 실패로 끝났다.

 

2. 북접 (법포좌포)

"최시형" 계열손병희 (최시형의 2째 사위)손천민

"남접" "서포" 군사에 대한 "북접"의 비협조 역시 농민군의 활동을 어렵게 했다.

1차 봉기 때, "북접"은 참가하지 않았다.

1차 봉기 때에도 "북접"은 참가하지 않았는데, "남접"과 달리 "중농 이상"이 많아, 개혁에 관심이 없었다 "북접"의 목적은 "최제우"의 명예 회복과 동학의 포덕 자유 허용"이 목적이었다 "북접"은 최대한 "정치적 문제"에서 회피하려 했고, "흥선대원군"과 연결을 탐탁하지 않게 생각하였다.

"남접""3차 봉기"를 준비하자, "북접""남접 농민군"을 공격하려고까지 했다

그러다가 1894.10, "최시형"이 제자들의 간곡한 설득에 참여하게 되었다 "논산"에서 "북접 군남접 군"이 합류한 것이 10.09일이니, "봉기" 결정 후 1달을 끌었다"북접"과의 연합에 너무 시간을 소비했고, "남원""김개남 부대"가 독자 행동을 한 것 역시 세력 약화의 한 원인이었다또한 "정권 전복"을 원치 않는 "북접"의 반발과 "왕실"을 부정하는 "남접 내 급진파"의 존재 역시 "농민군" 내분을 불러왔고, "남접""3차 봉기"를 준비하자, "북접""남접 농민군"을 공격하려고까지 했다.

3. 남접 (서포호서남접)

"서장옥" 계열전봉준김개남손화중 (농민군 남접 3대 지도자)   

"남접""서포"의 한 갈래였고, "서장옥"의 성을 따서, "서포"라 불렀다.   

남접의 분열 ("남접" 내에서도 이견이 나뉜다)

1890~ 1892"대원군""운현궁 식객" 출신이었던 "전봉준"을 비롯하여 "폐정개혁외척세도가 퇴출대원군 옹립"을 목적으로 했던 "남접 온건파""조선왕조" 자체를 부정한 "김개남 일파(남접 강경파)"는 갈등하게 된다.  "조선왕조" 체제는 인정하고, 외척 세력과 부패한 탐관오리들만 퇴치할 것을 주장하던 "전봉준 일파" "조선왕조" 자체를 부정하는 "김개남 일파"와 갈등하였고, 이는 "동학농민군 내부의 파벌 갈등알력"으로 발전한다.

4. 봉기 직전 : "거사 직전"에 동학 내 강경파였던 "남접" 내에서도 논란이 많았다.

1893.12~ 1894.01월 초, "거사"를 앞두고도 "남접" 내부에서도 "거사를 하느냐, 마느냐"를 놓고 쉽게 단안을 내리지 못했고, "남접"의 실력자인 "손화중" 역시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전봉준""이런 저런 부패가 있는데, 어찌 우리가 이렇게 가만히 있어서 되겠습니까? 우리 국민으로써 어차피 피해 다니면서, 교를 형성하고 교세를 확장하고 있는 차에, 이 기회에 나서서 정치를 바로잡도록 해주는 것이 좋은 것 아니요. 취지가 맞다고 생각하면, 다 같이 동참해서 힘이 되어 주시고, 접주님이 주관을 해주시요."라고 하였다.

그런데 "손화중"은 쉽게 승낙 하지 않았다고 한다."아직은 시기상조이다. 지금은 때가 아니니까 더 있으면 자연히 그럴 때가 닥칠 수 있다. 그때를 맞춰서 해야지, 지금 해서는 안 된다.""전봉준"을 설득하였다.

"북접"을 이끌던 "최시형""김개남" 등의 "개남국왕 설" 소문이나, "전봉준" 일파가 "흥선대원군"과 결탁한 것을 상당히 못마땅하게 여겼다그러나 "일본군""관군"과 함께 "농민군"을 압박하자, "최시형" 등은 처음에는 협상론인 "화전론(戰論)"을 펼치다가, 마침내 현실상황의 급박함을 인식하여, 스스로 자신의 주장을 포기하고, "북접" "전봉준"의 무장투쟁 노선에 동참시켰다"인심이 즉 천심이고, 이는 천운이 이르는 바이다. 고로 너희들은 도중(道衆)을 동원하여 전봉준과 협력, 이로써 교주의 원한을 풀어 드리고 나아가 우리 도의 큰 뜻을 실현시키라!이로써 "손병희" 등이 이끄는 "북접""남접"과 힘을 합쳐, "봉기"에 가담했다.

 

5. 동학농민운동 일지

•  1월  "고부" 봉기(10)

•  3월  "무장"에서 1차 기병하고, "창의문" 선포(20)그 후 "백산""호남창의 대장소"(장 전봉준) 설치하고, 농민군 4대 행동 강령 선포

•  4월  황토현 전투(6~7)황룡촌 전투(23)전주성 점령(27)

•  5월  청나라군(2)일본군(6) 인천 도착전주화약(7)

•  6월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21)-일 전쟁 시작(23)

•  7월  "전봉준전라감사 김학진", 서로 협력해 폐정개혁하기로 합의(6)

•  8월  남원공주산청울산영천언양김해기장의령 등에서 "농민군" 재봉기

•  9월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군", 재봉기 위해 "삼례"로 집결동학교주 "최시형", "남접 농민군"과 연합해 봉기할 것을 선언

•  10월  "전봉준" "논산"에서 "충청감사"에게 격문 띄워, 항일전선 구축 촉구(16)

•  11월  "전봉준 부대", "우금치"에서 대공세 펼쳤으나, "일본군관군"에 패배(9~12)전봉준 - 항일 연합전선 구축 다시 촉구(12)김개남 부대 - "청주" 공격 실패(13)

•  12: 김개남(1)전봉준(2)손화중(11) 체포

김개남

 

6.  우금치 (개금티) 전투 : 20여일간의 마지막 전투공주 전투 패전 퇴각

농민군은 "동학농민전쟁"의 가장 큰 전투이자, 승패의 분수령이 된 결전의 전투에서 패배

 대전투로 농민군의 결정적 패배 농민군 해산진압 원인

장소  공주 우금치 일대

결과  동학 농민군의 대패동학농민운동의 진압

지휘  농민군- 전봉준 (남접)손병희 (북접)

병력  농민군- 20,000- 남접 (10,000)북접 (10,000)

압군  :  5,200- 조선군 (3,200)일본 제국군 (2,000): 미국제 기관총 보유

1894.10월 동학 농민군은 제2차 봉기에 나섰다. 이때에는 "최시형손병희" 등 북접 지도부도 참여하였다. 농민군은 군대를 철수하지 않고, 경복궁을 침범하여 내정 간섭에 나선 일본의 침략을 물리칠 것을 목표로 하였다.

농민군은 당시 "일본군관군"의 거점으로, 서울로 통하는 길목이었던 "공주"를 점령하여 서울로 진격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논산"에 집결하여 "공주성"을 공격하였다최신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과 관군의 연합 부대에 패하였다.

10월 중순, 10만 부대로 "공주성"을 포위하고. 대 공격을 전개하였으나 패퇴하였고, 11월 다시 "공주" 부근의 "우금치 전투"에서 패배하여, 후퇴하게 된다. 그리고 나머지 "농민군""금구 싸움"을 마지막으로 "일본군관군"에 진압되어, "전봉준"은 쫓기는 신세가 된다.

12.05(11.09) "전봉준"은 드디어 총공격을 명령했다. 농민군 주력부대가 "우금치"를 목표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금치""견준산""주미산"이 만나 만든 가파른 고개로 "개금티"라고도 부른다. 물밀 듯 올라오는 농민군에게 "일본군관군"의 최신 무기가 불을 뿜었다. 시간이 갈수록 농민군의 패색이 짙어갔다.

"이규태(정부군의 좌선봉장)" 나중에 이렇게 실토했다. "수만이나 되는 비도(匪徒)4,50리에 걸쳐 길을 쟁탈하고, 산봉우리를 점거하여, 성동추서(聲東趨西), 섬좌홀우(閃左忽右)하면서, 깃발을 흔들고 북을 치고, 죽음을 무릅쓰고 앞을 다투어 올라오니, 들은 무슨 의리이고, 무슨 담략인가. 그 정황을 말하고 생각하면, 뼈가 떨리고 가슴이 서늘하다. 만약 병력이 전후좌우에서 방비하지 못해,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졌다면, 맹렬히 밀어붙이는 기세에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을 것이고, 결국 그들을 막아낼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주력부대가 "우금치"에서 결사 항전하는 동안, "농민군" 일부는 "공주"로 향했다. 이들은 "공주 감영"을 배후에서 치기 위해, "봉황산"을 공격했다. 조를 짜서 조별로 공격했지만, 역부족이었다"공주 감영"을 눈앞에 두고, 수없이 많은 "동학농민군"이 눈을 부릅뜬 채 쓰러져갔다. 시체가 산 같이 쌓이고, 핏물이 강을 이루어 "금강"으로 흘러들어갔다.

7. 평 가

"동학농민전쟁""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에 기초를 둔 "농민" 중심의 "민중항쟁"이라고 할 수 있다"동학""신분제의 타파"를 외치고 있었기 때문에, 혼란한 조선말 상황에 가난한 농민들이 의지할 수 있는 종교였기 때문이다.

"동학농민전쟁"의 성격은 간단하게 "반봉건적, 반외세적 농민항쟁"이다"농민"이 주축이 되는 운동으로, "지배계층"에 대한 조선시대의 "최대의 항쟁"이다"청나라일본"의 개입으로 결국 실패했으나, 후에 "31운동"으로 계승되었다.

"동학농민전쟁""동학"이라는 종교 조직과 "동학인"의 지도하에 일어난 "농민 항거"라는 점에서 이전의 "민란"과 다르며, "외세 배척을 목표로 했다"는 점도 처음 보이는 것이다그러나 당시의 역사적 조건하에서 "동학농민전쟁"은 몇 가지 한계도 가지고 있었다

농민군은 조선 관군을 넘어선 외세의 개입에 대하여, 맞서 싸울 만한 효과적인 무기와 병력이 부족하였다.

농민들 중심의 "동학군"에 대항하여, 기득권을 가진 향촌사회의 "지주부호양반"들의 "민보단(民堡團)"등을 통한 저항을 과소평가하였다.

사회개혁을 위한 혁명을 수행하면서도 "대원군"에 의지하려 한 것이 잘못이었다.

더구나 동학군 내 "과격파""조선왕조"를 부정하고, 새 정부를 구성하려는 시도를 보였고, "온건파" "전봉준" 등은 "흥선대원군"과 협력하는 등 "동학군" 내부에서도 의견이 일치되지도 않았다는 단점도 있었다.

"백산"에서 "전봉준""전라감사"에게 내놓은 "개혁요구서""전주화약"을 맺기 직전, "관군" 최고사령관 "홍계훈"에게 보낸 "탄원서"에는 "대원군"이 다시 권좌에 복귀하기를 바라는 내용이 들어 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동학농민전쟁"애국적이고, 애민적인 동기에서 일어난, 구한말 최대의 농민 중심의 "민중항쟁"이었으나, 결국, "동학농민전쟁"은 순박하고, 애국적인 농민들의 자기생존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으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때의 실패경험을 바탕으로, 농민층의 "반일애국주의"가 다음 시기의 "의병운동""양반유생"과 더불어, 함께 참여하는 성숙성을 보여주게 되었으며, 농민들의 내정개혁요구는 "갑오개혁" 부분적으로 반영되는 성과를 가져왔는데, "과부의 재가 허용신분제 폐지" 등이 반영되었다.

그러나 이 개혁에는 농민들의 소망이었던 "토지개혁"이 없었기 때문에 많은 지지를 받지는 못했다"김개남" 등 일부 "과격파""국왕 참칭"이라던가, "전봉준" 등 일부는 "흥선대원군" 등과 내통했던 점 역시 대중에게 부정적인 시각을 갖게 하면서, 많은 지지를 받을 수 없는 하나의 요인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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