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대원군 이하응 (興宣大院君ㆍ李昰應ㆍ1820~1898ㆍ향년 77세)"은 1864.01~1873.11월까지 조선 국정을 이끌었었다. 직접 며느리 "명성황후 (明成皇后ㆍ민자영ㆍ민비ㆍ1851~1895.10.08.ㆍ43세)"을 간택하였으나, 도리어 "명성황후"에 의해 권좌에서 축출되었다. 1873.11월 "명성황후ㆍ유학자ㆍ신 안동 김씨ㆍ풍양 조씨ㆍ여흥 민씨" 등에 의해 축출된 이후, "명성 황후"와 권력투쟁을 벌였다.
1. 흥선대원군 ⇌ 민비ㆍ고종의 끝없는 대결
• 흥선대원군 이하응 (1820~ 1898ㆍ향년 77세)ㆍ석파ㆍ민비 사망 후 3년 뒤 사망
• 고종 (1852~ 1919ㆍ향년 67세ㆍ재위 1863~1907(11세))ㆍ인평대군(인조의 3남)의 7대손
• 명성황후 (1851~ 1895ㆍ향년 43세)ㆍ민비ㆍ민자영
① 가계도 : • 아버지 남연군 + 여흥 민씨 → (근친혼) → 고종ㆍ순종도 상태 안좋음
• 본인 대원군 + 여흥 민씨
• 아들 고종 + 여흥 민씨 → 항문이 없는 아들ㆍ알렌 (1858~1932) 수술
• 손자 순종 + 여흥 민씨
② 대원군 집권기 : 1864(고종 12살)~ 1873 (10년)
민씨 척족 정권기 : 1874~ (고종 22살ㆍ민비 23살) → 고종 친정체제ㆍ대원군 하야→ 대원군의 권력집착 시기 (임오군란ㆍ갑오개혁 때 잠깐 재집권)→ 초기 통상 개화론자 대두 → 1876 강화도 조약 → 개항ㆍ근대화 시작
③ 고종ㆍ민비의 항명 → 친정체제ㆍ대원군 하야
1873 (10년)→ 고종 22살ㆍ민비 23살 (18살 이전까지 섭정이 타당)
고종은 민비에게 정치적ㆍ외교의 상당한 부분을 의지했다.
고종ㆍ민비→ 최익현(1833~1907ㆍ촉망받는 유생)을 등용 : 왜양일체론(1876)ㆍ을사의병장(1905)
최익현이 대원군에게 상소를 올린다 → "종친의 정치 참여를 금하소서" → 유생ㆍ양반이 합세 → 양반과 약속 (호포법 폐지)→ 고종 친정체제 확보 (※ 대원군 - 양반과 대립 : 호포법 실시ㆍ서원 철폐ㆍ원납전 징수ㆍ묘지림 벌목)
④ 대원군의 업적
• 대외정책 : 통상수교 거부정책→ 병인양요(66ㆍ프랑스)ㆍ신미양요(71ㆍ미국)
• 왕권강화 : 안동김씨 축출ㆍ과거제 부활ㆍ비변사 폐지→ 의정부 3군부 부활ㆍ경복궁 중건ㆍ법전(대전회통ㆍ육전조례)
• 삼정의 문란 시정(양전사업ㆍ호포법ㆍ사창제)ㆍ서원철폐
• 호포법(양반에게 군역의무 부과)→ 국가 재정 확보
⑤ 1866 (고종 15살ㆍ민비 16살) 중전 간택
왕실 외척(풍양 조씨ㆍ안동김씨)→ 한미한 집안 여자→ 자신에게 순종→ 처갓집 여자ㆍ외 어머니 외동딸 → 외척으로 힘이 없음ㆍ신데렐라 스토리 → 사랑받고 싶은 욕망 → 첫 날 밤부터 소박(?)→ 대원군이 합궁일도 정함
• 고종의 사랑→ 영보당 귀인 이씨(유모ㆍ상궁 출신)와 사랑→ 아들 완화군(서장자ㆍ1868~1880) 출산 → 대원군도 총애하였으나, 일찍 요절 / 아버지의 사랑이 그리워, 대원군에게 애정을 기대했으나 애정을 주지 않음 → 방안에 박혀서 공부 (중국역사서)
• 1째 아들 : 항문이 없는 아들 → 알렌(1858~1932ㆍ미 외교관ㆍ선교사) 수술 제의 → 대원군이 반대하고, 생후 3일된 장자에게 산삼을 하사→ 복통으로 사망
2. 고종의 왕위 계승
① 철종 (1831~1864ㆍ재위 1849~1864ㆍ17세ㆍ32세에 승하) : "은언군 (정조의 아우)"의 손자
② 고종 (1852~1919ㆍ재위 1863~1907ㆍ10세) : 흥선대원군 (31세) 아들ㆍ인평대군 (인조의 3남)의 7대손
③ 이하전 (1842~1862ㆍ향년 19세ㆍ도정궁 경원군ㆍ도정궁 대감)
1849년, "헌종"이 후사 없이 승하 후, 왕족 중 기개 있는 인물로(덕흥대원군(선조의 부)의 13대 사손), 왕위 계승후보였으나, 외척인 "안동 김씨(순조ㆍ헌종ㆍ철종 3대에 걸친 세도정치가)"의 반대로, "철종"이 즉위→ 1862년 "김순성ㆍ이긍선"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어, 모반하였다"는 "오위장 이재두(李載斗)"의 무고로 "제주도"로 유배ㆍ사사
④ 명성황후 (明成皇后ㆍ민비ㆍ민자영ㆍ1851~ 1895.10.08ㆍ향년 43세)
민치록(음서로 벼슬)의 재취부인 "한산 이씨"의 딸, 전 "부인 오씨"에게서는 자녀가 없었던 것으로 추정, "한산 이씨"에게는 1남 3녀의 형제가 있었으나 모두 죽고, 그녀만이 남았다.
• 양자1: 민승호 (1830~1874ㆍ43세) : 대원군 처남ㆍ민비 양 오빠ㆍ민씨 정권 수장ㆍ의문의 폭사(대원군 소행?)
• 양자2: 민겸호 (1838~1882ㆍ43세) : 대원군 처남ㆍ민비 양 오빠ㆍ병조판서ㆍ별기군 창설ㆍ임오군란 때 난병에 살해
• 민영익 (1860~1914ㆍ53세) : 민비는 친정아버지의 제사를 받드는 유일한 혈육인 그를 끔찍이 아꼈다. 촌수로는 조카였지만, 나이 차이가 9세밖에 나지 않았기 때문에 친동생처럼 친하게 대했다. 1905년 을사조약 성립 후, 고종폐위 음모에 관련되어, 홍콩으로 망명
• 민영환 (1861~1905ㆍ43세) : 1905.11월 "을사늑약 체결"에 반대하여 자결
⑤ 흥선대원군 이하응 (興宣大院君ㆍ석파ㆍ1820~ 1898.02.22ㆍ향년 77세)
"경복궁(390여 칸)"은 조선 초기에 "정궁"으로 사용되었으나, "임진왜란(1592~ 1598)" 때 전소되었다. 그 후 약 270년 후 "경복궁 중건(7,225칸 규모ㆍ重建)"은 조선 말기 수렴청정을 하던 "신정왕후"에게서 지시를 받은 "흥선대원군"이1865(고종2)~1872(고종9)까지 지휘함으로써,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경복궁 중건"은 "조선조 체제"를 다시 굳건히 세우려 한, 상징적인 사업이었다. 처음에는 "백성들 부역"에 신중을 기하고, 관리ㆍ백성ㆍ종친(宗親)들에게 고루 "원납전(기부금)"을 바치게 하였으나, 1866.3월 "화재"가 발생, "전각ㆍ목재(마감용 목재에 기름칠 하는 창고에 쌓아둔 800여 칸 분량)"이 모두 타버려, 공사가 중단될 처지에 놓였다.
강제적 "재원 마련ㆍ부역 동원"이 시행되고, "원납전"을 강제로 거두었고, "당백전(상평통보보다 100배의 명목 가치로 통용ㆍ실은 20배에도 못 미치는 악화)"를 발행해, 엄청난 경제혼란을 야기했다. "목재마련(양반 선산ㆍ마을 성황당 나무까지 절단)ㆍ결두전(토지부가세)ㆍ문세(도성문 출입 시)"하는 사람에게는 문세를 징수했다. 결과적으로 양반 귀족으로부터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원망의 대상이 됐으며, 경제적인 파탄을 초래하여, "대원군 몰락"의 원인이 되었다.
1910년, "국권"을 상실하자, 일본인들이 궁 안의 "전ㆍ당(堂)ㆍ누각" 등 4,000여 칸의 건물을 헐었으며, 1917년, "창덕궁"에 화재가 발생했을 때, 다시 "궁"의 일부를 헐어, 목재를 "창덕궁 재건"에 사용했다. 또한 "일제"는 "근정전"의 정면에, "근정전"을 완전히 가리는 커다란 석조건물인 "조선총독부 청사"를 건설(1916.07~1926.10)하여, "경복궁"의 위엄을 훼손했다. 1996.11월 완전 철거되었다.
⑥ 위정척사 운동 ( 중심 인물ㆍ배경ㆍ내용)
• 1866 : 이항로 → 병인양요 → 척화주전론
• 1876 : 최익현 → 강화도 조약 → 왜양일체론
• 1881 : 이만손 → 조선책략의 유포 → 영남만인소
• 1895 : 유인석 → 을미사변ㆍ단발령→ 을미의 병
3. 왕위 계승 과정 (대원군 31세에 "고종" 득남) ㆍ이재면 (장남)ㆍ이준용 (장손자)
① 흥선군 → 이호준 (이완용의 양아버지)와 교분 (사돈 관계)
→ 결혼 (사돈) : 대원군 (1820~1898)의 서녀와 이윤용 (이호준 첩의 아들ㆍ이완용의 이복 서형) → 조성하(이호준의 사위)와 사촌 동생 조영하와 접촉
② "이하전"이 사사된 후, 왕위계 승감을 찾지 못하던 "조대비(익종 비)에게
"조성하ㆍ조영하"가 "흥선대원군"을 소개하고, "흥선군"은 그들을 통해, "종친"이라는 명분으로 "조대비"에게 접근
③ "철종"이 승하하자, "조대비"는 "흥선대원군"의 2째 아들 "이재황 (李載晃)"으로 하여금
"익종"의 대통을 계승하도록 지명, "익성군"에 봉해지고, "국왕 (고종)"에 즉위
4. 대원군 집권 (1차) : 대원군(42세)
① 1863.12 : 고종 즉위ㆍ"조대비"가 형식상의 수렴청정 시작→ 곧 "흥선군"에게 고종 보필하라고 명함.
• 명목상- 조대비가 수렴청정ㆍ섭정, 실제- 흥선군이 권력의 일선 등장ㆍ조대비와 동맹관계
• "김병학ㆍ김병국(안동김씨 일부 세력 지원)"으로 권력 장악→ "김병기" 등 일부 "안동김씨" 세력 축출
② 사색당파를 가리지 않고, 인재 중용
→ "안동 김씨ㆍ풍양 조씨" 일색이던 조정에 다른 "노론ㆍ소론" 인사 배치 → "남인ㆍ북인"을 등용하자, 그의 지지 세력이었던 "노론세력 이항로" 등이 반발
③ 서원철폐→ 민중의 지지
양반 반발ㆍ최익현 (이항로 제자)는 "민씨 척족"과 손잡고, "대원군" 타도
5. 왕비 간택ㆍ진행 : 대원군 (44세)
① 1866년 간택 : "안동 김씨ㆍ풍양 조씨"의 세도가 두려워, "아버지ㆍ형제ㆍ혈육"이 없는 민자영 낙점
1866.03.06 : 왕비로 간택(당시 15세)ㆍ12~17세 사이의 모든 처녀들에게 금혼령 → 삼간택 시, "김우근 딸ㆍ조면호 딸ㆍ서상조 딸ㆍ유초환 딸"과 경쟁
② 1868 (고종5) : "궁인 이씨"가 "완화군 (12살에 요절)"을 낳고 나서, "대원군"을 미워하기 시작
"대원군"이 도에 넘칠 정도로 몹시 기뻐했고, "명성황후"를 무시 → 후에 "명성황후"가 "원자"를 낳았으나, 생후 수일 만에 사망
③ 쇄국정책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남연군 (대원군 아버지)"의 무덤 도굴로 더욱 강화)
• 1866 : 병인박해(천주교인 박해)ㆍ병인양요(프랑스)ㆍ미국상선 "제너럴셔먼 호" 침몰사건
• 1867 : 경복궁 방화사건→ 800여 칸에 쌓아 둔, 목재 소실→ 묘지ㆍ사유림에서 벌목
경복궁 중건 → 공사비 : 8천만 냥 (원납전ㆍ당백전ㆍ매관 매직ㆍ장정 징집)
"호포제" 실시→ 양반에게도 "군포" 징수
"삼군부" 부활→ 대원군의 친위 군대→ "대원군ㆍ왕실" 호위
• 1871 : 신미양요(미국)
④ "대원군"의 강력한 내정개혁 정치ㆍ쇄국 정치는 결과적으로 많은 반발을 일으켜, 며느리인 명성황후와 유림 세력의 담합을 유도→ "명성황후"는 "대원군"에 의해 숙청된 "안동 김씨ㆍ풍양 조씨" 등의 세도가와 "노론 세력"과 결탁
6. 대원군 실각 (1차)→ 민씨 일가 폭정 : 대원군 (52세)
① 1873 : "노론세력ㆍ최익현" 등 보수적 유학자들을 앞세운 "명성황후ㆍ고종" 견제로 실각→ 고종 친정
민중은 "대원군 실각"을 기뻐하며 축하, "대원군"이 출입하던 전용문 폐쇄→ 조선은 "쇄국정책"을 버리고, 개방시작→ "대원군"은 "운현궁"에 은둔→ "남인ㆍ북인" 파직
1874 : 민승호 폭사 사건→ "민승호ㆍ명성황후" 친모 사망 / 1876 : "강화도 조약"을 계기로 외국에 문호 개방
② "민씨" 집안의 폭정 : 정권을 장악한 "민씨" 집안의 권력남용ㆍ부정 축재ㆍ매관매직ㆍ권력 독식ㆍ 조선 왕실의 재정 탕진
민중은 "대원군 섭정" 시절을 그리워하게 되었고, "대원군"은 "세도 정치의 반의어"로 인식되기 시작→ "명성황후"의 개항정책에 반발한 조선 유림들은 "쇄국 정책"을 펼쳤던 점을 높이 평가, 다시 "대원군 지지"로 돌아서게 됨 (이렇게 탕진하는 하루 비용이 천금이나 되어, "내수사"가 소장한 것으로는 비용 지출을 감당할 수가 없었음) → "호조ㆍ선혜청"에서 소장한 공금까지 사용, 1년이 채 못돼, "대원군"이 비축한 재물 모두 탕진 → 남인ㆍ북인 파직 → 성균관 유생ㆍ8도 유생들이 대궐문 앞에서 규탄ㆍ원망→ 고종은 민씨 보호
③ "이재선 (대원군 서 장자ㆍ소실 계성월의 아들)" 추대 역모 사건
1881년, "이재선"을 옹립하려는 "이재선 추대 음모 사건" 발생 → "이재선"은 처형당했으나, "대원군"은 "국왕의 생부"라는 이유로 언급하지 않고, 불문율에 붙여졌다.
7. 대원군 집권 (2차) : 대원군 (61세)
① 1882 : 임오군란 당시, 봉기한 구식군대 추대로 재집권
명성황후 : 군대가 "경복궁"에 들이닥치기 전, 변복을 하고, 궁궐을 나가, "여주"에 은신 → "대원군"은 "봉기군 추대"로 입궐하여, "명성황후가 죽었다"고 거짓 보고 뒤, "황후가 입던 옷"을 관에 넣고, 장례를 치름 → "고종"에게서 "임오군란"의 사태수습을 위한 전권을 위임받자, 정권 회복 (대원군의 실권은 1개월 만에 종료됨)
※ 임오군란 (壬午軍亂ㆍ1882.06.05 (고종19)) : "선혜청(정부 예산을 집행부서)도봉소(都捧所)"에서"무위영"소속 옛"훈련도감"군병들에게 밀린 봉급 중, 1개월분의 급료만 우선 지불했으나,그나마도 썩은 쌀에다 모래하고 겨를 잔뜩 섞어 지급하자 병졸들이 폭동을 일으킨 것이다. 일본식 군제(軍制) 도입ㆍ민씨 정권에 대한 반항으로 일어난 구식군대의 군변(軍變)ㆍ군료 미지급ㆍ"별기군 (총책임자는 민겸호 대감 (민영환의 부친))"과의 차별 대우에 반항하여, 민씨 측근 세력들 살해ㆍ일본공사관 습격.
8. 대원군 실각 (2차): 대원군 (61세)
① 1882 : 민씨 세력이 "청나라"와 내통ㆍ"임오군란"을 군사적으로 진압
민씨 정권 요청으로 "청나라" 조선 출병 → 봉기 진압 → 군대 주둔시키며, 조선침략 획책 → 민씨 정권은 "청"에 의지하여 정권유지 → "임오군란"은 수구적인 민씨 정권과 급진개화파의 관계를 정치적으로 급속히 냉각시킴
황제의 유지를 받들어야 한다며, "대원군"을 강제로 "보교"에 태워, "화성군 남양만"으로 납치 (대원군은 실권 1개월 만에) → "청나라 톈진"으로 압송, "보정부"에 4년간 감금
• 1882 : 통상조약 체결 - 미ㆍ영ㆍ독 등 • 1883 : 태극기 사용ㆍ전환국 설치
② 1884 : 개항→ "개화파"들은 "민씨 정권"의 개화정책에 참여→ 점차 "김옥균"을 중심으로 결집
"개화사상"을 현실정치에서 실현하려는 하나의 "정치세력(개화파)" 형성 → 민씨 정권에게 정치세력으로 성장한 "개화파"는 위협적 존재 → 정치적 압박을 가하기 시작 → 민씨 정권에 참여ㆍ평화적으로 일대개혁을 꾀하려던 "개화파"의 정치적 입지는 크게 축소 → 민씨 정권은 부분적인 "개화 정책"만 실현→ 조선에 대한 "일본ㆍ청"의 침탈이 강화됨 → "개화파"의 평화적 개혁노력은 힘들어 짐.
• 8월, "베트남"에서 "청ㆍ프랑스" 사이에 전쟁 발발 → 조선에 주둔중인 "청군" 3,000여 명 가운데 절반을 철수 → "갑신정변" 실행
※ 갑신정변 (甲申政變ㆍ1884.10.17 (고종21)): "김옥균"을 비롯한 "급진 개화파"가 개화사상을 바탕으로 조선의 "자주독립ㆍ근대화"를 목표로 일으킨 정변. "청나라"에 의해, 3일 만에 진압
③ 1885 : 민씨 정권이 "친러ㆍ친일" 등의 성향을 보이며, "청나라" 견제
"러시아"를 견제하려는 "청나라 정부ㆍ위안스카이"의 정치적 계산으로,"대원군" 4년여 만에 귀국 → "명성황후ㆍ민씨 정권"의 "대원군 귀국 반대"를 위해, "텐진"에 밀서 송부 (반대 의견 제시) → "대원군"은 "고종" 외면→ "운현궁"에 칩거
④ 1887 : "대원군"은 "고종"이 "명성황후"에게 휘둘린다고 단정, "고종ㆍ명성황후" 폐위를 시도
"청나라 위안스카이"와 결탁, "고종"을 폐위시키고, 장남 "이재면"을 옹립하려다가, 실패 → 장손인 "이준용"을 추대 시도하나, 실패 → 1892년, "운현궁"에서 화약이 폭발, 여러 건물에 장치된 "화약" 발견 → "민승호 (명성황후 양오빠) 일가" 폭사 사건의 "보복극"이라는 비판
1890 : 1890~ 1892년까지, "전봉준"은 "대원군"의 식객 → 밀약 맺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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