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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 • 현대사)/사건

사건- 1873~1896 : 대원군ㆍ민비 대결- 2 (집권ㆍ실각)

by 당대 제일 2022. 9.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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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 이하응 (興宣大院君ㆍ李昰應ㆍ1820~1898ㆍ향년 77세)"은 일본인과 결탁하여 며느리 "명성황후 (明成皇后ㆍ민자영ㆍ민비ㆍ1851~1895.10.08.ㆍ43세)"의 암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유길준"에 따르면 "대원군은 차라리 명성황후를 제거해 달라"고 "일본 공사관"에 수시로 부탁했다고 한다. (을미사변의 조선인 주요 협력자의 한사람이기도 하다) "명성황후ㆍ민씨 일족ㆍ고종"을 폐출하고, "완흥군ㆍ이재선" 등을 조선 군주로 옹립하려는 쿠데타를 기도했으나 실패하였고, 이후 손자 "영선군 이준용"을 왕위에 앉히기 위해 여러 번 정변을 기도하였으나 모두 실패했다.

 

1. 대원군 집권 (3차): 대원군 (73세)

① 1894 : 동학 농민운동 발생

• 민씨 정권은 "청"에 파병 요청 → "일본"도 "톈진(天津)조약 (1884년)" 빌미로 군대 출동 양국 간 전쟁기운 고조 민씨 정권은 양국 군 철수 요청 "일본"은 거부하고, 침략의 명분으로 조선에 "내정개혁" 요구 민씨 정권이 "내정간섭"이라 거절하자, "일본군"07.23일 궁중에 난입하여, 무력으로 민씨 정권 타도

• "일본공사 서기관" 확약을 믿고, "대원군" 재집권 → "일본 상인"의 호위를 받으며, 입궐 → 개화파 인사들(김홍집 등)으로 "신내각" 구성

※ 동학농민운동 (갑오농민전쟁ㆍ東學農民運動 : 1894.01.10. (고종31)) : "전라도 고부군"에서 시작된 "동학계(東學系) 농민의 혁명운동"으로, 규모ㆍ이념적인 면에서 농민봉기로 보지 않고, 정치개혁을 외친 하나의 혁명으로 간주, 농민들이 궐기하여 부정ㆍ외세에 항거

② 1894 : 갑오경장→ 07.27일 내정개혁 추진기구로 군국기무처 설치→ 3단계 개혁사업시행

• 1차 개혁 : 1894.07.27.~ 12.17일까지, 약 210건 "개혁안"을 제정하는 형태로 진행

• 2차 개혁 : 1894.12.17일, "청일전쟁" 승리를 눈앞에 둔 "일본"이 "대원군"을 퇴시키고, "군국기무처"를 폐지, "일본"에 망명 중이던 "박영효" 등을 귀국시켜, "김홍집-박영효 연립내각" 구성

• 3차 개혁 : 1895.08.24.~ 1896.02.02일까지, "박영효" 망명이후, 다시 "김홍집"이 내각수반이 되어, 개혁을 추진

※ 갑오경장 (갑오개혁ㆍ甲午更張, 1894.06.25 (고종31)) : 1894.07~ 1896.02월까지, "개화파 내각"에 의해, 추진된 "근대적 제도개혁""개화당"이 집권한 이후, 종래의 문물제도를 "근대적 국가형태"로 고친 제도개혁

③ 1894 : 청일전쟁 (淸日戰爭) 발발

• "일본"이 내정을 간섭하는 등 "지배권" 확보→ 06.21일에는 병력 동원ㆍ왕궁과 4대문을 장악

• 조선 정부는 일본 강요로 "청나라와의 통상무역장정을 폐기한다."고 발표 → "조- 청"간의 국교 단절 → "일본군"은 조선 정부의 요청을 받은 것처럼 위장, "아산만"에 주둔중인 "청군" 공격 시작  → "아산만" 앞바다에 있는 "풍도(豊島)"에서 "청나라 육군"이 탄 함정을 "일본군"이 습격 → "청 군사" 1,200여명 익사→ "청ㆍ일" 두 나라 군대가 "조선" 내에서 충돌(1894.07.25. 새벽)

※ 청일전쟁 (淸日戰爭, 1894.07.25~ 1895.04.17)→ 시모노세키 조약→ 신해혁명 : 중일갑오전쟁(중국)ㆍ일청전쟁(일본)ㆍ제1차 중일 전쟁(서양)이라고도 부른다.  "청나라ㆍ일본 제국"이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벌인 전쟁이다.  "청나라"의 퇴보ㆍ무력함을 여실히 드러내고, "양무운동"의 한계를 보여준 전쟁이었으며, "일본의 메이지 유신" 이후의 근대화가 "중국의 양무운동"에 비해, 성공적이었음을 증명하였다.

• 일 시 : 1894.07.25~ 1895.04.17 (첫 전투- 07.25ㆍ선전포고- 08.01)

• 장 소 : 만주ㆍ한반도ㆍ타이완ㆍ황해 일대

• 결 과 : 일본제국의 승리→ 시모노세키 조약체결 (청나라의 요청, 1895.04.17일)

④ 1894 : 갑오경장→ 초기에 "대원군ㆍ이준용(장손)"은 "명성황후 폐서" 착수

• 06.22일, "대원군"은 "일본"에게 "명성황후 폐서"의 취지가 담긴 문건 제시ㆍ2차례나 동의 요구 → "일본 서기관ㆍ일본 공사관" 요원의 강력한 반발에 좌절→ "고종ㆍ명성황후" 감시

• "대원군"은 "고종 축출ㆍ이준용 추대 쿠데타"가 실패한 것이 "개화파들 때문"이라 단정 → "갑오개혁" 당시, "대원군"은 "고종"을 폐위하고, "이준용"을 추대할 계획을 다시 수립

• "대원군파"가 "농민군"을 상경시키고, "청군"을 끌어들여 "일본군"을 격퇴→ "개화파"를 제거하여 정권을 장악하려는 계획

• "이준용"이 이끄는 "통위병 영대"로 왕실을 장악ㆍ하수인들을 지휘하여, "김홍집ㆍ유길준ㆍ조희연ㆍ김가진ㆍ김학우ㆍ안경수ㆍ유길준ㆍ이윤용" 등을 사살, 정부를 전복하여, 정권을 장악한 뒤, "고종"을 "상왕"으로 추대하고, "왕비와 태자"를 폐하여, "이준용(장손)"을 왕위에 올리기로 결정

• "대원군ㆍ이준용"의 정변 음모는 "일본 공사관 첩보망"에 걸려 실패 → "일본"은 "대원군"을 공사관에 소환, "청나라"와 손잡고 "일본군"을 축출하려는 의도 추궁"대원군"은 7~ 8월까지 달포에 걸쳐 "섭정"을 하였으나, "일본"이 바라는 것과 다른, 자신의 정치 소신을 피력, "일본"은 "대원군"에게 은퇴를 강요

• 1894.10월 중순 이후, "일본"은 "대원군ㆍ이준용"의 항일활동 전개 증거로 추궁→ 공직 사퇴 종용→ "조선 정부"는 "대원군" 축출에 동의→ 김홍집 내각→ 경장사업 추진

대원군

2. 대원군 실각 (3차): 대원군 (73세)

① 1894 : "명성황후"는 "개화당" 제거계획 수립→ "대원군"의 첩보망에 발각

"대원군"은 "명성황후" 암살문제를 "일본 공사"와 협의ㆍ도움 요청 → 명성황후 제거 결정 → "김홍집ㆍ유길준" 등의 "급진적 개화파" 포섭, 내통 (1895년 초)

② 1894년 "갑신정변" 이전까지만 해도, "대원군"은 "개화파"를 제거하고자 함.

"갑신정변" 이후, "고종ㆍ명성황후ㆍ민씨 일족"은 "민겸호ㆍ민영목ㆍ흥인군" 등을 사살한 "급진 개화파"를 제거하기로 결심하고, "김옥균 암살"을 계획 "고종명성황후""개화파" 간에 사이가 틀어지자, "대원군""개화파" 포섭할 계획을 수립 → "급진 개화파"는 "대원군"에게 "명성황후"가 "개혁가들을 일망타진하려 한다."고 통보

"대원군"은 "명성황후ㆍ근왕세력ㆍ온건개화파"와 등을 돌리게 된 "유길준" 등의 "급진 개화파"를 포섭 → "대원군"은 "위정척사파ㆍ동학 농민군ㆍ개화파 일부"와 손잡고, 본격적으로 "명성황후" 폐출 작업 착수 → "청ㆍ일본" 외교관을 설득, "명성황후"의 패륜성 지적ㆍ폐출 당위성을 강조

 

3. 대원군 집권 (4차) : 대원군 (74세)

① 1895 : 10.08일, "명성황후 시해사건"발생→ 살해 (1895.10.08ㆍ향년 43세)→ "대원군" 사망(1898)

조선 : 흥선대원군ㆍ우범선(훈련대 2대대장ㆍ우장춘 부)ㆍ이두황ㆍ이진호ㆍ이주회(전 군부협판)ㆍ유길준(개화파 문신)ㆍ구연수(친일파 송병준의 사위) 등 다양한 계층의 조선인 지도자들이 내통ㆍ협조

 일본 : "조선"을 침략하는데, 가장 큰 걸림돌인 "명성황후" 제거에 동조

• 당일, "대원군"은 "고종"과 대면→ "이재면(고종 형ㆍ장남)"을 "궁내부대신"에 앉히고, 다시 정권장악

 

4. 대원군 실각 (4차) : 대원군 (74세)

① 1895 말 : "일본"에 의해, "대원군의 행동을 제약하는 법"을 정하여, 유폐생활을 강요당함.

• "명성황후 시해" 사건 후, "러시아"가 사태에 적극 개입 → "고종" 친위 세력(민씨 외척 등)은 "일본ㆍ개화파" 축출을 위해, 미온적인 "미국" 대신 "주한러시아공사 베베르"와 "아관파천" 기획 ("이호준"이 "이완용"을 보내, "러시아"에 접근)

• "박영효"의 갑오개혁 실패→ "고종" 친위 세력(민씨 외척 등)은 "박영효ㆍ일부 개화파"에게 "명성황후" "역적 누명(시해 모의ㆍ내란음모 등)"을 씌워, "조정"에서 추방

※ 아관파천 (俄館播遷ㆍ노관파천(露館播遷)ㆍ1896.02.11~ 1897.02.20.일까지 1년간) : "고종ㆍ세자(순종)"이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 제국 공사관(정동(貞洞))"으로 옮겨서 거처한 사건김홍집 (내각총리대신백성에게 살해)유길준 (일본 망명)"이완용이범진"등의 "친러 내각"이 조직

② 1896 : "아관파천" 발생하자, "대원군" 은퇴→ "양주"에 은거→ "아소정" (我笑亭ㆍ운현궁 별장ㆍ경기도 고양군 용강면 공덕리 소재)에서 "대원군" 사망 (1898.02.22ㆍ향년 77세)

③ 1896 : "아관파천" 발생→ 내각 해산→ "아관파천" 단행

"유길준"의 "단발령 공포"로, "춘천ㆍ원주" 지방에서 의병 봉기 → "친위대"가 지방 소요를 진압하러 떠난 사이, "고종"은 의도대로 "아관파천" 단행 "러시아 공관"에서 "세자(순종)" 1년 거주  자연히 "친일 개화파"들은 조정에서 사라짐.

"이완용"을 "외부대신ㆍ농상공부대신"에 임명 → "러시아" 협상 전담 → "러시아" 이용 → "고종ㆍ민씨 외척"은 "일본 견제ㆍ국제사회에서 독립을 인정"받으려는 요구

④ 1896 : "아관파천" 발생→ "독립협회" 설립

• 1897 : "러시아 공사"로 "고종" 환국(2월)→ 대한제국정 발표(10월ㆍ환구단)→ "독립문" 완공(11월)

• "미국통"이었던 "외부대신 이완용" 주장으로, "황실ㆍ내각"은 "미국"과 접촉 → "미국"에게 각종 이권을 헐값에 주어, "미국" 영향력을 이용해보고자, "미관파천" 제안  "미국""남북전쟁(1861~1865노예해방 전쟁)"이후, 외교기조는 "고립주의""러시아"와 충돌 우려거부 이권만 챙기고, 거부 "고종""이완용 능력" 불신 계기

• "러시아"는 조선의 "대미 접촉"에 분노ㆍ위기감→ "고종"에게 압력→ "이완용" 좌천, 중앙 정계에서 축출

⑤ 1901 : "이호준(이완용 양부ㆍ의정부 참정 (參政- 정1품))" 사망 (보호자ㆍ정치적 스승)

• "이호준"은 양아들 "이완용"에게 자신의 모든 정치적 지위ㆍ집안 제사를 양도 → "이완용"은 "양부" 대신, "수구파의 좌장자리"에 등장

• "조정"은 "일본" 견제를 위해, "이완용"을 재기용, "미국"과 비밀교섭 추진 → 몰래 "카츠라-태프트 밀약" 체결된 상태 → "미국"은 미서전쟁(美西戰爭)의 전리품이었던 "필리핀ㆍ북태평양"의 지배를 굳히고, "러시아"의 태평양 진출을 견제하기 위해, "일본"과 동맹 필요 → "미국"은 이권만 챙기고, 거부 → "한반도"에서 완전히 철수

⑥ 1904 : 러ㆍ일 전쟁 발발→ 일본 승리→ 대한제국은 더 이상 빌릴 외세의 힘이 모두 사라진 것

※ 러일전쟁 (露日戰爭, 1904.02.08~ 1905.09.05)→ 포츠머스 조약→ 적백내전 : "러시아ㆍ일본"이 "만주ㆍ한반도"에서 주도권을 쟁취하려는 욕망이 충돌하여, 발생

일본 - "만주ㆍ한반도" 일대의 권리를 점유하고자 하였으나, 서구열강(미ㆍ영ㆍ프)들의 "러시아 제국"을 견제하기 위해 발생  /  러시아- "러시아 해군ㆍ해상무역"을 목적으로, "태평양" 연안에 있는 "부동항"을 얻으려 했다"블라디보스토크"는 사용 가능한 유일한 항구였으나, "여름"에 주로 이용되었다"여순(旅順 : Port Arthur)"은 연중 사용할 수 있었다.

• 일 시 : 1904.02.08.~ 1905.09.05

• 장 소 : 만주 남부ㆍ특히 요동 반도와 한반도 근해

• 결 과 : 일본제국의 승리 → 포츠머스 조약체결 (1905.09.05일, "미국"의 주선) → "미 루스벨트 대통령"은 이 일로,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⑦ 1905 : 11.17일, "을사조약 (乙巳條約)" 체결→ "외교권" 박탈→ 내정 간섭 본격화

• 이제 "이완용ㆍ내각 대신"은 철저한 "일본 대리자"로 변신 → 모두 "친일파"로 전향 : 개화파(원래 친일파) + 수구파(일본을 경계) + 조정에 남은 자

• "이완용(학부대신)"은 "이토 히로부미(일본특파대사)"의 지시로, "어전회의"를 개최 → "고종" 협박, "을사조약"에 서명하게 함→ "이토 히로부미" 후원으로 "의정대신" 겸직 → "이완용" : 1907년, 대한제국 "내각" 최고 직이었던 "의정부 참정대신(정1품)"에 임명

⑧ 1907 :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고종"은 "이준ㆍ이상설" 등 밀사 파견

• 일본 침략의 부당성, "을사조약" 무효를 세계에 호소→ 국제 정치의 냉혹한 현실에 좌절

• "일본" 내 "이토 히로부미(온건파) 질책" 여론 생성 → 당초 계획보다 훨씬 앞당겨, "한국 병"합 추진 → "일본"은 친일 단체(일진회 등) 이용 → "이완용ㆍ송병준"은 "고종"에게 책임 추궁 → "순종"에게 양위 강요 → "순종" 즉위

⑨ 1907 : "순종"이 "정미 7조약" 서명→ "내정권" 양도

"이완용"의 참견으로, "고종"이 "순종의 황태자"로, "영친왕(순종의 막내 동생)" 결정

⑩ 1909 : "이완용" 독단으로, "기유각서"를 "일본"과 교환→ "사법권" 양도

⑪ 1910 : 08.22일, 한일병합 조약 (경술국치)

"이완용"이 "총리 대신" 자격으로 "일본"이 정해준 각본대로 "내각회의" 소집 → "한일병합"에 관한 건 상정 → "순종"이 직접 보는 앞에서, "합병 안" 통과

⑫ 1919 : 01.15일, "고종 황제" 승하 (昇遐)→ 3ㆍ1 운동

⑬ 1926 : 04.25일, "순종 황제" 승하 (昇遐)→ 6ㆍ10 만세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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