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미사변 (乙未事變)"은 1895.10.08일(음력 08.20) 새벽 6시경, "경복궁"에서 "명성황후 민씨 (明成皇后ㆍ민자영ㆍ민비ㆍ1851~1895.10.08ㆍ43세)"가 "미우라 고로(三浦梧樓ㆍ조선주재 일본공사)"가 지휘하는 일본 낭인 등에게 시해된 사건이다.
1. 을미사변 (乙未事變ㆍ명성황후 시해사건ㆍ명성황후 시해참변)
1895.10.08일(음력 08.20) 새벽 6시경, "경복궁"에서 "명성황후 민씨"가 "미우라 고로(三浦梧樓ㆍ조선주재 일본공사)"가 지휘하는 일본 낭인 등에게 시해된 사건이다. "일본 낭인들"은 치밀하게 계획을 짜고, "한성"으로 잠입, "명성황후의 암살"을 주도하였다. 이 과정에서 "조선인 병사들"을 훈련하여, 표면적으로 앞세웠다.
"암살 과정"에서 "조선인 병사들"이 길안내를 했고, "일본군"이 양성한 훈련대의 "우범선 (2대대장)ㆍ이두황 (1대대장)ㆍ이진호 (3대대장)ㆍ이주회 (전 군부협판)ㆍ구연수 (문신ㆍ송병준의 사위)"등이 일본 낭인에 협력했다.
일본인 낭인들은 "일본"을 출발하여, "인천 제물포 항구"를 거쳐, "조선인 군관들"의 경호ㆍ길 안내로 "경복궁"까지 반나절(3시간) 내에 진입했다. "경복궁"에서 "홍계훈"의 "근위대"를 통과하여, 궁녀 복장을 한 "명성황후"를 찾아내 사살한 뒤, 시신을 "녹원(鹿園ㆍ건청궁 동쪽)"에서 석유를 뿌려 소각했다. "일본"은 "조선의 분쟁"으로 일어난 일본 낭인들이 개입한 사건이라고 주장했지만, 2005년 "우치다 사다쓰지(일본 영사)"가 "을미사변 사건" 2달 뒤에 작성한 "일본 천황"이 결재한 보고서가 공개되었다.
일반적으로 "고종"이 "아관파천"을 결정하게 된 주요 원인, "대한제국 성립"의 한 원인으로 평가한다. 이 사건 계기로, "한국의 개화파"들 중 일부는 "일본"으로 망명하게 됐다. "한국 친일파ㆍ일본 극우 인사"들은 한국의 근대화를 방해하는 "민비"를 처단함으로써, 한국의 근대화를 촉진하였다고 주장한다. 반면 서구화만을 근대화로 오해하여, 자주적 근대화를 "수구ㆍ반동으로 여겨서 일으킨 폭거"라는 시각도 존재한다.
2. 개 요
① 암호명 : 여우사냥
• 일 시 : 1895.10.08일(음력 08.20) 새벽 5:00~ 6:00시경 • 장 소 : 옥호루(玉壺樓ㆍ왕후의 침전)
경복궁 건청궁(乾淸宮ㆍ왕/왕후 거처) 곤녕합(坤寧閤ㆍ왕의 침전ㆍ건청궁 동쪽)의 남쪽 누각 (폭도들은 "광화문(남쪽)ㆍ춘생문(동북쪽)ㆍ추성문(서북쪽)" 등 3개의 문으로 침입)
• 목 적 : 조선을 침략하는데, 가장 큰 걸림돌인 "명성황후"를 살해
당시 일본으로서는 대표적 인물인 "명성황후"를 제거하여, "조선ㆍ러시아"가 결탁할 여지를 없애는 것밖에는 방책이 없었다 → 기록을 조작하여, "살해" 책임을 "흥선 대원군ㆍ조선인 훈련대"에게 돌리려 했다 → 살해는 일본인 군인들과 낭인들이 맡고, 대외적으로는 불만을 품은 "조선인 군인들의 반란"이었다고 발표하는 것이 골자 → "대원군의 서약"을 받음 (그러나 "흥선대원군"의 정치 참여는 바라지 않았다)
② 계획 : 1895.09월, " 시해계획"을 세운 "이노우에(전 일본공사)"가 일본으로 돌아간 때는 사건 20일 전
• 일 시 : 10.03일(음력 08.15) - 세부 계획이 세워진 때 • 장 소 : 일본 공사관ㆍ지하 밀실
• 참 석 : 미우라 고로 (三浦梧樓ㆍ조선주재 일본공사ㆍ예비역 육군중장)ㆍ스기무라 후카시 (일등서기관)ㆍ오카모토 류노스케 대위 (낭인 두목/ 궁내부 및 군부 고문관/ 평소 흥선대원군과 친분이 두터운 사이/ 1894.06.21일, 경복궁 쿠데타 시, 경복궁 점령 지휘자)ㆍ호리구치 구마이치 (영사관보)ㆍ구스노세 유키히코 (공사관 무관/포병 중좌)ㆍ이 모의에 "우치다 사다쓰치 (1등 영사)"는 빠졌다.
※ 시바 시로 (미우라 참모) : "하버드 대학ㆍ펜실베이니아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한 고급 지식인, 조선에 나와 있는 "일본의 극우 낭인단체인 천우협(天佑俠)ㆍ현양사(玄洋社)"와 긴밀하게 협의하면서, "미우라"를 보좌하였다.
※ "일본의 극우 낭인단체인 천우협(天佑俠)ㆍ현양사(玄洋社) :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수단ㆍ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고급 지식인 출신이 많았으며, 심지어 동경제국대학 출신도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직업적 정치깡패"가 아니라, 고도로 의식화된 "지식인 테러리스트였다"는 주장도 있다.
< 주요 내용 > • 거사일은 10.10일 새벽으로 한다.
• 시해의 주역은 "일본 낭인"이 맡고, 외관상으로는 "흥선대원군ㆍ조선인 훈련대"의 반란으로 꾸민다 → "오카모토 류노스케 대위"에게 맡겨졌다.
• 일본인 가담자는 "낭인 자객ㆍ일본 수비대 군인ㆍ일본 공사관 순사"로 구성한다 → "낭인 자객"은 한양에서 있던 "아다치 겐조(한성신보 사장)"가 맡는다.
• 낭인 30여 명 (규슈ㆍ구마모토 현 출신)ㆍ구니토모 시게아키(한성신보 주필)ㆍ고바야가와 히데오(편집장)ㆍ기자(히라야마 이와히코ㆍ사사키 마사유키ㆍ기쿠치 겐조)등 민간인 참여 → 민간인의 참여는 일이 세상에 알려지더라도, "공사관ㆍ일본 정부"의 입장을 유리하게 만들 수 있었기 때문에 비중이 컸다.
• "일본 수비대ㆍ순사ㆍ조선인 훈련대"를 움직이는 일은 "일본 공사관" 소관이다 → "구스노세 유키히코(공사관 무관/포병 중좌)" 등이 참여
③ 암살 배후
• 암살 배후 : 이노우에 가오루 (전 일본공사)ㆍ이토 히로부미 총리 등 일본 정치의 최고 원로ㆍ각료ㆍ야마가타 아리토모 (육군대장)ㆍ무쓰 무네미쓰 (외상)
• 암살 지휘 : 미우라 고로 (三浦梧樓ㆍ조선주재 일본공사/ 예비역 육군중장)외 48명 (증거불충분) → 재판을 받고 석방되자, "일본 메이지 천황"이 직접 시종을 보내 치하했다.
• 직접적 암살자 : 데리자키 다이키치 (寺崎泰吉)?ㆍ낭인(나카무라 다테오ㆍ후지카스ㆍ구니토모 시게아키 등)ㆍ미야모토 소위ㆍ오카모토 류노스케 대위ㆍ마키 등
• 시신 유기 : 궁녀 복장을 한 "명성황후"를 찾아내 사살한 뒤, 시신을 "녹원(鹿園ㆍ건청궁 동쪽)"에서 석유를 뿌려 소각한 뒤, 유골의 일부는 "연못(향원지(香遠池)ㆍ함화당- 집경당 바로 뒤쪽 경복궁의 후원에 네모난 연못)"에 던졌다.
• 시체 소각 협조 : 구연수(문신ㆍ송병준의 사위)
• 암살 참여 : 낭인 자객(낭인 30여 명ㆍ규슈ㆍ구마모토 현 출신)ㆍ 조선군(일본인 교관 4~ 5명이 인솔한 관군 1ㆍ2ㆍ3대대) 약 250~300명ㆍ일본 공사관 소관(일본 수비대ㆍ순사ㆍ조선인 훈련대)ㆍ일본의 극우 낭인단체(천우협(天佑俠)ㆍ현양사(玄洋社))ㆍ시바 시로(미우라 참모)ㆍ오카모토 류노스케 대위 (낭인 두목/ 궁내부 및 군부 고문관/ 평소 흥선대원군과 친분이 두터운 사이/ 1894.06.21일, 경복궁 쿠데타 시, 경복궁 점령 지휘자)ㆍ스기무라 후카시 (일등서기관)ㆍ구스노세 유키히코 (공사관 무관/포병 중좌)ㆍ아다치 겐조(한성신보 사장ㆍ낭인 자객 담당)ㆍ구니토모 시게아키(한성신보 주필)ㆍ고바야가와 히데오(편집장)ㆍ기자(히라야마 이와히코ㆍ사사키 마사유키ㆍ기쿠치 겐조)
• 협조자 : 흥선대원군ㆍ유길준(개화파 문신)ㆍ구연수(친일파, 송병준의 사위)ㆍ이주회(전 군부협판)ㆍ우범선(조선국 관군 2대대장ㆍ육군 참령ㆍ장남 우장춘 박사 (원예육종학자)ㆍ일본 여인과 결혼)ㆍ이두황(조선국 관군 1대대장)ㆍ이진호(조선국 관군 3대대장ㆍ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ㆍ윤석우(국왕 친위대 부위(副尉))ㆍ박선(일본 공사관 통역관)ㆍ조선인 병사들(궁궐 수비대의 일부ㆍ구식군대 출신) → "명성황후"가 복권되면서, 가담자인 "박선ㆍ이주회"는 처형당하고, "우범선ㆍ이두황ㆍ이진호"는 일본으로 망명했다 → "우범선"은 일본으로 찾아간 "자객 고영근(민씨의 측근ㆍ개화파 문신)"에게 암살되었고, "구연수"는 한일합방 이후에 복권됐다.
• 목격자 : 세레딘 사바틴 (Sabatinㆍ러시아인 건축기사)ㆍ다이 대령 (W.M.Dyeㆍ시위대 미국인 교관)ㆍ궁녀ㆍ환관ㆍ태자 이척
• 대항자 : 홍계훈(경비대장)ㆍ현흥택(정령ㆍ연대장)ㆍ이학균(부령)ㆍ이범진(궁내부 대신)ㆍ이경직(궁내부 대신ㆍ명성황후 방문 앞에서 살해)ㆍ다이 장군(미국인)
※ 홍계훈 (1842~1895): 1882.08월 "임오군란" 당시, "수문장"으로 "명성황후"를 누이로 속여서, "명성황후"를 업고 피신시킨 뒤, "경기도 여주"로 호송했고, 그 공으로 출세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양호초토사"로 "전주"를 탈환하고, 그 공으로 "훈련대장"이 되었다. 1895.10.08일(음력 08.20) 새벽 5:50분경, "을미사변" 때, 소수의 "도성수비대" 병력을 이끌고 "광화문" 앞에서, "일본인 낭인들ㆍ일본이 훈련시킨 훈련대의 우범선ㆍ이두황 등 친일파 군인 내통자들을 막다가 죽었다.
• 저항 : 경복궁 입구 - 궁궐 수비대 (500여 명ㆍ미국인 다이 장군 지휘) → 쉽게 격퇴 당함 (겁을 먹고, 무기ㆍ군복 상의를 벗어던지고, 도주) → "갑오경장" 때, 우수한 무기를 빼앗겨, "일본군"을 당할 수가 없었음.
• 저항 : 건청궁 입구 - 궁궐 수비대(3~400여 명ㆍ현흥택 연대장ㆍ다이 장군 지휘) → 총격전 패배
• 궁녀 : 일본 폭도들의 폭력ㆍ협박 앞에서도 굴복 않고, 당당
3. 의 문
① "명성황후"를 죽이기 전, "능욕했다" ?
"에조 보고서"를 근거로, "일본 군인들은 황후를 죽이기에 앞서 능욕했다"는 주장이 있다. 당시 "조선 정부 고문"으로 파견 와 있던 "일본인 다치스카 에조"는 "낭인들이 왕비를 강간했다"는 기록을 남겼는데, "스에마쓰(일본 정부 법제국장)"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낭인들이 왕비의 시신을 자른 뒤, 국부검사를 했다"고 기록하였다.
"특히 무리들은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 왕비를 끌어내어 두세 군데 칼로 상처를 입혔다. 나아가 왕비를 발가벗긴 후 국부검사(웃을(笑) 일이다. 또한 노할(怒) 일이다)를 하였다. 그러고는 마지막으로 기름을 부어 소실(燒失)시키는 등 차마 이를 글(筆)로 옮기기조차 어렵도다. 그 외에 궁내부 대신을 참혹한 방법으로 살해했다." < 다치즈카 에조(立塚英藏)ㆍ에조 보고서> 그러나 "시간"이 아니라, "일본 군인들이 황후를 죽이기에 앞서 능욕했다"는 주장도 있다.
② 암살자는 "데리자키 다이키치 (寺崎泰吉)" ?
"흉도" 가운데, 황후를 죽인 사람으로 자주 지목되는 사람은 "데라자키 다이키치(寺崎泰吉)"이다. 그 외에도 "낭인(나카무라 다테오ㆍ후지카스ㆍ구니토모 시게아키 등)ㆍ미야모토 소위ㆍ마키 등의 일본 군인들"이 "황후 침실"에 난입하여, 칼을 휘둘렀기 때문에, 누가 범인인지 지목하기 힘들다는 지적도 있다.
또한 "암살 배후"로 "일본 공사 이노우에 가오루" 등이 지목되었다. 2006년, "최문형(한양대 교수)"가 "일본 헌정자료실"에서 찾아낸 "야마가타 아리토모 육군대장ㆍ무쓰 무네미쓰 외상" 사이의 편지에 의해, "일본 정부의 개입설"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또한 "황후"는 방 한 구석에 기대어 몸을 감추고 있다가, "낭인 오카모토 류노스케"의 눈에 띄어, 그 머리를 붙잡혔다고 한다.
※ 오카모토 류노스케 대위 : 낭인 두목ㆍ궁내부 및 군부 고문관ㆍ평소 흥선대원군과 친분이 두터운 사이ㆍ1894.06.21일, 경복궁 쿠데타 시, 경복궁 점령 지휘자
4. "고종"의 방어ㆍ"명성황후" 신원확인 방법
① "고종"의 방어
"고종"은 "명성황후"의 신변을 염려하여, 서양인 궁궐 경비원인 "세레딘 사바틴(러시아인 경비원)을 고용→ 그러나 그는 폭동이 있으리라는 정보를 "중국인"으로부터 받고도 방어대책을 건의하거나 세우지 않았다. "고종"은 감히 "왕의 침전 (곤녕합(乾淸宮ㆍ건청궁 동쪽)"만은 감히 침범하지 못하리라 예상하고, "황후"의 침전인 "옥호루 (玉壺樓ㆍ곤녕합의 남쪽 누각ㆍ명성황후가 암살당한 곳)"에서 "고종"의 침전인 "곤녕합"으로 부르고, 그래도 근심 되어, "황후"를 일반 궁녀와 같은 복장으로 궁녀들과 함께 앉혀, 폭도들의 눈을 피하려는 조치를 취했다.
② "명성황후"의 초상화 제작ㆍ신원확인 방법
당시 살해 시, "낭인들"은 살해한 4명의 여인 가운데 누가 황후인지를 확인하는 방법으로, "궁녀와 태자를 불러와서 확인했다는 설ㆍ황후 얼굴을 잘 아는 고무라의 딸을 불러와서 확인했다는 설(매천야록)ㆍ황후의 얼굴에 있는 마마 자국을 확인했다는 설ㆍ처음부터 초상화를 들고 들어왔다는 설"이 제기되고 있으며, 이러한 여러 방법을 섞어서 썼으리라는 주장도 있다.
"매천야록ㆍ대한계년사"에 따르면, "일본"은 "고무라의 딸"을 "명성황후의 양녀"로 삼게 하였는데, 뒤에 그녀는 "명성황후의 신원을 확인하는 일을 맡았다"고 한다. "고무라의 딸"과 "명성황후"가 궁중 연희를 보고 있을 때, 배우 가운데 종왜(從倭, 일본을 따르는 사람)으로 하여금 초상화를 그리게 했다고 한다.
※ 고무라 주타로 (1855~1911) : 1901(1차 가쓰라 내각)의 외무대신ㆍ1908(2차 가쓰라 내각)의 외무대신
5. 사건 (1895.10.08일) 발생 전, 상황
① 1894년 가을 : "흥선대원군"의 제거 결정
"명성황후"는 "러시아 공사"와 비밀 접촉하고, 1894년 가을 개화당 모두를 살해하려는 계획을 꾸미다가, "대원군"의 첩보망에 발각되었는데, "대원군"은 "일본공사 오카모토"와 협의 끝에 언약을 받고, "일본인들"로부터 약간의 도움을 얻어, "명성황후를 죽이기로 결정하였다"는 것이다.
"흥선대원군"은 정치적인 원한관계로 "민비 암살"을 기도했고, "일본 영사관"을 찾아가, "일본공사"와 협의하고, 일본 측에 약간의 도움을 요청했다. "유길준"은 "도움을 얻기 위해서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고 했다.
② 1895.07월 : "박영효"의 "명성황후 암살" 미수 사건
"박영효"는 별도로 "명성황후"를 암살할 계획을 세우는데. "명성황후"는 "일본ㆍ군국기무처"가 마음대로 하여, "고종"은 단 1가지 일도 단독으로 결정할 수 없었다. "명성황후"는 이를 못마땅하고 분하게 여겨, "러시아"와의 제휴를 통해, 점차로 군권(軍權)을 회복하기를 기원했으나, "박영효"는 이를 우려했다.
"명성황후"는 "군국기무처"의 일부 급진개화파가 독단하는 것을 두려워하였고, 이들의 정책을 뒤엎을 기회를 찾았다. 이때 "박영효"는 단독으로 계략을 세워, "왕비 암살"을 계획하였다. "박영효"는 "유길준"을 자기의 조력자로 여겨, 가만히 뜻을 알렸다. "유길준"은 매우 놀라워하며, "박영효의 명성황후 암살 계획"을 바로 "고종"에게 밀고했다. 그 무렵, "박영효의 명성황후 암살 음모"를 폭로한 "유길준"은 따로 "대원군ㆍ이준용"의 "왕비 암살 모의"에 가담한 상태였다.
③ 1895.09월 : "흥선대원군"의 "일본" 협조 거절
"미우라 고로(일본공사/예비역 육군중장)ㆍ스기무라 후카시(일등서기관)ㆍ오카모토 류노스케 대위(낭인 두목/궁내부 및 군부 고문관/평소 흥선대원군과 친분이 두터운 사이)"등이 "대원군"의 도움을 받으려고 다가갔으나, "대원군"은 일단 거절하였다. "대원군"은 "아소정 별장(我笑亭ㆍ고양군 용강면 공덕리ㆍ마포구 염리동)"에 칩거하면서, "교동"에 "장손 이준용"이 유폐된 일에 불만을 품고, 외출도 하지 않고, 집 안에만 지내고 있었다.
④ 1895.09월 : "이노우에 가오루 (주한 전 일본공사) 부부"의 왕궁 방문
"이노우에 가오루(주한 전 일본공사) 부부"는 사건이 있기 1달 전 일본을 다녀온 뒤, 왕궁을 방문하여, "조선 왕실의 안전을 확보한다."고 약속하면서, 9,000원에 상당하는 선물을 "고종ㆍ명성황후"에게 바쳤다고 한다. 이때의 "이노우에"의 행동은 일본에 대한 "고종ㆍ명성황후"의 경계심을 풀게 하려는 계산된 연극이었다는 주장이 있다.
⑤ 1895.09.01 : "미우라 고로 (일본공사ㆍ예비역 육군중장)"의 공사 부임
육군중장 출신 "미우라 고로"가 1895.09.01일(음력 07.15) 공사로 부임하는데, 전문 외교관이 아닌 "군인 출신을 공사로 보냈다는 사실 자체가 특수 임무를 띠고 있었음을 암시한다."는 주장도 있다. 우익군인 세력의 거두였던 "미우라"는 조선에 온 뒤, 두문불출하고 불경을 외우면서 지냈는데, 그래서 붙여진 별명이 "염불 공사"였고, "수도승 같다"라는 평을 들었는데, 이는 "경계심을 풀기 위한 위장술이었다."는 주장이 있다.
⑥ 1895.10.06 : "흥선대원군"의 "약조문(4개조ㆍ정치참여 않는다)"에 자필 서명
일본으로서도 "흥선대원군"의 정치 참여는 바라지 않았다. 그래서 "스기무라(서기관)"이 "4개조 약조문"을 초안하고, 10.06일(음력 08.18) "오카모토 류노스케 대위"가 이를 가지고, "공덕리"에 가서, "대원군의 서약"을 받았는데, "대원군"은 "명성황후" 제거와 관련된 "약조문"에 자필로 서명했다.
내용은 "명성황후"가 죽은 뒤, "대원군"이 국왕을 보필해 궁중을 감독하되, 내각에 정사를 맡겨 "일체 대원군이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명성황후"가 죽은 뒤, "대원군"이 정치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미리 언약을 받아 둔 것이다.
"대원군"은 "이재면(장남)ㆍ이준용(장손자)"와 함께 있는 자리에서 자필로 "약조문"에 서명했다. "오카모토"는 "대원군"을 만난 뒤, 일본으로 가는 척하다가, 급히 서울로 돌아왔다.
⑦ 1895.10.07. 새벽 2시 : "조선 정부"가 "훈련대"의 해산을 명령
9시 : "안경수(군부대신)"가 급히 이 사실을 "미우라"에게 통보하고, 뒤이어 "우범선"도 달려와 "미우라"에게 보고→ 이에 "미우라"는 거사 날짜를 그날 밤으로 바꾸고, "스기무라(일등서기관)"과 의논한 뒤, "오카모토 류노스케 대위 (낭인 두목)"을 불러들인다.
⑧ "미우라"는 예상보다 일찍 "훈련대"가 해산되자 거사 일자(당초 10.10일 새벽)을 10.08일 새벽 4시로 앞당기게 된다. 그러나 바뀐 계획도 차질이 발생한다.
새벽 4시에 작전을 끝내려면, 늦어도 새벽 3시까지는 "흥선대원군ㆍ낭인들"이 경복궁에 진입해야 한다. 그러나 "대원군"이 "공덕리 별장"을 떠난 때는 새벽 3시였고, "경복궁"에 도착한 때는 새벽 5시가 넘어서였으며, "명성황후"가 시해된 때는 6시경이었고, 그래서 많은 목격자가 나타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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