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미사변 (乙未事變)"은 1895.10.08일(음력 08.20) 새벽 6시경, "경복궁"에서 "명성황후 민씨 (明成皇后ㆍ민자영ㆍ민비ㆍ1851~1895.10.08ㆍ43세)"가 "미우라 고로(三浦梧樓ㆍ조선주재 일본공사)"가 지휘하는 일본 낭인 등에게 시해된 사건이다.
1. 사건(1895.10.08일) 진행과정
① 일본 낭인 자객 (30여 명ㆍ규슈ㆍ구마모토 현 출신) 입국
"일본 낭인"들은 "일본"을 출발하여, "인천 제물포 항구"를 거쳐, "조선인 군관들"의 경호ㆍ길 안내로 "경복궁"까지 반나절 (3시간) 내에 진입했다.
② "미우라" 지시ㆍ일본인 60여 명(공사관 직원ㆍ고문관ㆍ순사ㆍ기자 등) "대원군" 별장으로 집합
또한 "일본"은 "낭인ㆍ일본 군인ㆍ명성황후에 불만을 품은 조선인 군인" 등 300여 명가량을 모았다. "미우라"는 거사 계획서인 "입궐방략서(入闕方略書)"를 "호리쿠치 구마이치(영사관보)"에게 주고, 용산으로 가서 거사 준비를 지시했고, 이에 "한성신보 직원들ㆍ낭인들"은 칼ㆍ총을 들고, "용산"으로 모였다. "미우라"는 "오기하라 히데지로"에게 "영사관 순사들"을 인솔하여 사복에 칼을 차고, 용산으로 가도록 지시한다. "아사야마"로 하여금 "군부협판 이주회"에게 사실을 알리도록 하였고, "이주회"가 조선인 몇 명을 규합하여 "공덕동"으로 가도록 하였다.
③ 00:00 : "일본인"들이 "공덕리"에 도착
"대원군"이 은거했던 별장 "아소정(我笑亭ㆍ고양군 용강면 공덕리 별장)"에 모인 사람은 "공사관 직원ㆍ고문관ㆍ순사ㆍ기자 "등 약 60여 명에 달했으며, 이들은 술에 취한 상태였고, 복장도 제멋대로였다. "대원군"은 그들이 온다는 사실을 모르고, 잠을 자고 있었다. "일본인"들은 담을 넘어 가서, "별장 경리(警吏)"를 모두 포박하여 가두고 옷을 빼앗아, 일본인 순사들"이 입었는데, 조선인으로 위장하려 함이었다.
④ "대원군"은 "미우라 고로 (조선주재 일본공사ㆍ예비역 육군중장)"와 결탁ㆍ합의
"대원군"은 "미우라"와 결탁하고 합의하여, 가마에 태워져 "경복궁"으로 나아가게 되는데, "대원군"은 먼저 "명성황후가 죽음을 맞아 마땅하다"는 주장의 "고유문"을 발표하고, 이를 내일 서울 시내에 게시하라고 지시했다. 고유문의 내용은 "민씨 일가의 척족이 권력을 잡고, 갑오경장의 개혁을 무위로 돌려 나라를 위태롭게 하고 있으니, 이들을 제거해 버리겠다."는 내용이었다. 이를 대원군은 친필로, "일본"의 강요 없이 적어 놓았다.
대원군의 "고유문"으로 인해, 이 글을 미리 전해들은 조선의 학자들과 지식인들은 매우 혼란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대원군이 일본의 강요에 의해 그러했는지 본인의 의지로 그러했는지는 논쟁이 있다. 일설에는 오랜 실랑이 끝에 대원군이 집을 나섰는데, 아마도 일본인들이 대원군을 반강제로 끌어냈으리라 여겨지며, 76세 노령의 대원군이 이 쿠데타에 가담했다고 믿기지 않는다는 주장도 있다.
1894.04.15일 고등재판소 판사 권재현이 법부에 제출한 "권재형 보고서"에 따르면, 흥선대원군은 입궐하던 날, 간사한 무리를 몰아낸다는 요지의 유시를 내렸다고 한다. 그러나 "매천야록"에서는 이 유시가 "김홍집" 등이 "대원군"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기 위해 만든 것이라고 하였다. 한편 "한국통사"에서는 "대원군"이 입궐하는 "일본인"들에게 "오늘의 일은 단지 왕실을 호위하는 것뿐이다. 궁중에서 폭거를 행하지 말라."고 했다 한다. 이를 종합하면, "흥선대원군"이 "황후 시해"에 동의했는지, 매우 의문이다.
⑤ 02:00 : "시위대ㆍ궁궐 경비원"들은 이미 "일본군"의 수상한 동태를 파악했으나 안이하게 경비
"별군관"에게 "고종"의 호위경관 2명이 달려와, "삼군부(광화문 앞 경비실)"에 "일본군ㆍ조선군 훈련대"가 운집해 있다고 보고하자, "현흥택 정령"은 즉시 "궁궐 경비병" 여럿을 "광화문"으로 급히 보내 상황을 확인했다.
⑥ 03:00 : "대원군"이 교여를 타고 떠났고, "대원군" 일행, "서대문"에서 합류, "경복궁" 포위
"대원군" 일행이 "서대문" 쯤에 이르렀을 때, "우범선"이 이끄는 "훈련대 제2대대"와 합류했다. 그들은 그때까지는 "황후를 시해한다."는 사실을 몰랐고, 잠시 뒤, 장소를 잘못 알아 엉뚱한 곳으로 갔던 140여 명의 "일본 수비대 제1중대"가 도착하였다. 여기에서 또 시간이 지체되었다. 이때 "경복궁"에서는 "일본 수비대 제3중대"가 "광화문" 부근에서 대기하고 있었고, "수비대 제2중대장"은 "훈련대 제2대대"를 인솔하고, "춘생문(경복궁 동북문)" 부근에 집결하였다.
그들은 새벽 2시경부터, 미리 와서 "경복궁"을 포위하고 있다가, 광화문 쪽에서 총소리가 들리자, 사방에서 궁궐 담을 넘어, "명성황후"가 거처하는 "건청궁(乾淸宮)" 쪽으로 돌진했다.
⑦ 04:00 : "조선군 훈련대 대대"가 "춘생문(春生門ㆍ경복궁 동북문)ㆍ추성문(秋成門ㆍ경복궁 서북문)"을 포위하였다고 "현흥택 정령"은 증언했다.
"세레딘 사바틴 (Sabatinㆍ러시아인 건축기사)ㆍ다이 대령 (W.M.Dyeㆍ시위대 미국인 교관)"은 "이학균 부령"으로부터 보고받자마자 일어나, "별군관 실"로 갔으나, 2명의 부령과 최소한 6~7명의 당직 장교가 야근하고 있어야 함에도, 그곳에는 단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고 "사바틴"은 증언했다.
⑧ 04:30 : "고종"은 이미 궁궐이 소란함을 알고 있었으며, "명성황후"는 위험한 침전인 "옥호루(玉壺樓)"를 떠나 은신하였으리라 여겨지나, 궁궐을 벗어나지는 못했으리라 보았다.
"시위대ㆍ궁궐 경비원"들은 "고종"에게 급보를 전함→ "고종"에게 "황후"가 안전한 곳에 피신했다고 답변했으나, 당시의 급박한 정황으로 보아, 마땅한 피신처를 찾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했음.
⑨ "고종"은 "일본군이 궁궐을 포위했다"는 급보를 받고, "이범진"에게 시간을 다투어, "미국 공사관ㆍ러시아 공사관"에 뛰어가 도움을 요청하라고 명령했다.
"이범진(궁내부 대신ㆍ1907년 헤이그 특사의 일원인 이위종의 부친)"은 일본인 순찰을 피해, 높이 4~5m인 담에서 뛰어내려 궁궐을 탈출하였다. "미국 공사관"에 도착했을 때, "경복궁" 쪽에서 첫 총성이 들려왔다고 "이범진"은 증언했다. 그는 "미국공사관"을 거쳐, "러시아공사관"을 찾아가 "궁궐이 일본군에 포위되었음"을 알리고 구원을 요청했다.
한편 "고종"이 "미국 공사관ㆍ러시아 공사관"에 연락하라고 한 까닭은 "미국인ㆍ러시아인"이 궁궐 내에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예로 "시위대 지휘관"은 "퇴역미군 대령 출신의 다이(W.M. Dye)"였고, "미국 공사관"에서 의료 선교사로 활동하던 "앨런"은 "최초의 외국인 어의"였다. 또한 "미국 외교관ㆍ러시아 외교관"이 "일본은 유럽을 두려워한다."고 건의하자, 채용한 유럽인 경비원 가운데 "건축기사 사바틴"이 있었다.
⑩ 05:00 : "일본인"들의 "경복궁" 난입
새벽 4:30분 경, "일본인 교관"에게 훈련받은 "조선군" 약 250~ 300명이 "일본인 교관" 4~ 5명의 인솔을 받으며 뭔가 상의하였고, 그 뒤, 한 조선인이 큰소리로 대문을 열어 달라고 몇 번 외쳤다. 새벽 5:00시 무렵, "대원군" 일행이 "광화문" 앞에 이르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일본 수비대 제3중대"가 미리 준비한 긴 사다리를 건네고, "일본 순사들"이 담을 넘어, 빗장을 풀었다. "광화문"을 지키던 "경비병ㆍ순검"들이 저항하여, 총격전이 벌어졌다.
"일본인 낭인ㆍ조선인"들은 "광화문"을 넘어, "경복궁" 앞에 이르렀다. "광화문"이 열리자, "일본군ㆍ조선인 근위대" 병력이 소리를 지르며, "경복궁"을 향해 돌진했다. "경복궁" 입구에는 "미국인 다이 장군"이 지휘하는 "조선인 경비대(500여 명)"이 지키고 있었으나, 이들의 존재를 사전에 알고 있었던 일본인 낭인들과 조선인 병력은 쉽게 경비대를 격퇴했다.
많은 사상자를 낸, "다이 장군"은 "경비대"를 이끌고 도망쳤고, "낭인ㆍ조선인 길 안내자"들은 쉽게 "경복궁"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담을 넘은 "일본인 폭도들"이 "궁궐 경비병"에게 발포하자, "경비병"은 무기와 군복상의를 벗어던져 버리고 초소를 떠나, 어디론가 달아나기도 했다. 한편 폭도들은 "광화문(남쪽)ㆍ춘생문(동북쪽)ㆍ추성문(서북쪽)" 등 3개의 문으로 침입하였다.
⑪ 05:00 : 경복궁 건청궁 (乾淸宮ㆍ왕/왕후 거처) 진입
"경복궁"에 왕비가 없음을 안 "낭인ㆍ조선인 협력자"들은 "건청궁(경복궁 북쪽)"으로 향한다. "경복궁"에서 일본인들을 막으려고, "홍계훈(경비대장)"이 이들을 가로막았으나, "홍계훈ㆍ경비대원"들은 "일본인 낭인ㆍ낭인들에게 협력한 조선인 군인"과 교전하였으나, 이들의 "화승총"은 "일본의 개량된 총"을 당해내지 못하고, 발포에 맞아 죽는다. 일설에는 "홍계훈"이 "일본인"에게 호통을 치다가, "일본 수비대"가 쏜 총탄에 맞아 쓰러졌다고도 한다.
3~400여 명의 "시위대"가 "연대장 현흥택ㆍ교관 다이 장군"의 지휘를 받으며 총격전을 벌였으나, "갑오경장" 때, 우수한 무기를 빼앗겨, "일본군"을 당할 수가 없었다. "명성황후"가 기거하던 "건청궁"까지 다가온 "흉도들"은 대오를 맞추어, "합문(閤門)"을 포위하고 파수를 보았다. 자객들은 "전당"으로 들어가, "밀실"을 수색하기 시작했고, "대원군"은 "근정전" 뒤 "강녕전(康寧殿)" 옆에서 기다렸다. "훈련대 군인들"은 "건청군" 앞마당에서 휴식하며, "황후 시해"에는 가담하지 않았다.
"권재형 보고서(법부협판 권재형의 보고서)"에 따르면, "고종"은 "흉도들"의 주의를 따돌려, 황후의 피신을 돕기 위해, 밀실의 뒷문을 모두 열고, 흉도들이 잘 보이는 방 문 앞에 나와 서 있었는데, 흉도들은 칼날을 휘두르며, 그 방에 들어가 "고종"의 어깨ㆍ팔을 끌고 다니기도 하고, "고종" 옆에서 권총을 쏘고, "궁녀들"을 난타하며, 이리저리 끌고 다녔다고 한다.
또한 무단 침입을 꾸짖는 "고종"의 어깨에 무례하게 손을 얹어 주저앉혔으며, "태자"도 다른 방에서 붙잡혀 머리채를 휘둘리고, 관이 벗겨지고, 칼등으로 목 줄기를 얻어맞는 수모를 당했다. 당시 "낭인들"은 남의 나라 국모를 무참하게 죽이는 일에 가담하면서도, 양심의 가책은 커녕, "일본 국가를 위해 충성하는 자부심"에 가득 차 있었다.
⑫ 곤녕합 (乾淸宮ㆍ건청궁(乾淸宮ㆍ왕/왕후 거처) 동쪽) 진입, 옥호루 (玉壺樓ㆍ곤녕합의 남쪽 누각ㆍ명성황후가 암살당한 곳) 진입
"궁 안"의 상황과 병력들의 "궁 안"에서의 행동은 자료와 증언마다 차이가 있다. "사바틴(러시아인 건축기사)"가 "고종"을 호위하고 있었는데, 궁전 뜰에서 일본인의 행패를 목격했다. "다이 장군(시위대 교관)"도 시위대를 지휘하면서, 궁 안에서 이 참상을 목격했다.
"사바틴ㆍ다이"는 둘 다, "일본군인"들에게 폭행을 당했는데, 뒷날 "일본인"들의 만행을 세계에 폭로하는 증언을 하였다. "사바틴"은 궁궐 안에서 수비하던 도중, "폭도ㆍ환관(宦官)ㆍ벼슬아치ㆍ궁노(宮奴)" 등에게 떠밀렸다가 "일본인 대장"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말을 걸어 자신의 원래 직업인 "건축가"임을 밝히고, 호위를 요청했다고 한다. 그 뒤 그곳에서 서서, 사건을 목격하다가, "명성황후 시해"에 앞서 두들겨 맞고 현장에서 쫓겨난다.
흉도들은 궁녀들의 머리채를 잡아끌고 명성황후의 처소를 대라고 윽박지르는 등 난폭하게 행동했다. 외침을 들은 "명성황후"는 "궁녀 복"으로 갈아입고, "건청궁 곤녕합" 쪽에 있는 "옥호루"로 은신했다. "궁녀ㆍ내관들"은 "낭인들"에 의해 피습당하고 있었고, "궁녀들"은 두들겨 맞고, 내던져짐에도 신음조차 내지 않았다.
"건청궁 동쪽 곤녕합"에서 "명성황후"를 찾아냈는데, "이경직(궁내부 대신)"이 두 팔을 벌려, "명성황후ㆍ궁녀들 앞(이나 황후가 있는 방문 앞)"을 가로막고 나섰다가, 권총을 맞고 쓰러졌으며, 이어 "히라야마 이와히코(신문기자)"가 칼로 두 팔을 베었다. 다시 버둥대며, 일행을 방해하던 "이경직"은 "낭인들"에 의해, 허리가 베여 죽게 된다.
⑬ 06:00 : "명성황후"를 "곤녕합의 옥호루"에서 살해
"황후"가 절명한 시각은 "사바틴"이 현장을 떠난 지 2~30분 뒤인 10.08일 새벽 05:50분 이후인 "아침 6시 직전이나 직후"로 여겨지나, 절명한 곳이 어디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어쨋든 방 안에서 "황후의 시신을 보았다"는 증언은 많다.
"곤녕합"에 진입한 "낭인ㆍ조선인 협력자들"은 "궁녀ㆍ상궁들"을 일일이 확인하고, 누가 왕후인지 색출하던 중, 변복한 "명성황후"를 찾아내자, "건청궁 동쪽 곤녕합의 옥호루"에서 살해한다.
"황후"는 방 한 구석에 기대어 몸을 감추고 있다가, "낭인 오카모토 류노스케"의 눈에 띄어, 그 머리를 붙잡혔다고 한다. "오카모토 류노스케"는 "네가 명성왕후냐"라는 질문에 "황후"는 부인한 뒤, 몸을 빼내 마루 아래로 달아나려다가, 발을 걸려 넘어진 뒤, 젖가슴을 발로 밟히고, 칼에 베어져 잘려 죽었다고 한다.
"황후"는 "목숨을 그대로 두어 달라"고 애걸했으나, 일본인들은 칼을 썼다고 한다. 한편 "일본인 낭인ㆍ조선인 앞잡이들" 앞에서 당당하게 "나는 조선의 국모라고 호통 쳤다"는 공식 기록과 달리, 암살 직전, "목숨을 구걸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프레드릭 매킨지(영국 데일리메일 기자ㆍ조선주재 특파원)"에 의하면, "오카모토 류노스케가 방 한 구석에 숨은 여인을 발견하고, 머리채를 붙잡고 왕후가 아니냐?"고 물었다. 그러나 "황후"는 이를 부인하고, 몸을 피해 마루 아래로 달아나려는 순간, 일격을 당했다고 한다. "살려달라고 애걸했으나, 일본인들이 칼로 내리쳤다."고 하였다. 또한 "낭인들"은 "황후"를 죽인 뒤에도, 그들이 죽인 사람이 "황후"임을 알지 못하여, 용모가 비슷한 궁녀를 3명 더 살해하였다.
⑭ 녹원(鹿園ㆍ건청궁 동쪽) 숲속에서, "황후의 시체" 화장
"미우라 공사"는 "고종"을 면담하기 위해, "궁"에 들어간 뒤, "황후의 시체"를 직접 확인하고 나서,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오기하라에게 급히 화장하라고 지시했다. "흉도들"은 시신을 문짝 위에 얹어, "홑이불"을 덮고, "건청궁 동쪽 녹원(鹿園) 숲속"으로 가져간 다음, 장작더미 위에 올려놓고, 석유를 뿌려 태웠다.
궁궐을 순시하던 "우범선"이 우연히 타다 남은 유골을 발견하여, "향원정 연못"에 넣으려 했으나, "윤석우(훈련대 참위)"가 "혹시 황후의 시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이를 수습하여 멀리 떨어진 "오운각 서봉(西峰)" 밑에 매장했고, 다른 유골 일부는 누군가에 의해 주워져, 닦아진 후에 "고종"에게 전달되었다. 후에 "황후"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유해를 수습할 때, 뼈에 재ㆍ모래가 뒤섞여, 신체 부위가 판명되지 않아, "고양군"에 사는 "환관"을 불러, 그의 말대로 석회를 바르고, 비단옷을 수십 벌 입혀 구부리고 포개고 묶어, 관에 넣었는데, "매천야록"에 따르면, "정만조(궁내관)"이 이 광경을 목격했다고 한다.
뒷날 "친일내각"은 "윤석우(훈련대 참위)"를 비롯한 "이주회(군부 협판)ㆍ박선(일본어 통역관)"등을 무고하여, "반역죄ㆍ불경죄"로 사형에 처했다. 오전 9:20분, "주한 일본공사관 수비대 소속 니이로 해군소좌"는 "본국(일본제국) 대본영 육군참모부"에 전문 한 장을 보냈다. "극비(極秘)"라는 붉은 낙인이 찍힌 이 전문에는 "국왕무사 왕비살해(國王無事 王妃殺害)"라는 문구가 짤막하게 적혀 있었다. 그것은 일본 정부의 공식 라인을 통해 "여우사냥"의 성공을 알린 보고서였다.
⑮ "대원군"에게 보고
"황후가 암살당했다"는 소식은 "경복궁 내 강령전"에 머물며, 휴식을 취하던 "대원군"에게 보고됐다. 놀라고 두려운 "고종"은 "대원군"을 불러, 이날 아침 "경복궁 내 건청궁"에서 아버지와 대면한다. "고종"을 대면한 자리의 "대원군"은 "이재면(완흥군ㆍ장남ㆍ고종의 형)"을 "궁내부대신"에 앉히고 다시 정권을 장악한다.
6. 러시아 인의 증언 : 베베르 (러시아 공사)ㆍ세레딘 사바틴 (러시아인 경비원)
① 베베르 공사 : 1885~1897년까지 러시아 공사ㆍ고종의 개인적인 친구
"베베르 공사"는 "시해 사건"이 일어난 바로 다음날, "본국 러시아"로 보낸 공문에, 당시 사건 현장을 목격한 7명의 증언록(고종ㆍ순종을 비롯한 7명)이 첨부되어 있어 눈길을 끈다. "고종"은 칼을 들고, 왕의 내실에 침입한 일본인 중, 3명의 이름을 거명했는데, "오카모토 류노스케(조선 군부대신 고문관 역임)ㆍ스즈키ㆍ와타나베"가 그들인데, 보고서에 따르면, "고종"은 "오카모토ㆍ스즈키, 두 사람이 왕비를 잡으러 나갔다"라고, 진술하다가 실신했다고 한다.
"일본군이 왕비를 잡겠다."고 나간 뒤에도 "고종"은 왕후가 무사할 것으로 믿었던 것 같다. 왕의 처소에 일본군 침입 사실을 알리러 달려간 "이학균 연대장"이 "왕비는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라고 묻자, "고종"은 "왕비는 지금 안전한 장소에 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때는 "옥호루(왕후 처소)"에서는 이미 참담한 학살극이 벌어지고 있었다.
② 세레딘 사바틴 (러시아인 경비원)
이는 도망가는 "조선군" 사이에 섞여, "옥호루" 인근까지 밀려갔다가, 외국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사건 현장을 목격한 "러시아인 경비원 사바틴"의 증언과도 일치한다. 그는 "왕후의 처소" 앞에서 목격한 참상을 이렇게 적었다.
"내가 뜰에 서 있는 동안, 일본인들은 10~12명가량 되는 여인들의 머리채를 끌고 와, 창문 너머 마당으로 이들을 내던졌다. 창문의 높이는 6피트(180cm)쯤 되는 듯했다. 마당에 나뒹구는 여인들은 아무도 신음 소리나, 고함 소리를 내지 않았다."
③ 이밖에도 "사바틴 보고서"는 • "일본군"이 "경복궁"에 침입한 뒤, "조선인 시위대"가 보인 무력한 대응 행태 • "시해 현장"에서 목격한 일본군의 지휘 체계를 꼼꼼하게 적었다 • 사건 직후인 10.09~10일, "제물포 항"에 정박해 있던 "일본 군함ㆍ선박 2척"이 연이어, 황급히 "일본으로 떠났다"는 자체 첩보에 의거해, 이 배가 "시해 범"들을 실어 날랐을 것이며, 따라서 이것이야말로 "일본 정부가 시해 사건에 개입한 증거"라고 나름, 결론을 내렸다.
④ 또한, 한 상궁은 이렇게 증언했다. "왜인들이 왕비와 궁녀들이 있는 방으로 들이닥쳤다(중략). 일본군은 궁녀들을 밀치며, "왕비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고, 우리는 입을 모아, "여기에 왕비는 없습니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왜인들은 (옥호루) 아래로 궁녀들을 집어던졌다. 이때 왕비가 복도로 도망쳤고, 한 왜인이 왕비를 따라잡는 데 성공했다. "그는 왕비를 마룻바닥에 넘어뜨리고 가슴을 발로 3번 짓밟았다. 그리고는 칼로 가슴을 내리 찔렀다."
7. 사후 처리
① "김홍집 내각" 성립
"을미사변"이 일어난 10.08일 아침, "고종"이 "미우라 일본 공사"에게 사자를 급히 보내, 어젯밤 일의 내막을 묻자, "미우라"는 "스기무라(서기관)ㆍ통역관"을 데리고, "경복궁"으로 들어왔다. 아침 8시경, "고종"은 "건청궁 장안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한국통사"에는 "미우라"가 "고종"을 알현한 곳이 "건청궁"으로 되어 있다)
"미우라(일본 공사)ㆍ스기무라(서기관)ㆍ자객의 우두머리"가 옆에 섰으며, "흥선대원군"도 들어와 "고종" 옆에 앉았다. "미국 공사ㆍ러시아 공사"도 소식을 듣고, 궁으로 왔다. "미우라"는 "고종"을 협박하여, "김홍집 내각"을 성립시켰다.
"김홍집" 등이 연락을 받고 "궁"으로 들어올 때, "미우라"는 잠시 자리를 비웠다가, 황후의 시신을 직접 확인하고, "화장"을 명한다. "김홍집 내각"은 3가지 조칙을 기초하여, "고종"에게 서명하라고 요청했다. "고종"이 거부하자, 그들은 서로 서명하고 물러났으며, "일본" 군인들도 궁궐에서 철수하였다. 이날 "군부대신"은 "안경수"에서 일본의 사주를 받은 "조희연"으로 바뀌었고, "권형진(경무사ㆍ치안 담당)ㆍ유길준(서리내무대신)ㆍ어윤중(탁지부대신)ㆍ장박(법부대신)ㆍ서광범(학부대신)ㆍ정병하(농상공부대신)"으로 임명되었는데, 이들은 "황후 시해"를 방조ㆍ묵인한 이들이다.
② 여론 호도 작업
사건 직후, "미우라"는 "황후 시해 사건"을 "조선인의 반란"으로 호도하는 공작을 폈다. "미우라"는 이튿날인 10.09일과 10.10일 외부에 공문을 보냈다. 그 와중에 "조희연(군부대신)"이 일본을 위해 거짓말을 하고," 미우라"는 조선 군부와 외부의 입을 통해, 일본이 관여하지 않았다는 거짓 증명을 받아냈다. 10.09일에는 "사바틴"의 입을 막기 위해, "친일 내각"이 그에게 "내무부 고문직"을 제의했으나, "사바틴"은 거절했다.
③ 폐서인 조칙
"을미사변" 직후, "고종"은 허수아비처럼 되었는데, "대 군주 폐하"라는 존칭을 받고, "황제"가 쓸 수 있는 "조칙"을 내리고 있지만, 자신의 의지로 내린 조칙이 없었다. 2일 뒤인 10.10일, "김홍집"은 "명성황후"의 직위를 "왕후"에서 "서인(庶人)"으로 폐위하는 조서를 "김홍집 내각"이 스스로 서압하여, "고종"의 명의로 발표했다. 가짜 조서에서 "옛날 임오 때와 마찬가지로 짐을 떠나 피난했다."라는 거짓말을 하였다.
이때 서명한 이는 "김홍집"을 비롯하여, "김윤식ㆍ조희연ㆍ서광범ㆍ정병하" 등이며, "심상훈(탁지부 대신)"만이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갔고, 그때 "나라의 원수를 갚지 않으면, 벼슬하지 않겠다."라고 말했으며, 그런 까닭에 고종으로부터 신임을 얻었다. "왕태자"가 가장 먼저 "명성황후의 폐위"에 반발하면서, "태자위를 양위(讓位)하겠다"며 저항하자, 다음날인 10.11일에 "고종의 명"으로 "왕후"를 "서인"에서 후궁에 해당하는 "빈(嬪)"으로 승격시켰다.
10.14일, "황후를 새로 간택하라"는 지시가 내려졌으나, "고종"의 의사와는 관계가 없었고, "고종"은 그 뒤로 1919년 죽을 때까지 황후를 새로 맞이하지 않았다. "일본ㆍ김홍집 내각"은 악화된 국내외 여론을 무마하기 위해, 11.26일 "폐후 조칙"을 취소하였다.
④ 외국 공사들의 반응ㆍ시해 주동자 처벌
"황후 암살"은 바로 "한성부"에 체제하고 있던 "프랑스ㆍ청나라 공사 외교관ㆍ외교관 부인ㆍ언론인"들의 입을 통해 외국에 알려졌다. "폐위" 소식을 들은 외국 공사들은 "고종이 직접 도장을 찍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준을 거부하니, "일본"을 제외한 모든 나라가 같은 반응을 보였다.
특히 "베베르 공사(1885~1897년까지 러시아 공사ㆍ고종의 개인적인 친구)"는 사건 직후, "서울 주재 외교 대표단의 회합"을 주선하고, "일본공사 미우라"에게 항의하고, "미우라가 조선의 국모(國母) 시해사건의 주모자였음"을 밝혀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베베르 공사"는 즉시 보고서를 작성하여,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 보고했다. 당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는 "베베르의 보고서"를 직접 읽은 뒤표지에 자필로 "정말로 놀랍다. 이런 일이 진짜로 일어났단 말인가."라고 적은 뒤, 즉각 한반도에 가까운 아무르 주 주둔군에 비상 대기령을 내렸다. "프랑스 공사관"에서는 "황후 암살"의 배후로 "흥선대원군"을 지목했다. 이런 만행이 국제적으로 알려져, 비난을 받게 된 "일본"은 10월에 형식적인 조사를 한다.
"을미사변"을 "조선인의 소행"으로 돌리려던 "미우라"의 흉계가 실패로 끝나자, "일본"은 "미우라 공사"를 비롯한, 관련자 47명을 소환하여, "히로시마 재판소"에 회부했다. 그러나 "예심 판사 요시오카"는 증거가 불확실하다는 이유로 다음해인 1896.01.20일 이들을 모두 석방한다.
사건을 주동한 "오카모토 류노스케(육군 소좌ㆍ궁내부 및 군부 고문관)ㆍ호리구치 구마이치(영사관보ㆍ낭인들의 길 안내인)ㆍ구스노세 유키히코(주조선 공사관 무관ㆍ육군포병 중좌)ㆍ오기하라 히데지로(영사관 경찰총수)ㆍ일본 군인ㆍ외무성 낭인ㆍ일본 영사관 경찰" 등 암살을 주동한 "일본인 낭인들"은 처벌받지 않았다.
조선인 최고 지휘자 "흥선대원군"과 고위 협력자 "유길준" 역시 처벌되지 않았다. "고종"은 아버지 "흥선대원군"을 처벌할 수는 없었지만, 대신 "대원군"이 죽자, 장례식에는 불참한다. "이준용(대원군 손자ㆍ조카)"를 유학 형식으로 "일본"으로 추방한 뒤, "민씨 세력"은 꾸준히 자객을 보내, "이준용"을 암살하려 하였으나, 실패한다. 처벌은 "이두황ㆍ이주회ㆍ박선" 등을 처벌하는 선에서 종결되었다. 도피한 "우범선"은 민씨의 측근인 개화파 문신 "고영근"에 의해 암살된다.
⑤ 명성황후 지위 복원ㆍ장례
"폐후 조칙"이 취소된 뒤, "김홍집 내각"을 타도하고, "경복궁"에 유폐되다시피 한 "고종"을 구출하여 "미국공사관"으로 피신시키려던 "춘생문 사건"이 발생하자, "김홍집 내각"은 "명성황후"가 살해된 지, 55일 만인 12.01일에 사망을 공식 발표하고, "국상"을 치르려 했다. 이는 "고종"의 친위 쿠데타 세력인 "정동파"가 몰락한 분위기를 이용하여, "국상"을 치르려 함이었다.
1896.02.11일, "아관파천"이 일어났으며, 그날 "고종"은 조칙을 내려, "김홍집 일파- 김홍집ㆍ유길준ㆍ정병하ㆍ조희연"을 "을미4적(乙未四賊)"이라고 하여, "역도"로 규정하고, 그들이 진행시키던 "국모 재간택ㆍ이미 내린 폐비에 관한 조칙"을 무효로 돌렸다.
1896.03.10일, "김홍집 내각"이 진행하던 "국상 절차"를 중단시키고, 무기한 연기하였다. 그 뒤, "국상 일정"을 몇 차례 더 연기하였다. "고종"은 은신했던 "러시아 공사"로부터 1897.02월에 돌아와, 8월에 연호를 "광무"로 고쳤다. 1897.10.12일, "고종"이 새벽 4시~ 6시 사이에 "환구단"에 나아가 "대한제국 정"을 발표하고, 스스로 "황제"에 즉위하고, 낮 12시에 왕후를 "명성황후"로 책봉ㆍ추존하였다.
10.13일 아침, "고종"은 "황후의 빈전"에 제사를 드리고, 오전 8시 "태극전"에 나아가 "대한(大韓)"이라는 국호를 반포하였다. "고종"의 황제 즉위에 따라, "민비"는 황후에 추존되었으며, 장례도 "국장"으로 또 다시 치러지고, 1897.11.22일 "청량리 홍릉"에 안장되었다. 1919년, "고종"이 붕어한 뒤, "고종"에게 "태황제(太皇帝)"라는 시호가 올려 지자, 정후인 "명성황후"에게도 "태(太)"자의 시호가 올려져, "명성태황후(明成太皇后)"라 불리기도 한다.
⑥ 민중의 분노
"명성황후 시해ㆍ폐위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자, 민심은 극도로 나빠졌으며, 재야에서는 황후의 복위를 요청하는 상소를 올리고, 복수를 외치는 "의병운동(을미의병)"이 전국에서 일어났다. 1895.10월, 김해사람 "문석봉"은 "충북 보은" 등지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의병을 일으켜 적당들을 토벌하자고 소리쳤고, 그러자 이곳과 인접한 곳의 유생ㆍ선비들이 두건과 도포를 입고 나갔지만, 얼마 후, "공주부"에서 보낸 군사에 의해 모두 체포되었다.
"김구(당시 김창수)"는 의병으로 만주에 있다가, 1895년 초 귀국하여, "일본인 상인 쓰치다 조스케(계림장업단의 상인)"을 "일본 낭인"으로 오인, "치하포"에서 만나, 그를 죽이는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
"윤치호"는 "왕비가 암살당한 뒤, 민중들이 별로 애달파하진 않더라."는 기록을 남겼다. 윤치호는 "민씨의 집권은 바로는 압제와 잔인과 부패의 의미로 받아들여졌으며, 따라서 민중들이 민비의 죽음에 애도하지 않는 것도 당연하다고 여겼다."는 것이다. 암살에 관련된 "조선인 장교ㆍ군인들"은 피신하거나, 은신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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