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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 • 현대사)/사건

사건- 1979.10 : 부마 민주항쟁 → 10ㆍ26 사태

by 당대 제일 2022. 10.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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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마민주항쟁 (釜馬民主抗爭ㆍ부마사태)"는 1979.10.16~ 20일까지, "부산ㆍ경남 마산시(현, 창원시)"에서 "유신 체제"에 대항한 항쟁으로, 부마 민주항쟁"을 기리는 "민주공원"이 "부산"에 조성되었고, "마산(현, 창원시)"에도 이를 기리는 "기념비"가 설치되었다.

 

1. 부마 민주항쟁 (釜馬民主抗爭)부마 민중항쟁 (釜馬民衆抗爭)부마사태

1979.10.16~ 20일까지, "부산경남 마산시(, 창원시)"에서 "유신 체제"에 대항한 항쟁

10.16, "부산대" 학생들이 "유신철폐"의 구호와 함께, 민주화 시위를 시작했다17일부터, "시민 계층"으로 확산된 것을 시작으로 해서, 1819일에는 "마산지역"으로 시위가 확산됐다"박정희 유신정권"10.180시를 기해, "부산""계엄령"을 선포하고, 66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했으며, 10.20일 정오, "마산창원 일원""위수령"을 선포하고, ""을 출동시킨 후, 민간인 59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했다.

"부마항쟁"1970년대 "유신체제" 하에서 쌓였던 "정치사회경제문화종교" 등 각 부문에 걸친 여러 모순의 폭발이었고, 사실상 "박정희 정권의 붕괴"를 촉진시킨 결정적인 사건이었다"민주화운동의 성격지도세력" 등 여러 평가들이 있으나, "YH 무역노조 신민당사 농성 사건"과 함께 "유신체제"를 아래로부터 붕괴시킨 "결정적인 사건"으로 평가되고 있다이 항쟁은 "1980518 광주민주화운동, 198706월 항쟁"에 영향을 주었다.

일 시 : 1979.10.16~ 10.20 (5일간)             장 소 : 부산경남 마산시(, 창원시)

원 인 : 박정희의 유신정권 독재                  결 과 : 1026사태 (유신체제 종언)

시위자 : 부산마산 시민신민당

참여 인원 : 10,000명 이상            체포자 수 : 1,058명            구금자 수 : 125

2. 진행

 1979.05.03 : "신민당" 전당대회- "김영삼(강경파)"이 대표 당선, "이철승(온건파)" 패배

 08.11 : "YH 여공" 사건 발생 (YH 무역주식회사)

 10.04 : "공화당(여당)"이 날치기로, "김영삼(신민당 대표)""국회의원"에서 제명

 10.16 : "부마 민주항쟁" 발생. "부산대 학생 5,000여 명이 "유신정권 물러가라정치탄압 중단하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교내에서 시위. 저녁에 시내로 진출

 10.17 : 저녁, 시민들이 합세하면서 시위가 지속적으로 확산. "충무파출소한국방송공사(KBS) 서구청부산세무서" 등이 파괴, "경찰차량" 전소파손

 10.18 : 정부- 0시를 기해, "부산""계엄령"을 선포, "계엄군"을 투입해 1,058명을 연행하고 66명을 "군사재판"에 회부

 10.19 : "마산"지역에서 "마산대경남대" 학생 시위, "민주공화당사파출소방송국" 타격

 10.20 : 근로자고등학생 시위 합세. "마산""위수령" 선포

 10.26 : 박정희 대통령 서거 (1026사태)

부마

3. 김재규 ( 중앙정보부장) : 현지를 시찰한 뒤, 당시 상황에 대해 내린 결론

"제가 내려가기 전까지는 "남민전"이나, 학생이 주축이 된 데모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현지에서 보니까 그게 아닙니다. 160명을 연행했는데, 16명이 학생이고, 나머지는 다 일반 시민입니다. 그리고 데모 양상을 보니까, 데모하는 사람들도 하는 사람들이지만, 그들에게 주먹밥을 주고 또 사이다나 콜라를 갖다 주고, 경찰에 밀리면 자기 집에 숨겨 주고 하는 것이 데모하는 사람과 시민들이 완전히 의기투합한 사태입니다. 주로 그 사람들의 구호를 보니까

체제에 대한 반대, 조세에 대한 저항, 물가고에 대한 저항, 정부에 대한 불신 이런 것이 전부 작용을 해서, 경찰서 11개를 불 질러 버리고, 경찰 차량을 10여 대 파괴하고 불 지르고, 이런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그대로 각하에게 보고를 드렸습니다." (1979.12.08)

※ 10.22일(10ㆍ26 나흘 전), "김재규", "박정희"에 "부마항쟁 원인" 보고 : "상인은 세금, 노동자는 저임금 시위" → 정권에서 외면

"김재규(중앙정보부장)" "박정희(대통령)" 피격 4일 전, "부마항쟁"과 관련해서 면전에서 보고를 한 것이 있다. 그 내용은 "부마항쟁"을 힘으로 찍어 누른 "박정희 정권"의 시각과는 크게 달랐다"부마항쟁에 대한 의견차가 10·26 발발로 이어졌다"는 분석이다1979, "보안사령부"가 작성한 보고서에는 "박정희 대통령" 주재로 "부마항쟁 대책회의가 열렸다" 내용으로, 날짜는 "10·26" 고작 나흘 전, 그러니까 1022일이다참석자 명단에는 "국무총리·내무장관ㆍ국방장관ㆍ법무장관"이 망라 돼 있다"김영삼 의원 제명으로 지역감정이 불거져, 항쟁이 일어났다"고 보고한 "전두환(보안사 사령관)" 과의 시각차가 크다. 그런데 더 눈길을 끄는 것은 이날 "김재규(중앙정보부장)"이 한 보고이다.

제목은 "부마사건에 대한 계층별 요인분석 결과", "부마항쟁의 원인"을 분석해놓은 것인데, "상인들은 세금 때문에, 시민들은 잘못된 시정 때문에, 노동자들은 낮은 임금과 제약받는 노동권 때문에" 시위에 뛰어들었다는 것이 주요 내용입니다하지만 "김재규(중앙정보부장)"의 의견은 외면당했고, "중정"의 보고서는 모두 파기 처분됐다유출 시, "유언비어가 유포될 수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부마항쟁"을 겪으면서, 생긴 "권력층의 균열이 10·26으로 이어졌다"는 분석을 입증하는 정황 증거인 셈이다.

1979.12.08, "김재규 (, 중앙정보부장 : "체제에 대한 반대, 조세에 대한 저항, 물가고에 대한 저항, 정부에 대한 불신 이런 것이 전부 작용을 해서, 그대로 각하에게 보고를 드렸습니다."

차성환 (부마민주항쟁 진상규명위원회 상임위원) : "부마항쟁이 전국화 된다."라는 것이 김재규 부장의 판단이었죠. 대책회의에서 근본대책을 세워 한다는 필요성을 강조하기 위해서라도"

남민전 (남조선 민족해방 전선 준비위원회): 1976.10~1979.10 / 대표 : 이재문신향식김병권

지하조직 성격의 예비 테러 단체로, "무장 혁명"을 목표로 한다. 단체의 깃발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기"를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1977.01, "남민전"은 전술조직으로 "한국민주투쟁위원회(민투)"를 결성하여, 유신체제를 비판하는 유인물 및 기관지(민중의 소리)8차례에 걸쳐 배포하는 등 "() 유신투쟁"을 전개했다.

이어서 "민청학련" 등 학생 운동가들을 중심으로 "청년학생위원회"를 조직하여, "민주구국학생연맹민주구국교원연맹민주구국농민연맹"을 결성하였다 또 다른 조직, "민주구국노동연맹"의 결성을 시도하던 중, "이근안(경찰청 경찰관)"등의 표적 수사로 "이재문이문희차성환이수일김남주" 등을 비롯하여 84명의 조직원이 1979.10월 서울에서 적발구속된 후 강제 해산되었다.

4. 배 경

1978.12, 실시된 "국회의원 선거"는 불법적인 "금권관권 선거"에 영향이 크게 미쳤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집권 공화당""야당인 신민당"에 패배했다그 후 "민주화 시위"가 활발해지면서, 당시 민주인사들에 대한 연행투옥 등 탄압 강도가 강화됐다.

1979.08, "YH 무역주식회사" 여성 노동자들의 "신민당사 점거 농성"으로 "집권 공화당"은 야당인 "신민당""김영삼 총재"를 국회에서 제명했다이는 곧 "야당 국회의원" 전원 의원직 사퇴로 이어졌다1979.09, 전국에서 대학생들의 "민주화 요구 시위"가 확대됐다한편 "김영삼의 발언"을 문제 삼아, "국회의원" 직에서 제명처분을 하고, 감금한 것에 대한 반발이 "부마 민주항쟁"을 작용케 했다는 견해도 있다.

"박정희 정부의 유신체제"는 정치사회적 갈등을 빚어오다가, 1979년에 한계에 이르렀다"백두진(白斗鎭) 파동박정희 대통령 취임반대운동"으로 시작된 1979년은 "반정부 인사"들에 대한 "연행체포고문연금" 등 강압책이 잇따른 가운데서도, "야당재야 세력"의 저항이 고조되어 "신정국"은 긴장을 더해 갔다대표적으로 "크리스천 아카데미사건오원춘 사건"에 이어, "YH 무역노조 신민당사 농성"이 일어났고, 잇따라 "김영삼 신민당 총재"에 대한 "총재직 정지 가처분의원직 박탈"로 정국은 갈등으로 치달았다.

더불어 1970년대 말, 한국 경제는 "2차 오일쇼크"라는 "세계자본주의 체제의 위기"와 결합해 심각한 위기에 빠졌다"중화학공업의 과잉중복투자"는 한국경제를 심각한 위기로 몰고 갔고, 결국 "국제통화기금의 구제 금융"과 함께, 1979.04월 긴축 등을 골자로 한 "경제안정화정책"을 정부는 수용하기에 이르렀다경제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정부는 "중소자본가봉급생활자도시노동자농민" 등에게 "안정화 비용" 부과할 수밖에 없게 됐다이와 같은 "안정화정책"은 경제위기로 어려운 처지에 있던 "중소기업들의 도산"을 더욱 부채질하여 기업의 부도율이 사상 최고치로 치솟고, 가뜩이나 어려운 "도시 하층민"들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노동집약적 제조업"이 집중됐던 "부산마산"에서 대규모 민주화운동이 일어났던 것은 이런 사회경제적인 모순과 연관되어 있었다1979년 당시, "부산"의 산업별 생산구조는 "광공업" 비중이 42.1%인데 비해, 전국의 경우 23.7%"광공업 취업 가성비"가 매우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특히 "부산""신발의류합판" "영세한 자본낮은 수준의 기술"이 결합한 "저부가가치 제조업" 주를 이뤘으며, "부산"내 제조업 종사자의 비율은 196673.3%, 197577.3%, 198073.5%로 커다란 변동이 없었다.

그러나 1979년에 들어, "부산지역" 경제상황은 극도로 악화됐다"부산지역" 부도율은 전국의 2.4, 서울의 3배에 달했다"수출증가율" 역시 전국 증가율인 18.4%에 훨씬 못 미치는 10.2%로 하락했다1979, "부마항쟁"은 이런 정치사회경제적 모순이 모여, 일어난 학생시민들의 "반정부 민중항쟁"이었다.

5. 경과결과

1979.10.16일 아침 10시경, "부산대 구내도서관" 앞에서 약 500명의 학생들이 모여, "반정부 시위" 벌이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학생들은 "애국가선구자통일의 노래" 등을 부르고, "유신정권 물러가라정치탄압 중지하라"는 등의 구호를 외쳤다"민주선언문"이란 이름의 유인물은 "학원의 민주화언론자유인권보장에의 신념"을 확인하고, "제도화된 폭력성과 조직적 악의 근원인 유신헌법과 독재집권층의 퇴진만이 5천 만 겨레의 통일의 첫걸음"이라고 주장하면서, "형제의 피를 요구하는 자유와 민주의 깃발을 우리가 잡고 반민주의 무리, 불의의 무리들을 향해 외치며 나아가자"고 선언하였다.

"구호노래선언문 낭독" 등으로 기세를 올린 학생들은 산발적으로 교문을 나가, "가두시위"에 돌입했다이때 학생 수는 약 5,000명으로 불어나 있었다학생들은 "광복동남포동" 등 부산시내 중심가까지 진출, "애국가"등을 부르는 한편 "반정부 구호" 외치며, 이를 막으려는 "경찰"과 곳곳에서 충돌하였다한편, 비슷한 시간에 "부산 동아대"에서도 1,000여 명의 학생이 시내에 진출, "부산대" 학생과 합류하여 가두시위를 벌였다. 이날 데모로 학생 수백 명이 연행되고, 경찰관학생 100여 명이 다쳤다이튿날 17, 학생들의 시위가 더욱 격화되었다.

주목되는 점은 이날부터의 데모에는 학생들뿐만 아니라, 다수의 시민들이 합세한 사실이었다오후까지 시위는 "학생들"에 의해 주도됐으나, "야간시위"에서 시위대는 3분만에서 50,000명에 이르렀고 시위대에는 "화이트 컬러노동자상인업소 종업원, 고교생"들도 동참했다17일에 이르러서는 "도시룸펜접객업소 노동자영세상인반실업상태 자유노동자무직자"들이 시위를 주도했다.

"부산시경""79 부마사태의 분석"이란 문건을 보면, 데모의 특이양상으로, "20세 전후, 불량성향자 대학생 가장 합세(때밀이식당종업원공원구두닦이 등), 시민들 박수음료수 공급 등, 데모학생 동조 고무"라고, 지적하고 있다이처럼 "학생 시위"는 이미 "시민 항쟁"의 양상을 띠어가고 있었다밤늦게까지 계속된 시위에서, "학생시민"들은 "KBS부산방송국도청세무서파출소" 등을 파괴하였고, 일부 "경찰차량보도기관"의 취재차량도 피해를 입었다.

18일에는 "민주화 운동" "마산"으로 확산됐다해질 무렵 1,000여 명의 "경남대" 학생들이 "마산시내" 번화가에 산발적으로 집결, 일부시민들이 가담한 가운데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어두워진 다음, "학생시민"들의 데모는 격화되어, "공화당사파출소방송국신문사"에 투석, 유리창을 파괴하였다수십 명의 청년들은 "공화당 사""셔터 문"을 부수고 안으로 들어가, 서류집기를 밖으로 내던졌고, "파출소"로 뛰어 들어간 또 다른 청년들은 벽에 걸려 있던 "박정희 사진"을 파손했다.

19일에는, 더욱 치열해져, "마산시내"는 한때 "무정부 상태"가 되었다저녁 8시경, 시위대는 "경남대마산산업 전문대학일부 고교생"까지 합세하여, 8,000명에 이르렀다주목할 사실은 "공장직공점원날품팔이" 등으로 보이는 10~ 20대의 젊은이들이 가담하여 시위의 앞장에 선 점이었다이들의 행동은 격렬하여, 시내 곳곳에서 몽둥이를 들고, "동사무소파출소"로 몰려가 파괴하였고, "경찰차량"에 불을 질렀다.

이처럼 "부마항쟁"에서 특징적인 사실은 먼저 시위대의 가장 큰 분노의 대상은 "공화당사경찰출소"였다는 점, 2번째로 "부유층"에 대한 시위대의 공공연한 공격, 3번째로 "부가가치세를 철폐하라가세를 없애라잘 먹고 잘 살아라"라는 외침에서 드러나듯이, "세무서에 대한 공격"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문사방송국에 대한 공격"을 들 수 있다.

"부마항쟁"에 대해, "박정희 정부"는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다가, 사태가 심상치 않게 확대되어나가자, "강경책"으로 대응했다18일 새벽 0시를 기해, 정부는 "부산 일원""비상계엄"을 선포하였다.

18일 새벽 0시를 기해, "부산지구 계엄사령부""포고문 제1"를 발표, 각 대학의 당분간 "휴교조치야간통행금지시간의 2시간 연장" 8개항을 포고하였다10.24, "계엄사령부""검 합동반"을 편성, 계엄시기 중, "조직 깡패"를 발본키로 "특별수사부"설치, 소탕작전에 들어가, 132명을 검거하고, 23명을 구속 처리하였다.

"부산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한 지 2일 뒤인, 10.20일 정오를 기해 정부는 "경남 마산창원 일원" "위수령(衛戍令)"을 발동하였다이와 함께, "마산지역 작전사령부""마산 일원"""을 진주시켜, 시청 등 정부기관과 언론기관 등 공공건물에 대한 경계에 들어갔다"통행금지"2시간 연장되었고, "경남대학경남산업 전문대학"은 무기한 "휴교조처"가 취해졌다"계엄령"이 선포된 "부산"지역에는 "공수부대"가 동원되어, 시위하는 시민학생에 대해 강도 높은 진압이 이루어졌다이 때문에 "계엄령위수령" 발동 후, "부마항쟁"은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단시간에 진압되었다그러나 "부마항쟁" 직후, 1주일도 안 되어, "1026사건"이 발발하였고, "유신체제"도 종언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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