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10.16~ 20일까지, 민주화의 성지인 "부산ㆍ경남 마산시(현, 창원시)"에서 "유신 체제"에 대항한 반독재 투쟁 항쟁인 "부마민주항쟁(釜馬民主抗爭ㆍ부마민중항쟁(釜馬民衆抗爭)ㆍ부마사태)"이 올랐다. 무차별한 폭력과 마구잡이 연행에도 불구하고 "시민혁명"의 봉화불은 끊임없이 타올랐다. 유신의 핵심세력들은 당황했고, 점점 더 종말을 향해 치달았다.
1. 사건 결과ㆍ파장
"동아일보"에 연재되었던 "남산의 부장들"에 기록된 바로는, "보안사 분실"에서 조차도 수사 초기에는 수사관들이 함부로 "김재규"를 다루지 못했다. 일종의 "군사혁명" 즉 "김재규"가 박 대통령을 저격함과 동시에, "김재규"와 밀통한 군 사단이 서울로 진입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게다가 "김재규"는 "현직 정보부장"으로, "중정"에서 주관한 "보안사 요원 교육" 시, 우수요원에게 표창을 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김재규"는 "보안사령관 출신"이었다. 일종의 전관예우였던 셈이다. (※ 남산의 부장들 : 정치공작사령부(KCIA) (1992.11월, "김충식(金忠植ㆍ동아일보 기자출신)"이 쓴 책ㆍ동아일보사 출간))
처음 "김재규"를 체포하여, "보안사"로 연행한 "수사관 신동기"가 몇 달 전 그 우수요원으로 표창을 받았었다. 그래서 "신동기" 또한 처음엔 "김재규"에게, "부장님, 부장님"하며 쩔쩔맸지만, 상부의 지시를 받고, 곧바로 태도를 바꾸어, "김재규"를 매몰차게 대했다.
김재규"가 전방 사단과 밀약한 사실이 없다는 걸 확인한 후부터는 자백을 위한 고문이 시행되었다. "김재규의 탄원서"에 의하면, "군용 전화기 전선"을 발가락에 묶어, 전화기를 돌리는 "전기고문"을 당했다고 한다. 고문 도중, "김재규"는 수사관의 펀치에 맞아, 눈 밑에 피멍이 들기도 했다.
현장검증 사진을 보면, "김재규"의 오른쪽 눈 밑에 거무스름한 상처가 눈에 띈다. 그러므로 당시 "김재규"의 수사를 담당했던 "이학봉"이 "김재규를 고문하지 않았다"라고 한 증언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이때, 지병인 "간경화"로 인해, 간 기능이 거의 마비된 "김재규"는 고문으로 인한 "내출혈"이 멎지 않아 초죽음이 되었고, 당황한 "보안사 수사관"의 보고를 받은 "전두환"이 "대통령 주치의"였던 "김병수 공군 준장(당시 국군 서울지구병원 원장)"을 불러, "김재규"를 응급치료 했다.
사건의 전말은 "합동수사본부 본부장"으로 선임된 "보안사령관 전두환"의 수사보고에 의해 10.28일 세간에 알려졌다.
그 후 재판을 통해, 6명 "김재규(주모자/중앙정보부장)ㆍ박선호(의전과장)ㆍ박흥주 대령(부장 수행비서) ㆍ이기주(안가 경비조장/예비역 해병하사 출신/평소 박선호의 신임이 깊었다)ㆍ유성옥(의전과장 차량운전사/예비역 육군중사 출신/제대 후 중정 운전사로 취직했다가, 박선호의 도움으로 1급 근무지인 안가로 배치/11월에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었음)ㆍ김태원(안가 경비원/피해자에게 M16소총으로 확인사살)" 전원이 사형을 언도받았다.
이전 총살된 "박흥주"를 제외한 5명은 1980.05.24일 "서울구치소"에서 교수형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현장에 있었던 "김계원(비서실장)"도 "내란음모죄"로 "사형선고"가 떨어졌으나, 1982년 "형 집행 정지"로 감형ㆍ석방되었다. "비서실장"이 되기 전, "육군참모총장ㆍ중앙정보부장"까지 지낸 "예비역 대장"이었지만, 두려움에 휩쓸려 다니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김재규"의 말대로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쏜" 총탄은 철옹성 같던 "유신정권"을 무너뜨리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박정희의 죽음"으로 생긴 권력의 공백기를 재빠르게 파고든 자가 바로 "전두환"이었고, 그는 "12ㆍ12사태/ 5ㆍ18"을 거치면서, "박정희"의 뒤를 이어, 대통령에 오른 "최규하"를 허수아비로 만들며, 결국 자신이 대통령 자리에 올라, 권력에 꼭짓점에 서는데 성공, 또 다른 군사정권이 집권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최규하"는 "김재규가 대통령 시해범"임을 알면서도 육본으로 갔다는 사실이 "전두환"에게 약점을 잡힐 수밖에 없었다. 물론 사건 현장에 있었던 "정승화"는 "12ㆍ12사태" 때, "내란방조죄"로 체포당하게 된다.
2. 시해사건 준비
1979.10.26.일. 당일 "박정희 대통령"은 "충남 당진"에서 열린 "삽교천 방조제 완공식ㆍKBS 당진송신소 완공식"에 참석한 후 오후 02:30분경, "청와대"로 복귀하였다. ("당진송신소" 건물은 "중앙정보부"에서 관리하는 건물이라, "김재규"가 당일 아침 완공식(삽교천 포함)에 참석할 의사를 "차지철"에게 전화로 밝혔지만, "차지철"은 "시국이 어느 때인데, 정보부장까지 서울을 비우면 어쩔라고? 닥치시고 서울이나 잘 지키시오"라고 단칼에 끊어버렸다. 이것도 이날 "김재규"가 열 받은 요인 중의 하나였다.)
오후 04:00 경, "차지철"은 "박정희"로부터 "대행사"를 준비하라는 명을 받았고, "정인형 경호처장"을 통해, "중정 안가" 측에 "대행사"를 준비하도록 지시했다. 친구인 "정인형"에게 "대행사"가 있다는 소식을 들은 "박선호(중앙정보부 의전과장)"은 주방에 연회 준비를 지시하였다. (정인형과 박선호는 "해병대 간부후보생 동기"였다.)
한편, "대행사"를 도울 여성을 섭외했는데, 이날 섭외된 여성은 당시 모델 겸 배우이던 "신재순"과 가수 "심수봉"이었다. (대행사 : 대통령ㆍ중정부장ㆍ비서실장ㆍ경호실장 등이 참석하는 연회 / 소행사 : 대통령ㆍ시중드는 여성, 단 둘이서 하는 연회)
오후 04:10 경, "남산 중정 집무실"에서 "차지철"로부터 이날 "대행사가 있다"는 전화를 받은 "김재규"는 "궁정동 안가"에 도착한 후, "안가 집무실"에서 04:40분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에게 전화를 걸어 "오늘 저녁 궁정동에서 저녁이나 하자"고 초대했고, "김정섭(중정 국내담당 차장보)"를 06:30분까지 "궁정동 안가"로 오도록 했다. (이날 저녁, 정승화 총장은 김재규가 대행사에 호출되었다는 핑계로 연회장 옆의 본관 식당에서 김정섭 차장보와 저녁을 같이 했다) 그리고 "김재규"는 집무실 금고에 보관 중이던 "발터 PPK"를 꺼내 탄환 7발을 장전하고, 언제든 쉽게 꺼낼 수 있도록 책장에 숨겨놓았다. "김재규의 살의(殺意)"는 이때부터 발동된 것으로 생각된다.
오후 06:00 경, "박정희ㆍ차지철" 일행이 "궁정동 안가"에 도착하자, 05:20분 쯤 먼저 "안가"에 와 있던 "김계원ㆍ김재규"가 맞이하였고, "안가 나동의 연회장"으로 안내하면서 운명의 만찬이 시작되었다. (박정희가 도착하기 전, "안가 마당"에서 김재규는 김계원과 담화를 나누며, "차지철, 이 자식 오늘 해치워 버릴까요?" 하며 격한 반응을 보였다. 평소 김재규를 친동생처럼 아끼던 김계원은 다음 날 대통령 보고 때, "차지철의 월권"에 대해 얘기하겠다면서, 김재규를 달랬다.)
대통령 수행 차, "안가"로 온 "청와대 경호실 직원" 중 "김용태(특수차량 운행계장)ㆍ박상범(경호계장)ㆍ김용섭(경호관)"은 "나동 주방"에서 "안가 직원들"과 같이 맥주를 곁들여 저녁을 먹었고, "정인형(경호처장)ㆍ안재송(경호부처장)"은 "의전과장실 (박선호의 방)"에서 따로 저녁식사를 했다."정인형"은 해병장교 동기이자 둘도 없는 친구였고, "안재송" 또한 해병대 후배였다. 당시, "중정 안가"의 행사시, "대통령 경호"는 "안가 경비원들"에게 맡기고, "경호원"들은 별도 장소에서 식사를 하거나 휴식을 취하는 것이 일종의 관례였다.
이 날 만찬에서 "술(시바스 리갈)"은 "박정희ㆍ김계원"이 주로 마셨고, "간질환"을 앓고 있던 "김재규"는 "박정희"의 강권으로 억지로 몇 잔을 마신 반면, 독실한 "개신교(장로회)" 신자인 "차지철"은 술잔에 입만 대는 시늉만 하였다. (시바스 리갈은 평소 "박정희"가 즐겨 마시던 술이었다. 술 외에 만찬 당시의 음식들은 꿀에 재운 인삼ㆍ송이버섯 구이 정도를 제외하고, 도라지나물ㆍ전ㆍ생채ㆍ편육 등으로 평범했다고 전해진다. 다만, 해당 사건을 다룬 매체에서는 비쥬얼이나 의미 부여를 위해서 일부러 만찬상을 호화롭게 묘사하는 편이다.)
술을 마시면서, 한창 연회가 진행되는 와중에, "박정희"는 "부마사태ㆍ김영삼 제명건"에 대해, "김영삼을 구속시켜야 한다."라고 강한 어조로 몰아붙였다. "김재규"는 "이미 제명당한 김영삼을 구속시키는 건 그를 2번 죽이는 셈이다. 정치를 대국적으로 하셔야 한다." 라면서 의견을 밝혔다.
이에, 짜증이 난 "박정희"는 "정보부가 좀 무서워야지, 야당 놈들 비리만 쥐고 있으면 다가 아니다" 라며, "김재규"를 심하게 질책했다. 게다가 옆에서 "차지철"은 "야당 놈들 중 국회의원 하기 싫은 놈 하나도 없다. 까불면 학생이고 신민당이고, 전부 탱크로 싹 깔아뭉개야 한다."며, 맞장구를 치고, 혼잣말로 "요새 정보부는 부마사태 처리도 그렇고 뭘 하는지 모르겠다."며 비아냥거리며, "김재규"를 계속 코너로 몰고 갔다.
이런 분위기는 06:30분 쯤, "신재순ㆍ심수봉"이 연회장에 들어오면서 조금 누그러졌지만, 이미 뚜껑이 열린 "김재규"는 연회장을 나와, "김정섭(중정 국내담당 차장보)"와 저녁식사 중이던 "정승화 총장"에게 가서, "갑자기 대통령의 부름을 받고, 연회에 참석중이다. 김 차장보가 국내 정치에 대해 잘 알고 있으니, 이 친구와 시국 얘기 좀 나누고 계시라. 끝나는 대로 곧 오겠다."며, 해명을 한 후, 집무실 책장에 숨겨놓은 자신의 "발터 PPK"를 바지 호주머니에 숨겨 나왔다.
그리고 자신의 심복이던 "박선호(의전과장)ㆍ박흥주 대령(부장 수행비서)"를 "안가 마당"으로 불러내어 "오늘 각하와 차지철을 해치우겠다. 너희는 경호원들을 처치하라"라고 일방적으로 명령했다. (박선호 : 제자ㆍ김재규가 육사 2기로 임관했다가, 모종의 사건으로 잠시 면직되어, 대구 대륜중학교에서 체육교사로 교편을 잡고 있을 때의 제자 / 박흥주 : 전속부관ㆍ유일한 현역 군인ㆍ김재규가 6사단장으로 재임할 시, 전속부관ㆍ가족들의 간절한 탄원에도 불구하고, 단심 재판으로 사형을 언도받아, 이듬해 3월 총살당했다.)
"박선호ㆍ박흥주 대령"은 크게 놀랐지만, "김재규"의 명령에 성실히 따랐고, "이기주(안가 경비조장/예비역 해병하사 출신/평소 박선호의 신임이 깊었다)ㆍ유성옥(의전과장 차량운전사/예비역 육군중사 출신/제대 후 중정 운전사로 취직했다가, 박선호의 도움으로 1급 근무지인 안가로 배치/11월에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었음)"을 "암살조"에 합류시켰다. "박흥주 대령ㆍ이기주ㆍ유성옥"은 "안가 나동 주방" 근처에 세워둔 승용차 내부에 숨어서 총소리가 나길 기다렸다.(김재규의 총소리가 신호였다) 한편, "박선호"는 "의전과장 실"에 있던 "정인형(경호처장)ㆍ안재송(경호부처장)"을 처치할 준비를 했다.
3. 시해사건 실행
07:38 경, "박선호"에게 준비가 다 되었다는 얘기를 들은 "김재규"는, 07:40분 바지주머니에 숨겨둔 "발터 PPK"를 꺼내 "차지철"을 향해 "차지철 이 새끼, 넌 너무 건방져"라고 외치며, 제1발을 발사, "차지철"의 오른쪽 손목을 관통시켰다. (여기엔 2가지 설이 존재하는데, 이것은 소수설이다. 다수설은 신재순의 진술에 의거한 것으로, 김재규가 사격 직전 김계원에게 "각하를 똑바로 모시라"라고 충고한 후, 박정희에게 "차지철 저 버러지 같은 놈을 데리고 정치를 하니 올바로 되겠느냐"며, 발사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한때 논란이 되었고, 이로 인해 의자매까지 맺으며, 친밀했던 신재순과 심수봉의 관계가 소원해지기도 했다. 결국 신재순의 "버러지 발언"은 합동 수사본부 측의 강권으로 거짓 증언한 것임이 최근에 밝혀졌다.)
그러자, 박정희는 "이게 무슨 짓이냐" 하고 일갈했고, "김재규"는 3~ 4초쯤 후 엉거주춤 일어선 상태로 제2발을 "박정희의 오른쪽 가슴"에 발사했다. 당황하는 "차지철"에게 "김재규"는 제3발을 쏘려 했으나, "발터 PPK"가 격발불량을 일으켜 발사되지 않자 밖으로 뛰어나갔고, "차지철"은 화장실에 들어가 숨어버렸다.
만약, "차지철"이 총만 소지하고 있었다면 얘기는 전혀 달라졌겠지만, "차지철"은 이전에 "박정희"에게 뭔 지적을 받았는지 몰라도, 행사 때엔 총을 갖고 있지 않은 채, 대통령을 경호하고 있었다. 이때, "경호실장"이 "차지철"이 아닌 전임 "박종규"였다면 "김재규"는 바로 죽은 목숨이었을 거라는 얘기도 있으나, 그 전에 "박종규"는 "김재규"가 불만을 품을 사건을 만들 인물이 아니었다. 참고로, "박종규"는 세간에 잘 알려진 "사격 매니아"였고, 1970년부터 "경호실장"으로 있으면서, "대한사격연맹 회장직"도 겸임하고 있었다.
"김재규"의 제1발을 신호로 "박흥주 대령ㆍ이기주ㆍ유성옥"은 소지한 권총ㆍ소총으로 주방에서 식사 중이던 "김용태(경호실 운행계장)ㆍ김용섭(경호관)"을 사살했고, 그 과정에서 안가요리사 "이정오"가 허리에 총을 맞는 등 "안가 직원" 몇 명도 부상을 입었다.
그 난리 중에 같이 주방에 있던 "박상범(경호계장)은 허벅지 관통상만 입고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졌다. 이 때 살아난 "박상범"은 "전두환ㆍ노태우 정권"에도 계속 경호실에서 근무했고, "김영삼 정권" 출범 때, "경호실장"으로 임명되어, 최초의 민간인 출신 "경호실장"이 되었다. 총을 맞고 쓰러질 때, 주방 조리대에 머리를 세게 부딪쳐 완전히 의식불명이 되어 죽은 것으로 오인되었고, "김태원(안가 경비원)"의 확인사살시, "박상범" 옆에 "요리사 이정오"가 부상을 입고 누워있어, 제대로 조준을 못했던 행운도 따랐다.
게다가 "청와대 경호원"들은 "대행사ㆍ소행사" 때마다, "안가"의 중정 직원들과 얼굴을 부딪치다 보니 친분이 두터웠고, 막역한 친구 사이인 경우도 많았던 바, "김태원"으로선 친하게 지내던 경호원에게 쉽사리 총구를 들이대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같은 시각, "의전과장 실(박선호의 방)"에서 마른안주를 먹으며, AFKN TV 방송을 보고 있던 "정인형(경호처장)ㆍ안재송(경호부처장)"이 총소리를 듣고, 뛰어나가려 했다. "박선호"가 권총으로 제지하며, "움직이지 마라, 제발 우리 같이 살자!"라고 애원했지만, "안재송"이 총을 뽑으려 했고, 어쩔 수 없이 "박선호"는 "안재송"을 사살한 데 이어, "정인형"도 살해하고 말았다. 사실 "박선호"는 이 둘을 사살하기 보다는 잘 설득하여 어떻게든 살려볼 속셈이었다. "정인형"은 해병장교 동기이자 둘도 없는 친구였고, "안재송" 또한 해병대 후배였다.
밖으로 나온 "김재규"는 "정인형ㆍ안재송"을 처치하고 나온 "박선호"의 "리볼버"를 넘겨받아, 연회장으로 돌아왔고, 화장실에서 나와 경호원을 애타게 찾던 "차지철"은 "김재규"와 맞닥뜨리자, 문 옆의 문갑을 치켜들고 거세게 저항했으나, "김재규"는 "차지철"의 복부에 총을 발사하여 치명상을 입혔다. "차지철"을 쓰러뜨린 "김재규"는 "박정희의 뒷덜미"에 마지막 발을 발사하여 그를 사망에 이르게 했다.
4. 시해사건 이후 - 김재규의 오판ㆍ파멸
거사를 마친 "김재규"는 복도에서 공포에 떨고 있던 "김계원"에게, "나는 한다면 한다. 보안 유지를 철저히 해주시오"라고 언질한 후, 식사를 마치고 디저트를 먹고 있던 "정승화 총장"을 차에 태워 "안가"를 빠져 나오면서, "각하가 돌아가셨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정승화"는 소스라치게 놀랐지만, 이내 안정을 찾고, "남산(중앙정보부)"으로 갈지, "육본"으로 갈지 우왕좌왕 하던 "김재규"에게 병력동원 차원에서, "용산 육군본부"로 가는 것이 좋다고 권유했다. 이에, "김재규"는 "정승화"의 의견을 받아들여, "육본"으로 차를 돌렸다.
그러나 이날 "김재규"의 판단은 아직도 "김재규 최대의 실책"이었다고 세간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있다. 자신의 영향권인 "남산(중앙정보부)"으로 가서, 그곳에서 훗날을 도모하던가 했어야지(더구나 18년 동안 온갖 조작ㆍ은폐의 달인 중앙정보부가 아니었던가?), 당시 "군부 내"에서의 평가가 높지 못했던 "김재규"가 "육본"으로 간 것은 "나 잡아 잡수"하고, "호랑이 굴에 올 누드로 뛰어든 셈"이었다.
어쨌든, "육본 대회의실"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김재규는 박정희가 죽었다"는 사실은 숨긴 채, "각하가 지금 유고상태이다. 빨리 계엄령을 선포해야 한다. 김일성이 알면 큰일 난다."고 길길이 뛰었다, 그러나 뒤늦게 "육본"에 도착한 고향 선배인 "신현확(부총리)"이 "밑도 끝도 없이 계엄령이 말이 되느냐. 어떻게 된 일인지 전말을 밝히라"며, 다그쳤다.
"박정희"의 면전에서도 직언을 서슴지 않던 강직한 성격의 "신현확"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신현확"이 육본에 도착하기 전, 다른 장관들은 "김재규"의 기세에 밀려 전전긍긍 하고 있었다. 그 사이, "박정희"를 "국군 서울지구병원"에 안치하고, "육본"으로 온 "김계원"에 의해, "김재규가 대통령 시해범"이란 사실이 밝혀졌다,
결국 "김재규"는 "전두환의 보안사 수사요원"에 의해 체포당하며, 거사는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다. 또한, "박선호ㆍ박흥주 대령"을 위시한 "암살조"도 그 다음날 전부 체포되어, "김재규"와 함께 "보안사 분실"로 연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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