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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건- 상식ㆍ논쟁-개화파ㆍ북학파

사건- 1862 : 진주민란 (晋州民亂)ㆍ진주(晋州)농민항쟁

by 당대 제일 2022. 1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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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농민항쟁(晋州)ㆍ진주민란(晋州民亂)"은 "임술농민항쟁(壬戌農民抗爭)ㆍ임술민란(壬戌民亂)"의 일부로, 1862년(철종13) 봄, "진주"에서 일어난 민중의 봉기이다. "임술민란"은 "경남 진주민란"을 시작으로 하여, "전라도ㆍ충청도"로 삽시간에 번졌다. 1862년 한 해에만 "제주"를 비롯한 전국 71곳에서 농민들이 민란을 일으켰는데, 이것을 통틀어서 "임술농민항쟁ㆍ임술민란"이라 한다.

 

1. 진주농민항쟁(晋州)진주민란(晋州民亂)

일 시 : 1862(철종13) 03.14~03.23(02.14~02.23)          장 소 : 조선 경상우도 진주목            결 과 : 농민군의 자체적 해산주동자 처형

교 전 : 농민 봉기군 : 유계춘(몰락 양반)이명윤(, 교리)이계열(나무꾼)  /  조선군 : 박규수(안핵사)홍병원(진주목사)백낙신(경상우병사)

피 해 : 총 피해액 10만 냥 정도박살난 양반가옥(126)약탈당한 양반가옥(78) / 아전서리 수 명 피살 / 농민 봉기군 주동자 10명 효수

2. 배경진행

1809(순조9), "효명세자""순조순원왕후"의 장자로 "창덕궁 대조전"에서 태어나, 1812년 왕세자에 책봉되었다. 1827, "순조"의 명에 따라 "대리청정"을 하여,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견제하고, 처가인 "풍양 조씨" 다른 당파의 인물들을 중용하였으며, "이인좌의 난" 이후 축출당한 "소론"계열 인사들을 추가로 등용하였고, 1828년에는 "창덕궁" 내에 "연경당(演慶堂)"을 세우기도 했다그러나 1830.05, "창덕궁 대조전"에서 2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효명세자"가 일찍 요절하자, "이환(헌종)""동궁"에 책봉되고, 1834.08세의 나이에 즉위하였으나 실권은 할머니인 "순원왕후 김씨안동 김씨"에게 있었다"헌종"1841~184923살의 나이로 요절할 때까지 8년간 친정을 하였지만, 후사를 남기지 못했고, 결국 왕 "순원왕후"의 명으로 "덕완군"에 봉해진 뒤, "순조"의 양자 자격으로 왕위를 이은 "강화도령 철종"에게 넘어갔다"철종"1849~1863년까지 14년간 재위에 있었고, 지지기반과 서출로서 정통성을 가지지 못해, 조정은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에 좌지우지되었으며, 조세의 기본이 되는 "삼정"(전정군정환곡)은 문란해 질대로 문란해 졌다.

그러한 정치적 상황에서 1861.04.29"경상도우병사"로 새로 부임한 "백낙신"의 학정은 백성들을 더욱 절망에 빠지게 했다. 갖은 명목으로 거액의 "세전(稅錢)"을 강제 징수하여 사욕을 채워, "민읍(民邑)"을 소란케 했다. 그는 6만 냥의 돈을 "가호"에 배정하여, 죽은 이에게도 세금을 부과하는 "백골징포"의 만행을 저질렀고, 난민들에게 패악을 저질렀다.

"진주 유곡동"에서 대필을 해주며, 근근히 살았던 몰락한 양반 "유계춘""비변사"에 소장을 내는 등 여러 차례에 걸쳐 조세의 부당성과 관리들의 착취에 대해 항의했지만, 매번 묵살되었다그러자 그는 고심 끝에 무력 항쟁을 계획하기로 했다. 그는 "홍문관 교리"를 지낸 적이 있는 "이계열(이명윤의 6)김수만(장교출신)이귀재(유랑 농민)" 등과 함께 모의하였다그런 다음 그들은 "박수익의 외방객실사노 검동의 집박숙연의 집" 등을 전전하면서 모의를 계속해 나갔다.

1862.01.30일에도 그들은 "산기촌"에 사는 "사노 검동"의 집에 모여, 앞으로의 항쟁 및 집회 계획을 구체적으로 세우고자 할 때, 진주 사람들에게 신망이 두터운 "이명윤"도 참석하였다02.02일에도 "박숙연"의 집에 모두 모여, 새벽에 "계춘"이 소상인이나 농민들에게 보낸 한글 통문에 대해 토론을 벌였다이때 "이명윤"은 통문을 불태워 버리고, 가급적이면 합법적이고 평화적인 방법을 택하자고 주장했으나, 다른 사람들은 대부분 "유계춘"의 뜻에 따라, 한글 통문을 읍내 곳곳에 추가로 붙이기로 합의를 보았다그러자 "이명윤"은 말릴 수 없음을 알고 자리를 박차고 나가 버렸다.

02.04, "단성"에서 민란이 일어나자(단성민란), 이에 힘입어 "이계열"을 두령으로 내세우고, 나무꾼목동농민 등을 규합하였다그리고 "격문선전문"을 각 고을에 나눠 주고, 한글 노래도 만들어 보급함으로써 사기를 고무시켰다그러나 02.07일 주동자급인 "유계춘"이 붙잡혀 "진무청"에 연금되었다관에서는 농민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배려를 했고, 02.13일 제사를 핑계로 집으로 돌아와 다음 날인 02.14일 마침내 무력 봉기를 일으켰다.

그는 "김수만이귀재"등을 이끌면서 "철시(撤市)"를 주도하며 학정에 저항하였다. 그들은 농민운동을 일으킬 것을 모의하고, "통문"을 지어 돌리면서 민심을 모아, 1862.02.18일 행동을 개시하였다이들은 스스로 "초군(樵軍)"이라 부르면서, 머리에 흰 수건을 두르고 손에는 몽둥이나 농기구를 들고 "수곡 장터(수곡면 창촌리)"를 떠나서 "진주성"으로 몰려갔다이때 그동안 잠잠하던 이웃 고을의 농민도 모두 합세하여 그 세력이 수만 명에 이르게 되었다.

하룻밤을 성 밖에서 지낸 농민봉기군은 이튿날 "백낙신진주목사 홍병원"으로부터 부정부패를 혁파한다는 약속을 받아내지만, 부정 관리들을 불태워 죽이고, 지탄의 대상이 되었던 부호들을 습격하였다이에 조정에서는 02.29"박규수""진주 안핵사"로 보내, 난을 수습케 하였다.

정부는 "백낙신진주목사 채병원"을 파직하여 민중을 달래는 한편, 난의 주모자들인 "유계춘김수만귀재이계열박수익정순계곽관옥우양택최용득안계손"과 이들을 이끈 우두머리로 지목된 "전직교리 이명윤"을 체포하였다1862, 이들은 보복에 불타는 지방 향리들에게 가차 없이 처형되어, "효시"를 당하였다.

3. 결과영향

"진주민란"1811년 홍경래의 난 이후, 거의 쉴 새 없이 전국적으로 일어난 소규모의 민란 중 가장 두드러진 농민 봉기였다. "진주민란"은 관군에 의해 곧 제압되었지만, 영향은 심각하여, 이후 "삼남" 일대엔 "민란(임술민란)"의 큰 홍수가 잇달아 휩쓸고 지나갔다03.27, "익산"에서 3,000명의 농민들이 불법적인 도결에 항의하여 난을 일으켰으며, 항의에 침묵하는 "군수 박희순"을 옷을 찢고 마을 밖으로 추방했으며, 탐관오리로 악명 높은 "관찰사 김시연"을 습격하려 했지만, 가족을 버리고 혼자 서울로 도주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04.16, "함평"에서도 "정한순"의 주도로 민란이 일어났으며, 이것을 계기로 조정에서는 강제진압을 하 주동자 6명을 처형하고, 1명을 귀양 보냈다05월에는 "충청도 지역"에 민란이 집중적으로 발생했으며, 6월 들어 차츰 진정되었지만, "경상도 지역"에서는 여전히 세를 잃지 않았다9월에는 "제주도"에서는 대정현 "강제검"과 봉개리 "김흥채" 등을 중심으로 "민란(강제검의 난)"발생한. 이들은 농민들의 지지를 받아 거병, 민란을 일으켜, 91011월에 걸쳐 3차례나 봉기하였고, 3차 봉기에는 "제주 관아"를 점령하여 1월까지 "제주 목" 전체를 장악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조세를 지나치게 많이 거두는 것부역을 불공평하게 매기는 것환곡에서 부정이 많이 저질러지는 것 등의 이유로 발생하였다"진주농민항쟁제주농민항쟁" 당시 공격 대상은 주로 세금을 실질적으로 거두는 "향리아전"들에게 집중되었다. 그러나 "제주 관아"를 점령했던 봉기는 1863.1월에 진압되고, 제주민란의 주동자인 "장두인강제검김흥채"는 체포 후, 압송처형된다.

"농민항쟁"이 계속 확산되자, 조정은 보다 근본적인 수습책을 마련하기 위해서, 05.22"진주안핵사 박규수"가 올린 상소로 특별 관청을 설치하게 되었다그리하여 05.25"철종""삼정개혁"을 위한 기구를 만들 것을 지시했고, 26일에는 "비변사"에서 "삼정이정청(정식 명칭은 이정釐整)" 설치를 결정했다

그러나 "이정청"에서는 개선방안과 대책을 직접 내놓지 못하자, 06.12"철종""인정전"에서 직접 "삼정책문(三政策問)"을 내려, 여론을 수렴한다는 대의명분으로 "삼정을 유지한다"는 전제 하에서 개선방안을 공모하였다. 전국에서 올라온 상소문은 "감영"으로 전달되었으며, 서울로 보내졌다이것을 모아 "삼정이정절목"을 완성하고, 08.17일에 왕에게 보고한 후, 08.19일 석차 발표와 시상을 끝내고, "이정청"은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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