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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인물 - 영화 • 유명인 • 정치인 • 대통령

배우 : 알랭 들롱 (Alain Delonㆍ1935~2024ㆍ89세ㆍ178cm)

by 당대 제일 2025. 4.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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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워낙 잘생긴 걸로 유명해, "미남의 대명사ㆍ세기의 미남ㆍ영화 역사상 가장 잘생긴 남자" 등으로 불렸다. "장폴 벨몽도 (1933~202188), 카트린 드뇌브 (1943~ ), 잔느 모로 (1928~201789), 장루이 트랭티냥 (1930~202292)"과 함께, 1960년대 "프랑스 영화"의 전성기를 이끈 배우들 중 하나로, "프랑스" 밖에서도 인지도는 상당하며, "이탈리아" 영화사에도 영향력 있는 배우로 알려진다유럽에서 주로 활동하면서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지만, 정작 가장 큰 시장인 "미국"에서는 대중적으로 흥했다고 불릴 수 있는 작품이 없었다.

 

1. 생애

1935, 프랑스 파리 교외 "(Sceaux)"에서 태어났고, 4살 때 부모가 이혼했다. 이혼한 부모는 각각 재혼했고, 아무도 "들롱"을 맡으려 하지 않았기에, 다른 집에 입양되었다. 입양한 양아버지는 교도관이었으나, 양아버지가 사망하면서, 둘 중 재혼한 어머니와 살았다. "가톨릭 기숙학교"에 보냈지만, 행실 불량으로 6번이나 퇴학 처분을 받으며, 학교들을 옮겨 다녔다. 14살이 되자, 모친은 계부가 일하는 정육점에서 일하게 했다. 하지만 계부와 잦은 갈등을 일으켰고 정육점에서 오래 일하지 못하고 그만두었다. 정육점 일에도 부적응한 그는 17세에 "프랑스 해군"에 입대하였다.

파병기간 중, 부대 지프를 훔쳐 근무지를 무단이탈하여, 영외로 여행을 떠났다가, 운전 미숙으로 차량을 강물에 빠뜨린 혐의로 체포되어, 군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11개월간의 수감 생활을 마치고, 해군 상병으로 "불명예 전역"했다.

2. 영화 "태양은 가득히 (톰 리플리 역)"으, 세계적인 톱스타 반열에

1956, "불명예 제대" , 파리에서 "웨이터짐꾼비서점원" 등 갖은 잡일을 하며, 돈을 벌었다. 이 시절 그가 갱단에 있었다는 소문도 있다. 이때 여배우 "브리지트 오버"와 친분을 쌓았고, 이후 "오버"와 함께 "칸 영화제"를 방문했는데, 그곳에서 미국 영화제작자 "데이비드 O. 셀즈닉(1902~1965)"에게 발탁되었다.  스크린 테스트 후, "셀즈닉"은 그에게 영어 교육을 제공하고 계약을 제안했다. 하지만 "파리"로 돌아온 "들롱""이브 알레그레 (프랑스 감독)"을 만나, 고국에서 경력을 쌓으라는 충고를 받아들이고, "셀즈닉"과의 계약을 파기한 후, "알레그레 감독"의 영화 "여자가 다가올 때 (1957)"로 데뷔했다.

이후 "사랑은 오직 한 길아가씨 손길을 부드럽게" 등의 로맨스 영화를 통해 인기를 얻고, 1960년에 히트작 "태양은 가득히"로 세계적인 톱스타 반열에 올랐다. 위험한 남자 "톰 리플리 역"을 맡아 다부진 몸과 매혹적인 눈빛으로 전 세계를 사로잡았다.  1999, "스위스 국적"을 취득하여 "스위스"에서 살았다. 당시 "프랑스"의 사회주의 정부와 사회 전반에 환멸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다만 사망 당시, "프랑스 두쉬몽코르봉"에 있었던 걸 보면 어느 순간 다시 귀국한 것으로 보인다.  2017, 영화계 은퇴를 선언하였다. 2019, "뇌졸중"으로 입원해 수술을 받았고, 2024.08, 자택에서 사망했고, 장례는 가족장으로 치러졌다.

3. 태양은 가득히 (Plein Soleilㆍ1960년 개봉한 "프랑스" 영화)

원작은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추리소설 "재능 있는 리플리 씨 (The Talented Mr.Ripley), "금지된 장난 (1958)"으로 유명한 "르네 클레망"연출, "알랭 들롱모리스 로네마리 라포레" 주연의 작품이다국내명 "태양은 가득히"는 일본 개봉명인 "太陽がいっぱい"를 그대로 번역한 것으로, "프랑스" 원제는 "Plein Soleil (가득찬 태양)"이고, 미국 개봉명은 "Purple Noon (보라빛 정오)"이다일본 개봉명을 지을 때, 의미에 맞게 하자면, "정오의 태양작열하는 태양햇살이 가득한"이라고 했어야 했다.

 줄거리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별 볼 일 없는 삶을 전전하던 "톰 리플리", 부잣집 아들로 방탕한 생활에 빠진 고교동창 "필립"의 부친으로부터, 아들을 데려오면 $ 5,000을 주겠다는 제의를 받고 이탈리아로 향한다. 학창 시절부터 변함없이 ""을 하찮게 여기는 오만한 성격의 "필립"은 애인 "마르쥬"와 함께 셋이 보트 여행을 떠나자고 제안한다. "필립" ""에게 배의 조종을 맡겨둔 채, "마르쥬"와 보란 듯이 관계를 가지고, 배를 거칠게 몰았다는 이유로 ""을 구명보트에 태워 매달고 달리거나, 뙤약볕에 방치하는 등 모멸적 행동을 서슴지 않는다. "필립"과 다툰 "마르쥬"가 배에서 내리자, 더 이상 "필립"의 오만경멸을 견딜 수 없는 ""은 포커게임 중, 칼로 "필립"을 살해한 다음, 시신을 방수포에 감싸 바다에 던져버린다. "필립"의 신분증명서를 위조하고, 서명을 흉내 내어, 그의 자리를 대신 차지한 채, 살아가던 "" 앞에 필립의 친구 "프레디"가 나타나고, ""은 우발적으로 "프레디"마저 살해한다.

"" "프레디"의 시체를 유기한 다음, 마치 "필립" "프레디"를 살해하고, 죄책감을 견디지 못해 자살한 것처럼 정황을 조작한다. "필립"의 죽음을 슬퍼하는 "마르쥬"를 위로하면서, 마침내 자신의 여자로 만드는데 성공한다. 그러던 어느 날, 팔기 위해 내놓은 "필립"의 요트를 구매자들이 살펴보려고 육지로 인양하는 과정에서, 밧줄로 꽁꽁 싸매어 바다에 버렸던 "필립"의 시체가 발견된다. 시체를 바다에 버리는 것은 성공했으나, 하필 그 밧줄이 스크루에 걸려, 배와 함께 계속 따라 다녔던 것이다. 심하게 부패하여 엉망이 된 시체가 모래밭으로 끌어올려지고, 그것을 알아본 "마르쥬"의 절규가 울려 퍼진다.

""은 바닷가의 따스한 햇살 아래서, 최고급 술을 마시며, 손에 넣은 부를 잠시나마 만끽하고 있는데, 체포하러 온 형사들은 가게 종업원에게 전화가 왔다는 핑계로 그를 부르라고 거짓말을 시킨다. ""은 아무것도 모른 채,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여유롭게 전화를 받으러 걸어간다. 해변가를 가득 채우는 정오의 태양과, 바다 위에 잔잔히 떠있는 요트를 비추며 영화가 끝난다.

② "리플리 증후군 (Ripley Syndrome)"은 "알랭 들롱"이 주연한 영화인 "태양은 가득히 (1960년 개봉한 "프랑스" 영화)"의 주인공 "톰 리플리 (Tom Ripley)"역에서 따온 것이다.

"리플리 증후군"이란, 꿈은 높지만 그것을 실현할 능력이 없어, 자신의 신분ㆍ정체를 속이는 거짓말을 하다가, 결국 자신마저도 그 거짓말이 사실이라고 굳게 믿게 되는 망상장애에 시달리는 증상으로, 자신의 현실을 부정하면서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허구의 세계를 진실이라 믿고 상습적으로 거짓된 말과 행동을 반복하는 "반사회적 인격장애"이다.

 

4. 평가

연기력에 대해선 의견이 갈리는 편인데, 거장 감독들의 작품들로 꽉 채워진 "필모그래피"인데도, "세계 3대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적은 없다. 외모인기 때문에 연기력이 저평가되었다고 의견도 있다

서늘하면서, 퇴폐적인 특유의 매력과 독보적인 외모,"프렌치 느와르"의 전성시대를 열었다. 푹 눌러쓴 중절모, 깃을 세운 트렌치코트를 입고, 범죄자를 주로 연기했다. (한밤의 암살자시실리안암흑가의 두 사람암흑가의 세 사람볼사리노고독한 추적아마 어렸을 때, 질풍노도의 시기 때문인지, 그는 하류인생을 주로 연기했는데, 실제로 젊은 시절 많은 굴곡을 경험했기 때문에 생각보다 잘 어울린다. "시오노 나나미 (일본작가)"는 자신의 책에 "들롱은 미남이다. 그러나 왠지 풍기는 분위기가 천하다. 그런 만큼 밑바닥 인생을 연기하면 매력이 살아난다"는 평가를 했다.

 

5. 여담

"태양은 가득히"에서 "톰 리플리" 역을 맡은 그는 성격이 "톰 리플리"와 매우 비슷하다는 주장도 있다. 그는 성격이 좋지 않고, 여자관계도 복잡하기로 유명했는데, 그와 교제했던 여성들의 경험담을 보면, 사실상 연인을 "성공의 발판"으로 이용해왔다. 그만큼 비정하고, 남을 이용하는 성격이라는 것이다.

 목소리가 부드럽다. "가수" 제의도 자주 받았고, 나중에는 "달리다 (미스 이집트 출신 가수)" "Paroles Paroles" 라는 곡의 내레이션을 맡기도 했다. "셀린 디온"과 함께 공연하기도 했다.

 외모와 다르게 젊은 시절, 복싱을 무척 좋아했고, "카를로스 몬존"이라는 복서의 프로모터로 활동하기도 했다.

남녀노소에게 어린 시절부터 잘생겼다는 얘기를 매일 들었다는 건 유명한 사실인데, 아기 때부터 그를 만지려는 사람들이 많아서 유모차에 태우고 산책을 나갈 때마다 어머니가 "만지지 마세요"라고 적힌 팻말을 유모차에 붙여둬야 했다고 한다. 어렸을 때부터 여자들은 물론 남자들까지도 매일 24시간을 10명 이상이 주변에 졸졸 쫓아다니곤 했는데, 워낙 어려서부터 일상이었다 보니 그게 이상하단 걸 전혀 몰랐다고 한다.

6. 여자 관계

배우로 데뷔하기 전인 1950년대에는 "Paroles Paroles"를 함께 불렀던 가수 "달리다 (미스 이집트 출신 가수)"와도 사귀었었다고 밝혔으며, "브리지트 바르도 (배우1934~ )"와도 염문이 있었지만, 그녀와는 단지 절친한 사이일 뿐이고,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며, 루머를 부정했다.

2019, "칸 영화제"에서 "공로상" 격인 "명예 황금종려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는데, 막장 사생활로 인해, 수상 반대 여론이 거셌고, "수상을 철회하라"는 청원에도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공식적인 장남이자, 실질적 2남인 "앙토니 들롱"도 아버지의 바람기를 물려받았는지, 할아버지와 아버지처럼 이혼 경력도 있다고 하며, 장녀는 1째 부인 소생이고, 2녀와 3녀는 2째 부인 소생이다.

로미 슈나이더 (1958~1963독일 영화계의 스타 여배우)

가족의 영향을 받아 늘 배우업을 동경하며 자랐던 그녀는 1953, 15세의 나이에 영화 "흰 라일락이 다시 필 때"를 통해 스크린 데뷔했고, 이후 1955~1957년에 개봉한 "시씨 (Sissi3부작)"에서 여주인공이자 실존인물인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 (1837~1898ㆍ애칭 : Sissi오스트리아 제국에서 가장 오랫동안 황후자리(44)를 지켰으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황후라 평가)"를 사랑스럽게 연기해, "독일오스트리아" 양국의 국민 여동생이 되어,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얼굴에 걸맞은 바람둥이로 많은 염문을 남겼다. 대표적인 연인은 교제 당시, "유럽의 약혼자들"로 불렸던 독일의 여배우 "로미 슈나이더". "들롱"의 말로는 진정한 첫사랑이었다고 한다. 1958, 그는 영화 "사랑은 오직 한 길"에서 호흡을 맞춘 "독일 영화계의 스타 로미 슈나이더와 사랑에 빠져, 약혼했지만 둘이 언쟁을 할 때면" 그가 눈물을 보일 정도로 심하게 다투었다고 한다. 배우 출신인 "로미" 어머니의 반대도 굉장히 심했다. 그녀가 헐리우드에 진출하던 60년대 초, 그는 동료인 "니코나탈리" 등과 외도를 했고, 결국 5년여의 연애 끝에 1964년 결별했다. 둘은 결별 이후, 연락하지 않다가, 1969년경 "로미"가 결혼 후 복귀를 시도할 때, 그가 그녀를 자신이 주연으로 나오는 "수영장"의 여주인공으로 적극 추천하면서 다시 만났다.

이 때 "로미"와 스태프들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부인인 "나탈리"와 소원했던 그는 어떻게든 "로미"를 다시 유혹하려 했다고 한다. 그러나 "로미"는 이미 유부녀였으며, 파혼 당시 "나탈리"와 결혼한다며 쪽지로 통보하고 떠난 그의 태도도 문제였던지라 끝까지 받아주지 않았다. 다만 이후로도 여러 작품을 함께했고, 둘은 사망하기 전까지 가까운 사이로 지냈다.

"로미"의 사후에도 그는 "로미" 관련행사에는 늘 기꺼이 참석하며 그녀의 생전을 언급하며 칭찬하거나 그리워하는 반응을 보였다. 2000년대 이후 다시 연극을 시작했을 때, 과거 "로미" 함께 나온 연극에서 쓰인 "로미" 의상을 드레스 룸에 가져다 두었으며, 말년에도 집안 곳곳에 그녀와 찍은 사진을 걸어두었다. 2018년 인터뷰에서, "로미""인생의 사랑"으로 언급하며, 결혼하지 않은 것을 후회한다고 고백했다.

"로미"와 약혼했던 시절, 가수 "니코"와 외도해, 1962년 태어난 실질적인 장남 "크리스티앙 아론"이 있다. 그러나 그는 친자 인정 소송에도 불구, 현재까지도 "아론"을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게다가 여태 만났던 수많은 여자들 중, "니코"에게만 유독 혐오 증세를 보였는데, 아마도 당시 자신의 첫사랑이자 연인이었던 "로미"와 헤어지게 된 계기이자, 당시 다른 여자와 바람피운 것도 모자라 임신시킨 것에 대해 많은 비난을 받아서라고 추측된다. 그의 어머니는 그 아이를 친손자로 인정해, 마약 중독이던 "니코" 대신 돌봐주기까지 했지만, 아버지의 성을 물려받지는 못했다.

나탈리 들롱 (1964~1969)

1964~1969년까지, 유일한 결혼생활 끝에 이혼한 부인 "나탈리 들롱"과의 사이에 공식적인 첫 아들 "앙토니 들롱"이 있다. "나탈리"는 그의 바람기에도 잔소리하지 않는 편이었으며, 결혼 막바지에는 본인도 바람을 피웠다. 아들 "앙토니"는 할리우드에서 일하지만, 부모의 명성에 비해 인지도나 인기는 그저 그런 정도이고, 대신 "앙토니"의 딸 "앨리슨 르 보르게스""들롱"과 많이 닮았다는 이야기가 많다.

"나탈리"와 이혼 후, "미레유 다르크"와 사귀던 1972년에도 "독일"에서 "루드비히 : 신들의 황혼"을 찍는 "로미"를 찾아와 다시 들이댔었고, 당연히 실패했다.

미레유 다르크 (1968~1983)

가장 오래 사귀었으며, "들롱""인생의 여자"라고 말한 여인은, 15년간 관계를 지속한 끝에 결별한 "미레유 다르크"이다. "들롱"이 경호원 살인 사건에 연루되어 전부인 "나탈리"에게 조차 외면 받을 때, 가장 충실했던 여인이었으며, 사귄 여자 중 제일 끈기 있었다고 한다. 그는 "미레유"에게 처음부터 "나는 절대 결혼할 생각이 없으니, 이것을 감당할 수 있다면 곁에 남으라"고 말했고, "미레유"는 그의 숱한 바람에도 곁을 지켰다. 결별 원인은 "미레유"의 지병 때문에, 아이를 가지지 못하는 것이 크게 작용했다고 한다. 결별 후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며, 2017년 그녀가 사망하자, "들롱"은 굉장히 상심했다.

로잘리 판 브레멘 (1987~2001네덜란드의 모델 )

1987년부터는 "로잘리 판 브레멘"2001년까지 약 15년가량 동거하며, 1990년에는 딸 "아누슈카 들롱", 1994년에는 막내인 아들 "알랭 파비앙 들롱"을 얻었다. 나이 차가 30살이라 둘 사이의 자녀는 거의 손자뻘이었다. 고명 딸인 "아누슈카"를 가장 아낀다고 밝혔다. 다만 그런 딸이 어린 시절, 어머니인 "로잘리"와 정식으로 결혼해달라고 울고 불어도 결코 뜻을 굽히지는 않았다고 한다.

히로미 롤린 (2021~2023ㆍ일본인 영화관계자)

"히로미"라는 일본 여성과 파트너 관계라고 밝혔다. 2023년에는 자녀들이 그녀를 고소했다. 전화통화 이메일우편물 감시개 학대 등으로 아버지 "들롱" 괴롭혔다는 것이 이유다. 자식들은 그녀를 "입주도우미"로 칭했고, 그는 다소 중립적으로 표현했다. 영화 관계자라고는 하나, 정확한 신분은 알려지지 않았으며, 위 고소 건으로 결국 "들롱"의 마지막까지 지키지는 못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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