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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인물 - 영화ㆍ유명인ㆍ정치인ㆍ대통령

미국 : 보니 ② n 클라이드 : 범죄 행각 (1933~1934)ㆍ파국 (1934)

by 당대 제일 2023. 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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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시관 "J.L.웨이드 박사"에 의한 1934년 공식적인 기록은, "보니 파커 (1910~1934.05.2324)"는 여러 개의 헤드 샷을 포함하여 26발을 맞았으며, "클라이드 배로 (1909~1934.05.2325)"는 17발을 맞았으며, 1발은 척추 뼈를 뚫고 나온 것이라고 발표했다.

 

1. 범죄 행각

① 1932년 초기, 직업ㆍ살인

1932.02월, "클라이드"가 석방된 이후, 그와 "랠프 펄츠"는 무리를 규합하여, 주로 가게나 주유소 등에서 소소한 강도 행각을 이어갔다. 그들의 목표는 "이스트햄 교도소"를 습격할 만한, 충분한 자금과 화기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04.19일, "보니ㆍ랠프"는 "텍사스 카우프만"에서 "무기 상점"을 털다가, 체포되어 범죄를 인정하고 투옥되었다. 몇 달 후, "보니"는 석방되었지만, "랠프"는 감옥에 남았고, 이후 "갱단"에 돌아가지 못했다.

04.30일, "텍사스 힐즈 버러"에서 벌어진 강도사건에서, "보니"는 상점주인 "존 부처"가 총기로 살해되었을 때, "자동차의 운전사"였다. "보니"는 차에서 내려, 길에 있었으나, "희생자의 아내"는 사진이 제시되자, 그녀를 총격을 가한 일당 중 1명으로 지목했고, 이 사건이 그녀가 "최초의 살인"으로 기소된 사건이었다. "보니"는 06.17일까지 투옥되어 있는 동안, 시간을 보내기 위해 "시"를 썼다. "코프먼 카운티"에서 소집된 "배심"에서는, "보니"가 기소되는 것이 거부되었고, 그녀는 석방되었다. 몇 주도 안 되어, 그녀는 "클라이드"와 다시 뭉쳤다.

08.05일, "보니"가 "댈러스"에 있는 엄마를 방문하는 동안, "클라이드ㆍ레이먼드 해밀턴ㆍ로스 다이어"는 "오클라호마 스트링타운"에 있는 시골 "댄스장"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보안관 맥스웰ㆍ부관 유진 무어"가 주차장에서 그들을 검문하자, "클라이드ㆍ레이먼드"는 총을 발사하여 "부관"을 죽이고, "보안관"에게 중상을 입힌다. 이 사건은 "클라이드" 그의 갱들이 "공무"를 수행하는 인물을 최초로 살해한 사건이며, 결국에는 모두 9명의 공무원들을 살해한다. 10.11일, "텍사스 셔먼"에서 있었던 강도 사건에서, 상점주인 "하워드 홀"을 이들이 살해했다고 알려졌으나, 1997년 이후, 많은 역사학자들은 이 사건은 이들과 무관하다고 여긴다.

"W.D.존스"는 어릴 적부터 "클라이드" 가족의 친구였다. 비록 1932년, "크리스마스이브"에 16살에 불과했지만, 그는 "클라이드"를 설득하여 무리에 끼었고, 그날 밤, 그들과 함께 "댈러스"를 차를 타고 빠져나갔다. 바로 다음 날, "존스"는 "텍사스 템플"에서 차를 훔치는 도중, "도일 존슨"을 살해함으로써, 살인 행각에 가담했다. 2주가 채 지나기 전인 1933.01.06일, "클라이드ㆍ보니ㆍ존스"는 다른 범죄자들을 잡기 위해 잠복해 있던 "경찰관"을 만나면서, "클라이드"가 "테런트 카운티"의 보안관 "맬컴 데이비스"를 살해한다. 1933.11.28.일, "보니"는 "댈러스 대배심"에서 1933.01월에 저지른 "맬컴 데이비스" 보안관의 살해혐의로 살인 기소를 선고 받았을 때,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이다. 이것이 "보니"에 대한 최초의 "살인 확정 선고"였다. 4월 이후, "클라이드 갱단"이 저지른 살인은 이로써 전부 5건이 되었다.

② 1933년 : "벅"의 가담

1933.03.22일, "벅 배로"는 사면을 받고, 교도소에서 풀려났다. 며칠 후, "벅 배로ㆍ아내 블랜치"와 "클라이드ㆍ보니ㆍ존스"는 "미주리 주 오크리지 드라이브 1/2 3327번지"에 "임시 은닉처"를 마련했다. 가족들에 따르면, "벅ㆍ아내 블랜치"는 "클라이드"의 자수를 설득하기 위해, 방문하였다고 한다. "클라이드ㆍ보니"의 다음 범법 행위는, 그들의 정체가 탄로 나서가 아닌, "의심스럽고 눈에 잘 띄는 행동"에서 발생되었다. 그들은 조용한 주택가에서, 늦은 밤까지 시끄럽게 떠들며, 음주를 곁들인 카드게임을 하였다. "우리는 매일 한 상자의 맥주를 사왔었지요"라고, 훗날 "블랜치"는 회상했다. 그들은 종일 시끄럽게 굴었고, "클라이드"가 아파트에서 "브라우닝 자동 소총"을 청소 하는 동안, "총"이 발사되었다. 어떤 이웃도 그 집에 와 보진 않았지만, "조플린 경찰국"에 수상한 일이 있다는 신고가 접수되었다. 

"갱"들이 기다리고 있는 것을 알지도 못하고, 04.13일 5명의 경찰관들은 2대의 차에 나눠 타고 "밀주업자의 소굴"로 의심되는 "차고 아파트"에 모였다. 기습을 당했지만, 총격에는 냉정을 유지하기로 유명한 "클라이드"는 "총격전"에 있어 경찰관들보다 훨씬 더 많은 경험이 있었다. "클라이드ㆍ존스ㆍ벅"은 재빨리 "맥기니스 형사"를 사살하고, "해리먼 경관"에게 중상을 입혔다. 아파트에서 도주를 하는 동안, "보니"는 자신의 "자동소총"을 들고, 총탄을 피하기 위해 엎드려서, "30구경 총탄"으로 맞은편을 두들겨, 고속도로 순찰대 "G.B. 카헬러 경사"를 큰 참나무 뒤에 몸을 숨기게 하여, 나무 파편이 "카헬러 경사"의 얼굴에 맞게 했다. 그 후 "보니"는 일행과 차를 탔다.

차의 속도를 늦춰, 거리에서 "블랜치 배로"를 당겨서, 태웠다. 그녀는 거리에서 도망가는 그녀의 개, "스노볼"을 쫓고 있었다. 살아남은 경관들은 14발의 총알을 쏘았다고 증언했다. 이 총탄들 중 하나는 "존스"의 옆구리에 맞았고, 하나는 "클라이드"를 쏘았지만, "코트"의 단추를 맞고 굴절되었으며, 하나는 벽을 튕겨 나와, "벅"에게 타박상을 입혔다고 증언했다.

16살의 "W.D.존스"는 "클라이드"와 함께 한, 첫 2주 동안에만, 2건의 살인을 저질렀다. 그들은 "조플린"에서 경찰을 피해 달아났지만, 대부분의 물품을 아파트에 남겨두고, 떠났다. "벅ㆍ블랜치"의 결혼증명서ㆍ3주된 "벅"의 가석방 증서ㆍ화력 좋은 총기들ㆍ"보니"가 직접 쓴 시ㆍ 인화되지 않은 여러 개의 필름ㆍ카메라 등이 남겨둔 품목들이었다. 이 필름들은 "조필린 글로브"에서 인화를 했고, 인화된 사진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보니ㆍ클라이드ㆍ존스"이 서로에게 총을 겨누며, 익살을 떨고 있는 사진들이었다.  "보니"의 "시"와 손에 권총을 들고 담배를 꼬나물고 있는 "파커"의 사진이, 새로 시작한 뉴스에 공개되자, "댈러스"에서 온 "정체불명의 5인조"는 미국 전역에 "배로 갱"이라는 이름으로 사진과 시 "샐의 자살이야기"와 함께, 신문 1면을 장식했다.

이후 3개월 동안, 당국은 "텍사스"에서 북쪽으로 "미네소타 주"까지 수색을 했다. 5월에, "인디애나 주 루슨"에서 은행을 털려고 시도했으며, "미네소타 주 아카베나"에서 은행을 털었다. 전에 그들은 "루이지애나 루스톤"에서 "다비의 차"를 훔치는 과정에서 "딜러드 다비ㆍ소피아 스톤"을 유괴했다. 이것이 1932~1934년까지 그들이 "경찰관ㆍ강도 희생자"를 납치한 여러 사건 중의 하나로, 보통은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풀어주었고, 때때로 돌아갈 수 있는 돈을 쥐어주기도 했다.  이런 이야기들이 신문의 1면을 장식했지만, 더 좋지 않은 이야기도 있었다.

"배로 갱"은 경찰관이건, 민간인이던 그들을 가로 막는 누군가를 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알려진 "배로 갱"의 다른 조직원 또는 같이 살인을 저지른 공범이라고 간주된 사람은 "레이먼드 해밀턴ㆍW.D.존스ㆍ벅 배로ㆍ헨리 메스빈"이었다. 비록 신문에 난 사진들은 "배로 갱"에 대한 호사스런 삶을 조명했지만, 실제로는 그들은 "절망과 불만족"에 빠져있었다. 이것은 이후 1930년대 교도소에서 "블랜치 배로"가 쓴 그들의 삶에서 잘 설명하고 있다.

그들이 새롭게 얻은 악명은 사소한 일상 생활도 어렵게 했다. 그들이 갈 수 있는 식당ㆍ모텔은 점점 줄어들었고, 요리ㆍ목욕은 "캠프파이어"나 차가운 시내에서 해결할 수밖에 없었고, 두 부부는 지쳐감에 따라, 잦은 말다툼을 하게 되었다. 4월말, "딜러드 다비"에게서 훔친 차를 실질적으로 운전하던 "W.D.존스"는 기분이 나빠져, 그 차를 타고 도주를 하였다. 06.10일, "텍사스 웰링턴" 근처에서 "클라이드"는 "보니ㆍ존스"와 함께 차를 과속으로 몰고 가는 중, 건설 중인 다리의 "우회경고 표시"를 무시하다가, 현장의 바리게이트를 들이박고 강바닥에 쳐 박았다. 화재는 심하게 났었고, 배터리가 떨어져 나갈정도로 자동차는 박살났다. 실제 휘발유 화재가 있었는지, "보니"가 쳐 박힌 차의 배터리에서 산을 뒤집어썼는지에 대해서는 자료마다 일치하지 않는데, "보니"가 오른쪽 다리에 입은 "중상의 3도 화상"을 참았다는 것은 확실하며, 근육들이 수축되어,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죽음이 가까워 졌을 때, "보니"는 좀처럼 걸을 수도 없었고, 성한 다리로 뛸 수도 없었고, "클라이드"에 의한 부축도 힘들어졌다. 근처 농장 가족들의 도움을 받은 후, 2명의 현지 경찰을 납치하여, 3명의 범죄자들은 "벅 배로ㆍ아내 블랜치"를 다시 상봉할 수 있었다. "아칸소 주 포트 스미스" 근처의 여행자 숙소로 숨어들어, "보니"의 화상을 치료하려 하였다. 당시 "벅 배로ㆍ존스"는 "아칸소 주 앨마"에서 강도질에 실패하여, 현지 보안관 "헨리 D.험프리"를 살해했다. 법망으로부터의 새로 갱신된 추적으로, "보니"의 중태에도 불구하고, 다시 도주를 할 수 밖에 없었다.

③ 1933년 : "플랫 시"와 "덱스필드 공원"

1933.06.18일, "배로 갱"은 "미주리 주 플랫 시(현, 캔자스 국제공항I-29 건너, 캔자스 시 남쪽 경계에 들어가 있음) 남쪽의 "레드크라운 여행자 숙소"에 묵었다 "레드 크라운 코트"는 2동의 오두막집으로 "차고"와 붙어 있으며, 일당은 2개 모두 임대를 했다. 남쪽으로는 "미주리 고속도로 순찰대"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식당 겸 급수처인 "레드 크라운 술집"이 서 있었다. 다시 주목을 끌기위해, 외출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주인 "닐 하우저"는 "클라이드ㆍ블랜치"가 3개의 객실을 등록하자, 그들 일행에 즉각 관심을 보였다. "하우저"는 뒷문으로 나가, 차 안에 있는 5명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운전사는 재빠른 도주를 위해, 차고 안에 "갱 스타일"인 "전면 주차"를 해두었다. "블랜치"는 숙박비를 "지폐"가 아닌 "동전"으로 지불하였고, 3인용의 5번의 저녁 식사와 맥주를 사는 것도 똑같이 했다. 다음 날, "하우저"는 손님들이 통나무 객실 창을 신문지로 가려놓은 것을 알게 되었고, "블랜치"는 또 다시 5번의 식사를 은화로 지불했다. 그녀의 "승마용 쫄 반바지" 조차도 과도한 주의를 끌었다. 그런 복장은 "플랫 시"의 참한 여성이 입을 수 있는 그런 종류가 아니었고, 그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런 모든 것이 "하우저"에게는 과도했다. 그리고 이러한 행동으로 이 미심쩍은 일행을 식당 후원자이자, "고속도로 순찰대"에 재직하고 있는 "윌리엄 백스터 경위"에게 관심을 갖게 했다.

"클라이드ㆍ존스"가 시내에 "크래커ㆍ치즈ㆍ밴드ㆍ아트로핀 황산염(보니의 다리 치료용)을 사려 왔을 때, 약사는 "홀트 커피 보안관"과 접촉을 했고, 그는 오두막 집을 주시하게 되었다. "커피 보안관"은 "오클라호마ㆍ텍사스ㆍ아칸소"로부터, 그런 물품을 찾는 낯선 이들을 경계하라고 주의를 받은 터였고, "커피 보안관"은 "백스터 경위"와 접촉을 했으며, "백스터"는 "장갑차"를 포함하여, "캔자스 시"에 지원을 요청했다.

그날 밤 11시, "커피 보안관"은 "톰프슨 기관단총"으로 무장한 경찰 병력을 이끌고, 그 오두막집으로 접근했다. 그러나 상당히 떨어진 거리의 경사진 위치에서의 총격 속에, "반자동 소총"은 "오클라호마 엔니드"에 있는 "국영 경호 무기창"에서 07.07일 훔친 "클라이드"가 선호한 "브라우닝 자동 소총"과 잘 맞지 않았다. "클라이드"는 엎드려서 총탄을 갈기면서, 장갑차 위에 달린 경적을 파손시키고 도주를 하였으며, 경찰관들은 그것을 "사격중지 명령"으로 착각했다. 그들은 도망가는 "클라이드"의 차를 추격하지 않았다. 비록 "배로 갱"은 공권력을 또다시 피했지만, "벅 배로"는 "두개골 측면"에 끔찍한 관통상을 당했으며, "블랜치"는 양쪽 눈에 유리 파편을 맞아서, 거의 실명하였다. 쪼여오는 "인간 사냥꾼들의 추적"을 떨쳐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점점 줄어들었다.

5일 후인 07.24일, "배로 갱"은 "아이오와 주 덱스터" 근처에 버려진 유원지였던 "텍스필드 공원"에 캠프를 쳤고, "벅 배로"의 "머리" 상처는 너무 중상이어서, "클라이드ㆍ존스"는 그를 묻을 무덤을 팠다. 현지 주민들은 그들의 "피 묻은 붕대"를 목격을 하고, 그들이 "배로 갱"임을 확신했다. 현지 경찰들과 약 100명에 이르는 구경꾼에게 포위되어, 그들은 또다시 총격을 받았다. "클라이드ㆍ보니ㆍ존스"는 맨발로 도주를 했다. "벅 배로"는 다시 등에 총상을 당하고, "벅ㆍ아내 블랜치"는 경찰들에 의해 체포되었다. "벅 배로"는 5일 후, "아이오와 주 페리"에 있는 "킹스 도터스 병원"에서 수술 후, "급성 폐렴"으로 사망했다. 이후 6주 동안, 남은 3명의 잔당을 찾기 위해, 서쪽 "콜로라도"부터, 북쪽으로 "미네소타", 남동쪽으로 "미시시피"까지 광범위한 수색이 이뤄졌다. 그들은 흔적을 거의 남기지 않았고, 매일 숙식을 해결할 "좀 도둑질"만 했다.

08.20일, "클라이드ㆍ존스"는 "일리노이 플랫 빌"의 무기고를 털어, 다시 무기를 보충하여, "3정의 자동소총ㆍ권총ㆍ넉넉한 총탄"을 확보했다. 9월 초, 그들은 4개월 만에 처음으로 가족을 다시 만나기 위해, "댈러스"로 되돌아오는 모험을 했으며, "존스"는 그들 무리와 떨어져, 어머니가 이사 간 "휴스턴"으로 갔다. 그는 그곳에서 11.16일 체포되어, "댈러스"로 돌아왔다. 가을 내내, "클라이드"는 자신과 "보니"의 가족이 "보니"를 치료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해, 몇 명의 공범들과 작은 규모의 강도 행각을 저질렀다.

1933.11.22일, "텍사스 소어 주" 근처에서 가족과 만나려 하다가, 또다시 간신히 체포를 면했다. 이번에는 고향 "댈러스"의 "보안관 스뭇 킴드"와 부관 "밥 콘ㆍ테드 힌턴"이 근처에 엎드려 잠복하고 있었다. "클라이드"는 운전을 하면서, 함정의 낌새를 알아챘고, "보안관 스뭇 킴드"와 부관이 서 있는 가족의 차를 지나치면서, "자동소총"을 발사하면서, 도주를 했다. 가족들은 다치는 않았지만, "브라우닝 총"에서 발사된 총탄 1발이 차를 뚫고 들어와. "클라이드ㆍ보니"의 다리를 관통했다.

2. 파국 (1934년 )

1934.01.16.일, "클라이드"는 "악명 높은 이스트햄 탈옥"에서, "레이먼드 해밀턴ㆍ 헨리 메스빈"과 다른 여러 명에 대한 탈옥을 획책했기 때문에, 마침내 오랫동안 고심했던 "텍사스 교정국"에 대한 행동을 개시한다. "클라이드"는 "텍사스 교정국"에 제대로 된 복수를 한 것이었고, "텍사스 교도소"는 느닷없는 습격으로 전국적으로 부정적인 여론의 지탄을 받았다.

"탈옥"을 하는 동안, "탈주범 조 팔머"가 "교도관장 조 크라우슨"을 쏘았으며, 이 행위는 결국 "텍사스"와 "연방 정부"의 추적자들이 전력을 기울여, "클라이드ㆍ보니"를 추적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조 크라우슨"이 살려고 발악을 했기 때문에, "교도소장 리 사이먼스"는 그에게 탈옥과 연루된 모든 사람을 색출하여, 죽여 버리겠다고 약속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클라이드ㆍ보니"의 목숨을 당국에 맞바꿔치기 하게 되는 "헨리 메스빈" 만이 예외가 되었다.

"텍사스 교정국"은 "전 텍사스 레인저 프랭크 A.해머 대위"를 접촉하여, "배로 갱"을 추적하는 과제를 수락하도록 설득했다. 은퇴를 했지만, "해머"는 그의 권한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이것은 아직도 만기가 되지 않았었다. 그는 그들을 잡는 일을 "텍사스 고속도로 순찰대원"으로서 수락했고, 더불어 "교도소"에 "특별 감시관"으로서 배정을 받아, "클라이드ㆍ보니ㆍ배로 갱"을 잡는 특수 임무를 부여받았다. "전 텍사스 레인저 프랭크 A.해머 대위"는 키가 크고, 건장하고, 과묵하며, 당국에 의해 승인받지도 않았지만, 옳음에 대한 굽히지 않는 고집, 그가 옳다고 생각한 것을 밀어붙이며, 20년 동안 "텍사스"에서 "1명의 반란군에, 1명의 레인저"라는 기풍에, "걸어 다니는 화신"으로서 두려움과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텍사스 법률 집행관"의 목적을 달성하는데 있어서, 그는 몇 건의 놀라운 체포와 많은 텍사스 범죄자들의 저격의 결과로서, 경이적인 명성을 획득했다. 공식적으로 53명의 사살(자신도 17번의 부상을 당했다.)을 기록했다.

"교도소장"은 비록 항상 "클라이드"를 잡는 데에, "해머 대위"가 1번째 고려 대상이라고 공공연하게 말해왔었지만, 다른 2명의 "레이저"들에게 먼저 접근을 했었던 증거가 남아있다. 2명 모두 여자를 쏘는 것을 거절을 한 상태였으나, 확실히 "해머"에게는 그러한 주저함이 없었다. "해머"의 형제들 중 3명도 "텍사스 레인저"였으며, 형제 "해리슨"은 4명 중 가장 사격을 잘했고, "프랭크"는 가장 끈기가 강했다고 여겨졌다. 0934.02.10일 시작하여, 그는 꾸준히 "클라이드ㆍ보니"의 그림자가 되어 "차"에서 살았으며, 그들이 가는 "타운"의 한두 타운 뒤에 있었다.

1934.04.01일, "부활절 일요일"에, "클라이드ㆍ헨리 메스빈"은 "114번 도로"의 교차로와 "텍사스 그래이프빈(현재의 사우스레이크 이웃 도시) 도브 로드"에서 2명의 젊은 고속도로 순찰대원(H.D. 머피ㆍ에드워드 브라이언트 휠러)를 살해했다. 당시의 목격자들은 "클라이드ㆍ헨리 메스빈"이 총격을 가해 치명상을 입혔으며, 이야기는 언론에 대서특필되었다. "헨리 메스빈"은 1번째 총격을 가했으며, "클라이드"가 그 경찰관을 살해하기를 원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그는 죽어가는 경찰관을 돕기 위해, "보니"가 접근했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런 다음 "클라이드"가 "순찰대원 머피"를 쏘는 일에 가담했다. "헨리 메스빈"이 총을 쏘았을 때, "보니"는 뒷좌석에서 잠들어 있었으며, 폭행에는 가담하지 않았을 확률이 높다.

"그래이프빈" 살인사건 이후, 결과적으로 이 "부부"에 대한 여론이 바뀌었다. 1934년 봄에, "그래이프빈" 살인사건으로 그들에 대한 인지도가 높아졌다. "댈러스"의 4대 일간지는 사건을 목격했다고 주장하는 목격자, 농부의 증언을 실었으며, 그들은 "보니"가 그녀의 목을 뒤로 제치고 엎드린 대원을 쏘아, "순찰대원 머피"의 목이 땅에 고무공처럼 튀는 것을 보고 웃었다고 주장했다. 그 이야기는 심지어 "보니"의 작은 이빨 자국이 나 있는 담배꽁초를 경찰이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며칠 후, "머피의 약혼녀"가 웨딩드레스를 입고 장례식에 참석하자, 사정은 악화되었으며, 또 한 차례 사진이 실린 기사가 게재되어, 새로운 국면의 불을 지폈다. 목격자들의 오락가락하는 진술은 이내 신뢰를 상실했지만, "클라이드ㆍ보니"를 잡기위해서는 시의적절한 말이었고, 특히, "보니"에 대한 거대한 부정적 여론이 "배로 갱 잔당"을 일망타진하라는 대중의 요구를 가속화시켰다. 조잡한 언론보도였지만, 그러한 외침은 관계당국이 보다 구체적인 법적인 조치를 취하도록 했다.

"고속도로 순찰대 대장 L.G.페이어즈"는 즉시, "그래이프빈 도살자들의 시체"(잡아오는 것이 아니라 시체라도 상관없이)에 "1,000달러의 현상금"을 걸었다. "텍사스 주지사 마 퍼거슨"은 유권자들만큼 격노했고, 2명의 살인용의자들 각각에 대해, "500달러"의 현상금을 추가했다. "보니"가 "H.D.머피"를 쏘았다고 널리 믿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조취는 "보니"의 머리에 최초로 "특정한 가격이 매겨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5일 후, "클라이드ㆍ메스빈"이 "오클라호마 주 커머스" 근처에서 편부였던 60세의 "윌리엄 칼 캠벨 경관"을 살해하자, 분노한 여론은 더 커졌다. 그들은 "커머스 경찰서장 퍼시 보이드"를 주변에서 차로 납치하여, "주 경계선"을 넘어, "캔자스 주"로 도주를 했고, 그 후 깨끗한 셔츠와 몇 달러를 주면서, 세상 사람들에게 "보니"는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고,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달라고 하면서, 그를 풀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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