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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인물 - 영화ㆍ유명인ㆍ정치인ㆍ대통령

미국 : 마틴 루터 킹 (1929)ㆍ흑인 해방 운동가ㆍ노벨평화상(1964)

by 당대 제일 2023. 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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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루터 킹 (Martin Luther King Jr.ㆍ1929~1968ㆍ39세)"은 미국 목사(침례교)ㆍ기독교 평화주의자ㆍ인권 운동가ㆍ흑인 해방 운동가ㆍ권리신장 운동가이며, 미국 내 "흑인의 인권 운동"을 이끈 "개신교 목사"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1964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1. 마틴 루터 킹 주니어 (Martin Luther King Jr.ㆍ1929~1968ㆍ향년 39세)

그는 인종차별이 심각했던 1950, 60년대에 흑인의 인권운동을 이끌었던 "개신교 목사"이다. 미국 내 흑인 인권운동을 주도했고, 비폭력을 주장했다. 1963년,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연설에서 인종차별의 철폐와 인종 간의 공존을 호소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 이 나라가 깨어나서, "우리는 모든 사람이 공평하게 창조되었다는 명백한 이념을 신봉한다."는 미국의 신조 안에 깃든 참뜻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그 꿈입니다."로 시작하는 세계적인 연설의 주인공 "마틴 루터 킹".

• 출 생 : 미 조지아 주 애틀랜타          • 사 망 : 로레인 모텔 2층 발코니 (미 테네시 주 멤피스)          • 사 인 암살 (극우파 백인 제임스 얼 레이의 총기)          • 학 력 : 1944~1948 : 모어하우스 대학교 (학사)ㆍ1948~1951 : 크로저 신학대학교 (석사) 신학자들의 사상ㆍ1953~1955 : 보스턴 대학교 신학부 (박사)           • 처 : 코리타 스캇 킹          • 자 녀 : 2 2녀          • 저 서 : 자유를 향한 위대한 행진 (1958)ㆍ우리 흑인은 왜 기다릴 수 없는가? Why We Can’t Wait (1964)ㆍ흑인이 가는 길 (1967)

"킹"은 "흑인" 뿐만 아니라 차별당하고 있는 전 미국인들이 "역사적인 억압에 대해 금전적으로 보상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1965년 인터뷰에서 그는 "흑인들이 평등권을 인정받는다고 해서, 백인과의 경제적 격차가 줄어들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1968.03.29일, "킹"은 03.12일부터 더 나은 임금과 대우를 요구하며, 파업을 벌인 화장실 청소부들을 지지하러 "멤피스"로 갔다. 다음 날, "킹"은 머물고 있던 "로레인 모텔 2층 발코니"에서 저격당해 사망했다. 1969년, 극우파 백인 "제임스 얼 레이"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 범인 "제임스 얼 레이"는 2달 후, "런던 공항"에서 체포되어 99년형을 선고받았다. 39년 평생을 흑인 형제들의 인권을 위해 헌신했던 "킹". 사후 그의 몸을 검시한 부검의는 그의 심장 상태가 "60살 노인과 같다"고 말했다. 치열했던 13년의 인권운동이 "킹" 개인에게 남긴 흔적이었다.

2. I Have a Dream :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킹"의 연설은 "링컨 기념관" 앞에 설치된 연단에서 이루어졌다.

이 연설은 "게티즈버그 연설 (에이브러햄 링컨)ㆍ나는 베를린 시민입니다 (존 F.케네디)"와 함께 미국 사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연설로 손꼽힌다. "I have a dream"(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ㆍNow is the time~ (이제 그 때입니다)"이란 말의 대구(對句)를 통하여 강조의 어조를 남기기도 하였다. 1963.08.28.일, "킹"이 "미국 워싱턴 DC에"서 열린 "직업과 자유를 위한 워싱턴 행진"에서 행했던 연설에 붙은 별칭이다. 이 연설은 흑인과 백인의 평등과 공존에 대한 요구였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조지아 주의 붉은 언덕에서 노예의 후손들과 노예 주인의 후손들이 형제처럼 손을 맞잡고 나란히 앉게 되는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이글거리는 불의와 억압이 존재하는 미시시피 주가 자유와 정의의 오아시스가 되는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내 아이들이 피부색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고 인격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나라에서 살게 되는 꿈입니다. 지금 나에게는 그 꿈이 있습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지금은 지독한 인종 차별주의자들과 주지사가 간섭이니 무효니 하는 말을 떠벌리고 있는 앨라배마 주에서, 흑인 어린이들이 백인어린이들과 형제자매처럼 손을 마주 잡을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는 꿈입니다." < 연설문 I Have a Dream 중에서 >

 게티즈버그 연설 (Gettysburg Address)

"링컨"이 "남북 전쟁" 중이던 1863.11.19일, "미 펜실베니아 주 게티즈버그"에서 했던 연설이다.  이 연설은 "게티즈버그 전투"가 있은 후 4개월 후에 전장에 세워진, 당시 숨졌던 병사를 위한 "국립묘지 봉헌식"에서 이루어졌는데,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이 인용된 연설 중 하나이자, 가장 위대한 연설로 손꼽힌다.  내용은 "미합중국 독립선언서"에 나타난 인간 평등의 원칙과, 남북전쟁이 단순한 결합이 아닌 모든 국민들에게 참 평등을 가져다 줄 "자유의 재탄생"을 위한 투쟁임을 상기시키는 내용이 들어갔다.  단순히 "게티즈버그 전투"에서 숨진 병사들뿐만 아니라, 싸우고 있는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헌납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 연설의 이러한 역사적 위치와 관심에도 불구하고, 정확한 연설 내용에 대해선 논란이 많다. "게티즈버그 연설"의 필사본은 5개가 알려져 있는데, 각각은 여러 가지 세부 사항에서 차이가 있기 때문에 연설의 "전문"은 추측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 (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shall not perish from the earth)"

 나는 베를린 사람입니다 (Ich bin ein Berliner : 이히 빈 아인 베를리너)

1963.06.26일, "케네디 미 대통령"이 "서 베를린 라트하우스 쇠네베르크"에서 한 연설로, "케네디"가 한 연설 중 최고라 여겨진다.  이 연설은 "소련"의 지원 하에 "베를린 장벽"이 세워진 후, "동독이 언제 자신들을 침략하는지 모른다."는 불안을 안고 있던 "서 베를린" 시민을 격려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발언은 당시 "중앙유럽 공산국가"들을 겨냥한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동독ㆍ소련"에 맞서 "서 베를린을 지키겠다."는 단호한 어조가 담긴 발언이기도 했다.

"2000년 전, 가장 자랑스러운 말은 "나는 로마 시민입니다(라틴어: Civis romanus sum)"였습니다.  오늘날, 자유세계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말은 단연 "나는 베를린 시민입니다(Ich bin ein Berliner)"일 것입니다.(중략)  모든 자유민은, 그 사람이 어디에 살건 간에 그 사람은 베를린의 시민입니다. 고로, 자유민으로서,  "나는 베를린 시민입니다(Ich bin ein Berliner : 이히 빈 아인 베를리너))"라는 이 말을 자랑스레 여길 겁니다!"

 And so, my fellow Americans, ask not what your country can do for you- Ask what you can do for your country.

1961.01.20일, "워싱턴 DC, 국회의사당"에서 열린 "케네디"의 미 대통령 취임사 중에서,  "국민여러분, 조국이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지 묻지 말고, 여러분이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자문 (自問)해 보십시오.“

3. 논란ㆍ의혹

① 논문 표절 의혹​

1950년대 그의 논문 중의 일부는 다른 박사학위 논문이나 자료의 내용과 유사하여 표절 논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② 불륜 사건​ : 존 에드거 후버 (FBI)의 보고서

1968년, "캘리포니아 주 LA"의 "흑인 치과의사 부인"과 간통ㆍ성관계를 맺어오다가 "연방수사국 (FBI)"에게 발각되었다. FBI가 도청한 "킹"의 전화 한 통화는 LA의 한 "흑인 치과의사의 아내"였다. 그의 불륜을 눈치 챈 것은 "이먼 돈 뉴컴(LA 다저스 야구팀의 스타 선수)"의 제보에 의한 것이었다. "돈 뉴컴" 등 야구선수들의 제보를 받은 "존 에드거 후버"는 바로 "킹"의 전화를 도감청하고 사람을 붙였다. "후버"는 보고서를 작성, 1968.02.20일자 "린든 B.존슨 미 대통령"에게 보고되었다. 

"킹 목사는 1962년부터 로스앤젤레스에 사는 유명한 흑인 치과 의사의 아내와 불의의 성관계를 맺고 있음. 킹 목사는 전기의 여인을 매주 수요일 장거리 전화로 불러내며, 전국 내 각 도시를 전전, 밀회하고 있음." < 에드거 후버의 보고서 > "후버 보고서"에는 "한번은 뉴욕 시 뉴욕시티 호텔에서 조촐한 파티를 열고 술이 약간 취한 킹 목사는 그 여자가 자기를 사랑한다는 말을 안 하면, 13층 호텔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겠다고 위협했고, 성관계를 하자고 위협했다."이라는 보고도 들어 있다.

과연 이것이 사실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킹"의 성적 일탈에 대한 의혹 근거는 "FBI 파일" 밖에 없다.

증인도, 다른 증거도 없어왔고, 오직 "FBI 파일"이 현재 유일한 의혹의 근거이다. 하지만 파일은 2027년까지 봉인되었다. 이 봉인이 풀린다 할지라도 이 파일의 진위여부는 다시 따져 보아야하며, 법적인 효력은 이미 전무한 상태이다. 왜냐하면 "도청"이라는 불법적인 방법을 통해 얻었기 때문이다. 당시 "에드거 후버(FBI 국장ㆍ우파 인사)"는 흑인들의 권리를 요구하는 "킹"을 "위험인물"이라고 규정하여 활동 내역을 감시하기도 했다.

 존 에드거 후버 (John Edgar Hooverㆍ1895~1972ㆍ77세): FBI 1924~1972 (48년간 근무)

연방수사국(FBI)을 상징하는 인물ㆍFBI를 미국 내 모든 정보 수집ㆍ법 집행의 대명사로 만들었다.  1973년 워싱턴 DC에 있는 새로 지어진 "FBI 본부"는 이름을 "J.에드거 후버 빌딩"이라 하였다. 1924년, "수사국(FBI 전신) 국장"으로 임명되어, 1935년 "FBI 창설"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24년부터 죽을 때까지 FBI에서 재직했다. 1924~1972년까지 48년간 "FBI 국장"으로 근무하며, "스페인 내전ㆍ제2차 세계 대전ㆍ한국 전쟁ㆍ베트남 전쟁" 등에 관여하였다. 미 대통령 "트루먼"은 "후버가 우리가 알고 싶지 않은 정보들을 알고 있다" 면서, 그의 권한을 대폭 축소시키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후버" 덕분에 FBI는 대규모의 "효율적인 범죄 전담 부서"로 성장했으며, "지문 파일 집중화ㆍ과학 수사" 등 경찰 기술의 현대적 발전을 이루었다. "후버"는 미국에서 높이 인정받았으나, 그가 죽은 뒤 그는 점차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광범위한 "정보 수집ㆍ검문ㆍ수색ㆍ추적" 등을 통해, 방대한 양의 정보를 수집하여, "갱스터ㆍ마피아ㆍ마약ㆍ나치 독일 스파이ㆍ소련 스파이ㆍ쿠바 스파이" 등을 수시로 적발하여, 성과를 올렸다. 또한 "미 정치인들의 뇌물 수수ㆍ비리ㆍ이권 개입ㆍ성 관련 위법행위"에 대한 정보들도 파악하고 있어 "상원 의원ㆍ하원 의원ㆍ각 주 정부의 관리"들이 "후버"를 두려워하였다.

③ 케네디 (미 대통령)의 장례식

"케네디"의 장례식을 지켜보면서, 한 말장난이 "재클린 케네디"의 귀에 들어가면서, 그녀는 그의 사생활에 대한 폭로와 위선자라는 기록과 녹음을 남기게 된다. 1963년, "케네디 미 대통령"의 장례식 장면 중, "케네디"의 아내 "재클린 케네디"가 무릎을 꿇고 관의 중간 부분에 키스를 하는 부분을 본 뒤, 그는 "음, 이 부분이야말로 그녀가 가장 아쉬워하는 부분이지"라고 성적인 농담을 한 것이 "재클린 케네디"의 귀에 들어가게 됐다. 

"재클린"은 녹취록에서 "남편(존 F. 케네디)의 장례식 날, 킹 목사가 술에 취해 있었다."고 했다. 2011.09월, 언론에 공개된 내용에 대해, 영국 일간지 "더 타임스"에 따르면, "재클린"은 "마틴 루터 킹의 사진을 볼 때마다, 끔찍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고 말했다.

④ 성추문 의혹

"재클린 케네디"는 그가 "섹스파티를 즐긴 위선자 (phoney)"라고 평가했다. 그녀는 "킹"이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라는 유명한 명연설을 하기 전날 밤, 여성들을 "섹스파티"에 초대하기 위해, "호텔방에서 전화를 걸어댔다"는 "연방수사국(FBI)의 도청 정보"를 언급하기도 했다. 1964년,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가 미국의 역사학자인 "아서 M.슐레진저(Schlesinger)"와의 인터뷰에서 이를 언급하였다. 이는 "보스턴의 케네디 도서관 소장고"에 다른 자료들과 함께 보관되다가, 2011.09월 공개되었다.

⑤ 연방수사국 (FBI)의 도청 논란

"재클린"이 그의 사생활을 폭로, 비판한 것과 관련하여 FBI가 그를 도청했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다. "재클린"이 입수한 "킹의 섹스파티"는 FBI의 도청 정보를 통해 입수됐다. 연방 정부의 도감청 행위가 사실로 드러나면서, 또 다른 논란거리가 되었다. "에드거 후버(FBI 국장ㆍ우파 인사)"는 1964.10월 "킹의 노벨 평화상 수상"이 결정되자, 분노가 극에 달했다. 그 정사 장면이 녹음된 테이프를 언론사에 보냈다. 이를 보도한 신문사는 없었다. 그러자 "후버"는 "녹음테이프"를 아내인 "코레타 스콧 킹" 앞으로 보냈지만, 그 무렵 "킹"은 "공작 정치"가 아닌 "암살자의 총탄"에 의해 생애를 마감했으며, 정작 "후버" 자신이 공작 정치가 탄로나 파멸의 길을 걸었다.

4. 생 애

 노동운동

"킹"은 노동자들이 노동기본권인 "단결권ㆍ단체행동권ㆍ단체교섭권"으로써. 자본가와 투쟁하는 "계급투쟁" 곧 "노동운동"에도 관심을 갖고 있었다. "멤피스"의 흑인 청소노동자들이 파업투쟁을 벌이자, 다음과 같이 연설을 하였다. "자신이 지닌 엄청난 자원을 빈곤을 종식시키고, 주님의 모든 자녀들이 기본적인 생활상의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도록 하는 데 사용하지 않는다면, 미국도 역시 지옥에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노동자로서의) 평등한 대우를 받고 싶다면, 적절한 임금을 받고 싶다면 투쟁해야 합니다."

인권운동 (간디의 비폭력운동의 영향)

1929년, "조지아 주 애틀랜타 시"에서 "마이클 루터 킹"의 아들로 태어났다. "크로저 신학교"에서 신학자들의 사상을 공부했고, 1955년 "보스턴 대학교 신학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때 "기독교 근본주의적 신앙"에서 점차 "기독교적인 사회참여"를 강조하는 "진보적인 신앙"으로 변화를 겪었다. "앨라배마 주 몽고메리"의 "덱스터가 침례교회 담임목사"로 활동하던 1955년 "로자 파크스 사건"이 벌어졌다. "로자 파크스"라는 흑인 여성이 버스에서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아, "인종분리법"으로 체포된 일이다. "몽고메리 주"에서 "버스 보이콧 운동"이 벌어졌고, "킹"은 이 운동을 이끌게 되었다.

1956년 "미 연방 최고재판소"에서 마침내 "버스 내 인종 분리법" 위헌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킹"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대중이 일어나 잘못된 것을 바로잡을 것을 정부에 요구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남부기독교지도자회의(SCLC)"를 결성하고, 전국적으로 "인권운동"을 지도하기 시작했다.

"간디의 비폭력운동"에 늘 관심을 가졌던 "킹"은 "미국 퀘이커교도 단체"를 통해 1959.02월 "인도"를 방문해서 "간디"의 가족들을 만났다. 이 방문을 통해 그는 "비폭력 저항ㆍ미국의 인권운동"에 헌신할 것을 결의했다. 이후 "킹"은 더욱 열렬하게 "인권운동"에 매진했다. 그의 활발한 사회운동은 "우파"를 자극했다. 당시 "에드거 후버(FBI 국장ㆍ우파 인사)"는 흑인들의 권리를 요구하는 "킹"을 "위험인물"이라고 규정하여 활동 내역을 감시하기도 했다.

1961.12월, "킹ㆍSCLC(남부기독교지도자회의)"는 "조지아 주 알바니"에서 일어난 "인종분리 반대운동"에 참가했다. 그리고 다음 날 시위자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는 보석금을 내고 풀려나기를 거부했고, 결국 시에서 그를 풀어주었다. 이 사건으로 "알바니"의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으나, "비폭력 인권운동"의 기본 전략을 전국적으로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1963년, "앨라바마 주 버밍햄"에서 "킹ㆍSCLC(남부기독교지도자회의)"는 "인종차별적인 경제정책ㆍ 시의 관행"을 무너뜨리고자 했다. 그들은 비폭력으로 맞섰으나, 이 운동은 경찰의 과잉 폭력진압으로 전국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킹"은 "버밍햄 운동"의 목적을 "직접적인 행동만이 언젠가 협상의 문을 열도록 만들 수 있습니다"라고 설명했다.

1963.08.28일, "킹"은 "로이 윌킨스(전미 유색인종 진보협회)ㆍ휘트니 영(미 도시연맹)ㆍ필립 랜돌프(침대차 짐꾼 협회)ㆍ존 루이스(SNCC)ㆍ제임스 파머 주니어(인종평등협회)" 등 주요 인권조직 대표들과 함께, "워싱턴"을 행진하며 의지를 보여주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킹"의 명연설은 "워싱턴 행진"에서 행한 연설이다. 행진의 목적은 "남부 지역 흑인들의 비참한 실상을 보여주고, 시민들에게 조직위원들의 우려와 슬픔을 알린 후, 국회까지 가는 것"이었다. 조직위원들은 인권보호에 실패한 정부에 책임을 묻고 싶어 했다.

하지만 "케네디 대통령"의 지지와 영향력을 얻으며, 이 행진은 훨씬 더 조용하게 진행되었다. 그 결과, 인권운동가 중, 일부는 이것이 아무런 효과도 얻지 못했다고 생각하기도 했고, 특히 "말콤 X" 같은 사람은 "워싱턴에서의 쇼"라고까지 말했다. 또한 이슬람교도들은 행진에 참가할 수 없었다. "워싱턴 행진"을 통해, 그들이 바란 것은 "공립학교에서 인종분리 철폐ㆍ인권법의 승인ㆍ고용에서 인종차별 금지법ㆍ경찰의 폭력에서 노동자들의 보호ㆍ모든 노동자에게 최저 2$의 임금 보장ㆍ워싱턴 DC에서 통제하는 자치정부 수립" 등이었다. 총 25만 명 가량의 각기 다른 민족들이 행진에 참가했고, "킹"의 연설에 감동을 받았다.

1965년, "킹ㆍSCLC(남부기독교지도자회의) 위원들"은 "셀마~ 몽고메리"까지 행진을 준비했다. 03.07, 첫 행진이 시작되었을 때, 경찰ㆍ폭도들이 행진 참가자들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가했고, 사진이 전국적으로 퍼져나가며, 시민들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이것이 "피의 일요일" 사건이다. 하지만 이 날 "킹"은 함께 하지 않았다. 그는 "린든 존슨 미 대통령"과 만남을 가진 후, "행진을 중지하기"로 했고, "셀마"의 행진 담당자가 "킹" 없이 진행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맬컴 엑스 (Malcolm Xㆍ1925~ 1965ㆍ향년 40세)

미 흑인 인권운동 활동가ㆍ이슬람 운동가ㆍ미 흑인 무슬림 지도자ㆍ흑인 이슬람 종교 단체인 네이션 오브 이슬람(Nation of Islam)의 대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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