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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인물 - 영화ㆍ유명인ㆍ정치인ㆍ대통령

미국 : 보니 ① (1910ㆍ24세 여ㆍ150)ㆍ클라이드 (25세 남ㆍ162)

by 당대 제일 2023. 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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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전반 (1933~1934), "미국 중서부"에서 "은행 강도ㆍ살인"을 반복한 "보니 파커 (Bonnie Elizabeth Parker1910~1934.05.2324)ㆍ클라이드 배로 (Clyde Chestnut Barrow1909~1934.05.2325)"로 이뤄진 커플로, "루이지애나 주 비엔빌 패리 시"에서, 경찰​에 의해 사살될 때까지, 많은 살인에 관여하고 많은 강도행각을 저질렀다.

 

1. 보니 n 클라이드 (Bonnie and Clyde)

사람들은 보안이 철저한 "금융기관ㆍ부유층"의 물건을 훔친 것으로 알고, "대 공항시대의 로빈 훗"이라고 묘사했지만, 실은 "은행"보다는 "식료품점ㆍ영세구멍가게ㆍ빈집털이ㆍ주유소ㆍ싸구려 숙박업소"를 상대로 "강도질"을 벌였고, 약탈한 물건의 가격은 대부분 "5~10 $"에 지나지 않았다.

당시 "미국"은 "금주법ㆍ대공황" 하에 있었고, 그런 근심을 해소하기 위한 범죄가 자주 일어났다. 그들이 "흉악한 범죄자" 임에도 불구하고, 신문을 포함하여 그들을 영웅으로 보는 사람도 많았다. 후에 "보니와 클라이드"의 범죄는 여러 차례 영화화되었다.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1967감독 : 아서 펜출연 : 워런 비티ㆍ페이 더너웨이)

① 보니 엘리자베스 파커 (여ㆍ150cmBonnie Elizabeth Parkerㆍ1910~ 1934.05.23ㆍ24세)

(150cmㆍ당시 평균 160cm),ㆍ위스키를 굉장히 좋아했으며, 도주 중에는 알코올을 절대 입에 대지 않았다.

 클라이드 체스트넛 배로 (남ㆍ162cmClyde Chestnut Barrowㆍ1909~1934.05.23ㆍ25세)

키 (162cmㆍ당시 평균 172cm)미 해군에 입대하려했으나, 어린 시절 앓았던 "말라리아ㆍ황열병" 때문에 입대가 거절되었고, 이에 충격을 받고, 왼쪽 팔에 "USN (미 해군)"이라는 문신을 새겼다.

③ 선호 무기 (클라이드): 바 (BARBrowning Automatic Rifle)라 불리는 "M 1918 브라우닝 자동 소총    ④ 차 량 : 1932년형 컨버터블 세단 포드 V-8 B-400  

"보니"는 고등학교 2학년 때, 동급생이었던 "레이 손턴"과 만나, "중퇴"를 하고, 1926.09.25일, "보니"의 16번째 생일을 6일 앞두고 결혼을 한다. 그러나 그들이 "이혼" 한 것은 아니었으며, "보니"는 죽을 때까지 "손턴"의 결혼반지를 끼고 있었다. "보니"는 자신의 오른쪽 허벅지 안쪽에 "보니와 로이"라는 문신을 새겼다. 

잔학한 행위를 반복해 왔던 "보니ㆍ클라이드"였지만, 의외로 그들을 지지한 사람은 많았다. 범죄자가 된 그들의 가족은 탓하지 않았으며, 도망 중에 은닉처를 제공하여 기소된 사람도 23명에 달했다고 한다. 그런 배경으로, "보니ㆍ클라이드"는 사사건건 가족이 있는 "댈러스"로 돌아오곤 했다. 물론, 모든 미국인이 그들을 지지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당시 "연방수사국" 장관 "존 에드거 후버"는 그들을 "미국의 미친개들"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2. 보니 엘리자베스 파커 (여ㆍ150cmBonnie Elizabeth Parkerㆍ1910~ 1934.05.23ㆍ24세)

"보니"는 1910년, "텍사스 주 로웨나"에서 3자녀 중 2째로 태어났다. 아버지 "찰스 파커"는 "벽돌공"으로, 그녀가 4살 되던 1914년에 사망했다. 어머니 "에마 크라우스"는 사려 깊고, 상냥한 성격이었고, 장난도 곧잘 했다고 한다. 어머니는 아이들과 함께, 그녀의 부모가 있는 "댈러스" 근교의 산업단지인 "시멘트 시티"로 이사를 하여, 그곳에서 "재봉사"로 일했는데, 조부 "프랭크 크라우스"는 "독일" 출신이었다. "시멘트 시티"는 치안이 나쁘고, 아이를 제대로 키우는 데, 적합한 환경이 아니었다.

고등학교 시절, "보니"는 "우등생"으로, "글쓰기ㆍ연설"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성인이 되었어도, "글쓰기"를 좋아하는 그녀의 습성은 "샐 이야기(The Story of Suicide Sal)"와 "산책로의 끝(The Trail's End, 이후 "보니와 클라이드 이야기(The Story of Bonnie and Clyde)"으로 알려지게 된다.)"에 담긴 "시적 표현"에서 발견되는데, 1929년 짧게 갈긴 "일기장"에서, 그녀는 "외로움ㆍ댈러스 지방에서의 참기 힘든 삶ㆍ유성 영화"에 대한 사랑을 짧게 썼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보니"는 동급생이었던 "레이 손턴"과 만나게 된다. 그들은 "중퇴"를 하고, 1926.09.25일, "보니"의 16번째 생일을 6일 앞두고 결혼을 한다. 그들의 결혼생활은 잦은 "범법 행위ㆍ감방 출입"으로 점철되어, 짧게 끝난다. 1929.01월 이후, 그들은 영원히 결별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들이 "이혼" 한 것은 아니었으며, "보니"는 죽을 때까지 "손턴"의 결혼반지를 끼고 있었다. 1934년, "손턴"이 "보니"의 사망소식을 들었을 때조차, 그는 옥살이를 하고 있었다. 그의 반응은 "그들이 하던 데로 가버렸으니 기쁘다. 잡히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였다.

1929년, "결혼"이 파경을 맞은 후, 1930.01월 "클라이드"를 처음 만나기 전에, "보니"는 엄마와 함께 살면서, "댈러스"에서 "카페 종업원"으로 일을 시작한다. 그녀의 단골 고객 중의 1명이었던 "우체국 직원 테드 힘턴"은 1932년 "댈러스 보안관"이 되었으며, 1934년 그녀를 추적하는 대원 중 1명이었다.

3. 클라이드 체스트넛 배로 (남ㆍ162cmㆍClyde Chestnut Barrowㆍ1909~1934.05.23ㆍ 25세)

"클라이드"는 "텍사스 주 댈러스" 남쪽 타운에 있는 "텔리코" 근처의 "엘리스 군" 출신이다. 가난한 농부인 아버지 "헨리 배질 배로(1874~1957)"와 어머니 "커미 T.워커(1874~1943)"사이에 태어난 7남매 중 5째 아들이었다. 이들 부부는 1920년대 당시, "웨스트 댈러스"로 알려진 "슬럼가의 빈민"이었다가, 재정착 물결의 일환으로 "댈러스"로 이주해왔다. "배로 부부"는 "웨스트 댈러스"에서의 1달을 "마차"에서 살면서, 보냈다. 아버지 "헨리"가 텐트를 살 만큼의 충분한 돈을 벌게 된 것이 가족을 위한 큰 발판이 되었다.

"클라이드"가 처음 체포된 것은, 1926년 고등학교(16세) 때, 여자 친구를 방문하기 위해, "달라스"에서 임대한 "렌터카"를 제때에 돌려주지 못해, 업주가 도난신고를 하면서, 검거되었다. 3주 후, 형 "마빈 벅 배로"와 함께, 훔친 "칠면조"를 소지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1927~1929년까지, 합법적인 직업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금고"를 털고, 물건과 차량을 훔쳤다. 1930.04월, "텍사스"에서 "강도ㆍ자동차절도"로 14년 형을 선고받고, 악명 높은 범죄자 감옥인 "텍사스 이스트햄 교도소 농장"에서 수감생활을 한다. 잔혹한 노역을 견딜 수 없었던 그는 1932년 덜 가혹한 시설로 가길 원했기에, 자신의 "왼쪽 엄지발가락ㆍ2번째 발가락 일부"를 도끼로 절단했다. 결국 6일 후, "클라이드"는 걷지도 못하고, 신발을 신어도 자동차 운전도 불완전한, 영구적인 불구판정을 받으며, 1932.02월 "가석방" 되었다.

"클라이드"는 "이스트햄"에서 더 단단해지고, 더 독한 범죄자로 거듭났다. "옥살이"를 하는 동안, "클라이드"는 자신을 반복적으로 "성폭행" 했던 동료 "재소자"를 패서 죽였다. 이것이 "클라이드"의 "1번째 살인"이었다. 누이 "마리"는 "뭔가 무서운 것이 교도소에서 일어났었음에 틀림없어요. 그가 출소했을 때는 예전의 그가 아니었어요."라고 말했다. 동료 재소자였던 "랠프 펄츠"는 "클라이드"가 "학생에서 방울뱀으로 변신하는 것"을 자신이 지켜보았다고 증언했다. 그 후 "식료품점ㆍ주유소"를 털거나, 이것은 이후 10~15개의 "은행"을 재빨리 터는 데 도움이 되었다. "클라이드"가 선호한 무기는 "바(BAR, Browning Automatic Rifle)"라고 불리는 "M 1918 브라우닝 자동 소총"이었다. "존 닐 필립스"에 따르면, 배로의 삶의 목표는 "은행 강도"로 명성이나 부를 얻는 것이 아니라, 복역을 하는 동안 고통을 준 "텍사스 교도소"에 복수를 하는 것이었다.

4. 첫 만남 (Bonnie and Clyde)

첫 만남을 설명하는 여러 이야기들이 있지만, 가장 신뢰도가 높은 것은, 1930.01.05.일, "보니"가 "클라이드"를 "친구 집"에서 만났다는 것이다. "보니"는 실직 상태였으며, 팔이 부러져 일을 하지 못하는 친구를 돕기 위해, "웨스트 댈러스"에서 머물고 있었고, "보니"가 부엌에서 초콜릿을 만들고 있을 때, "클라이드"가 그녀의 집에 들렀다고 한다. 그들은 처음 만나자마자 서로에게 끌리게 되었다.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보니"가 사랑에 빠졌기 때문에, "클라이드"의 범죄 행각에 동참했다고 믿는다. 그들이 범죄를 저지를 때, "보니"는 "클라이드"의 믿을 수 있는 동료가 되었기에, 결국 그들은 끔찍한 죽음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5.  최 후

그들의 여정은 "루이지애나 소나무 숲" 깊은 곳에서 끝났다. 1934.05.23일, "클라이드ㆍ보니"는 "루이지애나 비엔빌 군 패리시"에 있는 시골 도로에서 "1934년 식 포드 V8"을 타고 주행 중, 잠복해 있던 경찰관들에게 걸려, 사살 당하게 된다. "클라이드ㆍ보니"는 대낮에 차를 타고 나타났고, 4명의 "경찰 추적대(프랭크 해머ㆍ매니 골트ㆍ밥 앨콘ㆍ테드 힌튼)"와 2명의 "루이지애나 경찰(헨더슨 조던ㆍ프렌티스 모렐 오클리)"에 의해, 150발 이상의 "기관총 세례"를 받았다.

이 추적대는 1934.02.12일부터 추적을 시작한 "해머"가 이끌고 있었다. 그는 "배로 갱"들의 이동에 대해 연구를 하였고, 5개의 "중서부 주"의 가장 자리를 지나며, 둥글게 움직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도망자가 특정 "주"로 도망치면, 그 "주"의 사법경찰이 다른 "주"로 추적할 수 없다는 규정의 허점을 악용한 것이다.

"클라이드"는 그가 활동하던 시기, "중서부"에서 활약했던 "존 딜링거"와 비교해, "FBI규정"을 더 잘 알고 있었지만, "클라이드"는 이동에 일관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해머"와 같은 노련한 추적자들은 경로를 그려서, 언제 가게 될 지를 예측할 수 있었다. 이들의 여정은 "가족 방문"에 중점을 두고 있었고, 그들은 "루이지애나"에 있는 "헨리 메스빈"의 가족을 방문할 예정이었다. 그의 가족은 추적 중인 "해머"와의 만남에서, 그것을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해머"는 "콜트 사"에서 "모니터"라는 모델로 제작된 "민간용 20발 탄창"을 가진 "브라우닝 자동소총"을 많이 확보하고 있었다.

1934.05.21일, "텍사스"에서 온 4명의 추적자는 "클라이드ㆍ보니"가 "메스빈"과 함께, 그날 저녁 "비엔빌 패리시"를 갈 예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슈레브포트"에 있었다. "클라이드"는 그들이 이후 갈라지게 되면, "메스빈"의 부모가 살고 있는 곳을 랑데부하는 곳으로 정했다. 실제로 "메스빈"은 "슈레브포트"에서 그들과 갈라지게 된다.

"해머 대장ㆍ댈러스군 보안관보 밥 앨콘ㆍ테드 힌턴(둘 다 클라이드ㆍ보니를 알고 있었다)ㆍ전 텍사스 레인저 B.M.매니 골트ㆍ비엔빌 패리시 보안관 헨더슨 조던ㆍ그의 보안관보-후임인 프렌티스 오클리"로 구성된 "추적대 전원"이 "깁스랜드" 남쪽에서 "세일리스" 쪽으로 뻗어있는 "루이지애나 주 154번 고속도로"를 따라, 매복을 했다. "테드 힌턴"은 05.21일 밤9시에 그룹이 제 위치를 잡고서, 05.22일까지 종일 기다렸지만, 그들이 올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고 설명하고 있었고, 다른 이들은 22일 저녁까지 매복을 하고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추적대"는 오후 내내 일시적으로 "난청"이 될 정도로 총격을 퍼부었다. 05.23일 오전9시경, "실패했다"고 생각하던 "추적대"는 "클라이드"가 훔친 "포드 V8"이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소리를 들었다. "추적대"의 공식보고서에서, "클라이드"가 "헨리 메스빈"의 아버지와 말을 나누기 위해 멈췄으며, 그는 그들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트럭을 세워두고, 그들 "추적대"가 있는 오솔길로 유인하게 했다고 한다.

경찰들은 일제 사격을 퍼부었으며, "클라이드ㆍ보니"는 약 130발 이상을 맞고, 사살 당했다.

자신을 포함하여, 잠복한 모든 이들이 "오클리"가 먼저 사격을 했다고 진술하고 있으며, 아마도 사전에 그렇게 하도록 순서를 정한 것 같았다. "클라이드"는 "오클리의 초탄 헤드샷"으로 즉사했지만, "보니"는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에 사망을 했다.  "테드 힌턴"은 "보니"에게 총격을 가하기 전에, "클라이드가 죽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비명을 질렀다고 보고했다. 경찰들은 특별 주문한 "자동 소총ㆍ샷 건ㆍ권총"으로 차를 향해 탄창이 빌 때까지 난사했으며, 이것으로 그들은 세상을 하직할 수밖에 없었고, "테드 힌턴ㆍ밥 앨콘"은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우리들 6명 경찰 각각이, 샷 건 1정ㆍ자동 소총 1정ㆍ여러 정의 권총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자동 소총으로 사격을 시작했다.  우리가 차에 다가갈 때 자동소총은 소진되었고, 그 후 샷 건을 사용했다.  차에서는 연기가 흘러나왔고, 마치 차에 화재가 난 것처럼 보였다.  샷 건을 다 소진한 후에 그들은 권총으로 차를 향해 쏘았으며, 자동차는 우리를 지나쳐서, 50야드 도로 아래 고랑에 쳐 박혔다.  거의 뒤집힌 상태였으며, 우리는 차가 멈춰 선 이후에도 계속 난사를 했다.  우리는 여지를 남겨놓지 않았다."

오늘 날, 어떤 이들은 "클라이드ㆍ보니"가 50차례 이상의 관통을 당했다고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시체마다 25개 이상의 상처가 있거나, 전체 50발이라고 주장을 하고 있다. 검시관 "J.L.웨이드 박사"에 의한, 1934년 공식적인 기록은 "클라이드" 시체에는 17발, "보니"는 여러 개의 헤드 샷을 포함하여, 26발을 맞았으며, 1발은 "클라이드"의 척추 뼈를 뚫고 나온 것이라고 발표했다.

"총탄 구멍"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시체를 담당했던 장의사 "C.F.부츠 베일리"는 "방부처리액"으로 감당을 하기 어려워, 시체를 "염"하는데 곤란을 겪었다. 두 사람의 시신은 "댈러스"에 각각 따로 묻혔다. 총격으로 벌집이 된 "포드 V8"와 "클라이드"가 마지막으로 입었던 셔츠는 "네바다 주 프림"에 있는 관광시설 "프림 밸리 리조트"에서 2009년에 공개되어, 전시되고 있다.

6. 대중문화 :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Bonnie And Clyde)

"보니ㆍ클라이드"가 워낙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기에, "영화"를 비롯해 다양한 장르의 작품에서 소재로 많이 다루어 졌으나. 많은 작품에서 그들의 행위나 사실을 그대로 전달하기 보다는 그 파란만장한 인생과 두 사람의 사랑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으며, 미화된 내용이 많다.

①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Bonnie And Clyde)

• 출 연 : 워런 비티ㆍ페이 더너웨이         • 감 독 : 아서 펜 감독의 대표작 (미국 국립영화등기부에 보존되는 영화 100선 중 하나가 되었다)         • 제 작 : 1967년ㆍ워런 비티         • 시 간 : 111분         • 내 용: "보니와 클라이드"의 만남에서 죽음까지가 그린 범죄 영화         • 제작비 : $ 2,500,000         • 수 익 : $120,700,000 (국내 $ 50,700,000ㆍ세계 $70,000,000)

• 영 향 : 영화의 성공에 자극받아 영화에서 섹스와 폭력을 노출하는데 더 솔직해지게 되었다. 이 영화의 끝 부분은 또한 영화 역사상 가장 잔인한 죽음 중 하나로 우상화되었다.

 줄거리 

1930년대 미국 대 공황기, "클라이드(워런 비티)"는 감옥에서 출소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백수였다.  그가 시골 마을의 여종업원인 "보니(페이 더너웨이)"의 어머니의 차를 훔치기 위해, 주변을 맴돌다 "보니"를 만나게 되는 장면에서 영화는 시작된다.  지루한 일상생활에 질렸던 "보니"는 "클라이드"가 그녀의 면전에서 식료품 강도행각을 벌임으로써 더욱 흥분한다. 두 사람은 차를 훔치고, 마을에서 마을로, 은행 강도를 반복하게 된다.  둘이서 여행을 하는 동안 "보니"는 "클라이드"에게 점점 매료되어 가지만, "클라이드"는 자신이 연인이 될 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며, 그녀를 거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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