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희 (朴相熙ㆍ1906~1946.10.06ㆍ향년 40세)"는 1946.10.01일, 미군정 영역인 "대구부 지역"에서 시작되어 3개월간 지속된 "공산 폭동"인 "대구 10.1 사건 (대구 10월 사건)"으로 사망했다.
1. 박상희 (朴相熙ㆍ1906~1946.10.06ㆍ향년 40세)
"박정희"가 가장 따랐던 3째 형ㆍ"김종필"의 장인 (장녀 "박영옥"의 부)
독립운동가ㆍ신간회 간부ㆍ건국동맹의 일원(여운형)ㆍ선산 청년동맹 (집행위원직)ㆍ건국준비위원회의 구미지부 창설ㆍ인민위원회 지부의 내정부장ㆍ전국 인민위원회 대표자회의 선산대표ㆍ민주주의민족전선 선산군지부 사무국장ㆍ언론인(조선일보 지국장ㆍ동아일보 구미지국장ㆍ기자)
1946년, "대구 10ㆍ1사건" 중, 경찰의 총격을 받고 사망했다. 박정희의 "만주행"을 반대하였다고 하며, 박정희가 본처 "김호남"과 이혼하는 것을 반대하여 박정희를 설득, 훈계하였으나, 듣지 않았다고 한다.
• 출 생 : 경북 칠곡군 약목면 • 사 망 : 경북 선산군 구미면
• 사 인 : 총격 피살 (대구 10ㆍ1사건시 경찰 총격 피살)
• 학 력 : 경북 구미보통학교 • 자 녀 : 1남 5녀 (장녀- 박영옥)
일제 강점기에 신간회ㆍ1934년 조선중앙일보의 지국장ㆍ1935년 동아일보 기자 등 언론인으로 활동하였다. 일제 강점기 1940년대 여운형이 결성한 "건국동맹"에서 활동하기도 하였다. 해방 후에는 건국준비위원회 구미지부를 창설하였고, 1946년에는 민주주의민족전선 선산군지부 사무국장을 맡아 활동하였다. "대구 10.1사건" 중 경찰의 총격을 받고 사망했다.
2. 박정희의 가계
• 부 : 박성빈 (朴成彬ㆍ1871~ 1938) / 모 : 백남의 (白南義ㆍ1872~ 1949)
• 1째 형 : 박동희 (朴東熙ㆍ1895~ 1972)
• 2째 형 : 박무희 (朴武熙ㆍ1898~ 1960) : "장승원 (장택상 부)" 집안의 "머슴ㆍ소작농"
• 3째 형 : 박상희 (朴相熙ㆍ1906~ 1946) : 가장 따랐던 형ㆍ김종필의 장인(박영옥의 부)
• 1째 누나 : 박귀희 (朴貴熙ㆍ1902~ 1974)
• 2째 누나 : 박재희 (朴在熙ㆍ1913~ 1996)
3. 대구 10.1 사건 (대구 10월 사건)
1946.10.01일에 미군정 영역인 "대구부 지역"에서 시작되어 3개월간 지속된 "공산 폭동"
이 사건을 높이 사는 사람들은 "동학농민운동ㆍ부마민주항쟁ㆍ광주민주화운동"과 견줄 만한 사건이며, "부마항쟁ㆍ광주 운동"과 함께 민중이 주도한 항쟁이라 평가한다. 국가기관에선 "대구 10월사건"이라 부르며, "항쟁ㆍ폭동"등의 평가부분에는 하지 않고 있다.
1946.09월 "총 파업"의 연장선에서 시작되었는데, 10.01일 "대구"에서의 시위가 직접적인 계기가 되어 우발적으로 격화되어 발생했다. 시위는 "대구ㆍ경북" 인근 지역으로 전파되면서, 점차 전국각지로 퍼져나갔고, 약 3개월 동안 지속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공산당"이 어느 정도 개입한 면이 있기 때문에, "좌익들이 사주한 무장폭동"등으로 인식되어,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후 오랫동안 금기에 가까울 정도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다가 1987.06월, "민주항쟁" 전후로 재평가 논의가 활발히 시작되어, 2007년부터 "진실ㆍ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재조사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2010.03월 "진실화해 위원회"는 "대구 10월사건 관련 진실규명결정서"에서 이 사건을, "식량난이 심각한 상태에서 미군정이 친일관리를 고용하고, 토지개혁을 지연하며, 식량공출 정책을 강압적으로 시행하자, 불만을 가진 민간인ㆍ일부 좌익세력이 경찰ㆍ행정당국에 맞서 발생한 사건"이라고 규정하고, 국가의 책임을 인정해 유족들에 대한 사과와 위령사업을 지원하도록 권고하는 결정을 내렸다.
4. 항일투쟁 활동
9살 때인 1914년 가족과 함께 선산 구미면 상모리(현 경북 구미시 상모동)로 이사 갔고, 그로부터 3년 뒤에 "박정희 대통령"이 태어난다. 1920년 "구미보통학교"에 입학하였는데. "구미보통학교"의 초기 학생이었다. "박정희" 증언에 의하면, 처음 3년간은 4년제로 운영하면서 학무관들이 구미면 내의 가정을 방문해 가며 아이들의 취학을 유도했다고 하며, 박상희도 이무렵 학교를 다니게 된다.
박정희는 대통령 시절의 수기 "나의 소년시절"에서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어머니께서는 상희 형을 학교에 보냈다"고 회상하였다. 1923년 4년제였던 "구미보통학교"를 졸업을 했다가 학제 개편에 맞춰 5학년에 편입을 하고, 1925년 최종졸업을 한다. 그는 향학열을 가슴에 묻고 있다가, 1929년 다시 "대구사범고등학교" 시험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였다. 1970년 무렵, 당시 청와대 공보비서관이던 "김종신"이 박정희에게 "박상희 씨가 대단한 수재였다던데요."라고 하자, 박정희는 "형은 대구사범 1회에 입학시험을 쳤다가 떨어졌다"며, 다소 퉁명스럽게 대답하기도 했다.
1920년대 말, 박상희는 "선산 청년동맹"의 "준비위원"과 "상무위원"을 겸직하고, 1928년 "집행위원직"으로 올라간다. 1927.02월, 비타협적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이 결집해 결성한 "신간회" 창립 후에는 "신간회" 간부로 항일활동에 앞장섰다. 1931년 "신간회"가 해소되자, 1934년 항일민족지 "조선중앙일보"에 입사하여 "대구지국장"을 맡는다. 이듬해 1935년 "동아일보"의 "구미지국장 겸 주재기자"로 옮겨 활동했다.
박정희는 띠 동갑이었던 친형 박상희를 가장 잘 따랐고, 존경했으며, 박상희는 잦은 독립 운동으로 일본 순사에게 끌려가는 일이 많았으며, 그것은 박정희가 군인이 되려고 결심한 계기가 되었다. 1944년에는 "황태성"과 같이 "건국동맹"의 일원으로 가담해 활동하다가, 경찰에 체포된 상태에서 해방을 맞았다.
1945년 8ㆍ15광복 이후, "박상희의" 영향력은 대단하였다. 이는 "일제 강점기"때 "조선중앙일보","동아일보"등 언론인으로 기자로 일했고, "신간회" 간부로서 항일투쟁에 앞장섰던 경력이 작용한 것이었다. "건국준비위원회"의 "구미지부"를 창설하였고, 이어 "인민위원회 지부의 내정부장"을 역임하였다. 1945.11월 "전국 인민위원회 대표자회의"에 "선산대표"로 참가하게 된다. 1946년 "민주주의민족전선" 선산군지부 사무국장을 맡는다. "신탁통치"가 결정되자, 박상희는 "신탁통치" 반대운동도 지도하였다. 그러나 "김일성","박헌영" 등 공산주의자들이 "모스크바 3상회의" 지지의 입장으로 돌아서버리자, 그는 침묵을 선택했다.
5. "대구 10.1 사건" 중, 경찰 총격으로 피살
1946.10.01일 "대구 항쟁 사건"이 발생하였고, 박상희는 10.03일 2,000여 명의 군중의 선두에 서서 오전 9시에 "구미 경찰서"를 공격, 경찰관과 우익인사들을 감금했다. 이어 "구미 면사무소ㆍ선산군청"을 타격하여, 식량 130여 가마니를 탈취하고, 관청서류를 전량 소각하였으며, 10.06일 박상희는 경찰이 발포한 총에 맞고, 피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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