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빈 (朴成彬ㆍ1871~1938ㆍ67세)"은 몰락한 양반가 출신의 동학 농민군의 고령ㆍ성주지역 접주로, 박정희 (5째 아들) 대통령 부친ㆍ박근혜 대통령 조부ㆍ김종필/ 한병기의 처조부이다,
1. 박성빈 (朴成彬ㆍ1871~1938ㆍ향년 67세)
무관 ( 효력부위ㆍ정9품)ㆍ박문수(암행어사 출신ㆍ소론의 거두)은 박성빈의 6대 방조
몰락한 양반가 출신으로, "동학농민운동" 당시 "농민군의 고령ㆍ성주지역 접주"였다. 동리 주민들 기억으로는 "괄괄하고, 호쾌한 성격"이었다고 증언한다. 그는 조선 말기, 척신세도정치ㆍ부패 정치에 환멸을 느껴 반발하여, 20대에 "농민군의 고령ㆍ성주지역 접주"로 활동하다가, "동학농민운동"에 가담ㆍ체포되어, 처형 직전에 천운으로 사면되어, 구명을 하였다.
"박재희 (2째 딸ㆍ1913~1996)"의 증언에 의하면, 체포된 동학 농민군 300명 중 혼자서 살아 나왔는데, 달변에 능하였기 때문이다고 하였고, "박정희"는 "어머니 백남의"가 "이때 너희 아버지가 죽었더라면, 너는 태어나지 못하였을 것이라고 했다"고 후일 "김종신ㆍ이석제" 등에게 수시로 언급하였다.
"몰락한 양반가"의 자손이었던 그는 초기에 관직에 나가려고 하였다. "박재희(딸)"의 증언에 의하면, 벼슬을 하려고 전답을 팔아서 서울에 자주 올라갔으며, 이때 가산을 많이 날렸다는 것이다.
그 후 "박성빈"은 가세가 몰락하여, 처가의 선산(先山)인 "경북 선산군 상모동"의 "위토"를 소작하기로 하고 처가의 양해를 얻어, "구미 상모동"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경제적으로는 무능력했던 탓에 5남2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실질적인 가장 역할은 아내인 "백남의의 몫이 되었다"고 한다.
2. 그의 입으로 얘기한, 아버지가 "동학접주였다"는 주장은 의미심장하다.
"조갑제"는 앞의 글에서 "박정희의 아버지 박성빈이 동학란을 진압하는 쪽에 섰던가, 동학혁명에 가담했던가 하는 쟁점에 대한 기록과 증언을 따져볼 필요가 있다."고 서두를 꺼낸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쓴다. "5ㆍ16군사쿠데타 후, 이낙선 소령(당시 최고회의의장 공보비서관)이 정리해둔 "박정희 의장 신상 비망록"에는 "1894년 동학란이 경북에 침입하였을 때, 박성빈은 용감히 의병을 일으켜 성공, 그 공이 지대하여 무과, 영월군수"라고 적혀 있다. 박성빈이 동학란을 진압하는 쪽에 섰다는 이야기는 그 공으로 해서 영월(또는 영변)군수로 임명되었다는 것으로 연결이 되는 경우가 많아, 의도적이란 느낌을 준다. "
박정희, 특히 3째 형 "박상희"를 보면, 아버지인 "박성빈"이 반골 기질을 가졌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그러니 접주로서든 아니든, "동학혁명"에 그가 참여했을 수도 있다. 또 반대로 당시 유자로 동학혁명을 진압하는 쪽에 섰을 수도 있고. 그런데 그때의 이낙선이 누구인가? 바로 박정희의 입이 아닌가! 그렇다면 박정희가 직접 흘린 얘기를 그가 쓸어 담았을 가능성이 거의 확실하다.
아버지 "박성빈"은 "상모리"에서는 "박선달"이라 불렸다. "선달"은 원래는 "문ㆍ무과"에 급제하고도, 벼슬을 얻지 못한 사람을 일컫는 말이었다. 특히 무과 급제자는 벼슬을 얻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선달이 주로 그런 뜻으로 쓰이기도 했다. 무과 초시에만 합격하고, 본 시험에서는 낙방한 사람에게도 "선달"이란 호칭을 붙여주었다.
과거제도의 엄격성을 잃게 되는 조선조 말기에 가면, 요사이 박식한 사람한테 붙이는 애칭으로서의 "박사"처럼 씩씩하게 생긴(또는 다소 건달기가 있는) 사람에게 "선달"을 붙여주었다. 박성빈에게 "선달"이란 호칭이 붙었다는 것은 그가 무과의 1차 시험에는 합격했을 가능성은 있지만 급제했을 것 같지는 않다는 판단을 내리게 만든다.
3. 아버지 "박성빈"은 "상모리"에서는 "박선달"이라 불렸다.
"아버님의 성격은 쾌활하고 호담하였으며, 두주불사(斗酒不辭). 소시적에 성주(星州) 어느 산길을 밤에 혼자 지나다 범을 만나서 길에 앉아 담배를 피우며 부싯돌을 치니 섬광이 튀자, 범이 사라지더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음. 담대하였다고 느껴진다. 선친께서는 소시에 무과과거에 합격하여 효력부위(效力副尉)란 벼슬까지 받은 바 있으나, 원래 성격이 호방한데다가 당시 조선조 말엽척도정치(戚道政治)와 부패정치에 환멸도 느끼고, 반항도하여 20대에는 동학혁명에도 가담하였다가 체포되어 처형 직전에 천운으로 사면되어 구명을 하였다고 한다.
어릴 때 어머니께서 가끔 이야기를 하시면서 그때 아버지가 처형되었더라면 너는 이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는 옛이야기 하는 것을 들었으나, 그때는 어리고 철이 없어서 그 이야기 내용을 잘 못 알아들었고 또 자세히 물어보지도 못했다. 동학란(東學亂)이 1895년 경이니까, 선친께서 나이가 22~23세경이라 짐작이 된다. 그 후부터 선친께서는 가사에 관심이 적고, 호주(豪酒)로 소일하면서 이래저래 가산도 거의 탕진을 하게 되니 가세가 나날이 기울어지고 하는 수 없이 외가의 선산인 선산 상모동의 위토를 소작하기로 외가의 양해를 얻어 상모동으로 솔가하여 이사를 하게 되었다. 이해가 바로 내가 태어나던 전 해인 1916년이다."
"박정희"의 얘기를 한번 검증해보자. "효력부위"는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자료에 다음과 같이 나온다. "조선시대 정9품(正九品) 서반(西班) 무관(武官)에게 주던 품계(品階)이다. 해당 관직으로는 오위(五衛)의 사용(司勇), 선전관청(宣傳官廳)의 선전관(宣傳官),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의 좌세마(左洗馬)ㆍ우세마(右洗馬) 등이 있었다. 처(妻)에게는 유인(孺人)의 작호(爵號)가 주어졌다. 같은 정9품으로 문관에게는 종사랑(從仕郞), 무관에게는 효력부위(効力副尉), 문관 잡직에게는 복근랑(服勤郞), 무관 잡직에게는 치력부위(致力副尉), 문관 토관직(土官職)에게는 계사랑(啓仕郞), 무관 토관직에게는 여력도위(勵力徒尉)가 주어졌다."
"박성빈"이 "무과 합격" 뿐만 아니라, "현감ㆍ통훈대부" 등 다른 벼슬까지 했다는 주장에 대해 "조갑제"는 다음과 같이 쓴다. "1871년에 태어난 박성빈이 무과에 급제할 수 있었던 기간은 갑오경장으로 과거제도가 폐지된 1894년까지이다. 그가 무과에 급제했다면, 한 세대 이후에 만든 족보에 그 사실이 기록되어 있지 않을 가능성은 퍽 낮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박정희가 죽은 뒤에 만들어진 최근의 고령박씨 족보에는 28세손 박성빈에 대해서 "자화익무과.통훈대부영변군수"라고 적혀 있다."
"통훈대부는 당하관 정3품의 문관 품계이다. 무과 급제자가 문관의 품계를 받았다는 것은 의문을 낳게 한다. 무과 급제자가 현감으로 임명된다는 것도 이상하다. 박정희의 기억에 따르면, 선친은 무과에 급제하여 효력부위라는 계급을 받았다. 이 품계는 서반, 즉 무관의 말단인 종9품 이다. 그런데 선친이 임명되었다는 현감은 동반, 즉 문관의 종6품 자리이다.
더구나 영변현감은 조선조의 최고법전인 경국대전에서 정3품이 부임하는 곳으로 명시되어 있다. 조선시대의 무과급제자 명단을 기록한 "무과방목"에도 박성빈의 이름은 없다. 물론 이 문서는 결락이 없는 온전한 것이 아니므로, 결정적인 반증이 될 수는 없다. 박성빈이 영변(또는 영월)현감으로 임명되었다는 주장은 신빙성이 없다. 무과에 급제했을 가능성은 있으나, 그 가능성도 낮은 것으로 파악된다. 조선조 시대의 무과시험과목은 궁술ㆍ기창ㆍ격구 등 무예와 경서 및 병서 등 학술이었다. 시험은 초시 복시 전시의 3중 관문을 통과해야 했다. 초시는 지방에서 치러졌다."
"어쩌면 박성빈은 초시에서는 합격되었으나, 서울에서 치는 복시에서 탈락했을 지도 모른다. 둘째 딸 재희가 말한 "벼슬하시겠다고 서울에 자주 올라가시다가, 가산을 탕진했다"는 것이 복시를 보기 위한 서울행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은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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