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영수 (陸英修ㆍ1925~ 1974ㆍ49세ㆍ박정희와 8살차ㆍ결혼 (1950~1974)"는 본처ㆍ3명의 첩에게 12남 12녀를 얻을 정도로 "충북 옥천"의 대지주였던 "육종관"과 본처 "이경령"의 1남 3녀 중 2째 딸로 태어난다. 1950년 "한국전쟁" 중, 가족과 함께 "부산"으로 피난 중, 이종오빠이자 "박정희"의 대구사범 1년 후배인 "육군정보국 송재천 소위"의 소개로, 운명적인 만남을 가진다.
1. 박정희 (朴正熙ㆍ다카키 마사오ㆍ1917(경북 구미)~ 1979.10.26(서울)ㆍ 62세)
제 5~ 9대 대통령ㆍ호 : 중수 (中樹)ㆍ키 : 165cmㆍ빈농의 5남 2녀 중 막내ㆍ무교
① 여자 (3명) : 처 (2명)ㆍ약혼자 (1명)
• 1 처 : 김호남 (金好南) : 1920년 생 (3살차)ㆍ결 혼(1936~1950)ㆍ당시 16-19세ㆍ1녀 → 이혼 후 출가하여, "비구니 (법명 : 월상)"가 됨→ 1950년에 육영수와 결혼
• 약혼자 : 이현란 (이대1년) : 1924년 생 (7살차)ㆍ동거 (1948~1950)ㆍ당시 24- 31세ㆍ1남 사산 → 아이가 생후 6개월 만에 사망하고, 1948.10월 "여순ㆍ반란 사건"으로 "박정희"에게 문제가 생기자, 그를 떠나 "요정" 등을 전전하였다.
• 2 처 : 육영수 (陸英修) : 1925년 생 (8살차)ㆍ결혼 (1950~1974)ㆍ당시 25- 33세ㆍ1남 2녀 → 1974.08.15일, 8ㆍ15광복절 기념식장에서 조총련계 "문세광"이 쏜 흉탄에 맞아 사망
② 자 녀 : 5 명 (아들 2ㆍ딸 3 )
• 1째 딸 : 박재옥 (朴在玉ㆍ1937~2020ㆍ83세ㆍ동덕여대 가정학과) : 김호남의 딸ㆍ사위 : 한병기 (1931~2017ㆍ86세ㆍ갑종1기): 육군대위ㆍ외교관ㆍ국회의원ㆍ설악관광케이블카 회장
• 1째 아들 : 미상 ( ? ~ ?ㆍ생후 6개월 후 사망) : 이현란의 자
• 2째 딸 : 박근혜 (朴槿惠ㆍ1952~ ㆍ서강대 전자공학과) : 18대 대통령 (2013.02~2017.03)
• 3째 딸 : 박근령 (朴槿令ㆍ박근영ㆍ1954~ ㆍ서울대 작곡과) : 전, 육영재단 이사장ㆍ1혼 (1982): 류청 (풍산금속 사장 장남, 6개월후 이혼)→ 2008년 신동욱과 재혼 (14살 연하)ㆍ사위 : 신동욱(1968~ ㆍ남서울대 광고홍보학과) 공화당 총재
• 2째 아들 : 박지만 (朴志晩ㆍ1958~ ㆍ육사37기) : 육군대위ㆍEG대표이사 회장ㆍ2004년 서향희와 결혼 (16살 연하ㆍ4남)ㆍ며느리 : 서향희 (1974~ ㆍ고려대 법학대학원) : 법무법인 새빛 대표변호사ㆍ국민대 초빙교수
2. 처- 1 : 김호남 (金好南): 1920년 생 (3살차)ㆍ결혼 (1936~1950)ㆍ당시 16-19세ㆍ1녀
• 이혼 후 출가하여, 비구니(법명: 월상)가 됨→ 1950년에 육영수와 결혼
• 딸 박재옥 (1937~2020ㆍ83세)과 한병기(1931~2017ㆍ86세)은 당시 13세로, 친가ㆍ외가ㆍ사촌 집을 전전하다가, "육영수" 슬하에서 생활하다가 결혼. 경제적으로는 "한병기"와 결혼한 이후, 꽤 유복했는데 "설악산"에 설치된 "케이블카 사업 독점운영권"으로 돈을 꽤 많이 벌었다.
"박정희"와 같은 빈농 출신의 "김호남" 부친은 "박성빈(박정희 부친)"과 친구 사이였다고 한다. 양가 부친이 나눠 마시는 막걸리 1잔에 지금보다 훨씬 어린 나이의 자녀 혼사가 결정되는 것은 당시로는 매우 흔한 일이었다. 문제는 "박정희"였다.
"대구사범"에 진학하여, 신식교육을 받았던 그는 좀 더 나이가 든 뒤, 자신과 맞는 여성과 혼인하길 원했다. 그러나 병이든 "박성빈"은 47세에 낳은 막내의 결혼을 꼭 보고 싶어서, "내가 죽기 전에 막내가 장가가는 것은 보고 가야겠다"며, 사실상 반강제로 혼인시킨다. "대구사범"을 졸업하기 1년 전인 1936.04.01일의 일이었다.
"김호남"은 "딸 박재옥"을 키우며, 시댁에서 지낸다. 그러나 마음에도 없는 혼인을 한 "박정희"는 타지에서 홀로 교직생활을 하며, 월급을 부인에게 준 적이 없고, 방학이 되어 어쩌다 고향에 내려와도 "김호남"과는 가급적 마주치지 않으려 한다. 이게 너무 심했던지, "박정희"가 모처럼 고향에 내려왔을 때, 화가 난 3째 형 "박상희"가 "박정희"를 강제로 "김호남"의 방에 집어넣기도 했다고 한다. 그의 심정을 이해한다 하더라도 자신의 딸까지 낳은 그녀에게 돈 한 푼 준 적이 없다는 건, 그의 인간적인 무책임함ㆍ냉혹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주위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김호남"은 그런 그의 구박에도 그 시절 여성답게 시부모를 극진히 모시는 착한 며느리였다고 한다. "박정희"가 "문경보통학교"를 사직한 뒤, "만주"로 건너가 "만주국군"에서 복무할 때에도, "김호남"에게 안부를 전하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광복 이후 귀국 뒤, 육군 장교로 근무할 때, 동료의 결혼식에서 만난 "이현란"과 동거하다가 결혼을 결심하면서, "김호남"에게 줄기차게 이혼을 요구했으나, 그때마다 "김호남"은 도망치며 이혼을 거부한다. "이현란"이 떠난 뒤, 부하의 소개로 만난 "육영수"와 혼인을 결심한다. "육영수"와 결혼식을 올리기 2달 전, "김호남"을 찾아가 다시금 이혼을 요구한다. "이현란" 때문에도 마음고생이 심했던 그녀는 더는 견디기 힘들었는지 이혼을 승낙하고, 출가하여 비구니가 된다.
불교 관련인사들은 대체적으로 "김호남"에 대해 호의적으로 평가한다고 한다. "박정희 정부"에서 불교 교단을 지원해준 연유에서 기인한 것인지, 특히 "김호남"이 출가한 사실을 알게 된 "육영수"는 "김호남"이 머무는 사찰을 적극 지원한다. "김호남"이 부담스러워, 타 지역 사찰로 옮기면, "육영수"가 다시 행방을 찾아내 그 사찰을 지원해주는 일이 반복되었다고 한다. 예로 "상무대"가 "광주"에 있을 무렵, "김호남"이 "상무대"내 진중사찰 "무각사"로 옮겼는데, 이를 안 "육영수"가 다시 지원을 해줘, "상무대" 이전 후에도 지역의 대찰로 남을 만큼, 세가 커졌다고 한다.
둘 사이의 장녀인 "박재옥"은 두 사람이 이혼할 때 13살이었다. 이후 친가ㆍ외가ㆍ사촌오빠 박재석ㆍ사촌언니 박영옥 (김종필의 처)의 집 등을 전전하다가, "계모 육영수" 슬하에서 생활하기도 한다. "박정희" 집에 머물렀을 때, "박정희 부관"으로 그 집에서 출퇴근하던 "한병기"와 결혼하게 된다. "육영수"가 적극 중매를 선 덕분이라고도 한다.
"한병기"는 "육군 대위"로 예편, 1961년 32세의 나이로 주 "미국 뉴욕 총영사관 영사"에 부임하고, 이후 주 "칠레ㆍUNㆍ캐나다" 한국대사를 지내는 등 대통령 장인의 덕인지 젊은 나이에 외교관으로 승승장구한다. 1971~1975년까지는 강원도 속초ㆍ양양ㆍ고성 지역구 국회의원을 지낸다. "설악산 케이블 카"를 독점 운영하면서, 특혜 덩어리로 구설수에 오른 "설악관광 (주)"의 회장이 된다.
한편, 이들 부부의 예전 미국 집이 구설수에 오른 바 있다. 블로그 "Secret of Korea"를 운영하는 재미 언론인 안치용의 글(2009.09.19일)이다. "박정희의 큰 사위 한병기는 1976년 45세 나이에 주 유엔대표부 대사에 임명됩니다. 뉴욕에 있는 UN대표부는 특1급 대사 자리로 외교부의 최고 베테랑 외교관이 나가는 자리입니다만, 한병기는 외교관 등 공직과 민간기업 등을 오락가락하다가 대통령 맏사위여서인지 기라성 같은 선배들을 제치고 UN대사가 된 것입니다.
자세한 내막은 모르겠지만, 미국정부에 보관된 문서를 살펴보면, 한병기-박재옥 부부는 1976.08.17일 뉴욕주 스카스데일에 붉은 벽돌집을 사게 됩니다. 이 집의 서류상 주인은 한재옥(HAN JAE OCKㆍ박재옥의 미국식 이름), 구입가격은 20만5천$ 였습니다. 당시 미국 이민 길에 오르는 사람들에게 허용된 외화반출한도가 1인당 200$ 였던 시기입니다. 뉴욕타임스는 1976.11.30일 뉴욕타임스는 중앙정보부(KCIA)의 미국 조직개편 등 을 다룬 장문의 기사에서 "한병기-박재옥 부부"의 집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미스터 한은 최근 뉴욕 스카스데일에 20만5천$ 짜리 집을 샀다. 한인사회에서는 중세 성 모양의 이 붉은 벽돌집은 박정희 대통령이 실각할 경우 망명처로 사용될 것이라는 소문이 떠돌고 있다. (박정희가 권좌에 있으니) 확인될 성질의 문제는 아니지만"
뉴욕에서는 "한병기가 관사를 샀다ㆍ박대통령을 위한 집이다"등의 소문으로 이집에 대해 아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직접 서류를 조사해 보면서 깜짝 놀란 것은 이 집이 대통령 딸의 소유로 돼 있었고 더구나 이를 한국정부, 그러니까 정부 예산으로 다시 사들였다는 것입니다. 돈은 누가 냈는지 알 수 없겠으나 관사가 개인이름으로 구입될 수 없는 만큼 큰 딸이 소유권자인 것은 "박정희 망명처" 소문의 어렴풋한 근거가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3. 약혼자 : 이현란 (이대1년): 1924년 생 (7살차)ㆍ동거 (1948~1950)ㆍ당시 24- 31세ㆍ1남 사산
• 아이가 생후 6개월 만에 사망하고, 1948.10월 "여순ㆍ반란 사건"으로 박정희에게 문제가 생기자, 그를 떠나 요정 등을 전전함. 당시 24세(이화여대 1학년)때, 박정희와 약혼을 하고, 1948~1950년 초까지 "사실혼 관계"로 용산관사에서 동거했으며, 아들이 태어났으나, 생후 6개월 후 사망하였다.
• 이후, 박정희가 1948년 발생한 "여수ㆍ순천사건"에 연루돼 감옥생활을 하면서,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녀가 떠난 후, 찾으려고 노력하였으나, 요정에 있는 모습을 본 것을 마지막으로 다시는 찾지 않았다는 증언이 있다.
※ 여수ㆍ순천 10ㆍ19사건 : 1948.10.19일 전라남도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국방경비대 제14연대소속의 일부 군인들이 일으킨 사건으로, 제주도 4ㆍ3사건 진압출동을 거부하고, 대한민국 단독정부를 저지하기 위해 군인들이 일으킨 사건
증언을 보면, 여자들 중에서 "이현란"을 이성으로서 가장 좋아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원산 루시여고" 출신으로, 당시 "이화여대 1학년(당시 24세)"이었다. 이국적인 외모의 미인(美人)형이고, 키도 크고, 성격도 쾌활했고, 애교가 있고, 매력이 있었다고 한다.
박정희는 술 마시는 것을 싫어하는 "이현란"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그녀와 함께 있는 자리에서는 "5ㆍ16 쿠데타"를 일으킨 절대절명의 그 순간에도 마실 정도로 좋아했던 술을 한 번도 마시지 않을 정도라고 하니, 분명 그녀는 다른 여자와는 뭔가 달라도 달랐던 모양이다. 또한 박정희는 자신보다 7살이나 어렸던 그녀에게 꼬박꼬박 존댓말을 썼다고도 한다.
1947.12월, "조선 경비사관학교 (육사 전신)" 중대장인 박정희 대위는 "경리장교 박경원"의 결혼식에 참석했다가, 신부 들러리인 "이현란"을 만났는데, 그녀가 마음에 꼭 들었던 모양이었다. 사귀다가 약혼한 후, 곧 "용산 관사"에서 1948~1950년 초까지 약 3년가량 사실혼 관계로 지낸다.
"박정희"가 1948년 발생한 "여수ㆍ순천사건"에 연루돼 감옥 생활을 하면서, 두 사람 사이에 금이 가기 시작하고, "이현란"은 그의 곁을 떠난다. "박정희"의 잘잘못을 떠나, 당시 시대 상황에서 무슨 순애보 영화의 주인공이 아닌 "이현란"으로선 너무나 당연한 선택을 했다.
"박정희" 혐의는 "사형감"이라, 무작정 기다릴 수만은 없는데다가, 그녀에게 불통이 튀면 자신의 삶도 같이 구렁텅이로 말려들어 갈 수밖에 없는데, 보통 여자로선 너무나 상식적이고 또한 유일한 선택이었고, 더구나 핏덩이 아들까지 잃은 상태라면 더욱 더 그럴 수밖에 없다.
"이현란"에 관한 자료는 별로 없다. 그녀가 동거 기간 중 자주 가출을 했다는 것과 박정희는 그녀가 떠난 후에 요정에 있는 모습을 보고, 그 이후에는 다시 찾지 않았다는 증언이 있는 반면, 동거 기간 중 둘이 아주 사이좋게 살았으며, 박정희는 그녀가 떠난 후에도 아주 오랫동안 계속해서 그녀를 찾으려 다녔다는 증언이 있어, 서로의 내용이 극과 극으로 엇갈린다.
후자의 증언은 1999.01.19일, 숙군 때 처형된 "김학림"의 아내 강 아무개 씨가 당시 "대한매일(현, 서울신문)" 문화부 기자인 "정운현"에게 보낸 편지가 있어 더 확실한 근거를 갖는다.
"최근 집에서 자료를 정리하다가 한동안 행방을 몰랐던 편지 한 통을 우연히 찾았습니다. 편지 수신일자가 1999.01.19일로 돼 있으니, 햇수로 12년이 넘은 것입니다. 편지봉투 겉면을 보니 제가 보낸 편지에서 제 주소를 잘라 되 붙였는데, 당시 제 소속이 "대한매일(현, 서울신문) 편집국 문화부"로 돼 있군요. 박정희 대통령은 숙군 때, 유죄를 받은 "좌익전력" 때문에 두고두고 논란이 돼 왔습니다. 그래서 이와 관련한 얘기도 들어볼 겸해서 김학림의 아내 강 아무개 씨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지금 기억으로 질문 내용은 남편 김학림의 구속 전후 사정과 박정희 등 주변 인사들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뒤늦게 도착한 편지 속에는 그간 강씨의 개인사는 물론 놀라운 내용들이 상당히 많이 들어 있었는데, 주목할 만한 내용은 김학림과 박정희의 관계, 박정희 동거녀 이현란의 출산이었습니다. 박정희는 육영수와 결혼하기 직전에 한 여대생과 동거를 하고 있었습니다. 원산 루시여고 출신으로, 당시 이화여대 1학년이던 이현란(당시 24세)이 그 주인공인데, 이현란은 이국적인 외모에다 키도 크고 성격도 쾌활해 박정희 눈에 든 모양입니다.
김학림의 아내 강씨가 필자에게 보낸 편지는 본문 6장, 추신 1장 등 총 7장인데, 본문 가운데 박정희와 그의 동거녀 이현란 관련 부분을 골라 옮겨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어느 날 신성모 국방장관의 명령으로 3개월 만에 부산을 떠나서 저희는 태릉 육사로 오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살림집은 초가집 건넛방이었습니다. 거기에서 생남(生男)하였지만, 군인 장교들이 초가집 건넛방에서 출퇴근하였습니다.
순서대로 황택림, 박정희도 초가집 건넛방에서 살았는데, 이대생이었던 이 여사(李女史ㆍ이현란)가 매일은 아니지만 같이 살았었고, 그 다음에 박근서(숙청되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다음의 군인 가족이 저희들이었고, 그 다음의 초가집도 장교였습니다. 이 동네에서 약 1년 쯤 지난 후에 명령으로 용산 군인관사로 이사했었는데, 관사 입구 제일 가까운 데는 강문봉이 자리 잡았었고, 박정희, 황엽장군, 저희들 세 식구는 깊숙이 들어가서 자리를 잡았었는데, 이때에도 이여사(李女史ㆍ이현란)하고, 박정희는 아주 사이좋게 재미있게 살았습니다.
고(故) 남편과 고(故) 박정희는 태릉 초가집 동네에서 살 때부터 자주 만나는 것을 알았었는데, 남편이 저한테 아무 얘기도 안하고 비밀로 한 것 같았었는데, 나이도 어리고 아무 것도 몰랐었습니다. 그저 친구니까 친하게 지내는 걸로만 알았습니다. 남편이 이 관사에서 3일 동안 소식이 없이 집에 안 돌아왔었는데, 이여사가 저희 집에 와서 우리 남편도 소식이 없다고 하면서 걱정을 하였는데 나중에 체포된 사실을 알고 어찌 할 바를 몰랐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이여사가 출산하게 되어, 광화문 산부인과에 가서 생남(生男)하여서 제가 며칠 같이 있다가 퇴원하여서 이여사는 육아에 전념하였으나, 약 6개월 후 병명은 몰랐었지만 사망했었습니다. 작명(作名)도 안했었습니다. 그 때 이여사가 한 말이 너는 무슨 기구한 운명으로 애비 얼굴도 모르고 죽었느냐고 하면서 슬피 울었었습니다.
그 후에 소문인데 신당동에서 재혼(再婚)하여서 자식 낳고 잘 산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고, 또 소문은 이여사(李女史)의 남동생이 청와대 출입기자여서 이여사(李女史)의 소식을 고(故) 박정희에게 전하여 주고 서로 연락이 있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또 소문에 의하면, 육여사하고 결혼하라고 중매를 했을 때도 이여사의 미련 때문에 오랫동안(몇 年) 망설였다고 합니다. 이여사는 미인이고 애교가 있고 매력이 있었기 때문에 잊을 수가 없었다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저는 관사에서 나와서 갈 곳이 없어서, 태릉 육사 앞에 있는 육아원에 들어가서 보모노릇을 하다가 남편이 서대문형무소에 갇혔다는 말을 듣고, 서대문형무소로 아이를 안고 면회를 갔었습니다. 남편을 만나자마자 목에 메이고 눈물이 쏟아져서 말도 못했습니다. 어떻게 사느냐고 물어 보길래 육아원에서 보모를 하고 있다고 하였는데, 그 때 저의 아이를 안아본 것이 마지막이었습니다. 남편이 하는 말이 나는 주모자가 아니기에 재심이 있는데, 그 때 풀려나가니까 걱정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 후, 공주로 이감했다는 소식을 듣고 1950.06.25일이 일요일이었으므로 원장에게 외출 승낙을 얻어서 면회를 가려고 했었는데, 사변(事變)이 나서 못 갔으니 서대문에서의 면회가 마지막이 된 것입니다. 고(故) 박정희에 대한 저의 원한은 영원합니다." "이어 덧붙인 "추신(追伸)"가운데 박정희와 이현란 관련 내용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여사의 사망한 아이는 황(黃)장군 부인(고 故 최장군 부인하고 동창인데 지금은 고인임)하고 같이 용산관사의 뒷산에 저녁때에 가서, 암매장을 하였습니다.(입관하여서)"
"추신"에는 "이현란"이 낳은 아이가 생후 6개월 만에 죽자, 용산 관사 뒷산에 암매장했다는 증언이 있다.
4. 처- 2 : 육영수 (陸英修): 1925년 생 (8살차)ㆍ결혼 (1950~1974)ㆍ당시 25- 33세ㆍ1남 2녀
• 1974.08.15일 (48세): 8ㆍ15광복절 기념식장에서, 조총련계 "문세광"이 쏜 흉탄에 맞아 사망
본처ㆍ3명의 첩에게 12남 12녀를 얻을 정도로 "충북 옥천"의 대지주였던 "육종관"과 본처 "이경령"의 1남 3녀 중 2째 딸로 태어난다. 1950년 "한국전쟁" 중, 가족과 함께 "부산"으로 피난 중, 이종오빠이자 "박정희"의 대구사범 1년 후배인 "육군정보국 송재천 소위"의 소개로, 운명적인 만남을 가진다.
"육종관"이 결혼을 반대하자, 그녀는 가출하여, "박정희"의 임지였던 "대구"에서 하숙을 하며, 결혼을 감행한다. 당연히 결혼식에 불참한 "육종관" 대신 "김영기(대구사범 스승)"가 신부를 인도한다. 몸으로는 "김호남"과 헤어지고, 마음으로는 "이현란"과 있으면서 "육영수"와 결혼을 한다.
전기에 따르면, "육영수"는 대통령 부인이 된 후, 어느 여기자에게 선을 보러온 "박정희"를 숨어서 본 인상에 대해, "맞선 보던 날 군화를 벗고 계시는 뒷모습이 말할 수 없이 든든해 보였어요. 사람은 얼굴로써는 남을 속일 수 있지만, 뒷모습은 남을 속이지 못하는 법이예요. 얼굴보다는 뒷모습이 정직하거든요. 그 후 몇 번 만나 뵈니까 그 직감이 틀림없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어요. 미덥고 소박하고 아주 정다운 분이세요."
"박정희ㆍ육영수" 부부와 가까웠던 "윤필용"의 말이다. 1966년(윤필용은 1967년으로 기억) 어느 날, "육영수"는 오빠 "육인수" 집에 와서, 방첩부대장인 "윤필용"에게 전화를 걸어, 와달라고 한다. 육영수는 그에게 "우리 두 사람이 만난 것을 각하께서는 절대로 몰라야 한다"면서, 평소 쌓아놓았던 불만(박정희의 여자 문제)를 하소연하기 시작한다.
"윤 장군이 나를 좀 도와주어야겠어요. 간신 조조 같은 이후락 비서실장과 깡패대장 같은 박종규 실장이 각하를 망치고 있어요. 세상에 많고 많은 게 여잔데, 각하에게 왜 꼭 탤런트나 영화배우를 데려다주어서 국민들이 수군수군 거리게 만듭니까. 정말 제가 여자라고 강짜 부리는 것만은 아니에요. 그 사람들 그런 것 보면 정신 나간 사람들이에요." "피스톨 박종규"가 이 말을 들었으면 많이 억울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경호실장으로서 대통령의 채홍사 역할에 넌더리가 나서 어떻게 하든 그만두고, 중앙정보부장으로 가겠다고 기를 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웅진(육군본부 정보국 방첩대장 역임ㆍ육군소장 예편)"이 군인 박정희에 대해 한 얘기가 있다. "그분과 술을 퍼마시고 집에 같이 갔다가, 육여사가 싫은 표정을 짓는다고 내가 보는 데서 때리고 심지어 물을 뒤집어씌운 적도 있었다."
"어느 날 식사 중에 육 여사가 부하의 청탁을 남편에게 전했어요. 박 장군은 화를 버럭 내더니 숟가락으로 육 여사를 사정없이 찌르면서 비겁하게 마누라를 시켜서 부탁하는 그런 새끼는 혼을 내주어야 된다면서 그 따위 부탁 듣지 말라고 고함을 치더군요. 밥상을 뒤엎고 그릇을 집어 던지는 것도 더러 봤지요."
1970.02월, 서울대 단과대학별 수석졸업예정자들을 대통령 부부가 초대해 저녁을 대접하는 자리에, 법대 수석졸업예정자로서 참석, "박정희"를 처음 만난 "김상철(변호사)"이 전하는 얘기는 이렇다. 식사 도중, "육영수" 여사는 "김상철"의 이름을 부르더니, "학생들이 데모를 하느냐?"고 물었다. "최문환(서울대 총장)"이 이 질문을 대신 받아, 적당히 기분 좋은 말을 했다. "육영수"는 재차 "김상철 학생, 말 좀 해봐요"라고 했다. 이번엔 "법대 학장"이 가로막고 나서서 적당히 이야기를 했다. 그녀는 3번째로 "교수님들 이야기는 다 들었으니, 이젠 학생 이야기 좀 들어봅시다."고 재촉했다. "김상철"은 "육영수"가 학생의 입을 통해 대통령에게 바른말을 전해주고 싶어한다고 판단했다.
"저의 친구들 중에는 막걸리를 마시자고 하면, 커피를 마시자고 하는 학생들도 있습니다. 커피를 마시자는 학생들처럼 열심히 공부만 하는 학생들도 필요하고, 막걸리를 마시면서 시국을 개탄하는 사람들도 있어야 나라가 잘된다고 생각합니다. 얼마 전에 신문에 난 걸 보니까 대통령께서 기능올림픽에서 메달을 딴 기능공들을 격려해주셨다고 하더군요. 참 좋은 일입니다만 기능공들은 어차피 이 나라를 이끌어가고 있는 사람들은 아니지 않습니까, 미래의 이 나라를 이끌어가는 학생들에게도 격려를 해주시고, 실수를 하더라도 한수 접어두고 생각해주시면 합니다."
순간 "박정희"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고 한다. 뒷날, "김상철"은 그날 밤에 "육영수"여사가 "박정희"에게 손찌검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는다.
이런 증언을 보면, 박정희는 "간헐적 폭발 장애(IEDㆍIntermittent explosive disorder)"를 가진 것 같다. 그런데 자존심이 강하고 체면을 중시하는 성인의 경우, 이렇게 폭발하고 나면 자신의 치부를 덮기 위해 피해를 준 상대에게 보통 이상으로 배려하는 행동을 보여준다.
1974.08.15일, "육영수"는 "국립극장(서울 장충동)"에서의 "광복절기념식"에서 "조총련계 문세광"이 쏜 총에 맞고 사망한다. 그러나 이 비극은 북한을 "육영수 암살의 배후"로 만들면서, 자신의 철권통치로 높아진 국민적 반감에서 탈출한다. 바로 그런 상황을 노리고, "박정희" 자신이 이 사건을 기획했다는 "음모론"이 나오는 배경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죽음이었다. 김수환 추기경의 글이다. "육여사가 그때 세상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박 대통령의 통치 스타일은 한결 부드러웠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심리적 의지처를 잃은 박 대통령의 고독감이 정치에 어느 정도 악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육여사는 국민의 목소리를 제대로 전달하면서 남편의 통치 스타일을 슬기롭게 누그러뜨렸을 분이시다." 이렇듯 박정희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도 "육영수"에 대해서는 대부분 훌륭한 대통령 부인이었다고 호의적으로 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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