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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⑧ 관계 : 정일권ㆍ백선엽ㆍ 군부내 파벌

by 당대 제일 2022. 10.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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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02월, 군 내부의 "남로당 세력을 색출하는 숙군 과정"에서 "박정희 소령 (朴正熙ㆍ1917~ 1979ㆍ 61세)"이 "남로당 조직책"으로 지목돼 사형을 선고받았다. "김창룡"의 직속상관이며, 육본 정보국장인 "백선엽 대령 (白善燁ㆍ1920~ 2020ㆍ100세)은 "사형" 위기에 처해 있던 "박정희 소령"을 만났다.  박 소령이 그에게 "한번 살려 주십시오"라고 하자, 백 국장은 "그럽시다, 그렇게 해보도록 하지요"라고 답했다.

 

1. 정일권 (丁一權ㆍ나카지마 잇켄ㆍ1917~1994ㆍ향년 77세)

만주국 일본군인ㆍ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친일ㆍ박정희의 군사쿠데타를 도와 외교관ㆍ간도헌병대 대대장 (일본군 중령ㆍ최상위계급 조선인)ㆍ군인(육군대장ㆍ군번5번)ㆍ국회의원(3선ㆍ8~10대)ㆍ국회의장ㆍ국무총리(9대)ㆍ외교관(주미 대사 3대/ 5대)ㆍ외무부장관(11대/ 13대)이승만 정권 시, 3대 파벌 구도형성(백선엽ㆍ이형근)ㆍ"인천상륙작전"을 성공으로 이끈 숨은 주역

• 출 생 : 러시아 연해주 니콜리스크 (현, 우수리스크)      • 호 : 청사 (淸史)

• 사 망 : 미국 하와이 스트라웁 병원 → 국립묘지 장군 3묘역      • 사 인 : 병사 (임파선 암)

• 학 력 : 1937년 : 만주국 봉천군관학교 (5기ㆍ수석 졸업) → 1940: 일본 육군사관학교 (55)

• 처 : 5 명- 윤계원(요절)ㆍ박혜수ㆍ미 상ㆍ이모씨ㆍ정인숙         •  종 교 : 개신교

• 자 녀 : 3남 4녀 (정성일 (정인숙 아들) 포함)      • 가 족 : 형 2명(요절)    • 저 서 : 전쟁과 휴전ㆍ정일권 회고록

• 경 력 : 만주군 간도헌병대 대대장 (일본군 중령)ㆍ해방 전 만주국 군대에서 계급이 제일 높은 조선인 → 육군대장(1949~1957)국무총리(1964~1970)국회의장(1973~ 1979)외교관(주미대사외무부장관)공화당 총재 상임 고문(1970)국회의원(1971년부터 3, 8~ 10)

생애 2등에 만족하는 "처세(處世)의 달인"으로, 권력의 핵심에 있었지만, 최고 권력을 넘보지 않고 현실에 도전하기보다는 순응했다는 평가다. 1970.03.17일 밤11시경 발생한 "정인숙 암살사건" 이후, 그는 "정인숙의 암살 배후ㆍ정성일의 생부"로 의심받기도 했다. (정인숙 암살사건 참고) 미국에 있을 때, "정인숙"과의 사이에서 얻은 아들 "정성일"이 찾아와, 친자임을  인정해 줄 것을 요구했으나 사양했고, 이후에는 만나는 것을 거부했다. 1993년, "정성일"은 "서울가정법원"에서 그를 상대로 친자확인소송을 제소했다.

① 정일권ㆍ박정희 관계

1963년, "박정희"로부터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고, 12월에 "외무부장관"이 되어 입각하였다. 이때 "공화당"의 신진 당료들과 "최두선 총리" 간의 갈등을 중재하려 노력했으나. 실패했다. 1964년, "박정희 정권"에서 강행한 "한일협정 회담"에 대한 국민들의 반대가 이어지고, 1964.05월 "최두선 국무총리"가 사임하자, 4월부터 "국무총리"에 임명되어 1970.12월까지 6년 7개월 동안 재임했다.

"국무총리"로 취임한 정일권은 "한일회담의 조기 타결ㆍ식량증산 및 확보ㆍ물가 안정ㆍ공개 및 신속한 행정" 등을 공약으로 내걸고 빠르면 6개월 늦어도 1년 안에는 국민이 원하는 모든 일을 과감하게 실천하겠다고 공약하였다. 그 뒤 아무도 "외무부장관직"을 선뜻 맡으려 하지 않아, 2개월간 "외무부장관직"을 겸직하였다. 1966.12~1967.06월까지, 다시 "외무부장관"이 되어, "총리직ㆍ외무부 장관"을 겸임했다.

1965.02월, 이른바 "불도저 내각ㆍ돌격내각"이라 불리면서, 일본을 방문해 "사토 에이사쿠 수상"과 회담을 마무리하고, 6월 "한일협정"을 조인하는데 앞장섰다. 한일협정반대와 삼성의 사카린 밀수사건으로 국회에서 본회의 도중에 김두한 의원의 국회오물투척사건 당시 오물세례를 맞았다.

1970.03.17일 "정인숙 (鄭仁淑ㆍ1944~1970.03.17ㆍ향년 26세)"사건이 터졌다.  1970.03.17일 밤 11시경, "정인숙"은 남산의 "타워호텔 18층 나이트클럽"에서 한 40대 남성과 만나 와인을 마셨고, 그 후 그곳에서 "Release Me ( 제발 날 놓아 주세요ㆍ영국 엥겔버트 험퍼딩크 노래)"를 듣고, 운전수 "정종욱(4째 오빠)"이 운전하는 "코로나 자동차"를 타고 가던 중, "서울 강변 3로(마포구 합정동 절두산 근처)"에서 갑자기 나타난 2명의 괴한들에 의해 총격을 받아, 현장에서 2발의 총탄(머리ㆍ가슴)으로 사망하였고, "정종욱"은 1발(넓적다리)이 관통당하였으나 부상당한채 생존해 있었고, 택시기사에게 도움을 청해, 구조되었다.

제3공화국 시절, 엄청난 미모로 최고 권력층의 실세와 유력한 정치인들을 두루 섭렵하고 다니면서 큰 위세를 떨쳤던 고급요정 종업원 출신 "정인숙"은 "박정희ㆍ정일권ㆍ박종규ㆍ이후락" 등 대다수 5ㆍ16 주체세력들과 연결되어 있었다.

야당인 "신민당"의 정치공세가 계속되자, "정일권"은 "박정희"를 찾아가 무릎까지 꿇었다고 한다. 바로 해임을 시키면, 세간의 루머만 커질 것을 우려한 "박정희"는 "정일권"을 불러 자진 사퇴를 권고한 뒤, "정종욱"이 구속되고, 잠잠해질 무렵 "정일권"을 해임하고 바로 "미국"으로 내보냈다.

정일권

 

2. 백선엽 (白善燁ㆍ시라카와 요시노리ㆍ1920~ 2020ㆍ향년 100세)

친일 군인ㆍ대장ㆍ박정희 생명의 은인ㆍ만주국 간도특설대 장교(헌병중위)ㆍ조만식 비서(1945.08~12)이승만 후계자군인(한국군 최초 대장)정치인(교통부 장관/서울 1기 지하철건설)박정희(소령/만주군 출신/남로당 프락치 활동 중 체포) 처형위기에서 구해준 생명의 은인625전쟁 당시, 휴전 회담의 한국군 대표다부동 전투(경북 칠곡)제일 먼저 "평양"입성유일한 "1군단" 배속야전전투사령부 사령관()야전사령부(지리산의 빨치산 소탕)2군단

외교관(캐나다/중화민국/프랑스/네덜란드/벨기에)ㆍ기업인(충주비료 사장/한국종합화학공업 사장/호남비료 사장/한국종합화학공업 사장/한국에탄올 사장/대한화학펄프 사장/비료공업협회 회장)ㆍ교육인(선인재단 이사장/ "인천대학교ㆍ선인재단" 설립자 (백인엽 중장과 함께)): "선인학원"에서는 "학생체벌ㆍ교사의 예비군복 착용ㆍ부정입학ㆍ부정 편입학ㆍ졸업장 판매ㆍ기부금 입학ㆍ교사해고ㆍ학교근처 주민재산 침해ㆍ중국인 공동묘지 침탈" 등의 비리 문제가 불거졌다.

• 출 생 : 평남 강서군 강서면 덕흥리        •  : 우촌(愚村)운산(雲山)

• 학 력 : 만주국 육군군관학교(제9기, 만주 봉천군관학교) → 대한민국 군사영어학교 1

• 처 : 노인숙(盧仁淑ㆍ1925ㆍ1944년 가을ㆍ평양에서 결혼)

• 경 력 : 1940~1945- 만주국 육군 중위 → 1952.07 - 육군 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  → 1946~1960- 대한민국 육군 대장 → 1953.01 - 육군 대장 진급 (대한민국 군 최초 대장)

①   백선엽박정희의 비교분석

비교분석

숙군 사형위기 "박정희 소령" 구해줘, 후에 "5ㆍ16 주역들"과 만나게 된다.

백 장군은 "박정희 대통령"을 죽음으로부터 구해 준 인물로 유명하다. 1949.02월, 군 내부의 "남로당 세력을 색출하는 숙군 과정"에서 "박정희 소령"이 체포됐다. "박정희 소령"은 "남로당 조직책"으로 지목돼 사형을 선고받았다. "백선엽(육본 정보국장)은 "사형" 위기에 처해 있던 "박정희 소령"을 만났다.

박 소령이 그에게 "한번 살려 주십시오"라고 하자, 백 국장은 "그럽시다, 그렇게 해보도록 하지요"라고 답했다. "박정희 소령"이 다른 군인을 포섭하는 활동을 하지 않고, 자신이 아는 "남로당 조직"을 밝혔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의연한 "박정희 소령"의 자세를 높이 샀다. 백 국장은 "미군의 동의와 이응준(총참모장)의 재가"로 "박정희 소령의 형 집행정지"를 받아냈다. "박정희 소령"은 "불명예 제대"하는 처분으로 끝났다. 다시 만난 두 사람은 이런 대화를 했다고 한다.

• 백선엽 : 나가서 하실 일 있나요?     • 박정희 : 마땅한 게 없습니다.      • 백선엽 : 그러면 정보국에서 문관으로 근무하시는 게 어떨까요?     "박정희 문관"은 "정보국 전투정보과"에 배치됐다. 당시 "전투정보과"에는 백 국장이 뽑은 "육사 8기생"들 가운데, 똘똘하다고 소문 난 중위 "김종필ㆍ석종선" 중위가 근무하고 있었다. 박통이 훗날 "5ㆍ16 군사정변"의 주역과 연을 맺은 자리였다. 이후 "백선엽"을 생명의 은인으로 대우했다. 사석에선 백 장군이 3살 아래인데도 불구하고, "형ㆍ백형"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박정희 대통령과 만남

"육본 정보국장" 재직 중, 1948.10.19~ 10.27일 발생한 "여수ㆍ순천사건(여순 14연대 반란사건, 3,400명 학살)" 이후, "공산 게릴라 소탕ㆍ숙군 사업"을 지휘하였다. 이때 같은 "만주군" 출신으로, "남로당 프락치"로 활동하던 중, 체포ㆍ처형위기에 처한 "박정희(당시 소령)"의 목숨을 구해준다.

1948.12.15일, "국방부"는 "육군본부 정보처"소속이던 "백선엽"등 중령 8명을 대령으로 특진 발령했다. 이후 그는 "남로당 빨치산 토벌ㆍ군내 좌경인사 숙군작업"에 주력한다. 이때 "김창룡"의 강경책과 달리, 좌익혐의자 중 단순가담자를 선별하여, 가벼운 징계를 내릴 것을 건의하여 성사시킨다.

"백선엽"은 "숙군 과정"에서 검거되었던 "박정희 구명"에 대해서 적극적이었다. "박정희"의 재능을 아깝게 생각한 "백선엽"은 "박정희"에게 전향을 권고한다. 1949년 초, 어느 날 "방첩대의 김안일 소령"은 "백선엽 대령"에게 "박정희 소령"이 조사 과정에서 "군내 침투 좌익조직"을 수사하는데, "적극 협조했다"는 점을 들어, "박정희"를 만나 줄 것을 부탁했다.

"박정희"를 만난 "백선엽"은 도움을 부탁하면서도, 시종 의연한 자세를 잃지 않았던 그를 도와주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숙군 과정"에서 체포된 "박정희 소령"을 만났을 때, "박정희"는 "1번만 살려달라며, 이 은혜를 잊지 않겠다."고 거듭 부탁했다. 당시 "박정희"는 "육군사관학교 좌익용의자"의 한 사람으로 검거되어, "사형 선고"까지 받은 상태였다.

"옥석을 가리기 힘들었던 만큼, 무리한 일이 없었다고 자신할 수는 없지만, 바로 1년 후에 터지는 동족상잔의 대전란을 앞두고, 적어도 군내의 좌익조직을 일소할 수 있었던 것은 지금으로서도 다행이다"

"김창룡" 등은 "박정희"를 "남로당의 총책"으로 보고, 숙청하려 했으나, 그는 "박정희"의 구명에 적극적이었다. "백선엽"은 "이드 대위(미육군 정보국 고문관)"에게 부탁하여, "하우스만 대위ㆍ윌리엄 로버츠 준장"에게 "박정희 소령"의 구명을 요청했다."육군본부"에 재심사를 요청하여, "박정희"에 대한 "형 집행정지 조치를 얻어냄으로써, 불명예 제대시키는 선"에서 문제를 매듭지었다.

이후 군내부의 반대와 일부 장교들의 비난을 감수하고, "박정희"가 "문관 신분"으로 "정보국"에서 근무하도록 배려했다. "공식 보직"이 부여되지 않은, "편제외 인원"으로 "비 편제 군무원" 자격으로 근무하던 "박정희"에게는 급여가 없었으나, "백선엽"은 "동료ㆍ부하 장교"들을 설득하여, "장교 월급"에서 일부 각출하여, "박정희"의 "문관 월급"을 만들어 주었다. 어머니를 옥중에서 잃고, 연인과도 사별하여, 의기소침한 "박정희"를 독려하여, 동기를 부여한다. 1950년 "6ㆍ25전쟁"이 발발하면서, "박정희"는 기적적으로 회생ㆍ현역으로 복귀하여, "정보국 제1과장"으로 전쟁에 참여하게 된다.

 

3. 한국 군부 내 파벌주의 (1962년 미 대사관 기밀문건)

•  일 시 : 1962.08.17          • 발 신 : 서울 미대사관            • 수 신 : 미국 워싱턴 국무장관

 미 비밀문서 : 백선엽은 부패척결 대상자였다.  미 참사관 "하비브" 기록 : "5ㆍ16쿠데타" 때, "박정희ㆍ김종필" 등 후배 "청군운동"으로 숙청

"6ㆍ25전쟁 영웅"으로 미화시킨 "백선엽"은 "간도특설대" 출신의 "친일파"였을 뿐만 아니라, 한국 전쟁 이후 국군에 파벌을 형성해, "부패의 온상"이 됐던 인물이었으며, 결국 이 때문에 "5ㆍ16쿠데타 준비세력"에 의해 옷을 벗어야 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 같은 사실은 "5ㆍ16쿠데타" 당시, "필립 하비브(주한미대사관 정치담당 참사관)"이 본국에 보낸 장문의 기밀문서에 자세히 기록돼 있다.

"하비브 참사관"은 "5ㆍ16쿠데타" 발생 1년이 조금 지난 1962.08.17.일, 한국군내 세력판도를 자세하게 분석ㆍ정리한 장문의 비밀전문 "한국군부내 주요 파벌주의"를 "미 국무장관"에게 보냈다. 전문에서 정부수립 후, 승승장구하던 "백선엽"을 비롯해, "정일권" 등 "친일 군벌세력(구 파벌)"이 "박정희ㆍ김종필" 등 "쿠데타 세력(신진 장교들)"에 의한 "부패척결" 등 "청군운동"으로 군 조직 내에서 숙청됐다고 기술했다.

전문에서 "정부수립 이후부터, "5ㆍ16쿠데타" 전까지 군을 구성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세력을 크게 "만주파ㆍ일본파ㆍ중국파"로 구분하고, 이 가운데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세력은 "만주파"였으며, "백선엽"을 "만주파"의 2명의 거두 가운데 하나로 보았다. 실제 군 조직은 모두 일제 때, "만주군관학교"를 나온 "만주파 정일권(함경도 파)ㆍ백선엽(평안도 파)" 두 거두에 의해 장악됐었다고 "하비브"는 분석했다.

북한지역 출신 군인들이 조직을 장악한 이유에 대해, "뿌리가 없고, 연고가 없는 이방인들이며, 친가ㆍ처가의 대가족을 데리고 내려왔기 때문에 가난했고, 생계유지에 대한 욕구가 컸다. 이러한 욕구가 그들을 한데 결속시켰고, 그들은 조직을 통제하기 위해 자신들의 지역적인 연대를 이용했다"고 설명했다. 이 같은 "지역연고ㆍ파벌"이 결국 "군내 엄청난 부패"의 한 원인이었다고 기술했다.

특히 "만주파 정일권 (함경도 파)ㆍ백선엽(평안도 파)"가 이끌던 파벌의 부패상에 주목했다. 

"정일권과 백선엽은 모두 자신들의 군사적 국가적 임무에 덧붙여서 자기 파벌을 유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자기 파벌의 성원들이 파벌에 대한 반역이 아니라면 위법행위를 하더라도 이들을 보호하고 계속 활동하게 할 뿐 아니라, 처벌을 받을 경우 복권시켜 줘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고 밝혔다. 이들이 이른바 후에 "하나회"로 까지 이어지는 "군내 파벌의 뿌리였다"는 것이다. 

"하비브"는 그 중에서도 "백선엽"을 부패한 장군의 대표적인 인물로 꼽았다. 이 비밀전문에서 "백선엽"에 대해 "혜택과 진급, 적절한 사면 등의 방법을 통해 자신의 파벌적 역량을 축적했다."고 분석하고, "1가지 단점"으로 "백 장군은 다른 참모총장들보다도 더욱 부패한 것으로 유명했다."고 기술했다. "하비브"는 "5ㆍ16쿠데타"는 창군 세력들의 이 같은 파벌ㆍ부패에 대한 군내 소외세력과 젊은 장교세력들의 반발에서 비롯된 점이 없지 않다고 보았다.

그는 "당시 젊은 장교들은 백선엽ㆍ정일권을 자신의 선배로 분류하고 싶어 하지 않을 정도로 부패구조가 만연됐었다"고 분석하고, "5ㆍ16쿠데타ㆍ청군운동은 백선엽ㆍ정일권 등 선배들의 지역적 파벌과 그로 인한 돈과 친인척의 등용으로 얼룩진 부패에 분노한 젊은 장교들의 감정을 그들의 선배를 제거하고, 오랫동안 적체된 진급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발판으로 이용했다"고 풀이했다. 

"백선엽ㆍ정일권"이 거느린 파벌세력의 부패 고리는 1960년 "4ㆍ19혁명" 1년 전인 1959년 군내 파벌과 부패 문제를 제기하고 나선 "조선경비사관학교(육사) 5~9기 장교들의 "청군(정군)운동"에 의해 와해되기 시작했다고 기술했다. "군사쿠데타"를 기획하던 이들 "신진장교"들은 "4ㆍ19혁명"으로 "쿠데타" 기도가 불발에 그치자, "청군운동"으로 방향을 돌려, 혁명 직후인 5월 "송요찬(참모총장)ㆍ백선엽(연합참모회의 의장)이 퇴역했다. "하비브"는 이들의 퇴역에 대해 "직접적으로는 4ㆍ19혁명을 통해서, 간접적으로는 부패사건으로 함께 숙청됐다"고 기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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