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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 - 일반 • 명리학

맹자의 역성혁명 (易姓革命ㆍDynastic Revolution)

by 당대 제일 2022. 8.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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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성혁명 (易姓革命)"이란,  왕조가 바뀌는 일이고, 중국에서는 왕조교체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사상이다. 유교의 정치 사상 가운데서 완성되었는데, 제왕이 부덕하여 민심을 잃으면, 다른 유덕자가 천명을 받아 부덕한 왕조를 넘어뜨리고 새로운 왕조를 세워도 좋다고 하는 사상이다.

 

1. 역성혁명 (易姓革命)을  체계화된 이론으로 제시한 것은 "맹자 (B.C 372?~ 289?)"였다.

"맹자의 역성혁명론""무력혁명"을 긍정하지 않았으며, "군주가 덕을 베풀면, 적국은 자연스레 무너지게 되어, 천하통일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낙관적 이상론"에 불과했다.

"맹자""군주가 그 지위를 유지하는 것은 천명(天命)에 따른 것이며, 천명은 인심(人心)에 의해 좌우된다"고 주장했다.

"인심"에 영향을 주는 것은 "군주의 덕()"이며, 따라서 군주가 ""이 없으면 "인심"을 잃게 되고, 이에 따라 "천명"이 군주에게서 떠나게 된다"인심""새로운 유덕자(有德者)"를 찾게 되고, "천명""유덕자"에게 내려져, 기존의 군주를 몰아내고, 새로운 군주로 군림하게 된다.

이로써 "역성혁명"이 일어나게 되는데, 본래 "맹자"가 이와 같은 주장을 한 것은 당시 폭정을 일삼던 "전국시대 군주들"에게 충고하기 위한 것일 뿐이었다.

그가 주장한 "역성혁명"의 내용을 가장 잘 담고 있는 일화는 다음과 같다. (맹자- 양혜왕 하 제8)

()나라의 선왕(宣王)이 맹자에게 물었다"과인이 듣기로는, "()은 걸()을 몰아내고, 천자(天子)가 되었고, 무왕(武王)은 주()를 쳐내고 천자가 되었다" 하던데, 이것이 사실입니까?" 

맹자가 답하길,  "전해오는 기록에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왕이 말하길,  "신하 된 자로서, 제 임금을 시해한 것이 도리에 맞는 일이겠습니까?"

맹자가 말하길,  "()을 해치는 자를 적()이라 하고, ()를 해치는 자를 잔 ()이라 하며, 잔적한 이는 (으로써의 권위를 이미 상실한) 필부일 뿐이니, "무왕께서 ""라는 자를 주살하였다"라는 말은 들었어도, "임금을 시해 하였다"라는 말은 들어 본 바 없습니다", "탕무방벌론(湯武放伐論)"을 통해, "역성혁명"을 정당화했다.

, "통치체계"라는 것 자체가 ""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를 해치는 군주는 스스로 그 통치의 권위와 정당성을 상실한 개인에 불과하며, 백성이 이에 저항하여 통치체계를 전복할 수 있다는, 말 그대로 "혁명적인 이론"이다.

"불법적인 권력"에 맞설 시민의 저항권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맹자의 혁명사상""민의(民意)를 기본으로 하는 천명"에 근거를 두고 있다.  "위민의식(爲民意識)"에 기초한 것이며, 또한 "위민"을 구현하기 위한 보완적 방법이었다.

즉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라고 하는 "민본주의(民本主義)"에 입각한 "맹자의 위민의식"은 백성의 온존을 위협할 수 있는 부도덕한 정권을 견제할 필요가 있었고, 그러한 필요로 말미암아 당연히 "혁명론"으로 전개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2. "탕무방벌론(湯武放伐論)""맹자"에서 거론되는 개념이다.

"천자"가 무도한 "폭군암군"일 때, "천하백성"을 위해, "유덕한 제후"가 그 "천자"를 토멸하는 것을 "방벌(放伐)"이라 하고, 그것을 정당화하는 이론이 "탕무방벌론"이다고사에서 인용되는 실례가 "은나라 탕왕주나라 무왕"이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다.

전설에 따르면, 중국 최초의 "천자계승 방법"은 유덕한 이가 유덕한 이에게 물려주는 "선양 (禪讓)"이었다.

"천자"가 그 자손에게 "천위(天位)"를 세습하지 않고, 다른 "성의 유덕자"에게 양위하는 방식이다하지만 "하나라" 대에 이르러, "혈통 세습제"가 확립되었는데, "세습왕조"가 교체되는 경우, "방벌(放伐)"이 일어나게 되었다. (탕왕무왕의 경우)

"하나라 걸왕""은나라 탕왕"이 멸한 것이 최초의 "방벌(放伐)"이라고 한다하지만 "하나라"의 역사성이 아직 확실하지 않기에, "은나라 주왕""주나라 무왕"이 멸한 것이 실재성이 확실한 최초의 "방벌"이 된다.

하지만 "맹자""방벌(放伐)의 정당화 이론(역성혁명)을 제공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뒤 중국사에서 "방벌(放伐)" 사례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진한시대" 이후, 황조 교체는 "찬탈(유혈 쿠데타)"을 해놓고, "선양 (禪讓)"이라고 주장하거나, 방 유목민이 밀고 내려와, 기존 황조가 "멸망(정복)하는 식"으로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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