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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 역사ㆍ사건ㆍ인물

만주족 (청ㆍ말갈ㆍ여진)ㆍ거란 (몽골)ㆍ흉노

by 당대 제일 2022. 1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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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금(大金1115~1234")"여진족 완안부의 아골타"1115년 황제에 즉위하여, 국호를 "대금 (大金) 연호""수국 (收國)"으로 정하면서 건국됐다. "금나라"를 건국한 "여진족"의 시조가 "고려" 또는 "신라"에서 온 "김함보 (金函普)"이며, "김함보" "안왈아골타" 7대조이다. 

 

1. 여진 (女眞 )김함보(시조)ㆍ완안아골타(금)ㆍ누르하치(후금)ㆍ홍타이지(청ㆍ아들)

숙신 (진)→ 읍루 (한)→ 말갈 (고구려 지배ㆍ수ㆍ당)→ 여진 (당ㆍ송ㆍ명)→ 만주족→ 

• 계 통 : 말갈족 + 선비족ㆍ거란의 신하들ㆍ퉁구스ㆍ"흑수말갈"의 후예

• 거 주 : 함경도ㆍ중국 랴오닝 성ㆍ지린 성ㆍ헤이룽장 성ㆍ러시아 연해주ㆍ하바롭스크 지방ㆍ아무르 주

여진(女眞)은 본래 "말갈족ㆍ선비족"이 융화된 족이다. "북위(北魏, 386~534)ㆍ북주(北周, 557~581)시대" "말갈족ㆍ선비족"은 융화되었고, "당나라" 때 "거란족"의 일파가 되었다가, "요나라"가 성립할 무렵, "요동"에서 "만주 동남부"로 일부가 이동하였다. "북만주"의 여진 부족들은 원래 "거란"의 신하들이었다.

여진은 "만주 동북부"에 살던 "흑수말갈"의 후예로 "요ㆍ발해(200년 지배당함)"의 지배를 받았다. "고구려(700년 지배당함)"의 지배를 받아온 "말갈(靺鞨)"이 전신이며, 고려 때 "여진족 정벌"로 "고려"를 "상국(上國)"으로 모셨고, "고려ㆍ조선"에 조공하였다. "함경도 북부"에 거주하던 "조선귀화 여진족"은 20세기 초까지 "재가승"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가 "한민족(韓民族)"에 흡수되었다.

① 시 조 

"금나라"를 건국한 "여진족"의 시조가 "고려" 또는 "신라"에서 온 "김함보(金函普)"이며, "김함보"는 "안왈아골타"의 7대조이다.

② 금 (金ㆍ1115~1234ㆍ완안아골타)

1115년, "완안아골타"가 "요나라"를 정복하고, 스스로를 "황제"라 칭하고, "금나라"를 건국하였다.  "여진족"은 자신의 왕조를 고향에 있는 "강"의 이름을 따라, "금(金)"이라고 지었다.  그 후, "요나라"의 잔당들과 함께 자신들을 공격하려고 하였던 "송나라"를 공격하였고, 마침내 1126년, "송나라" 수도 "카이펑"을 점령하자, 이들은 화북지역에 대한 패권을 쥐게 되었다(정강의 변)   "금군"은 "장강"까지 남하하였으나, "회하" 부근에서 저지되고, "남송"은 일단 국경을 방어하게 되었다.  "여진족"은 전쟁에 뛰어났으나, 정착하여 수십 년을 지내게 되자, 자신의 유목 정체성을 잃게 되었다.  결국 "여진족"은 점차 "한족화" 되면서, "유교"를 따르게 되었고, "남송"과의 평화를 공고히 하였다.

1189년, "금나라"는 "몽골ㆍ남송"을 상대로 2개의 전선에서 싸우게 되었다.  1215년, "몽골"의 압력으로 수도를 "베이징"에서 "카이펑"으로 옮겼으나, 1234년 "몽골제국(원나라)"의 공격으로 멸망되기까지, 북부를 점거하고 있었다.  "금나라" 멸망 이후, "여진"은 "야인여진(野人女眞, 만주 최북방 파아손 거주)ㆍ해서여진(海西女眞, 헤이룽장성 거주)ㆍ건주여진(建洲女眞, 지린 성 거주)"로 나뉘었다.

③ 후금 (後金ㆍ1616~1636ㆍ누르하치)ㆍ청(淸ㆍ홍타이지ㆍ1636~1912): 2~300만 명이 "명나라" 1억 인구를 지배

1616년, "건주여진"의 우두머리였던 "누르하치"가 "여진"의 3부족을 통합하고, 연합된 부족의 이름을 "만주족"으로 바꾸었고, "누르하치"는 "유목 법령"을 통합하여, 강력한 제도를 만드는데, 이는 "후금(後金)"과 중국을 점령한 후의 "청(淸)제국"이 된다.  정식 국호는 "금"이었으나, 이전에 있었던 "금"나라와 구분하기 위해 "후금"이라고 불린다.

"송" 때, 한 부족에서 "금"이 나와, "요(遼)"를 멸하고, 다시 "송"을 남방으로 쫓아버린 후 "몽골제국(원나라)"에 의해 멸망되기까지 북부를 점거하고 있었다.  이를 계승하고 부흥시킨 의미에서 다시 "금(金)"이라는 이름으로 나라의 기틀을 다졌다.  "누르하치"는 "칸"으로 즉위하고, 그 뒤를 아들 "홍타이지"가 잇다가, 점차 중국 대륙 전체를 노리게 되면서, "명나라"를 몰아내고, 1636년에 국호를 "대청(大淸)"이라 개칭하고 융성하였다.  1912년, "신해혁명"으로 몰락하였다.

2. 거란 (契丹): 요(遼)ㆍ야율아보기 : 몽골제국(1206~1388)ㆍ원나라(1271~1388ㆍ대원대몽골국)ㆍ칭기즈 칸(1162~1227ㆍ테무진)

• 계 통 : 몽골계 + 퉁구스계의 혼혈족→ 언어ㆍ문화적으로는 "몽골계"에 가깝다.

• 거 주 : 함경북도ㆍ내몽골ㆍ중앙아시아ㆍ중국 랴오닝 성ㆍ지린 성ㆍ헤이룽장 성ㆍ러시아 연해주

① 요 (遼ㆍ916~1125): 거란족 "야율아보기"가 "중국 북부ㆍ몽골" 지역에 세운 왕조

"거란족"의 "야율아보기"가 "중국 북부와 몽골" 지역에 세운 왕조이다. "몽골ㆍ둥베이ㆍ화베이"의 일부를 차지하며, 10~11세기경에 동아시아 최강국의 위세를 자랑했다. 916년, 건국 당시에는 국호가 "거란(契丹)"이었는데, 947년에 "대요"로 바꾸고, 1125년에 "여진족"의 공격을 받아 망했다. 10세기 초, "질랄부(迭刺部)"의 "야율아보기"는 많은 "한족"을 부하로 삼아 새로운 권위를 창출했고, 906년에 연맹장인 "카간(可汗)"이 되었다.

그는 다른 부족의 반란을 진압하고, "카간"의 선거제를 폐지해, "세습제"를 확립했다. 916년에는 "황제"를 칭하며, "거란"을 세웠고, "상경임황부"를 수도로 하였다. "거란족"을 통합한 "태조 야율아보기"는 924년에 "서역 정벌"에 나서, "탕구트ㆍ토욕혼"을 굴복시키고, 925년에 "발해"를 공격해, 926년에 멸망시켰다.

② 역사에 처음 등장한 것은 "북위(北魏, 386~534)" 때이다.

"몽골 동부"를 중심으로 유목 생활을 했고, 당시 "거란족"은 8개 부락이 독립적으로 활동했으며, "부족연맹"은 결성되지 않았다. "남북조(南北朝, 386~589)" 시대에는 "북위ㆍ북제"의 공격으로 타격을 입었고, "수(隋, 581~ 618)"나라 때에도 엄청난 희생을 치렀다.

"당(唐, 618~907)"나라 초기에 "부족연맹"을 결성했으며, "대하씨(大賀氏)"가 "연맹 장"을 맡았다. "대하씨"는 "당 태종" 때, "당"에 귀의해 "이씨(李氏) 성"을 하사받았다. "측천무후(則天武后, 중국의 여자 황제ㆍ고종 이치의 황후ㆍ무주(武周)의 황제(당 7대 황제))" 통치 시기(690~ 705)에 "당"에 반기를 들었다가 실패하고, "돌궐"에 귀속했다. "돌궐"이 쇠퇴하자 다시 "당"에 귀의했고, 745년에 "위구르 제국"이 건국되자, 100여 년 동안 "위구르"의 통치를 받았다. 840년, "위구르"가 망하고, "당"이 쇠퇴한 틈을 이용해서, 대외 팽창을 시작해, "북방의 오고(烏古), 실위" 등의 부족을 복속시키고, "한족"을 포로로 데려와, 노예로 삼았다.

③ 한반도와의 관계

378년, "고구려"의 북쪽 변경을 침범하는 등 노략질하였으나, "고구려"는 거란의 8개 부락을 빼앗았다. 392년(광개토대왕 때)에는, 378년(소수림왕8)에 "거란"의 침입으로 잡혀갔던 1만여 명의 백성들을 되찾는다. "거란"은 "광개토왕"의 공격을 받고, 일부가 복속했고, 이후 "거란"은 "당나라"에 복속했다. 916년, "야율아보기"가 "거란"의 여러 부족을 통합하여, "대거란"을 세우고, "발해"를 멸망시켰다. 993~1019년까지,"요나라"는 "고려"에 쳐들어왔으나, 패퇴했다.

3. 흉노 (匈奴): 유목 제국ㆍ한 무제 (재위 BC 141~ BC 87)의 공격으로 급격히 쇠퇴

• 계 통 : BC 3C ~ AD 5C까지, "몽골ㆍ중국 북부" 지역에 존재한 유목제국ㆍ일각에서는 "흉노""훈족"을 같은 민족으로 간주하기도 하지만, 명확하게 증명된 것은 없다.

• 거 주 : 시베리아 남부ㆍ만주 서부ㆍ중국 내몽골 자치구ㆍ간쑤성(甘肅省)ㆍ신장 위구르 자치구

• 선 우 : "하늘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흉노"를 이끄는 대장의 호칭

BC 3C 무렵, "몽골고원" 지역에서 세력을 확대하기 시작"한나라"와 군사적 충돌을 겪기도 하였고, 때로는 "조공무역결혼동맹"을 하는 등 복잡한 관계를 맺었으며, 결국 "한무제(재위 BC 141~ BC 87)" , "한나라"의 공격으로 급격하게 쇠퇴하였다.

BC 318, "흉노""()()()()()"5개 나라와 함께 "()"을 공격했지만, 결과는 "5국의 참패"로 끝났다BC 215,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제""장군 몽염(蒙恬)"을 보내, "흉노"를 토벌축출한 뒤, 하남의 (오르도스 지방)을 점령하고, "감숙(甘肅)"에서 "요동(遼東)"까지 장성을 쌓아, 북방 기마민족들의 침공을 막았다.

"묵돌(冒頓, 두만의 태자)"월지를 빠져나온 후, 귀국하여 자신을 따르는 자들을 모아, 아버지 "두만(頭曼) 선우"를 살해하고, 스스로 "선우"가 되었다"묵돌"이 등장할 당시, 중국은 "초한전쟁"이라는 내전을 치르고 있었는데, 동쪽의 만주서부지역의 "동호(東胡)", 서쪽의 천산산맥과 감숙지방에 있던 "월지국(月氏國)", 남쪽의 "누란(樓蘭)","백양 하남왕"을 병합하고, 북쪽의 "혼유(渾庾)굴야(屈射)정령(丁零)" 등의 여러 부족을 복속해, 북방 최대의 유목민족국가를 수립하였다.

그 사이, 중국에서는 "전한(前漢)""유방(劉邦, 재위 BC 202~ BC 195)"에 의해 내란이 수습되었다BC 200, "흉노"를 정벌하기 위해, "유방"이 친히 "한군"을 이끌고 갔으나, 큰 눈과 추위로 더 나아가지도 못하고, "유방""백등산(白登山)"에서 7일간 포위되었다가, 가까스로 달아났다.

"유방""흉노와 전쟁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이후, "전한""흉노"와 굴욕적인 "전한흉노"는 형제 관계의 화친을 맺었다. 화친 조약의 내용은   한의 공주를 "흉노 선우"에게 의무적으로 출가시킨다.      한이 매년 술비단곡물을 포함한 일정량의 공물을 바친다.       한과 흉노가 "형제맹약(兄弟盟約)"을 맺는다.       "만리장성"을 경계로, 양국이 서로 상대의 영토를 침범하지 않는다.

"흉노"에 내는 조공액도 "흉노"사이의 역학 관계에 따라 수시로 바뀌었는데, 대체로 ""의 조공액은 매년 늘어났다BC 192~ 135년까지, 적어도 9차례에 걸쳐, """흉노"에 대한 조공액을 인상했다는 기록을 근거로 이 시기 "전한이 흉노의 속국과 같은 존재였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BC 141, 즉위한 "한무제(재위 BC 141~ BC 87)""흉노"와 맺은 조약을 파기하고, "흉노"와 전면적인 전쟁을 시작하여, "서역"을 정벌하고, "비단길"을 통제하게 되자, "흉노"는 경제적으로 약화되었다"흉노"의 전쟁으로 "전한"은 막대한 손실을 입었으며, "흉노"의 피해는 더 커서, "흉노"의 세력은 크게 위축되었다

BC 60년경, "흉노""선우"자리를 놓고 내분이 일어났으며, "호한야 선우(呼韓邪 單于)"의해 "흉노"는 재통일되었으며, "전한"과 화친을 맺었다그러나 "후한"이 건국된 이후, "흉노"는 다시 분열되어, "남 흉노""후한"에 복속되어, "오르도스 및 산시성(山西省)" 일대에 거주했으며, "북 흉노""몽골 고원"에 남았다.

89, "후한남 흉노"의 연합군은 "북 흉노"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남 흉노""중국의 번병(番兵)"역할을 하며, "오르도스 및 산서" 일대에서 북방을 방어하였다"후한""남 흉노"의 군대를 용병으로 활용하여, "선비오환()"등을 토벌하기도 하였다중국 명령을 충실하게 이행하는 "선우"에 대해서, "흉노"의 여러 유력자들은 많은 불만을 가졌으며, 또한 중국 측에서도 간섭하여, "선우"의 직위는 크게 실추되고 위태로워졌다"삼국시대"에는 "조조(曹操)"에 의해, "흉노 선우"는 유명무실하게 되고, "흉노"5부로 재편되어 중국의 실질적인 통제를 받게 되었다

"남 흉노"는 남하하여, 대부분 "중국인"이 되었다"흉노""좌부수(左部帥) 유연(劉淵)"은 중국이 혼란스러운 틈을 타, "산서" 일대에서 "()"을 건국하였다이는 "흉노"가 과거 "한나라"와 형제의 맹약을 맺은 것을 근거로 한 것으로, "유연"은 형인 "한나라" 대신하여, "한나라"를 계승할 것을 천명하였다"흉노의 한나라""서진"을 멸망시키고, "화북 지역"을 초토화하여 지배권을 얻었다.

이후 "흉노"의 일파인 "갈족(羯族)""석륵(石勒)""후조(後趙)"를 건국하자, 국호를 "(: 후조와의 구분을 위해 보통 전조(前趙)라고 부른다)로 고치고, "화북"을 양분하여 서로 물고 물리는 전쟁으로 대립하였다329, "후조"에 의해 "전조"는 멸망하였으며, "후조" 역시 351년에 멸망하였다407, "흉노 철불부(鐵弗部)""혁련발발(赫連勃勃)""산시 성(陝西省)" 일대에서 "()"를 건국하여 "선우"를 자칭하였으나, 431년에 멸망하였다이후 "흉노"는 중국 역사에서 소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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