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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 • 현대사)/인물

1공 : 장택상 (창랑ㆍ1893)ㆍ수도경찰청장ㆍ국무총리(3대)

by 당대 제일 2022. 1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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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택상 (張澤相ㆍ1893~1969ㆍ76세)"은 10차례나 테러를 당하였고, "이승만 정권" 시, "부산정치파동"에 "이범석"과 함께 주동적 역할했다. "장면ㆍ박정희 정권"시, 야당 지도자(대일굴욕외교반대투쟁위원회 위원장ㆍ신민당 고문)였다. "진보당 사건"으로 "조봉암" 등이 "이적행위자ㆍ공산주의자"로 몰리자, "조봉암의 석방ㆍ구명운동"을 폈고, 법정에서 "조봉암"을 변호하기도 했다. 타고난 체력ㆍ운동으로 다져진 몸ㆍ순발력 등으로 9회의 총격ㆍ칼침ㆍ수류탄 투척 테러 위기를 모면하였다. 

 

1. 장택상 (張澤相1893~1969향년 76)

독립운동가(안창호 제자)조선에 손꼽히는 거부집안미군정기 수도경찰청장외무장관(1)국무총리(3)ㆍ해방 정국에서 "조선공산당남로당""좌파 정당좌파정치운동"에 대한 구속탄압을 가하였으나, "여운형조봉암이만규" 등과는 인간적인 친분관계를 유지하였다.

•  출 생 : 조선 경상도 인동군 북삼면 오태동 (현, 경북 구미시 임오동) 태어났던 칠곡군 생가는 이후 방치되다가, 법당이 되었으며, 뒤에 음식점이 되었다.    •  사 망 : 서울 고려병원 (동작동 "국립묘지 국가유공자 묘역" 안장)    •  사 인 : 노환

•  : 창랑(滄浪)      •  아 명 : 장삼욱(張三旭)     •  별 칭 : 난세의 정치인천재적 능변가정치의 곡예사권력의 도화사(道化)기고만장의 기염아(氣焰兒)술수의 화신TK의 대부      •  유행어 : 로맨스는 인생이요, 인생은 로맨스     •  학 력 : 와세다 대학교영국 에든버러 대학교 법학과 중퇴ㆍ국방대 행정학사 1기(1956)

•  : 1- 진주 정씨(사별1889~1908) 2- 진주 류씨(사별?~?류성룡의 후손)  3- 김연식 (1900~1990"국립묘지 장택상 묘소"에 안장)장병민(1째 딸)  - 이유앵 (李柳鶯1905~ 기생 출신서울 동대문에 거주) "의친왕의 첩"이었다가, 다시 "남작 조명구의 첩"이 된 "이유색"의 사촌동생

•  자 녀 : 1째 딸(장병민)사위(채항석일설에는 "김진국"이라고도 한다 "장병민채항석" 부부는 "남로당"에서 활동한 "좌익 운동가로, 1950.04.04"남로당원 색출 기간 중에, "장태식"등과 함께 체포되었으나 곧 풀려났다 이들은 "한국 전쟁" , "북한"으로 갔다.

•  가 족 : : 장승원(1852~1917자헌대부 관찰사)- 풍양 조씨  /  조부 : 장석용(이조판서 1째 형 : 장길상(규장각 직각경일은행 운영 영남지역의 거부 2째 형 : 장직상(선산군수)

•  수 상 : 미군정청 공로표창수교훈장 광화장 저 서 : 대한민국 건국과 나 (장택상 회고록)

•  경 력 : 1910 : 안재홍 도움 상하이러시아(이상설(부친 친구)만남)이갑독일(안창호) →  1919 :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 특파원구미외교위원부 외교위원에 임명 → 1930 : "장길상(1째 형)"이 운영하는 "경일은행" 상무 취임  1938 : "청구구락부 사건"으로 투옥  1946 : "경기도 경찰부장"에 임명됐다가, 다시 "서울 수도경찰청장"으로 전보

1946 : "10월 대구 폭동" 진압  1947 : "31절 기념식" 충돌사건과 관련"장택상""서북청년단"5만원을 하사했다.  1948 : 외무부 장관(1) 취임  1950 : 민의원(2)에 당선국회부의장(2)탄핵재판소 의장에 피선  1952 : 국무총리(3) 취임

장택상

해외에서 "항일 독립운동"에 참여했고, 형제들도 "무장독립군""군자금"을 보내주었다집안은 "조선의 손꼽히는 거부집안"의 하나로, "총독부"에 반하여, "임정의 구미위원부" 등에서 활동했음에도, "영국 에든버러대학"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올 때, "조선 총독"이 마중을 나갔을 정도였다그는 귀국 후에도 비밀리에 "항일운동"을 계속 하였고, 주로 "임시정부미국 구미위원부"쪽 독립 운동가들에게 비밀리에 "독립운동 자금"을 송금해주기도 하였다그는 "조선총독부"에서 각종 사회단체에 참여해달라는 권고를 받았지만, 모두 거절했다그밖에 고학생 "갈돕회(고학생 모임단체)""여자고학생 상조회"에 주기적으로 쌀기탁금을 후원하였다.

1925.06, 큰형 "장길상"에게 돈 300원을 빌렸다가, 갚지 못한 "이수철(李秀喆, 경기도 고양군 벽제면 성석리 114번지 거주)"을 사람을 시켜 잡아다가, 집에 감금한 뒤, 구타했다이는 그대로 6.25일자 "동아일보"에 보도되었다1930.06.12, 두 형인 "장길상장직상"이 설립한 "경일은행 상무"에 임명되었다가,1935년 그만두었다.

1945.08.15, 광복 직후 "경기도 경찰청 경찰부장1관구 경찰청장수도경찰청장" 등으로 활동하였다"조선 공산당원남로당" 탄압을 주도하였으며, 해방정국에서 9차례나 테러를 당하였다1948년 대한민국수립 직후, "외무장관(1)"를 역임하였고, 56"UN총회 대표단"으로 파견되기도 했으며, 1952.05~ 7월 무렵, 피난지인 "부산"에서 "이범석" 등과 함께, "부산정치파동"에 주동적 역할을 수행하고, 1952.05.06.~10.05일까지 "국무총리(3)"를 역임하였다"부통령 후보"로도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이승만"의 장기집권에 반발하여, 1954"자유당"을 탈당하여, "호헌동지회"에 가담하기도 했다그러나 "조봉암"이 끝내 "호헌동지회"에서 배제 당하자, "장택상""호헌동지회"를 탈퇴, "호헌동지회" 중심으로 하는 "반() 이승만 신당""민주당" 결성에도 불참하였다. "419혁명" 이후, "장면 정권""박정희 정권" 기간 중에는 야당 지도자로 활동하였다"자유당"을 재건하여 총재가 되었고,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하며, 1964년 이후 "박정희 정권""한일회담" 반대하여, "윤보선장준하함석헌" 등과 "대일굴욕외교반대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위원장"을 역임하였으며, 1967, "신한당(新韓黨)고문"에 추대되었다또한 "동아일보조선일보"를 비롯한 언론에 칼럼회고록을 내기도 했다.

2. 테러 사건 : 수도경찰청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9회의 테러를 당하였다.

 1946.11.13일, 오전 8:30분경 :  자동차로 "수도경찰청"에 출근 중, "을지로2가 철길" 앞에서 괴청년 2명이 수류탄 2개를 던지고 권총을 발사하였다. 장택상은 자동차에서 뛰어내렸다 차량 운전수 "남씨"는 괴한의 수류탄을 발로 밀어냈으나, 유리창을 뚫은 총격에 경호원 1명이 사망하고 함께 있던 자녀들이 질식하거나, 파편에 맞아 부상당하였다 파편으로 눈과 귀에 부상당한 장택상은 바로 성모병원으로 달려가 응급처치를 받았다.

1948.01.24일, 출근길 :  집 앞에서 괴한 2명의 수류탄 저격을 받았다 그는 현장에서 재빨리 피신하였으나, 경호원 2명과 마을 학생들이 부상을 당했다 범인 중 1명은 체포되었다 이 사건의 범인으로 "박성근(朴聖根, 일명 임화)"라는 25살의 청년이 검거되었는데, "수도경찰청"에서 "노덕술"의 지휘 하에 그를 고문하였으나, 01.29일 오전 3, "고문후유증"으로 "박성근"이 사망했다.

3. 박정희 (5~ 9대 대통령ㆍ1917~1979ㆍ62세)"와의 악연

"금오산 기슭""1명의 왕과 3명의 장군이 나올 명당이 있다"는 풍수설을 듣고, "구미 상모리"를 찾아갔지만, 그곳에는 "박정희"의 생가할머니 묘가 있었다"칠곡""집성촌"이기도 했는데, "양반가의 후손"이라는 자부심을 가졌던 "장택상윤보선" "박정희" 가계와 가난한 가정환경에 대한 열등감을 가진 것을 간파하고, 이를 경멸하였다"박성빈(박정희 부친)박무희(박정희 2째 형)""장승원" 집안의 "머슴소작농"으로 있었으므로, 그는 "박정"를 경멸하고, 얕잡아보면서도, 늘 껄끄럽게 여겼고, "박정희" 역시 "장택상"을 싫어했다.

아버지 "장승원"의 토지소작농이었던 점, "박정희""좌파 전력"을 말하며,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다그러자 "박정희"는 그의 집에 "장병민(1째 딸)채항석(사위)"의 주선으로 "남로당원"들이 은신한 것을 문제 삼았고, "박정희"가 그를 직접 공격한 것은 "영남""야당 정치인"들이 "박정희"에 대한 악감정을 품는 하나의 원인이 되고, "박정희"와의 관계는 끝까지 원만하지 못하였다1964년 이후, "박정희 정권""한일회담" 반대하여, "대일 굴욕외교 반대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원장"을 역임하였다.(윤보선장준하함석헌 동참"박정희"의 등장으로, "영남"지역에서는 "민주공화당"에 대한 지지가 강했으나, 그는 "김영삼신현확" 비롯한 "영남 야당 정치인"들을 후원하며, 유세 활동에 참여하였다"박정희"는 그가 신병 치료차 미국으로 가겠다는 것을 불허하여, 1968년 겨울, 그가 "친필""도미 허용 탄원서""박정희"에게 보냈고, 이에 "박정희"는 수용하였다.

말년에는 같은 "경북 칠곡군" 출신의 "신현확"을 정치적으로 후원하였고, 기타 "영남" 출신 정치인들을 지원하여 "TK의 대부"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한편 1970년부터 "박정희 정부"의 국무회의에서 "장택상"에 대한 포상의견이 나왔지만, 번번이 무산되었다독립 운동가이며, 대한민국의 정부수립에 기여하였으나, "건국훈장" 서훈 대상에서는 제외되었다1970년대부터 추모 사업이 시작되어, "김영삼" 등 야당 정치인들이 참여하였으나, 그는 "박정희"의 정적이자, 개인적으로 껄끄러운 관계였으므로, 그의 "추모 운동"은 순조롭지 못했다.

장승원 (張承遠1852~191765): 조선의 문신장택상의 부친 : 대농토를 소유한 대지주였으며, "박성빈(박정희 부친)"은 한때 "장승원"의 집을 출입했으며, 그 인연으로 해서 "박무희(2째 형)"는 논 5마지기를 빌어 7:3의 비율로 소작하기도 했다 "박상진"이 만든 "광복회"에서 군자금을 요청하였으나 거부하고 밀고하려고 하자, 1917.11.10일 광복회원인 "채기중강필순"에 의해 처단당하였다.

박상진 (朴尙鎭1884~192137): 독립운동가대한광복회 조직 (총사령) : 1910, "양정의숙"을 졸업하면서, "판사 시험"에 합격했지만 "판사 임용"을 거절하고, 1911"만주"지역의 망명자들을 만나러 갔다. "만주"에는 "허겸(허위의 형)이상룡김동삼손일민 김대락" 등이 망명해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영남지역의 유학자 출신으로 해외 독립운동기지 설립을 위해 "만주"로 건너간 인물들이었다.

귀국한 뒤, 해외의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하고, "안둥 삼달양행창춘 상원양행지린"에 연락 거점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대구""상덕태상회(尙德泰商會)"를 설립하였고, 1915년에는 비밀 결사 "조선국권회복단"을 조직해 활동했다 계몽운동가 중심의 이 단체는 곧 "채기중" 등이 결성한 구 의병운동가 중심의 "풍기광복단"과 연합하여 "대한광복회"를 조직했으며, 그는 "광복회의 총사령"을 맡았다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던 중, 협조하지 않는 "장승원(장택상부친칠곡의 부호)"등의 부호들과 친일파를 처단하기도 했으며, 1918년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았으며, "만주"에 있던 "김좌진""박상진"을 구하기 위해, 파옥계획을 세웠으나 시행하지는 못했다 이후 변호사 선임 등을 거부하고, "대구 형무소"에서 처형되었다.

4. 평 가

"반공주의자"이며, "대한민국 건국의 원훈"이라는 평가와 "민주주의자"라는 평가도 있다"조병옥"과 함께 테러를 조장하였다는 비판도 있다성격은 "괄괄하고 직선적"이었는데, 한편으로는 "오만하다"는 평도 들었고, ""을 많이 만들었다"머리 회전이 빠르고, 또 야심이 있는 정치가여서, 한 사람한테 절대적으로 복종할 인물이 아니었다." 시각도 있으며, "오만하고, 괄괄한 성격, 비교적 거만한 편"이라는 평가도 있다.

"감성"이 풍부했던 데다, "만만치 않은 재력가"였고, "담백한 기질명랑 강직한 성격청빈한 기품불굴의 자유혼기지와 해학을 가졌다"는 평가도 있다"박병배(교육자해방정국에 경찰부에서 근무)""가문총명학식날카로운 판단력무서운 행동력을 갖추어, 해방 후의 건국사대한민국 정치사에 수많은 업적과 화제를 남긴 분"이라고 평하였다성격이 괄괄하고 활동적이었으나, "양반가의 자손"이라는 품위 때문에, 어릴 적 체육활동은 다소 뜸하였다.

"김일성(북한 주석)""친일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하였다1960.03월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지도부"04.19"피의 화요일"에 분명히 이승만의 사퇴를 예견하였는데, 04.21"김일성""이승만의 후계자를 언급하며, 반공연맹 의장이던 장택상을 그 후계자"로 내다보았다.

그러나 "장택상"에 대한 "미국의 신뢰"를 의심했다이어 "김일성""이승만"의 후계자들에 대해 전망하면서, 미국이 난처한 입장에 처해 있다고 말했다"이승만"은 연령상 도저히 안 되는 상태인 바, 특히 최근 들어 권위를 엄청나게 훼손당하였다고 말했다"(이승만)를 교체해야 한다. 그러나 충분한 권위와 특색을 지닌 인물이 없다 또 다시 부통령이자, 민주당 최고위원인 가톨릭신자 "장면"도 적합하지 않다 그나마 권위를 누리고 있었던 "조봉암 진보당 당수" 평화적 조국통일이라는 당 강령을 성급하게 공표하는 바람에, 이승만의 명령으로 체포돼 지난해 처형되고 말았다 부르조아 민주당 최고위원인 "조병옥"1960.03.15.일 대선후보였으나, 선거를 며칠 앞두고 급사했다 현재로서는 남조선 정치지도자들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인물은 반공연맹 의장 "장택상"이다 그러나 그는 친일성향을 가지고 있으며, 이 때문에 미국은 그를 신뢰할 수 있는지 망설이고 있다."

5. 일 화

"백자 감식"에 있어서는 첫 손가락에 꼽는 "전문가"이기도 했다"고미술품골동품 수집"이 취미이기도 했던 그는 "고미술품"을 감정하는 실력도 있었다1935.06월에 발행된 "조선고적도보(15)"에는 그의 "도자기 8"이 수록되기도 했다1937.03, "잡지 조광(朝光)"의 인터뷰 기사에서 "선생의 가지신 자기는 몇 점이나 됩니까?"라는 기자의 질문에 "네 한 1,000여 점 됩니다. 그중에 쓸 만한 것은 300여 점밖에 되지 않습니다."고 대답했다1969.07, "폐렴"으로 병원에 입원하였고, 임종직전 혼수상태에서 연설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임종 전에도 "간호사"에게 조크를 던지기도 했다고 한다일제강점기에, 대외활동을 자제했지만, "기생집"에 출입했던 그는 본부인 "김연식" 외에 "이유앵(柳鶯)"이라는 "기생 첩"을 두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에 그를 고문하던 형사가 있었다"수도경찰청장"에 취임한 후, 자신을 고문하던 경찰관들을 부하로 만나게 되었다그들은 보복을 염려하였으나, "장택상"은 보복하지 않고, "그때가 때이니만큼 어쩔 수 없었다.", "직무를 수행하는 열의는 대단했다"고 치하하였다나아가 "자기 직책을 완수한 것은 어느 때나 높이 평가해야 한다.", 1계급을 특진시켜서 경찰관들의 사기를 돋우기도 했다.

6. 관 계

조병옥 (경무부장趙炳玉1894~196066)과의 관계

1919.08,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인쇄업을 하던 "서재필""뉴욕시"에 도착하여, 한국인 유학생들을 모아 사회를 봤고, "조병옥"도 참석하였는데, 이때 처음으로 "조병옥"을 만나게 됐다 한다"조병옥"은 동지였으나, "강원룡"에 의하면, "그는 조병옥과 경쟁관계였다."한다"강원룡"은 수도경찰청장 당시 "장택상""조병옥"의 관계는 좋은 편이 아니었다고 회고하였다.

개인적으로는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다그러나 원래부터 "조병옥"과 사이가 나쁘지는 않았다는 진술도 있다당시 군정청 경찰에 근무하던 "박병배"에 의하면, "원래 창랑 선생과 유석 선생은 인간적으로 볼 때 남이 부러울 정도로 더할 나위 없는 다정한 친구였다. 그러나 두 분의 성격상의 차이를 역이용한 일부 부하들의 아첨은 패권 다툼의 양상을 띠어, 수십 년에 걸친 두 분의 우정을 그대로 두지 않았다." 회상하였다.

"친일파 경찰의 채용""조병옥(경무부장)장택상(수도경찰청장"에 의해 추진되었다"조병옥""장택상""친일경찰 채용" 소신이 드러난 것은 1946.01월에 있었던 "서울시내 8서장 임명"이었는데, "서울시내 8개 경찰서 서장"으로 새로이 임명된 이들은 모두 "전직 일제 경찰관"들이었다"장택상조병옥"은 서로 상대방의 업무능력을 인정하였고, "최능진김규식"등이 "군정청" 경찰 치안을 공격할 때는 서로를 극구 변호하기도 했다미군정 기간 중, "최능진""조병옥"의 친일파 옹호를 규탄했을 때는 공식적으로 "조병옥"을 두둔하며, "최능진"을 비판했다"최능진"은 경찰직을 사퇴한 이후에도 "조병옥"을 비판, 이후 그는 "조병옥"과 함께 "최능진"을 논박했다.

조봉암 (진보당 당수曺奉岩1899~195960) 구명운동

독립운동가공산당 조직 활동(건국준비위원회)제헌국회의원농림부 장관(1)국회부의장(2) 진보당 총재농림부장관 재직 시, 지주에게 예속된 농지들을 농민들에게 분배하는 농지개혁 주관ㆍ"대통령 선거(3)"에 출마하여, 30%라는 지지율을 얻어 파란을 일으키기도 했다1958"상인 양명산"을 통해, "북조선의 정치자금을 건네받았다"는 혐의로, "진보당 사건"에 연루되어 재심결과 사형선고를 받고, 교수형을 당하였고, 당대에도 "사법 살인"이라는 비판이 제기

"조봉암(진보당 당수)""장택상(전 수도경찰청장)"과 이념을 넘어, 오랜 친분관계를 유지하였다1958, "조봉암"등이 "간첩 혐의"로 피소되자, 당시 "조병옥민주당""조봉암의 이적행위" 철저 수사를 주장하며 규탄했지만, 그는 "조봉암이 간첩일리 없다", 탄원서를 제출하고, 탄원 서명을 받기도 했다그의 "조봉암 구명운동"에 이어, "윤치영""조봉암"을 옹호탄원변호에 동참하였다공판기간 중, "조봉암"을 대신하여, "변호사 선임"을 알아봐주기도 했고, "조봉암"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조봉암"을 대신하여, 변론항소를 작성하여, "서울고등법원대법원"에 발송하기도 했다.

"조호정(조봉암 1째 딸)""장택상"을 찾아갔다통 크고, 정 많은 "장택상""조호정"의 갸륵한 효심을 외면할 수 없어, "홍진기(법무장관이병철 사돈)"을 집무실로 찾아가, "조봉암의 구명"을 호소했다"홍진기" "지금은 적절한 시기가 아니니, 내년 봄 대통령 선거가 끝나면, 이 박사의 82회 생신일이 됩니다. 그러나 이 일에 대해서는 비밀에 부쳐 주십시오."라고 답했다그러나 "장택상"은 그 비밀을 지키지 못하고, 여기저기 다 발설해 버리는 실수를 저질렀다소문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그 약속은 무산되고 말았다

"조봉암"의 정치활동을 변호하는 "국회 질의"를 하였고, "조봉암"의 구명운동을 직접 추진하기도 하였다"조봉암""옥중 성명서"를 대신 작성발표하기도 하였다"조봉암"의 인물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며, 광복 후 "경찰청장"으로 "폭력적 좌익세력" 검거에 앞장섰던 "장택상""조봉암 구명운동"을 하였으나 실패하였고, "조봉암"1959.07.31.일 사형 당했다"조봉암"의 사형 소식을 접한 "장택상""사법당국의 부당한 처사"에 분개하였다.

노덕술 (盧德述마쓰우라 히로1899~196869)

일제강점기 고등계 형사악질 친일경찰한국 수도경찰청 간부ㆍ1948.01.24, "장택상(수도경찰청장)"출근길 집 앞에서 괴한 2명의 수류탄 저격을 받았다그는 현장에서 재빨리 피신하였으나 경호원 2명과 마을 학생들이 부상을 당했다범인 중 1명은 체포되었다이 사건의 범인으로 "박성근(朴聖根, 일명 임화)"라는 25살의 청년이 검거되었는데, "수도경찰청"에서 "노덕술"의 지휘 하에 그를 고문하였으나, 01.29일 오전 3, "고문후유증"으로 "박성근"이 사망했다뒤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노덕술"은 직접 곤봉을 들어, "박성근"의 머리를 무수히 난타했으며, 하인 "김재곤박사일" 등을 시켜, 실신지경에 빠진 "박성근"3시간에 걸쳐 물고문하게 했다고 한다.

조직의 우두머리를 죽이려 한 자에 대한 무한한 적개심에서 고문을 행했지만, 정작 피의자가 죽자 "노덕술" 등은 무척 당황했다이들은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수도경찰청 2"에 있던 "취조실" 창문을 열어젖히고, "저놈 잡아라!"라고 소리치며 뛰어나가, "박성근"이 감시 소홀을 틈타, 도주한 것처럼 꾸미고는 사체를 "한강"으로 가져가 음구멍에 유기하였다후에 "노덕술"은 이 사건의 전말을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에게 보고했는데, "동아일보(1948.08. 27일자) "에 의하면, "장택상"은 오히려 "노덕술" 이하 이 사건을 담당한 14명에게 "그 직무를 충실하게 이행한 공로를 찬양하여, 1949.02.05일 최고 2만원~ 5천원까지 특별상여금을 주었다"고 한다.

저격범이 사망할 무렵, "경향신문기자"가 피투성이가 된 채, "강원룡"을 찾아갔다기자는 "장택상 저격범 도주" 관계기사를 쓰면서, "장택상 저격범 도주"라고 표현했는데, 고의로 "총감"이라는 직책을 삭제했다는 이유로 심한 구타를 당하였다기자는 "저격범이 도주한 것이 아니라, 고문 도중 죽고 말았으며, 자신이 항의의 뜻으로 일부러 총감이라는 직책을 빼버렸다"고 진술했다.

김구 (임시정부 주석1876~194973)임시정부 지지철회

1945.11, "임시정부임정 요인"들이 귀국할 때, "장택상"은 전폭적 지지환영을 하여, "김성수송진우조병옥김준연백관수"등과 함께, "임시정부 주석 김구"를 방문하였다. 오후 3시에 "경교장"에 도착하자, 경비원 5~ 6명에게 제지당하였다"83 경비원"들은 문밖에서 기다리라 하였으나, 감감무소식이었고, "장택상"과 일행은 3시간 동안 "영하 15"의 혹한에서 "경교장 정문 밖"에서 기다려야 했다고 한다"임시정부" 인사들의 고자세에 반발한 "장택상""김구"를 이후, 부정적으로 보게 됐다또한 "우익 청년단원"들이 "미군정 경찰청"에 감금당했을 때는 "김구, 김성수, 조소앙, 신익희" 등으로부터 "석방하라"는 전화를 계속 받으며, 장시간 전화통화에 시달림당하기도 했다.

1945.12.02, "장택상""환국지사후원회""국민대회준비회 대표 송진우"와 함께 임정요인들을 예방하면서, "후원회 기금 900만원"을 전달하였다12.29, "반탁운동"의 방향에 대한 "경교장 모임"에 참석했다"경교장 회의"에서 "송진우""미군정에 대항하면, 무력 충돌이 발생하거나, 정권이 돌아가지 않을 것을 경고하고, 무력 충돌은 자제해줄 것"을 촉구했다12.30일 새벽2, "송진우"와 함께 돌아가던 길에 같이 밤을 보내자는 "송진우"의 요청을 거절하고 "수표동"의 자택으로 되돌아갔다새벽 6, "송진우""원서동 자택"에서 "한현우유근배"5명의 청년에게 피살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 원서동""송진우 자택"으로 찾아갔다"송진우"의 빈소에서 "송진우의 원수를 갚을 것"을 다짐했는데, 이후 그는 "임시정부" 측을 부정적으로 보게 되었고, 이후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두고, "미군정""임시정부"가 충돌하자, "조병옥"과 함께 양측 사이에서 조절중재하였다.

1946.01, "이승만김구" 찾아가, "군정청" 내에서의 입지약화를 이유로, "과격한 반탁 행위"자제해줄 것을 촉구하였다. "하지 중장(군정청 사령장관)""이승만김구"를 꺼리고, 상대적으로 온건한 "김규식안재홍김성수"를 신뢰하게 되었다"군정청"에 근무하던 그는 "이승만"의 열렬한 지지자였지만, "이승만김구"로부터 진의를 의심받기도 한다.

1947.12.02, "장덕수"가 암살되자, "장택상""김구"를 체포하려 했다장택상에 의하면, "장덕수 암살 사건이 일어났을 때의 일이다. 수사가 진전됨에 따라 암살의 배후에 김구 씨가 직접 관련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백범의 지지파 내지는 임정측이 관련된 혐의가 있다는 것이 포착되었다. 그러므로 나는 경교장에 대한 수색 영장을 내려고 하였다."고 했다"장택상"은 여차하면 "김구의 소환"까지도 검토하고 있었다이를 눈치 챈 "하지 중장"이 이를 저지시키고 말았다장택상에 의하면, "이 사건을 군정재판에 넘기고 말아, 우리(군정청 경찰)는 끝내 손을 못 대고 말았다. 평소 모든 사건을 매섭게 처리하는 나의 성질을 잘 알고 있던 하지 중장은 혹 김구 씨에게 무슨 화가 가지 않을까 염려가 된 나머지 이와 같은 조처를 취하였던 것이다."

송진우 (선배오랜 친구宋鎭禹1887~194558) 암살 관련

"강원룡"의 회고에 의하면, "송진우"의 암살 직후"나중에 장택상이 술자리에서 미군정 인사에게 "송진우 암살사건 배후에 김구가 있었다교장에서 모인 날 싸워서 그렇게 됐다"는 식으로 얘기했다는 겁니다."고 회고했다.(로빈슨 저 "미국의 배반"참조"장택상" 외에 "조병옥""송진우"의 암살 배후로 "김구"를 지목한 바 있다그러나 "장택상""미군정청" 간부에게 "송진우 암살배후가 김구이다."고 하기 이전에, "미군정""송진우"의 암살 배후로 "김구"를 의심하고 있었다"송진우 암살사건"이 전해지자, "하지 중장"은 암살 배후로 "김구"를 지목하고, 1946.01.01"김구" "미군정청"으로 소환하여, 경고를 주었다.

여운형 (呂運亨1886~194761): 독립운동가언론인(중앙일보사 사장)전도사교사

비밀지하 독립운동 단체 "건국동맹농민동맹" 결성   통일 임시정부수립을 위해 "좌우 합작 운동" 전개 (김규식안재홍 등)   고려공산당 창립(이동휘)건국준비위원회(안재홍, 헌영 )조선인민공화국 결성조선인민당 창당    근로인민당 창당좌파 단체의 주도권을 놓고 박헌영 등과 경합김원봉을 "좌파 진영으로 영입    1946.03.07"소련 군정청 사령관 스티코프"가 짠 초안에서 여운형은 향후 수립될 정부의 "수상 후보감"으로 목되기도 했다.

1947.05월 말, "조병옥"과 함께 "우익 진영""미소공위 파탄"을 위해, 관련자 암살을 계획 중이며, 첫 대상자로 꼽힌 인물은 "여운형김규식허헌"이었다고 보고하였다장택상은 또한 우익 진영에서 200여 종의 "권총"을 보유하고 있다고 주장했다"반탁 운동"에 비협조적이었던 점과 "백의사의 암살계획"을 폭로하게 되면서, 그는 "우익 진영"으로부터도 부정적인 시각이 나타나게 된다.

1947년 여름, "여운형"에 대한 테러 소식을 접하고, "여운형"의 집에 찾아가 전하였다", 나는 선생의 신상이 걱정되어 그럽니다. 요즈음 입수한 소식에 의하면 테러하겠다는 패가 어찌나 많은지(중략). 오늘이라도 선생이 들어오시면, 한동안 시골에라도 은거하라고 전하십시오." 그러나 "여운형"은 피하지 않았고, "한지근" "백의사 단원"이 쏜 총에 맞고 죽었다장택상은 "여운형"의 시신이 안치된 "서울대 병원"에 조문을 갔고, 그때 "여남구(여운형 큰딸)"칼날 같은 소리를 질렀다. "우리 아버지를 죽인 자가 무엇 때문에 여기까지 나타났는가? 어서 썩 나가라.장택상은 아무 말 없이 돌아서 나왔다.

김규식 (金奎植1881~195069): 통일운동가교육자언더우드 목사의 비서

1946"미군정청""하지 중장"으로부터 앞으로 수립될 정부 수반은 "미 국무성이 김규식 박사를 지지하고 있으니, 이승만 박사에게서 손을 떼라"는 압력을 받았다"하지"의 압력을 받자, "미군정청"의 고용인이 아니라, 정부가 수립될 터전을 닦는 일을 맡는다며 사령관이 어긋나는 조건을 제시한다면, 사퇴하겠다고 응수하였다그는 "조병옥"과 함께, "김규식"을 지지하는 "군정청장 하지 중장"을 설득하였다이후 "장택상""이승만""단정 수립"을 적극 지지하였다.

1946.01, "이승만김구" 찾아가, "군정청" 내에서의 입지약화를 이유로, "과격한 반탁 행위"자제해줄 것을 촉구하였고, "하지 중장(군정청 사령장관)""이승만김구"를 꺼리고, 상대적으로 온건한 "김규식안재홍김성수"를 신뢰하게 되었다"군정청"에 근무하던 그는 "이승만"의 열렬한 지지자였지만, "이승만김구"로부터 진의를 의심받기도 한다"하지 중장(군정청 사령장관)""장택상조병옥"에게 "김규식"을 도울 것을 요구했지만, 그들은 거절했다특히 "장택상"은 대놓고 거절하였는데, 이에 "김규식""장택상"에게 악감정을 품게 된다.

1946.06월 경, "하지 장군" "통역관 이묘묵"을 통해, 전화를 걸어 "하지 중장"이 할 얘기가 있으니 곧 들어오라고 하였고, "사령관 실"에 들어서니, "하지"는 파이프를 입에 물고 있었으며, "장택상" 앉자, "김규식"을 지지하라고 강요했다"중요한 문제가 있어 오늘 장 총감을 불렀소. 다름 아니라 앞의 정책을 의논하자는 것이오 지금까지 미 국무성에서는 이승만 박사를 지지해 왔는데, 이제부터는 좌우 합작을 위하여 중립적인 김규식 박사를 지지하기로 바꾸었습니다 장 총감도 앞으로는 김규식 박사를 지지하는 방향으로 일을 해주기 바라오."

그러자 "장택상""이러한 그의 말은 나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이었다."라며, "지체 높은 사령관의 말을 제가 감히 어떻게 거역하겠습니까? 그리고 지금 그 말은 오히려 늦은 감이 있지만 참 잘하셨습니다. 잘 알았소."라고 비꼬는 투로 말하였다그리고는 안주머니에서 봉투 1장을 내어, "하지 중장"에게 주었다"하지""이게 뭐요?"하고 의아스럽게 물었다그러자 "장택상""펴 보시면 알 것 아닙니까?" 하고, 퉁명스럽게 말했다그 봉투 속에 있는 것이 "사표"임을 알자, "하지"의 얼굴이 굳어지더니 언성을 높여, "당신이나 조부장이나 다 나쁜 사람이오"하면서 심한 욕설까지 했다장택상이 "하지"의 방을 나와서, "조병옥"을 만나 보았더니, 그도 "하지"의 그 같은 제의를 받고 사표를 냈다는 것이다이러한 일이 있고 난 뒤부터, "하지"2번 다시 "김규식 박사를 지지하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군정""좌우합작 정책"에 따라, 두드러지게 된 사람이 "김규식"이었다그러나 "김규식"은 당시 치안의 책임을 지고 있던 "조병옥""장택상"이 여전히 "이승만"을 지지하는 데 대하여, 몹시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장택상""김규식"을 만났다"김규식"은 장택상에게 "장 총감은 이제 사표를 내는 것이 어떻겠소? 그렇지 않아도 곧 갈리게 될 터인데?" 라고 말하였다이 말을 듣고, "장택상""하지 중장""김규식"에게 무슨 말을 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하지 중장"을 만났고, "하지 중장"에게 이러한 이야기를 하였더니, 하지는 "당신과 조 부장은 우리 국무성에서 절대 신임하고 있는 사람인데, 어찌 일개 사령관인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겠소?"라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장택상은 "우리가 김규식 박사를 지지하지 않는 데에 적이 불만을 가지고 있던 하지 중장이었다. 그러나 우리를 다른 인물로 갈아치운다면, 치안을 유지하기가 어려우리라는 사실을 하지는 잘 알고 있었다."고 했다한편 "김규식""장택상"더러 사퇴하라는 압력을 가했지만, "장택상"은 묵살해 버렸다.

안재홍이상설(부친 장승원 친구)이갑안창호

1910년 안재홍 도움 상하이러시아(이상설(부친 친구)만남)독일(안창호)    안재홍(安在鴻1891~196574): 독립운동가통일운동가(중도파,공산주의)정치가언론인     이상설(李相卨1871~191746): 독립운동가만국평화회의 특사(1907)해외 독립운동 기지 건설     이 갑(李 甲1877~191740): 대한제국 육군장교항일무관독립운동가     안창호(安昌浩1878~1938ㆍ60): 독립운동가교육자정치가개혁가계몽운동가

윤치영이기붕 : "이승만"의 다른 측근인 "윤치영이기붕" 등과 사이가 나빴다.

윤치영(尹致暎1899~199697): 승만 비서실장내무부 장관(1)     이기붕(李起鵬1896~196064): 이승만 비서국방부 장관서울특별시 시장국회의장

장면 (張勉다마오카 쓰토무1899~196667)

국무총리(2, 7)부통령(4)외교관(주미대사(1)     한때 미국에서는 이승만을 강제퇴진 시킨 뒤, 그를 한국의 통치자로 세울 것을 계획하기도 했다1952, "파리 UN총회(6)" 귀국 직후, 정가에서 "장면을 대통령으로 추대한다내각책임제로 바꾸어서 이승만을 실권 없는 대통령으로 만든 후 장면을 추대한다."는 등의 소문이 돌자, 불쾌해한 그는 "장면도 하는데, 나라고 못할게 뭐야?", 불쾌함을 토로했다고 한다"장택상""장면이 대통령 자리에 뜻을 두고 있었다."고 판단했다.

"나는 장면 총리와 파리에서 한 호텔에 있으면서도 좀 이상스러운 눈치는 보았었지만, 그가 대통령을 꿈꾸고 있는 줄은 전연 눈치 채지 못하였다. 장면 씨가 총리를 퇴직한 후에는 의당 있을 수도 있는 일이겠지만, 현직으로 있으면서 자기 상사의 앉은 자리를 파헤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고, 더구나 일국의 재상으로서 있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있어서도 안 될 일이었기 때문이었다."고 하였다.

이만규 (독립운동가북조선 국문학자배화여자 중 교장여운형 친구, 사돈조봉암 친구)

"이만규"과도 개인적으로 친분관계가 있었다.

성유경 ("성혜림(월북인사김정일의 2번째 부인)성혜랑성일기" 남매의 아버지)

"성유경"과 먼 친척 간이었는데, 친척관계인 인연으로, "성일기 남매""서울 수표동"에 있던 "장택상" 집에 놀러가기도 했다"장병민(장택상의 큰딸)"의 남편 "채항석""조선공산당원"이기도 했다. "한국전쟁" 중에 월북했다.

이형근 (李亨根1920~200278)

군인(육군 대장)국방경비대 참령대한민국 국군 창설의 주역 중 한 사람외교관ㆍ이형근과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조영갑"에 의하면, "이형근"은 회의에서 가끔 그를 만났는데, 어떤 때는 정말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은 험악한 사태로까지 번지곤 했다고 회고하였다.

이범석 (李範奭1900~197272): 군인국무총리(1)국방부장관내무부장관

1952"부산정치 파동" 때는 "이범석"과 충성경쟁을 벌였다1956, "4대 부통령 선거"에서는 "이범석"을 낙마시키려는 "이승만"의 의도를 읽고, "이범석"의 낙선을 지원하다가, 뒤에 "이범석"으로부터 고소를 당하기도 했다"이범석"과는 해방 정국에서, "우익 활동좌파세력 억압" 등으로 서로 연락협력하였으며, 1952년의 "부산정치 파동" 당시에는 "내무부장관국무총리"로 협력하며, "내각제 개헌 저지"를 이끌어냈다.

그러나 "부산정치 파동" 이후, 그는 "족청"의 세력이 강대해져 가는 것과, "자유당" 내 족청계의 간부직 잠식을 경계한 "이승만"의 의중을 파악, 1956년의 "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 부통령 후보자"로 입후보한 "이범석"을 낙마시켰다"경찰 인맥총리의 직위"를 이용, "경찰 병력인력"을 동원해, "이범석""홍보물팜플렛"을 수거하거나, "이범석"의 선거 홍보를 방해했다"장택상"의 선거 개입에 화가 난 "이범석"은 선거 직후, "장택상""김태선(서울시장)"을 고소했다.

그러나 사법 당국은 "장택상"의 손을 들어주었고, "족청"에서는 그가 1953년 겨울, "일제 강점기" 당시 "경성 부윤(서울특별시장)"을 지낸 "고시 진""부산항"에서 비밀리에 만난 것을 빌미로 그가 친일파라는 설을 유포시켜, "총리직"에서 낙마시켰고, 사건 이후, "이승만""족청 해산"까지 결심하게 된다그러나 1958년 그는 "이범석"과 다시 화해, 협력하였으며, "공화당"이라는 "친여성향"의 신당 창당을 함께 준비하였으나, "대통령 후보자" 문제를 놓고 실패했다"1공화국" 붕괴 이후에도, 함께 "야당 활동"을 함께하기도 했다"김준연"에 의하면, 그의 형인 "장직상""반민특위"에 기소 당했을 때, "장직상"의 석방을 탄원한 사람 중의 1명이 "이범석"이라고 한다.

김대중 (15대 대통령1924~2009ㆍ85세): 1956년 초, "김대중""개인 대변인"으로 임명

김영삼 (14대 대통령1927~2015ㆍ88세)

1951.10, "국회부의장 장택상""비서관"을 역임했고, 장택상이 "국무총리" 되었을 때는 "국무총리실 사담당비서관"을 지냈는데, "장택상""김영삼" 정치적 후견인으로, 그를 정계에 데뷔시켰으나, "김영삼"은 뒤에 "민주당 구파" 건너갔다대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인 "김영삼""서울 명동 시공관"에서 있은 "정부수립기념 웅변대회"에 참가하여 2등을 차지, "외무부 장관상"을 수상했는데, 당시 "외무부 장관""장택상"이었다.

"김영삼"에게는 "장택상"이 처음 직접 대하는 거물 정치인이었고, "장택상"은 곱상하고, 총명한 청년을 마음에 두게 되었다가, "민의원(2) 선거" , "김영삼"과 가까워지게 되었다"민의원(2) 선거"에 출마할 결심을 한 그는 "서울대 문리대 교정"으로 지프차를 보내, "김영삼"학생에게 선거 도움을 요청해 왔다"김영삼""서울대" 동료 20여 명과 함께, "경북 칠곡"으로 내려가, 이때부터 40여 일간을 "장택상" 침식을 함께 하며, 찬조연설을 하는 등 "장택상"의 당선을 위해 노력하였다"625전쟁" , "김영삼"이 학도병으로 "국군 정훈 공보국"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국회부의장 장택상" "국방부"에 전화를 걸어 "김영삼"을 자신에게 보내라고 요청한다"김영삼""국군 정훈공보국"에서 방송에 몰두하고 있을 때, "국회부의장 장택상"으로부터, "국회"에서 일을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았으나, "군에서 대북방송의 중책을 맡고 있음"을 들어, 거절하였다.

그러나 "장택상""이선근 국장"에게 전화로 부탁하였다"국방부" 측에서는 "장택상"에게 당초 곤란하다는 반응을 보였으나, 나중에 "김영삼"에게 "어느 곳에서 일하든, 나라를 위한 일에는 장소가 문제될 것이 없다"면서 ,"장택상 부의장의 일을 도우라"고 하였다1951.10, "장택상""김영삼""국회부의장 인사담당비서관"으로 채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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