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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 • 현대사)/인물

1공 : 김준연 (낭산ㆍ1895)ㆍ조선공산당 ML파 당수ㆍ법무부 장관

by 당대 제일 2022. 1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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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연 (金俊淵ㆍ1895~1971ㆍ76세)"은 "신간회" 창립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고, "흥업구락부사건ㆍ조선어 학회 사건" 등을 주동하여 국내에서는 가장 격렬한 항일투쟁을 벌였고, 8년의 투옥 생활ㆍ9년 동안의 연금생활을 하였다. 일제 강점기, "김창숙"과 함께, 항일 세력의 양대 산맥이었으며, 일제가 가장 경계하고 감시하는 "0순위 인물"이었고, 국민들로부터 인기ㆍ신망을 한 몸에 받는 인물이며, 국내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인물이었다. 하지만, 이후 "반민법 처리에 소극적인 입장을 보였다"는 비판도 받고 있다.

 

1. 김준연 (金俊淵1895~1971향년 76)

일제시기 언론인독립 운동가조선공산당 ML파 당수5 국회의원(13456)법무부 장관ㆍ조선일보 기자(1925~1928)동아일보(19283차 공산당사건(ML당사건) 관련투옥)ㆍ한국 최초의 "해외 특파원(조선일보 모스크바 특파원)ㆍ"독일 베를린 대학"을 우등으로 졸업하고, 귀국 후에는 "조선공산당 결성" 운동에 참여ㆍ해방 후, "우익"으로 전향하여, 1945.09"한민당 창당"에 가담, 1948년 단독정부수립에 지지ㆍ "516 군사정변" 이후, 고령에도 불구하고, 7차에 걸쳐, "군사정권 세력"을 향해, 폭탄연설을 하여 "군사정권"을 붕괴 직전까지 몰아붙이기도 하였다.

•  출 생 : 전라 영암군 영암면 교동리      •  사 망 : 서울 성동구 금호동 자택     

•  : 낭산(朗山)    •  학 력 : 1910 : 영암보통학교 1914 : 한성고보 경성고보(전교 6등 졸업ㆍ경기고 전신) 1917~1921 : 동경 제국대학 법학부 독법과 법학사교육학 석사 → 1922~1924 : 독일 베를린 대학원 "정치법률학"법학석사 → 영국 런던 대학교 대학원 경제학 석사

•  저 서 : 나의 소전(1954)나의 길(1966)나의 편력(1969)독립노선(1947)

•  친 구 : 송진우조봉암(공산주의 운동을 하던 사상적 동지)   /   "일본" 유학 시 : 김성수송진우김도연김상덕신익희안재홍여운홍윤치영   /   경성고보 동창 - 이긍종민태원   /  현대평론 : 홍명희긍종안재홍이관용이순탁백남운

•  경 력 :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한국민주당 대표최고위원민주국민당 대표최고위원호헌동지회ㆍ임고문민주당 상임고문통일당 전임고문자유민주당 특임위원신민당 고문

김준연

1925년부터 2년간 "조선일보 기자주 러시아 특파원" 등으로 활동했다"한민당 부당수 겸 선전부장"으로 있으면서, "제헌국회 의원헌법기초위원"이 되어, 직접 "대한민국의 헌법"을 작성했고, "헌법과 정부조직법 기초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이승만 대통령"을 도와,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힘썼다"민주국민당"1954"호헌동지회"에 참여하였으며, "민주당"에 참여하였으나, "친여 인물"로 분류되어 비판을 받던 중 탈당하여, "자유민주당"을 창당 조직하기도 했다1961.05월과 1963"5대 대통령" 선거 당시, "박정희"의 사상 경력에 의혹을 제기하여,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2. 연 보

1914 : "일본"으로 유학일본 오카야마(岡山) 6 고등학교로 편입학 김성수송진우김도연김상덕신익희안재홍여운홍윤치영과 조우 1919 : "28독립선언"에 주동적으로 참가조선기독교청년회(朝鮮基督敎靑年會) 부회장 11, "여운형"의 도일(渡日) , 환영회 조직 1925 : 조선일보사 기자조선일보 논설위원 해외 특파원(조선일보 모스크바 특파원)으로 "소련" 시찰

1927 : "신간회"의 발기인보성전문학교 강사"조선공산당" 재건운동에 관여당수  1928 : "조선일보" 사퇴(조선총독부 탄압)동아일보사(김성수 배려)편집국장  "3차공산당사건(세칭 ML당사건)"에 관련7년간 투옥

1934 : 동아일보 주필   1936 : "손기정(孫基禎)의 일장기 말살사건"으로 사임ㆍ광복 때까지 "경기도 전곡"에서 "해동농장(海東農場김성수 개인 농장)" 관리 → 1945 : "송진우(宋鎭禹)장택상" 등과 "국민대회 준비회" 조직 → "한국민주당" 창당 참여"임시정부 봉대위원회" 조직"임시정부 귀국 환영회" 주관ㆍ"서울특별시장 고문관"에 임명ㆍ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위원

1946 : 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탁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 부위원장  "한민당 내 신탁통치 반대론자"의 한사람"송진우장덕수" 갈등  민주의원(民主議院)민주의원한국민주당 상무집행위원에 선출  남조선과도입법위원회 의원김규식(의장)과 갈등  (이유 : 김규식의 합작운동 추진미소공동위원회 개최 반대)

1947 : 반탁 투쟁회 지도위원(경교장 12, "김성수""한민당 당수""한민당 부당수"로 선임  1948 : 05.10, "제헌국회의원 총선거"에서 고향인 "영암"에서 "대한민국 초대 국회의원"에 당선ㆍ "헌법기초위원회 위원" 선임반민특위 조사위원  1949 : "한민당신익희지청천" "대한국민당 탈당파"가 연합한 "민주국민당" 참여

1950 : 법무부 장관  1954 : "호헌동지회" 참여  1955 : 통합 야당 "민주당 상무위원대표위원(민주당 구파)UN 한국대표 동아일보사 중역  1957 : "이승만" 지지 "민주당"에서 제명 "통일당" 조직통일당 위원장

1963 : "통일당자유민주당"이 통합, "자유민주당" 출범자유민주당 대표최고위원  1963 : "516 군사정변" 이후, "박정희 군사정권" 퇴진운동ㆍ"5대 대통령 선거" 유세기간 중, "박정희의 남로당 경력여순사건 관련 경력"을 들어, "박정희 사상의 건강성민주성"을 의심"박정희"의 사상 검증 요구

1964 : "박정희의 한일회담" 협상 반대 운동에 참여 (윤보선함석헌장택상이범석박순천장준하 등)→ 1967 : "민중당 총재""대통령 후보"에 출마낙선 정계 은퇴 → 1971 : "신민당" 입당

3. 논 란

① "임시정부" 지지 철회 원인

1945년 "8ㆍ15" 직후, "건준 세력(국내파)ㆍ임정파(해외파)"가 대립하고 있을 때, "임정파(해외파)"를 적극 지지, "건준 세력(국내파)"와의 투쟁에서 그 선봉에 섰다. 그러나 이렇게 "임정파"에 적극 접근했던 그가 후에 "임정파"를 반대하는 선봉에 서게 된 데에는 "임정"의 까다로운 조건 때문이었다. 당시 "중국"에서 돌아온 "임정"에서는 앞으로 수립될 "통일 정부요인의 자격 규정"으로서 "대통령은 30년 이상ㆍ국무총리는 20년 이상ㆍ장관은 10년 이상" 독립운동을 유일한 천직으로 하여, 계속 투쟁한 인사에 한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는 "임정"측의 이러한 주장에 "너무 터무니없는 주장"이라고 공개적으로 반박하고 나섰다. "대통령ㆍ국무총리"는 그래도 좋겠지만, "장관"까지 그런 규정을 둔다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이러한 규정대로 한다면, 자기가 속해 있는 "한민당"은 "정부 요직"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인사가 거의 없다고 생각한 때문이었다. 이후 "임정"측은 "김성수" 등을 "임정 국무위원(장관급)"으로 입각시키는 등의 조치를 취하지만, 그는 "임정"을 부정적으로 보게 된다. 이런 이유로 해서, 그는 "임정"을 반대하는 선봉에 섰고, "임정 요인"이 일부 중심이 된 "좌우 합작ㆍ남북협상"을 신랄하게 비난하게 된다.

② "김구ㆍ김규식" 비난과 공방전

그는 당초의 "임시정부 지지"를 철회하고, 1946년 이후부터 "임시정부 세력을 건국 방해 세력으로 규정"했다. 그는 "김구"를 정점으로 하는 "남북협상파"ㆍ"김규식"을 정점으로 하는 "좌우합작파"를 모두 "공산주의 노선과 비슷할 뿐 아니라, 정부 수립에 크나큰 방해인물들"로 단정했다. 그래서 (남북협상 당시) "공산당이 김구에게 정치자금을 조달한다는 설"이 있자, 곧 "동아일보" 지상을 통해, 규탄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며칠 후, "한민당"도 당의 이름으로, 같은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하여, "김구ㆍ김규식"을 신랄히 비난했다. 너무나 신랄하고, 공격적인 이 성명은 곧 "한국 정계"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김준연ㆍ한민당"의 성명을 보고, 누구보다도 치를 떤 것은 "한독당의 김학규(金學奎)"였다. "각주 선생님, 이걸 좀 보십시오. 한민당의 김준연이란 자가 우리를 아주 공산당으로 몰아세웠습니다. 세상에 이런 죽일 놈이 있습니까." "김학규"에게서 신문을 받아든 "김구"는 돋보기로 "김준연의 성명"을 읽었다. "음, 내 머지않아 이런 성명이 나올 줄 알았지. 나보다 김규식 박사가 더 안됐군!" 극도로 흥분한 "김학규"를 진정시키는 "김구"의 눈에도 분노와 울분이 서려 있었다. 조용히 눈을 감고 앉아 있던 "김구"는 책상 위에 놓인 붓을 들었다. "김구"는 말없이 이런 글귀를 써내려갔다. "小人閑居 爲不善 (소인한거 위불선) (소인은 편안할 때엔 좋은 생각은 커녕 못된 짓만 생각한다.)

"김구ㆍ김규식"을 위시한 "남북협상파"를 정면으로 공격한 "김준연ㆍ한민당"의 폭탄 성명은 "정부 수립파"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자신들을 "공산당"으로 몰고 간 일로, "김준연ㆍ한민당"을 극도로 증오하게 된 "김학규"는 나중에 "김준연ㆍ윤보선"이 "박정희"에게 사상 검증 공세를 할 때, "박정희"를 공개적으로 지지하게 된다.

4. "박정희" 사상 검증 요구ㆍ군사정권 퇴진 운동

"5ㆍ16 군사정변" 이후, 그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7차에 걸쳐, "군사정권 세력"을 향해, 폭탄연설을 하여 "군사정권"을 붕괴 직전까지 몰아붙이기도 하였다.

① 1961년, "5ㆍ16 군사정변" 이후

그의 발언이 나온 뒤 정계는 술렁였고, "박정희의 사상"을 의심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그는 1961.05.26일자, 미국 "타임 지"의 "박정희 프로필"을 인용하여 주장했다. "박정희 소장은 전에 공인된 공산주의자였다. 그는 군 반란을 조직하는 데 협력했다.  그래서 그는 이승만의 장교들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전향하여 반란군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고 사형을 면제받았다. 그는 지금 분명히 강력한 반공주의자이다." 이에 대하여, "박정희"는 "허무맹랑한 일이어서 해명할 필요조차 없으며, 법이 가려낼 것"이라고 응수했다.

1963.03.16일, "박정희"가 "군정연장"을 선언하는 "3ㆍ16 선언"을 발표하고, 이를 거두지 않자, 03.19일 "김준연ㆍ윤보선ㆍ김도연ㆍ장택상ㆍ이범석" 등은 "박정희"에게 "3ㆍ16 성명"의 저의를 추궁하였다. 04.03일, "박정희가 관여하지 않는 과도 정부를 수립할 것"을 제의하였다.

1963.05월, 공개적으로 "박정희 의장에게 충고한다."는 제목의 공개서한을 "동아일보" 등 언론에 발표했다. "혁명 정부는 잡념을 버리고, 8ㆍ15까지 정권을 민간인에게 이양하고 출마하지 마시오.  박의장이나 김종필 씨 같은 정도의 지식을 가진 자들은 수십만 명이나 있다.  자기가 잘났다고 생각하지 말고, 국민을 두려워할 줄 아는 겸손한 태도를 가져라.  7월 8일 경,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를 동시 선거하여, 8월 15일에 민정이양을 할 수 없는가?" "민주공화당"에서는 "그를 고소해야 된다."고 분노하였다.

② 1963년 초, "제5대 대통령 선거"시

1963년 초,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대통령 후보" 간의 갈등이 심하여 입장표명을 하지 않다가 "윤보선"으로 대선후보가 확정되자, 그는 "윤보선"을 지지하여, 지원유세를 다녔다. "제5대 대통령 선거" 유세기간 중, "윤보선" 외에도 "김준연" 역시, "박정희의 남로당 경력ㆍ여순사건 관련 경력"을 들어, "박정희 사상의 건강성ㆍ민주성"을 의심하였다.

1963년 여름, "그는 박정희가 공산주의자는 아니냐?"며, 공개적으로 의혹을 제기하여 파문을 던졌다. 속히 "윤치영" 등이 "박정희의 전향은 확실하며, 내가 내무장관 때 사상을 보증했다"고 했지만, 그가 다시 "박정희의 사상 의혹"을 제기하면서, 논란은 확산되었다. 그는 "박정희"에게 사상 검증을 하자고 하였다. 1963.09.28일, "윤보선"의 지지 유세를 하던 "김사만(민주당 의원)"은 "박정희는 여순반란사건에 관련되어 사형 선고까지 받았던 공산주의자였다."는 발언을 인용하면서, "일제에 항거하다가 사형선고를 받았다면 몰라도, 우리의 주적인 공산당 혐의를 받았던 사람에게 어떻게 믿고 투표할 것이냐?"라며, "박정희"를 공격했다.

"김사만"은 "여순반란 사건의 관련자가 정부 안에 있는 듯하다"라고 한 "윤보선"의 "전주" 발언이"(김준연의 폭로에 비교하면) 그 얼마나 점잖은 표현이냐?"며, "윤보선"을 옹호하고, "박정희 씨는 그렇게 민족을 사랑하고 아낀다는 사람이, 일본제국주의의 군인이 되겠다고, 만주군관학교를 거쳐 더 출세하겠다고 일본에 가지 않았느냐?"며, 맹비난을 가했다.

바로 "공화당"에서 "김준연을 고소하겠다."고 선언하자, 그는 "고소 할 테면 해보라"며, 답변할 가치가 없다고 응수한다. 10월 그는 "송요찬의 녹음 연설회"를 열기 위해, "경남 마산"으로 내려갔다. "마산"에 온 그는 10.02일 오전 10시 "기자회견"을 발표한다. 이 기자회견에서 그는 "박정희ㆍ김종필"의 사상 의혹을 제기한다. "간첩 황태성은 박정희 씨의 친형인 박상희 씨와 친면이 있는 사이이고, 고 박상희 씨는 대구 폭동 당시 군위 인민보안서장으로 활약했다가, 토벌경찰에 의해 사살되었고, 여순반란 사건 때, 박정희 씨가 남로당 책임자였다는 것, 또한 박 씨의 조카사위인 김종필 씨는 서구식 민주주의를 부인하고, 공산세계와 일맥이 통하는 소위 교도민주주의를 제창하였다는 것 등으로 미루어, 그의 사상이 의심되지 않을 수 없고, 국민들은 그러한 사실들을 알아야 할 것이다."

③ 1964년, "한일회담 반대" 공방전

1964.04.04일 오후, "공화당"은 "1억3천만 $ 유입설"의 발설자인 "김준연 의원"을 "명예훼손ㆍ허위사실 유포 혐의"로 "서울지검"에 고소했다. 또 "공화당"은 "김준연"의 발언 가운데, "박정희 총재ㆍ김종필 당의장"에 해당되는 "명예훼손" 사항에 대해서도 아울러 검찰에 고발했다. 그러자 야당에서는 "정치 탄압"이라며, "김준연"을 옹호하고 나섰다. 1964년, "박정희의 한일회담"에 반대하여, "윤보선ㆍ함석헌ㆍ장택상ㆍ이범석ㆍ박순천ㆍ장준하" 등과 함께 "한일협상 반대 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는 각지에서 "한일협상 반대" 강연활동을 다니며, "박정희의 사상이 건강하지 못하다ㆍ솔직하지 못하다"며, 비판을 가했다.

1965.03.30일, 그는 "국회"에서 "정부가 한일협상을 하면서, 일본으로부터 사전자금을 수수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그리고 이 의혹은 "장택상이 제보해주었다"고 발표하였다. "김준연"의 주장은 "장택상의 증언ㆍ일본 잡지에 기재된 기사ㆍ우인기의 고소장 내용" 등이었는데, "조사위원회"는 몇 명의 증언만 듣고, 종결시켜 버렸다. "박정희 정권"은 그를 처벌하려 했으나, 야당(민정ㆍ민주)의 강한 반발로 무산된다.

그러나 1965.04.07일, "민주공화당"은 "김준연"을 고발했고, "김준연"은 "박정희ㆍ김종필"을 "외환죄 혐의"로 맞고소했다. 04.18일, 정부는 "허위사실 유포 죄"로 "김준연의 구속 동의 요청서"를 "국회"에 제출했다. 그러나 "사법부"는 "정부ㆍ공화당"의 편을 들어주었고, 야당에서는 그의 석방ㆍ구명운동과 함께 "보석금"을 모금했다. 그는 "보석금"을 내고, 5월초 석방되었고, "의원직"도 유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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