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정 (許政ㆍ1896~1988ㆍ92세)"은 "이승만"의 심복으로, 임시정부 구미위원부의 수금위원으로 "이승만"을 보좌했다. 개인적으로는 "이승만"과 친분이 있었으나, 자유당에는 가담하지 않았다. "이승만" 내각에서 1960.04월 외무부 장관에 발탁되었다가, "4ㆍ19혁명" 이후, "이승만"에게 하야를 권고하기도 했다. 하야 이후, 내각 수반과 대통령 권한대행을 지냈다.
1. 허정 (許政ㆍ1896~1988ㆍ향년 92세)
독립운동가ㆍ외교관ㆍ임시정부 구미위원부 위원(이승만 보좌)ㆍ제헌국회의원ㆍ1960년 외무부장관시, 4ㆍ19혁명 이후, 내각 수반과 대통령 권한대행ㆍ"장면"은 그를 "이승만의 심복"이라고 평가하였다ㆍ구미위원부의 수금위원
• 출 생 : 부산 초량동 • 사 망 : 서울 종로구 평창동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 • 사 인 : 병사
• 호 : 우양 (友洋) • 별 칭 : 국로 (國老) • 학 력 : 중국 난징 항해대학교 항해학과 → 영국 런던 항해대학원 이학석사
• 처 : 1번째 : 미상 (부산 상인의 딸ㆍ1931년 이혼) / 2번째 : 백귀란 (白貴蘭ㆍ동래 일신여학교 음악교사ㆍ1932)
• 자 녀 : 1남 1녀 • 정 당 : 한국 민주당→ 민주국민당→ 민주당 • 저 서 : 내일을 위한 증언(자서전)
• 경 력 : 1919 : 3ㆍ1운동 참여 후 중국 망명ㆍ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ㆍ임시정부 직원ㆍ임시의정원 의원 → 1920 : 프랑스로 건너가 한인거류민회장 → 1921(1922) :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한인유학생회장, 북미한인교민 총단장 → 1923 : 미국 교포신문 "삼일신보(三一新報)" 사장 → 1945 : 한국민주당(경남 총무)ㆍ서울특별시장 고문관
1948 : 제헌국회의원(경남 부산을) → 1948~1950 : 교통부 장관 → 1950~1952 : 사회부 장관 → 1951~1952 : 국무총리 서리 → 1952 : 무임소 장관(재임 중 부산정치파동으로 사퇴) → 1957~1959 : 서울특별시장(9대) → 1959 : 한일회담 수석대표로 방일, 민주당 최고위원 → 1960 : 외무부 장관ㆍ4ㆍ19혁명 이후 내각 수반과 대통령 권한대행 → 1960.04.27~06.15 : 대통령 권한대행, 내각수반 → 06.15~08.18 : 국무총리(6대) → 06.22~08.12 : 대통령 권한대행
1963 : 국민의당 대표최고위원, 대통령 선거에 출마 → 후보단일화를 위해 사퇴 → 박정희 정부는 "군정이 민간 정권으로 변장한 것"이라 비판 → 1965 : 민중당 대표최고위원 (1966- 민중당 고문) → 1967 : 신민당(민중당 + 신한당) 가입→ 6대 대통령 선거에서 윤보선이 패한 뒤 정계 은퇴 → 1969 : 국토통일원 고문 (정계 은퇴 후, 박정희 정권에 호의)→ 허정의 타협에 야당 인사들은 냉소 → 1979 : 10ㆍ26사태 후, 최규하 내각 출범ㆍ국정자문회의 의원으로 선출 → 1980~1984 : 국토통일원 고문회의 의장 → 1980~1988 : 국정자문회의 의원
일제 강점기 당시, "임시정부 구미위원부"의 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이승만"을 보좌하였고, 1928년에는 교포신문인 "삼일신보"를 창간ㆍ발행하다 귀국하였다. "충남의 형석광"을 매입, 광업ㆍ상업에 종사했다. 광복 직후, "한국 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였고, "민주당 최고위원"에 선출되었으나, "호헌동지회ㆍ 민주당 결성"에는 불참했다. 개인적으로는 "이승만"과 친분이 있었으나, 자유당에는 가담하지 않았다. "이승만" 정권 하에서 내각의 일원으로 활약하였지만, "자유당" 당적을 갖지 않음으로 해서 무소속을 대변하는 입장에 서기도 했다.
"민주당 구파"로 분류되는 그는 "외무부장관"으로 임명될 때까지, 한국민주당→ 민주국민당→ 민주당의 당적을 갖고 있었다. "제1공화국ㆍ과도정부" 기간 중, 공무원의 노동조합 설립을 반대, 공무원노조 및 교원노조 조직 활동을 원천 차단하였다. "이승만" 내각에서 1960.04월 외무부 장관에 발탁되었다가, "4ㆍ19혁명" 이후 내각 수반과 대통령 권한대행을 지냈다. "4ㆍ19혁명" 이후, "이승만"에게 하야를 권고하기도 했다. 1960.05월 당시, 각료들까지도 모르게, 비밀리에 "이승만"을 출국 조치시켰다. 1963년, "대통령 선거"에도 출마하였으나, 후보단일화를 위해 사퇴하였다. 이후 "박정희 정권" 기간 중에는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하였다. "제5공화국" 때는 정계원로로서 자문역할을 하기도 했다.
2. "한민당"에 대한 관점 : 지역정당(전라도당)이라는 비판
"한민당"은 창당 초기부터, "전라도 당ㆍ호남 갑부의 정당"이라고 비난받아 왔다. "한민당"의 주요 인사들의 출신은
• 전북 고창ㆍ부안 (김성수ㆍ김병로ㆍ이철승) • 전북 금산 (임영신ㆍ유진산) • 전남 담양 (송진우ㆍ백관수ㆍ백남훈) • 전남 영암 (김준연) • 황해남도 해주 (장덕수) • 경북 영천 (이활) • 충남 (윤보선ㆍ윤치영) • 충남 천안 (조병옥) • 서울 (원세훈ㆍ이기붕ㆍ김도연) • 대구 (서상일) • 경북 (장택상ㆍ이인) • 부산 (허정ㆍ김약수)
창당 멤버인 "허정"은 "한민당을 가리켜, 전라도 당ㆍ호남 갑부의 정당이니 친일파의 소굴이니 하고 비난하는 것은 공산당의 악의의 찬 비난에 지나지 않았다. 공산당이 지어낸 것"이라고 주장했다. "조병옥"은 "송진우나 김성수는 정당을 조직하는 데 있어서나 또는 당 사업을 하는 데 있어서도 지방적인 차별을 두지 않고, 인재 본위 실력 본위로 사람을 등용하였으며, 특히 정당 및 사회단체 조직에 있어서는 그런 점에 가장 유의하고 세심한 검토로서 전력을 다하여 주력하였던 것이다"라며, "지역 정당이 아니다"라고 반박하였다.
< 친일파 정당론 반박 >
"한민당"은 창당 초기부터 친일파들을 일부 받아들인 것을 두고 논란거리가 되었다. 창당멤버인 "허정"은 일부 친일파의 수용을 인정하였지만, 나름대로 엄선 기준이 있었다고 한다. 그에 의하면 "일제하에서 고급 관리를 지냈거나, 친일파로 지목받던 사람들이 몇 사람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들이 극악한 친일파나 민족반역자는 아니었다. 정당 당원들의 총수가 많다는 것이 정당의 우수성의 증명은 아닌 것쯤은 알고 있었다. 당시 우리로서는 아무리 문호 개방을 원칙으로 하기는 했더라도 무원칙, 무분별하게 입당시켰던 것은 아니다. 단지 좀 더 문을 넓게 열어, 민족진영의 대 집결체가 되자는 뜻에서 인선의 원칙을 크게 완화시켰을 뿐이다"라고 주장했다.
3. 1960.05.29일 새벽, "이승만 박사"와 이별 (당시 외무부 장관)
1960.05.29일 새벽, 그는 "이수영(외무부 차관)"에게 "이화장"으로 직접 가서, "이승만 내외"를 모시고 나오도록 지시하고, 그는 "김포공항"으로 나갔다. "이른 새벽이어서 공항 직원들은 아직 일어나지도 않아, 나는 그들을 깨우게 하고 이 박사의 출국 준비를 갖추었다. 이윽고 이 박사 내외를 태운 차가 새벽의 어둠 속에 도착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경향신문의 취재 지프가 뒤를 따르고 있지 않은가?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 박사 출국의 눈치를 채고 밤을 새워, 이화장을 지켰다는 것이었다. "이승만 출국" 정보를 입수한 "경향신문"은 5월 초 "이화장"에 사람을 보내, "이승만"의 동태를 감시했다. "김포공항"에 미리 도착하여, "이승만 내외"를 면담했다. "이승만은 그의 손을 잡고 "바쁜데, 왜 여기까지"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뒤따라온 신문기자가 이 박사에게 소감을 묻자, 옆에서 "프란체스카 도너"가 대신 대답했다. 더 지체하는 것이 좋지 않을 듯해서, "이 박사 내외"를 비행기 내로 안내했다. CAT 전세기는 정비 관계로 약 1시간 동안 지체하고 있었다. 넓은 비행기 안에는 "이 박사 내외"와 허정이 있을 뿐이었다. 우리는 묵묵히 앉아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이 박사나 나나 이 순간에 어떤 말을 할 수 있었을 것인가." 허정은 "나는 이승만의 아픈 심정을 직접 느끼는 듯해서 목이 메었다."고 회고했다.
"비행기의 정비가 끝나고 출발을 알리자, 이 박사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 이승만 : 나 하와이에서 잠시 쉬고, 아이크(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가 오기 전에 돌아오겠소. • 허 정 : 염려마시고, 푹 쉬고 오십시오. 이 말 이외에는 더 이상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이 이 박사와 내가 직접 나눈 마지막 말이 될 줄이야."
이후 "프란체스카 도너"가 "오스트리아"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여, 직접 "프란체스카 도너"의 편의도 봐 주었고, 여권도 발급해 주었다. 허정은 바로 "공보실"을 통해, "이승만의 출국"을 발표했고, "국회ㆍ언론ㆍ국민"은 "이승만의 출국" 문제로 논란을 벌였다. 이승만이 망명하자, "국회"에서는 항의가 빗발쳤다. 그러나 허정은 즉시 각의(閣議)를 열고 평소 "이승만과 사적 관계"라든가, 기타 여러 가지 사리로 보아 할 수 없이 그것과 같이 단행하였다는 말을 하면서, 이에 대해서는 "자신이 책임을 지겠노라"고 하였다. "국회" 답변시의 허정의 생각은 "이 박사는 건강이 나빠 하와이로 요양 차 여행한 것이며, 외교관 여권을 주선해 주었다고 말하고, 이박사의 이한(離韓)은 오히려 시국수습에 도움이 될 것이며, 필요하면 언제든지 소환할 수 있다."
4. 평가
① 긍정적 평가
성격이 청렴하고 강직하여, 정계의 원로로 대우받는 요인이 되었다. 학창 시절에 만난 "이승만"을 존경하여, 1919년 이후부터 "이승만"의 측근으로 활동하였으나, "자유당"에는 가담하지 않았다. "이승만" 하야 2일 전, "외무부장관"에 임명된 "허정"은 "과도정부의 내각 수반"에 임명되었다. 따라서 일반 국민의 입장에서 "허정"은 "이승만 정권의 연장"을 의미했다.
"4ㆍ19혁명" 이후, 그가 보여준 정치적 행동에 대한 논의는 여러 갈래로 이해되고 있지만, 혁명의 불길을 개혁의 성격으로 전환시키면서, "사회를 안정시켰다"는 기여를 평가할 수 있다. "이병도 (역사학자)"는 4ㆍ19혁명 당시, 그가 내각의 수반ㆍ대통령 권한대행으로서 어려운 시국을 수습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고 평가하였는데, "허정"이 "이승만"을 출국시킨 일을 두고, "이승만을 그대로 서울에 머무르게 하여 어떤 일이라도 생기게 된다면, 피차의 체면이 어찌될 것인가, 이처럼 허정의 대단한 과단성과 정의감에 나는 그를 다시한번 쳐다보기도 하였다."고 평하였다. "어수선한 판국의 수반으로서의 우양은 각료, 기타 부하들을 잘 통솔하여, 과오 없이 뒤처리에 진력하였고, 특히 공명한 총선거를 치른 후 민주당 내각에 정권을 넘겨주었다. 가히 공성명수(功成名遂)ㆍ신퇴(身退)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라 하겠다. 우양은 온화한 군자(君子)이면서도 내강(內强)하여, 의지가 굳고 자기의 이념에 비추어 옳다고 생각하는 바는 기어이 관철시키는 성격의 소유자이다. 또한 정치적ㆍ행정적 경험을 많이 쌓은 만큼 어디까지나 정치적인 풍모(風貌)를 띄고 있는 것도 사실이나, 한편 인정도 있고 의리를 중히 여기는 인격자"라고 평하였다.
"박종화(소설가)"는 "정계의 거성(巨星)ㆍ한국 근대 정치사의 산증인"이라고 평가하였다. "유진오(고려대 법학교수)"는 "빛나는 경력을 가진 정계의 거물이라면 보통은 마주 앉으면 어째 거북함을 느끼는 것이 보통인데, 우양은 남에게 그러한 냄새를 풍기지 않는 분이다. 소탈하다고 할까, 학자 타입 이라고 할까, 옛날 선비풍이라고 할까, 우양은 그런 인품의 분이다. 연하자라고 해서 자기의 고집을 밀어붙이려고 하지 않고, 이승만 박사를 존경한다고 해서 사사친분에 얽매이지 않는다. 모든 계루(係累)를 떠나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쪽으로 용기 있게 나가는 사람이다."고 평하였다.
② 부정적 평가
국민적 동의 없이 독단적으로 "이승만"을 출국시킨 것과 "3ㆍ15 부정선거" 관련자 처벌 등 미약한 대처를 했다는 것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장면"은 과도정부에게 "이승만"의 탈출 경위ㆍ진상을 밝히도록 요구하였고, 부패ㆍ독재ㆍ학정에 인책ㆍ사과하지 않고 망명함은 무책임한 행동이라며, 망명주선을 비판하였다. 한편 "윤치영ㆍ장택상ㆍ이범석" 등 "이승만"의 측근ㆍ우익 단체에서도 "이승만"을 해외로 몰아냈다며 비판했다. 특히 "이승만"의 측근 "윤치영"은 "한 두어 주일 후에는 돌아오게 될 것"이라고 담담한 표정으로 떠나간 이 박사는 이것이 영영 살아서 고국과의 이별이 되고 말았으니, 그런 일을 꾸민 자세한 음모가 무엇이냐며, 그를 비난하였다.
5. 4ㆍ19혁명에 대한 해석
① "4ㆍ19혁명은 사태이며, 혁명이 아니다"고 평가했다.
"4ㆍ19사태를 혁명으로 보고 싶지 않다"고 하였다. "제6대 국무총리에 취임했을 때ㆍ제5대 민의원 개원식"에서는 "4ㆍ19혁명"이라고 하였으나, 퇴임 후에 "4ㆍ19 사태"라고 표현했다. 그는 "4월의 사자들의 민주회복을 위한 투쟁은 의거였고, 결코 혁명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허정은 "4ㆍ19사태는 꺼져가는 민주주의의 횃불을 지키려는 의로운 궐기였을 뿐, 정권에는 조금도 뜻이 없던 한없이 투명한 젊은 애국심의 발로였다. 이러한 의거는 혁명과는 분명 구별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② 4ㆍ19 이후, 자유당계열 보복조치 금지 주문
"4ㆍ19혁명" 직후, 미국은 대통령직과 국무총리직을 임시로 대행하던 그에게 "자유당" 계열 인사들에 대한 보복조치가 없게 할 것을 주문하였고, 그는 미국 측의 의견을 그대로 수용하였다. 그러나 이 문제로 혁신 세력은 물론이고, 일부 같은 민주당 계열로부터도 "방탄 내각ㆍ이승만 정권의 연장"이라는 등의 비난을 받게 됐다.
6. 문제점의 반론ㆍ술회
① "이기붕" 옹호
평소 "이기붕"에게 동정적이었다는 점과 "이기붕"과 오랫동안 친하게 지낸 점도 문제화되었다. 오랜 친구였던 "이기붕 일가"를 동정하기도 했는데, "이기붕"을 동정하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3ㆍ15 부정선거"의 주역인 "이기붕"에 대한 비난, 규탄 여론이 주를 이루었다. "이기붕"의 친지들마저도 외면하거나, 언급을 회피하거나, "이기붕"과의 관련성을 부정하였으나, 그는 "이기붕"을 동정하였다. 그는 "이기붕"의 해외망명을 주선하려다가 실패했는데, "실각이 정치보복으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고 봤기 때문이라고 해명하였다.
② "장덕수" 암살에 대한 시각
1947.12월, "장덕수"가 암살당하자, "한독당"을 용의자로 의심되었고, "조소앙"은 용의선상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차마 "김구"에게는 따지지 못하고, 소년시절부터 친하게 지내던 "조소앙"을 찾아가서 따졌다. "구미위원부"에 10년간 근무했던 그는 "한인애국단ㆍ이봉창ㆍ윤봉길 거사"를 준비하는데 "조소앙"이 기여한 점을 근거로 "조소앙"을 찾아갔던 것이다.
"허정"은 "조소앙"을 찾아가, "왜 설산을 죽였소?"라고 격렬하게 항의하였다. "조소앙"은 너털웃음을 짓고 직접적인 답변을 회피하였다. "허정"은 "임정 짓"이라고 확신하였다. "허정"은 "너털웃음으로 숨길 수 있을 줄 아시오? 끝내 속이지는 못합니다."라고 외치고는 뛰쳐나왔다. 결국 "장덕수 암살" 배후로 "임정ㆍ한독당ㆍ민주의원"에 모두 간부로 몸담던 "김석황ㆍ조상항"이 체포되면서, "김구"까지 법정에 서게 되었다.
③ "신성모" 소개에 대한 후회
1919년, "허정"은 "상하이"에서 "신한청년당"의 당원이자, 행동대원으로 활동하던 "신성모"를 만나게 되었다. 해방 후, "이승만"에게 천거했는데, 이것을 후회하게 된다. "신성모"는 "신채호ㆍ김원봉" 등과 함께, 임정에서 "이승만"을 탄핵하는데 찬성한 전력이 있어 "이승만"의 눈 밖에 났었다. 그러나 "허정"의 간곡한 설득으로 내각에 입각하게 된다. 그러나 "6ㆍ25전쟁" 당시, "신성모"의 태도에 실망하여 절교하게 된다.
"신성모 국방부장관은 전쟁이 일어나면 점심은 평양에서 먹고,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을 것"이라고 우리 군대의 실력을 과장하고 있었다. 신성모를 이승만 대통령에게 소개한 것은 나 자신이었다. 그는 나의 보성전문학교 1년 선배이고, 그가 상하이에 있을 때 다시 만났던 인연도 있어서 이대통령에게 각별하게 소개했던 것이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정부에 들어와서 하는 그의 행동을 보고, 그가 소인(小人)임을 알고, 그 후로는 그와 가깝게 지내지 않았다."
④ "김규식"에 대한 평가
1919년, "구미외교위원부" 재직 당시 만났던 "김규식"을 "상당히 냉정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김규식"을 처음 만난 날, "김규식"과 저녁을 함께 하면서 프랑스에서 고생하는 한국청년들을 데려와야 한다고 말했다. "허정"에 의하면 "김규식은 내가 워싱턴에 있을 때, 한국인 유학생들이 나를 찾아와 괴롭혔다고 말하면서, "자기가 좋아서 미국에 왔으면 노동을 하든, 공부를 하든, 자신의 역량껏 할 것이지, 왜 구미위원부를 찾아와 괴롭히느냐?"라고 쌀쌀한 어조로 말했다."는 것이다.
⑤ "안창호ㆍ이승만" 중에서, 이승만 선택
미국에 있을 때, "안창호"는 직접 찾아와, 정치ㆍ사회 시사에 대한 담론을 하고 그에게 "흥사단"에 가입해줄 것을 권고하였으나, 그는 "안창호"의 부탁을 조용히 사양하였다. 오랫동안 "이승만ㆍ안창호"를 비교ㆍ대조하면서 고민하던 그는 결국 "이승만"을 선택하였다.당시 미국에서는 한국인 교포 사회의 분열ㆍ임시정부의 분열을 이유로 "임시정부 승인"을 거부했다.
임시정부의 승인을 위한 방법은 교포사회의 단결이라 봤던 그는 "이승만"을 선택했지만, 그는 한국인 교포사회의 "이승만 계ㆍ안창호 계"의 대립ㆍ반목을 조절하려 노력하였으나, 실패했다.이후 "이승만"을 보좌하며, "이승만 계"의 동지회와 "안창호"에게 비교적 우호적이었던 "국민회" 간의 중재ㆍ화합을 위한 만남을 주선하였다. 1920년대, 재미 한국인 교포 중 "이승만 계ㆍ안창호 계ㆍ박용만 계"의 파벌다툼에 염증을 느껴, 한인 사회에 대한 관심을 끊었던 "서재필"을 설득하여, 한인사회에 다시 오게끔 마음을 되돌리게 하기도 했다. "구미위원부의 수금위원"으로 독립자금을 모금하러 다녔던 그는 "상하이 임시정부"에 거액의 송금을 하기도 했다. 그러면 "김구"는 감사표시로 "백범일지의 친필본"을 택배로 미국에 있는 그에게 부치기도 했다.
⑥ 공산당의 "한민당" 습격설
"한민당"이 창당될 때, "조선공산당" 일부가 창당대회장을 습격하여 엉망으로 만들었다는 소문이 한때 유포되었다. 그러나 "한민당" 창당 발기인인 "허정"은 "루머"라고, 해명하였다. 그에 의하면 "한민당 창당과 관련하여 덧붙여서 말해두어야 할 것은, 창당대회 때 공산당의 습격을 받았다는 항간에 떠도는 이야기에 대해서이다. 내 기억으로는 공산당의 습격은 전혀 없었던 것 같다"고 하였다.
그 이유로 허정은, "그 때만 해도 해방 직후여서 좌우의 대결은 물리적인 힘의 대결로 번지지는 않았을 때이다. 다만 이념상의 문제, 정책상의 문제로 대결을 하고 있었을 뿐이다. 실력 행사까지 벌이게 된 것은 시일이 좀 더 지난 다음이었다."고 하였다. "한민당" 창당대회 때, "박헌영"이 내빈으로 참석하여, 창당을 축하한다는 축사를 한 것을 증언하였다. "한국민주당 창당대회 때만 하더라도 박헌영이 참석하여 내빈 축사를 했다. 우두머리는 축사를 하고 졸개는 습격을 하는 일은 없다"는 것이었다.
⑦ 1982년 "청와대"에서의 일화
1982년, "청와대" 홀에 약 20명의 원로가 모여 앉아 서로 잡담을 하고 있는데, 의전실장이 대통령께서 나오시니 모두 앞으로 나와서 줄을 지어 서라고 지시하였다. 이 지시가 떨어지자마자, "허정"은 벼락같은 소리를 냈다고 한다. "무엇이 어째? 줄을 서라고? 내가 이럴 줄 알고, 안 나오려고 했다!"하고 외치자, 모두가 어리둥절하여 그를 쳐다보고 있는데, Y씨가 "대통령께서 나오시는데, 줄을 서야 할 것 아니오?"라고 하자 "허정"은 더 큰 소리를 질렀다. "당신 혼자나 나가서 서시오!" 이렇게 되니, 누구 한 사람 나가서 서려고 하지 않았다.
비서들이 몇 번씩 들락거리고 나서야, "전두환 대통령"이 홀 안으로 들어섰다. 원로들은 앉은 자리에서 모두 일어섰고, 대통령이 창가로 돌아다니면서, 위촉장을 한 사람씩 전달하였다. "유달영"은 나는 근래에 이런 기골있는 인물을 처음 보았다고 평하였다.
7. 정치관ㆍ사상ㆍ신념
① 민주주의관
일찍부터 다수의 주장이 무조건 민주주의인가 여부에 대해서는 일찍부터 논란이 되어 왔다. "허정"은 "다수의 주장이 곧 민주주의"라는 견해에 홀로 반대하기도 했다. 그에 의하면 "사람의 머리수, 정당 당원들의 총 수가 많다는 것이 정당의 우수성의 증명은 아니다"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소수의 의견이라고 해도 합리적이고 올바른 주장이면 수용하는 것이 민주주의"라 했다. 정치가에 대해서는 "참된 정치가란 국민의 어떠한 자유도, 어떠한 권리도, 어떠한 발언도, 또한 어떠한 활동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다."라고 정의하였다.
② 반미주의관
"반미주의"는 위험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한국이 미국의 식민지라고 하던 학생운동계 일부의 주장은 근거 없는 낭설"이라며 반박했다. 민족 자주ㆍ민족 해방ㆍ자주외교에 대한 일부의 주장을 "감정적인 것"으로 해석했다. "오늘날의 국제정치에 있어서는 경제적 강자가 가장 자주적일 수 있다는 것은 냉혹한 현실인 것이다. 경제적인 자주성이 없는 한, 진정한 민족의 자주성이나 자립 외교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경제적 번영을 성취하는 것이 선결문제인 것이다."
"실력을 갖추고, 그 실력을 바탕으로 정치, 외교력을 행사해야 된다며, 민족자주, 자주 외교론을 비판하였는데, "흔히 민족의 자주성이니, 자주 외교니, 하는 말을 하지만, 나는 그들이 어느 정도의 경제적 실력을 토대로 이 말을 하는지 헤아려 보고 싶다."며, 입으로 자주성을 들먹이는 정치인을 비판하였다.
③ 민족주의관
민족주의를 표방하며 외세의존적인 정치가들에 대한 비판을 가하기도 했다. "실력을 갖추지 못한 자주성 남발은 국익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겉으로는 강한 민족주의적 색채를 노출시키면서도 사실은 외국 자본에 매달리는 허식적인 자세는 절대로 긍정할 수 없다. 내자(內資)의 결핍으로 외자(外資)를 도입한다는 것은 불가피한 문제이지만, 도입한 외자가 국민의 이익을 크게 증진시키지 못하고, 일부 재벌, 일부 정객(정치인)이나 정당의 이익에만 공헌하는 겉치레 경제 부흥에 절대로 동조할 수 없다."는 것이다.
④ 공무원 노조ㆍ전국교직원노동조합 설립 반대
"교통부장관"에 임명되자, 좌파 계열의 농성ㆍ파업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던 철도에 행정력을 집중하여, 철도ㆍ교통부 직원의 노조활동을 금지시켰다. "교원 노조"에도 부정적이었다. 1960.04.29일 대구의 여러 중등학교 대표 약 60명이 중등교원노조를 결성한 것을 필두로 국민학교 교원들의 노조도 결성되고, 05.22일에는 서울에서 전국의 교원 대표 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전국교원노조연맹"이 조직되었다. 새로 조직된 이 연맹은 종래의 "대한교련(大韓敎聯)"을 즉시 해체하고, 연맹을 유일한 전국교원조직으로 정부가 공식적으로 승인해줄 것을 요구했다.
"교원노조"가 전국적인 규모로 확산되어 나가자, 허정 과도정부는 지극히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그는 "교육공무원은 법에 의하여, 일반 공무원과 같은 자격을 가지며, 공무원은 정치에 간여할 수 없고, 교육자(공무원)는 일반노동자와는 구별되므로, 각자가 스스로의 대접을 받아야 된다."고 말하고 교원노조의 부당성을 지적했다. 그는 또한 "다른 일반 공무원보다는 교육자들의 생활 보장면이 우선되어 있고, 사회적으로 스승의 대접을 받고 있는데, 투쟁에 의해서만 그들이 권익을 옹호하려는 방법에는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논리를 폈다. 허정은 공무원 및 교직원 노조 결성 움직임을 관계자 문책 및 해임, 파면 등으로 강경 단속하였다.
⑤ 자본 경영에 대한 관점
"자본"은 민영화ㆍ개인 운영이 타당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한민당 창당 초기에 허정은 앞장서서 자본의 일시적인 국유, 국영화를 주장하여 한국민주당의 당 강령으로 정착시켰다. "한민당이 중요 산업의 국영 또는 통제 관리를 정책으로 내세운 것은 한민당이 사회주의 경제를 지향하기 위해서는 결코 아니었다."고 해명했다. "자유민주주의의 구현이 한민당의 지상과제인 만큼 경제정책도 기회 균등이 보장되는 자유경쟁 체제를 원칙으로 삼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인들이 남겨놓고 간 많은 산업시설을 인수할 만한 민족자본이 형성되지 못한 때에 자유경쟁의 원칙만을 고집하면 경제적 혼란이 오고, 이에 따라 기업 윤리가 혼미에 빠지고 급조 재벌이 횡행하여 민생이 위협받을 것이므로, 건전한 민족자본과 기업윤리가 형성될 때까지 국영 또는 통제 관리를 잠정적으로 실시하려고 한 것이다."고 하였다.
⑥ 토지문제
토지 문제에서는 "경자유전(耕者有田)"을 원칙으로 삼고 있었다. "당시 공산당과 그 계열은 경자유전을 말하면서도 토지의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주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것은 토지의 국유화를 전제로 해서 가능한 만큼, 토지의 소유권이 농민에게 돌아가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허정은 농민은 단지 경작권만을 얻을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농민은 남의 땅 경작이 아니라, 자신이 소유하는 땅을 원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기 땅에 자기가 씨앗을 뿌리고 거둬들이는 기쁨을 희구했으며, 남의 땅에 씨앗을 뿌리고 거둬들이는 슬픔을 바라지는 않았다. 따라서 지주가 개인으로부터 국가로 바뀌는 차이밖에 없는 무상몰수, 무상분배는 경자유전의 원칙과는 거리가 멀었다. 허정과 한민당은 공산당이 말하는 "무상몰수, 무상분배는 완전한 국유화 국영화는 농민을 소작농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한민당"은 "유상 매수ㆍ유상 분배"를 주장했다. 저렴한 대가 내지는 국가에 토지세를 상환해서 갚아나가는 것이었다. 허정은 "한민당은 모든 농민에게 자기 땅에 씨앗을 뿌리는 기쁨을 주기 위해 농민이 땅을 사서 사유화하는 유상분배의 원칙을 세웠다."는 것이다. "가난한 농민을 위해 국가가 지주로부터 토지를 사들여 농민에게 분배하고, 농민은 땅값을 국가에 장기 분할로 갚아나가고, 지주는 토지를 매각한 자금으로 산업 자본가로 전환하는 토지의 합리적 재편성을 의도했다"고 하였다.
⑦ 독립 운동가들의 직업 문제
"보성전문학교" 재학 시절부터, 방학 때 해외여행을 다녔고, 졸업 후에는 미국으로 가서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런데 허정은 독립운동가들이 일정한 직업이 없이 교포들의 돈에만 의존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그는 "내가 미국에 가서 독립운동 지도자들을 만나보고 놀란 것은, 그들이 생계 수단이 될 직업을 갖지 않고 독립운동에만 전념한다는 점이었다. 이러한 독립운동 지도자들을 뒷받침해주기 위해 교포들은 자신의 수입의 많은 부분을 떼어내고 있었다. 이러한 생활을 알게 되자, 나는 자기 생활조차 자기 힘으로 해결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독립운동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적어도 교포들의 피땀 어린 성금이 독립운동 아닌 개인의 생활비로 쓰이는 일만은 없어야 할 것이 아닌가 하고 의문이 들었다."고 했다. 일부 독립운동가들이 교민들에게 손 벌리는 것, 민폐를 끼치는 것을 부정적으로 봤다. 또한 독립운동가들의 도덕적 우월감도 부정적으로 봤다. "자기 직업을 갖고 있었던 독립운동가로 대학교 강사인 서재필과 교수로 강단에 선 김규식 등 소수였다"는 증언을 하기도 했다. 허정은 "나는 비록 하우스 워크였지만 내 생활에 불편이 없을 정도의 자활책을 강구해 놓은 다음 독립운동에 가담하였다"고 하였다.
그는 식당 서빙ㆍ접시닦이ㆍ상점 점원 등 자신의 생계ㆍ생활비를 스스로 조달하면서 독립운동 자금 모집ㆍ홍보 활동을 병행하였다. 또한 허정은 "자기 직업도 없이 무슨 애국을 하는가"라며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이러한 말은 당시의 독립운동 지도자들을 비난하려는 뜻은 아니다. 그분들의 사생활을 돌보지 않는 열렬한 활동에 대해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존경을 아끼지 않는다. 다만 그분들은 사생활을 위해 쓸 시간이 있으면 독립운동에 바치겠다는 입장이었으나, 나는 모든 애국 활동, 독립운동은 순수한 시민적 자각, 스스로 깨닭음에 입각한 순수한 봉사여야 한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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