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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 • 현대사)/인물

1공 : 유진산 (옥계ㆍ1905)ㆍ7선 의원ㆍ정치생물론ㆍ사쿠라 (별명)

by 당대 제일 2022. 1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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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산 (柳珍山ㆍ1905~1974ㆍ69세)"은  정부 수립 이후, "반민특위"에 가담하여, 친일파 단속ㆍ척결활동을 했으나 실패했고, 제1공화국ㆍ제3공화국ㆍ제4공화국 시절에는 "야당 정치인"으로, "신민당 대표" 등으로 활동하였다. 그의 "정치 생물론"은 현재까지도 정치꾼들에게 바이블로써 내려온다. 그는 투쟁보다는 타협을, 공식회의보다는 비공식회의를, 대중 집회보다 사랑방 흥정을 선호했다. "타협과 안배의 정치가 최고의 정치"라고 생각한 것이다.

 

1. 유진산 (柳珍山1905~1974향년 69)

독립운동가ㆍ국회의원 (7)청년운동가 (백의사에서 활동)해방 정국에서는 우익청년단체 운용ㆍ정치적 계보는 "민주당 구파" 정치인으로 활동하였으며, "구파의 대부"로 불렸다. 1954, "호헌동지회"에 참여한 이후, "민주당민정당신민당" 등에서 활동하였다. 근대사에서 역할에 비해, 가장 야박한 평가를 받는 인물 중 한 사람이 "사쿠라 유진산"이다. 일제시기, "독립운동"으로 "만석 집 재산"을 날렸고, 해방시기에는 "백색테러" "적색테러"에 맞섰으며, "자유당 정권" 하에서는 "반독재투쟁"에 나섰다.

•  출 생 : 전북 금산군      •  사 망 : 서울 상도동      •  사 인 : 병사 (결장암)     •  본 명 : 유영필 (柳永弼)

•  : 옥계(玉溪)진산(眞山, 후에 珍山으로 고침)       학 력 : 고려대학교ㆍ와세다 대학 정치경제학부 (3년 중퇴)

•  별 칭 : 사쿠라ㆍ권모술수의 화신      •  필 명 : 진산(珍山眞山) 원래 필명(眞山)이자 호였으나, 나중에 이름이 됨

•  : 김현신      •  저 서 : 농민독본ㆍ해뜨는 지평선

•  친 구 : 고향 출신- 이현상(남부군 총사령관)임영신(이승만의 측근이승만의 청혼거절 고향 친구인 "이현상"을 여러 번 설득하여, "우익 진영"으로 전향시키려 노력하였으나 실패했다 조병옥장택상백관수전진한김산

유진산

그가 비판받는 부분은 "박정희 정권시기"인데, 사실 1960년대 많은 일을 한 사람이 "유진산"이었다"516" 때는 일본 방문 중인 정치인 중에서 가장 먼저 귀국하여 수감되었고, 1964"대통령 선거"에서 책략으로 "민주당"을 주저앉혀, "윤보선 단일후보"를 만들어 내, "박정희"와 박빙의 승부를 이루었다1960년대 중반, "신민당"으로의 야당통합을 지휘했고, 1971년에는 당수로써 맘에 안 드는 40대를 인정하고, "후보 단일화" 하도록 압박을 가해, "김대중 단일화"에 공헌하였다.

1971.05.06(525 국회의원 총선후보 등록마감일), 갑자기 자신의 지역구인 "서울 영등포 갑구" 출마를 포기하고, "전국구 1번 후보"를 등록함으로써, "1차 진산파동"이 발생했다1973, 전당대회에서 "신민당 당수"로 당선되었고, 가을 "박정희""박정희유진산 회담"을 가졌다이후 여당에 대한 타협론화합론을 주장하다가, "윤보선"으로부터 "사쿠라"라고 질책을 당했는데, "사쿠라" 라는 별명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당시 "중정"에서 돈을 받아 정치자금으로 사용했고, "진산파동"2차례나 일으켰고, 물리적 충돌을 서슴없이 일으켰다는 점에서는 비판의 여지가 있다.

"박정희"가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했고, "중정"이 가장 상대하기 편한 정치인으로 손꼽혔던 인물이었다사실은 항상 대국을 보고, "실리"를 취한 최악에도 유머감각을 잊지 않는 정치인이었다"선명야당"을 이야기하며, "사쿠라"로서 "유진산"을 욕하지만, "유진산"이 받은 것은 빚을 갚기 위한 것으로, "김영삼""유진산" 나이가 되었을 때, "노태우"에게 받은 것에 비한다면, "조족지혈"이었다무엇보다 "유진산"이 살아있어 "당수"였다면, 1987"양 김"이 모두 대선에 나오는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2. 청렴성

"유진산"이 작고했을 때, "서울 상도동"에 집 1채 밖에 없었다그나마도 2천만 원에 가까운 부채로, 은행에 저당 잡힌 상태였다당시 이를 딱하게 여긴 "김종필 국무총리""집안이 거의 폐가가 됐으니, 정치인의 말로가 너무 허무하지 않느냐". 모금을 주선하게 됐다"전경련" 3개 경제단체와 여야 의원들이 모금한 돈은 총 3천만 원에 이르렀는데, 당시 "김진만 국회부의장"을 통해 돈을 전달하면서, 모금자들의 뜻에 따라 저당 잡힌 집을 찾고, 남은 돈으로 "망인 생계 기금"을 써 달라며, 전달하였다.

3.  별명 "사쿠라"

같은 민주당 구파계열 인사 중에서 "선명 야당론"을 주장하는 "윤보선"과 대조되었다1973년 가을, "박정희""박정희유진산 회담"을 가진 , 여당에 대한 타협화합론을 주장하다가, "윤보선"으로부터 "사쿠라"라고 질책을 당했는데, "사쿠라" 라는 별명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생전 자신을 "사쿠라"라고 비난하는 것에 대해 그는"세상에서 나를 두고, 흔히 권모술수의 능수로 악의에 찬 비난과 곡해들을 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굳이 해명을 늘어놓고 싶지도 않다 권모술수라는 말이 반드시 나쁜 것만도 아니지만, 나로서는 민족과 나라를 위하는 길이라면 항상 당당하게 꿋꿋하게 걸어 왔음을 자위해 본다 나는 남에게 추파나 던지며, 속중의 호감을 사려는 것을 극력 회피해왔다 그러한 위선의 자행은 말할 수 없는 사회적인 해독을 초래하기 마련이다라며, 언급할 가치가 없다고 반론을 제기하기도 했다(일본에서 불교 전래 전에, "벚꽃"이 핀 봄날에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쿠라"란 축제 의식을 선동하기 위해 박수 꾼바람잡이가 군중 속에 몰래 동원되어, "사쿠라""사기꾼야바위꾼" 뜻으로 변질되었다는 설이 있다.)

4. 정치 생물론

유진산의 "정치 생물론"은 현재까지도 정치꾼들에게 바이블로써 내려온다그는 투쟁보다는 타협을, 공식회의보다는 비공식회의를, 대중 집회보다 사랑방 흥정을 선호했다"타협과 안배의 정치가 최고의 정치"라고 생각한 것이다그는 입버릇처럼, "정치란 칼로 두부를 자르듯, 일도양단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토론하고 타협하는 것이 바로 정치이다.라는 소신을 피력한 바와 같이, "민주정치의 기본을 대화와 타협에 두었던 정치인"이었다.

유진산은 "권모술수에 능하다"하여, "권모술수의 화신"이라는 평가를 얻었고, 정적(政敵)과의 타협을 쉽게 하며, "명분보다는 실리를 추구하는 합리주의자"라는 평이 있다"막후정치"에 능한 그를 정적들동지들은 "사쿠라소신 없는 존재"라며 폄하하였다.

5. 연 보

1919 : 경성고등보통학교 2학년 때 31운동에 참가, 교내 독립만세 벽보사건으로 인하여 자퇴 → 1926 : 와세다 대학 정경학부 재학중, 독서회 사건으로 이치가니 형무소에 투옥, 3학년 때 중퇴 → 1933 : 농민운동을 펴다가, 일본경찰의 감시대상이 되어 중국으로 망명ㆍ난창(南昌)에서 한인회 조직, 충칭(重慶) 임시정부의 연락원으로 립운동

1934 : 일본 영사관 관헌에 잡혀 서대문형무소에서 4개월간 구금 → 1942 : 만주로 건너가,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만주 연락원  1945 : 흥국사(우익청년단체)조직건청(建靑, 좌익 최대단체)해체시키고, 조선인민공화국의 인민대표자회의를 강제 해산ㆍ김구의 신탁통치 반대운동에 가담ㆍ백의사(비밀 우익단체)에서 활동ㆍ비좌파와 우파적 성향의 노동운동단체와 청년단체에서 활약 (전진한김두한)

1946 : 대한민주청년동맹 (반공주의 우익 청년단체ㆍ감찰부장: 김두한) 조직ㆍ회장 조선민주청년동맹 (좌익청년단체) 대항 1947"청년조선총동맹"으로 명칭변경  1948 : 제헌 국회의원(마포구) 낙선  1948 : 이승만 청년단체 통합지시청년조선총동맹 + 서북청년단 + 대한청년단과 통합 대한청년단 가입ㆍ대한청년단 최고지도위원으로 활동

1949 :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서, 친일파 단속 및 검거활동ㆍ노덕술 등 친일파들이 시도한 반민특위 및 정부요인 암살음모사건의 암살표적이 됨  1950 : 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출마, 낙선  1954 : 3대 국회의원으로 당선 후, 7 연속 당선ㆍ호헌동지회(()이승만 인사와 야당인사가 모여, 신당창당 준비) 가담

1955 : 민주당 창당에 참여, 민주당 구파 정치인으로 활동하였으며, 구파의 대부  1960 : 유진산은 직접 나서지 않고, 윤보선(민주당 구파 출신최고위원얼굴 마담 격)을 조병옥 사후의 구파 리더로 추대  1960 : 민주당 신구파를 보수양당으로 분당시켜, 신민당의 창당 주도

1962 : 민주구국선언대회 주관(박정희의 322 군정연장성명 반대 대회)  1963 : 민정당(民政黨)창당김병로를 당대표로 추대  1964 : 윤보선과 결별 (민주당 구파는 양분)  1967 : 신민당 부총재  1970 : 신민당 총재  1971 : 1차 진산파동구파인 김영삼에게 총재직 이양  1973 : 신민당 총재에 재선임2차 진산파동신민당 총재에 재당선ㆍ가을 박정희와 "박정희유진산 회담"ㆍ여당에 대한 타협화합론을 주장윤보선이 "사쿠라"라고 질책  1974 : "유신헌법개헌 투쟁"을 선언하고 나섰으나, 병으로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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