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치영 (尹致暎ㆍ이토 지에이ㆍ1899~1996ㆍ97세)"은 "윤영렬"의 아들로, 태어날 무렵, 상당한 갑부여서 집 크기가 85칸이나 되었다고 한다. 1938.05월,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조선총독부"에 체포돼, "신흥우ㆍ갈홍기" 등과 "전향성명서"를 발표하고, 기소유예 처분으로 석방된 이후, 친일협력의 길을 걸었다.
1. 윤치영 (尹致暎ㆍ이토 지에이ㆍ1899~1996ㆍ향년 97세)
이승만의 비서실장ㆍ내무부장관(1대)ㆍ프랑스 공사(2대)ㆍ언론인ㆍ윤보선 대통령 숙부 (나이는 2살 어림)제헌국회부의장(1949.07~1950.05월)ㆍ국회의원(5선ㆍ1ㆍ2ㆍ3ㆍ6(민주공화당)ㆍ7(민주공화당))ㆍ서울특별시장(1963)ㆍ민주공화당 총재 상임고문(1970) ㆍ"윤영렬"의 아들ㆍ"윤웅렬"이 백부ㆍ"윤치오(조선총독부 중추원 찬의ㆍ1째 형ㆍ26세 차이)ㆍ윤치소(중추원 참의ㆍ2째 형ㆍ24살 차이)"동생ㆍ태어날 무렵, 상당한 갑부여서 집 크기가 85칸이나 되었다고 한다.
• 출 생 : 한성부 종로방 안국동 • 사 망 : 서울 송파구 서울중앙병원 • 정 당 : 한국민주당 → 대한국민당 → 자유당 → 민주공화당 • 종 교 : 개신교
• 호 : 동산 (東山) • 학 력 : 와세다대학교 법학 학사→ 조지워싱턴대학 학사(1932)→ 아메리칸대학교 석사
• 처 : 이병영(사별)ㆍ이은혜(異恩惠ㆍ1902~1980ㆍ82세): 정치인ㆍ교육자ㆍ대한여자국민당(대한국민당 전신) 창당ㆍ이화학당 여교사ㆍ대한국민당 부총재 • 자 녀 : 2남 1녀
• 가 족 : 친척 형(윤치오ㆍ윤치소)ㆍ사촌 형(윤치호ㆍ윤치왕)ㆍ조카(윤보 선ㆍ윤영선)
1923년, "하와이"에서 "이승만" 노선을 추종해, "하와이한인회ㆍ임시정부구미위원부" 등의 간부로 활동했다. "이승만"의 비서이자, 연락원으로 활동하며, 그에게 "무솔리니ㆍ케말 파샤" 등에 비견하며, "집정관 겸ㆍ천황 겸ㆍ대통령"의 지위ㆍ권력을 갖춘 지도자가 될 것을 역설하였다.
1923~1927년까지 "동아일보" 주미통신원ㆍ1924년 "하와이대한인동지회"의 기관지 "태평양" 주필, 1928년 "뉴욕"에서 창간된 "삼일신보"의 발기인ㆍ편집부원으로도 활동했다. 1935년 귀국이후, 1936년, "중앙기독교청년회 부총무ㆍ흥업구락부 간사"가 되었다. 1938.05월,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조선총독부"에 체포돼, "신흥우ㆍ갈홍기" 등과 "전향성명서"를 발표하고, 기소유예 처분으로 석방된 이후, 친일협력의 길을 걸었다. 1940.01월, "황군의 무운장구를 축도함"이라는 글을 "청년"에 발표했으며, 1941.08월 "임전대책협의회"의 대좌담회에 참여했고, "임전대책협력회"의 채권 가두판매에 참여했고, "조선임전보국단"의 발기인으로 참여해 활동했다. 이 과정에서 "매일신보ㆍ동양지광" 등에 일제의 침략전쟁에 협력하는 글을 발표하는 한편, 1944.09월 "국민동원총진회" 중앙지도위원이 되었다.
1945.09월, "한민당" 창당 발기인으로 참여해 "외무부 부장"이 되었고, 10월 "이승만" 귀국 이후, 비서실장이 되었다. 1948년, "제헌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ㆍ국회부의장(1949.07~1950.05월)으로 활동했고, 1949.12월 "대한국민당 최고위원"이 되었다. 1953년, "UN총회 한국대표"로 선임되었고, 1956년 "부통령선거"에 "대한국민당"의 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1963년, "민주공화당" 창당발기위원으로 참여, "의장"이 되었다.
2. 집안 (윤웅렬ㆍ윤영렬 가계도)
조선 선조 때, "영의정 윤두수"의 둘째 아들 "윤흔"의 8대손으로, "병조판서"를 지낸 초기 개화파 정치인 "윤웅렬"의 아들이고, 해방 후 대한민국의 군의관 "윤치왕", 사업가 겸 외교관 "윤치창"의 이복형이며,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이자, 정치인인 "윤보선(尹潽善)"의 5촌 당숙이었다. 큰아들 "윤영선"은 1950년대에 "농림부장관"을, 손자는 "교통부" 고위 관리를 지냈다. 증손녀는 "방상훈" 조선일보 사장과 결혼했다.
3. 윤웅렬 (1840~1911ㆍ71세)ㆍ동생 윤영렬(1854~1939ㆍ85세)
① 윤웅렬 (尹雄烈ㆍ1840~1911ㆍ71세)ㆍ조선 말기 무신 (군부대신)
• 아들 (3명): 1째 윤치호 (중추원 고문)ㆍ2째 윤치왕 (영국 글래스고 의대 출신 군의관, 세브란스 병원장)ㆍ3째 윤치창 (미국 시카고 대 출신 외교관, 초대 주영공사ㆍ터키대사)
일찍이 무과에 급제한 후, "2차 수신사" 일행으로 일본에 다녀왔고, 1882년부터 "교련병대 창군"을 지도하였다. 1884년, "갑신정변"에 가담하였다가, 정변실패를 예상하여 관직을 사양했다. "갑오개혁" 이후, "경무사ㆍ군부대신" 등을 지냈다. 1897년, "대한제국" 수립 후, "법부대신ㆍ고등재판소 판사 군부대신" 등을 거쳤고, "전라도"가 전남ㆍ전북도로 분도되자, 초대ㆍ4대 "전남 관찰사"가 되었고, 1910년 "한일합방조약"이 체결되자 , 일제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아,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가 지목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분류됐다.
② 윤영렬 (尹英烈ㆍ1854~1939ㆍ85세)ㆍ대한제국 군인 겸 정치가
• 아들 : 윤치영 (국회 부의장) • 손자 : 윤보선 (제4대 대통령)ㆍ윤원선 (경기도지사)ㆍ윤일선 (서울대 총장), 윤명선(일제 괴뢰국 만주국의 간도성 차장)
6남3녀를 낳았는데, 이 가운데 4명의 이름이 친일인명사전에 올라가 있다. 손자를 포함하면 모두 5명에 이른다. 1째 "윤치오"와 2째 "윤치소"는 일제 때, "조선총독의 자문기관"이던 "중추원"의 찬의ㆍ참의를 각각 지냈다. 2째 "윤치소"의 장남이 "윤보선"이다. 3째 "윤치성"은 "일본 육사(제11기)"를 나와, "일본군 기병 중좌(중령에 해당)"로 있었다. 6째 "윤치영"은 일제 말기 "국민동원 총진회 중앙지도위원" 등으로 적극적인 친일 활동을 펼쳤고, 해방 이후 "서울시장ㆍ민주공화당 의장ㆍ내무부장관ㆍ국회 부의장" 등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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