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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 • 현대사)/인물

1공 : 이기붕 (만송ㆍ1896)ㆍ이승만 비서ㆍ부통령(3ㆍ15 부정선거)

by 당대 제일 2022. 1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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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붕 (李起鵬ㆍ1896~1960.04.28ㆍ64세)"은 이승만의 비서로, 1954년, "국회의장"이 됨과 동시에, 아들 "이강석"을 이승만의 후계자로서 대통령 관저인 "경무대"로 보냄으로써, 이승만의 뒤를 이어 최고의 권력자로 군림하고, 그의 거처가 "서대문 경무대 (현, 4ㆍ19 혁명기념 도서관)"라 불릴 정도로 권력을 쥐게 되었다.

 

1. 이기붕 (李起鵬1896~1960.04.28향년 64)

이승만의 비서국방부 장관서울시장국회의장직 역임후손은 없다

•  출 생 : 충북 괴산 (한성부에서 성장)     •  사 망 : 서울 경무대 별관 (, 419 혁명기념 도서관)   

•   : 만송 (晩松)     •  학 력 : 연희전문학교 중퇴아이오와 데이버 대학(문학과) 학사졸업

•  부 인 : 박마리아 ( 밴더빌트 피바디 대학 교육학 석사) 친일반민족행위자일제 강점기 교육인이화여대 부총장이화여대 영문과 교수10살 차이.  두 아들은 미혼으로 후손은 없다. (이강희이강석이강욱)

•  장 남 : 이강석 (1937이승만의 양자로 입적(1957))  이승만은 양녕대군의 15대손이고, 아들 이강석은 효령대군의 17대 손이므로 손자 항렬로서 촌수가 맞지 않으나, 이승만의 양자로 입적된 것이다.     •  차 남 : 이강욱 (1940~1960) 장녀 : 이강희 (요절1935~1949))

•  경 력 : 1953.12 자유당 중앙위원회 의장 1954~1958 3대 민의원 의장 : 3대 국회의원(서대문구을) 자유당 1958~1960 4대 민의원 의장 : 4대 국회의원(이천군) 자유당 1960.03~ 04 4대 부통령 : 315 부정선거 부통령(자유당) 79.2% 1무효

이기붕

태종의 2째 아들 "효령대군 이보(李補)"의 후손으로, "흥선대원군"의 측근이었다가 "임오군란"에 연루되어 처형된 "이회정"의 증손이었다. 1934년 미국 유학 중 만난 10살 연하의 "박마리아"와 결혼하였다상해를 거쳐, 미국으로 건너가 접시닦이 등을 하면서 학교를 다녔다"아이오와 데이버 대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였다.

"이승만"의 지시로 "자유당" 창당을 주도하였고, 1951"김성수" "한민당"을 야당으로 차 던진 이승만이 새롭게 자유당을 결성할 때, 그것을 도와서 신당의 중앙위 의장에 추대되어 당의 실권을 잡았다1954, "국회의장"이 됨과 동시에, 아들 "이강석"을 이승만의 후계자로서 대통령 관저인 "경무대"로 보냄으로써, 이승만의 뒤를 이어 최고의 권력자로 군림하고, 그의 거처가 서대문 경무대라 불릴 정도로 권력을 쥐게 되었다1956, "3대 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하였고, 1960년에 실시한 1960"부통령 선거"로 당선되었으나, 부정선거임이 밝혀지면서 사퇴하였다1960.04.28, 장남 "이강석"에 의해 권총으로 살해되었다.

2. 315 부정선거"아들 이강석"에 의한 살해

1960, "4대 정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의 부통령 후보"로 출마하여, 경쟁자인 "민주당의 장면(張勉)"과 경합을 벌였다. 그러나 "315 부정선거"를 통해 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419혁명"으로 사임하고, "자유당국회의장직"마저 제명되었다.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던 1960.03.15 부정선거는 임기를 마칠 가망이 없는 고령의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한 것이었다기보다는, 대통령 유고시 승계권을 가진 부통령의 지위에 이기붕을 앉히려는 것이었다.

"이강석"은 수많은 정치테러와 부정선거로 인해, 수많은 국민들을 죽게 만들었던 아버지 "이기붕"을 매우 증오했다. 1960"315 부정선거"에 대해 민중들이 항거한 "419 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 성명"을 발표이틀 뒤인 04.28일 새벽, "경무대 비서"가 쓰던 36호실에서 미국으로 도주하려고 했던 "이기붕박마리아사랑했던 남동생 이강욱"을 권총으로 차례로 쏘아 죽이고 자살하여 그의 일가족은 멸문지화를 당하였다.

책임을 모두 이들에게 덮어씌우고 사태를 가라앉히기 위해 "경무대의 곽영주가 살해했다는 설""3 누군가가 타살한 것"이라는 소문도 있으나, 사실관계는 확인되지 않았다그들 내외가 살던 집은 제2공화국 당시 국가에 환수되어 집터에 "419 혁명기념 도서관"이 건립되었다대통령(14)을 지낸 김영삼은 "밑에 사람들이 보좌를 잘못했고, 이기붕이 건강이 안 좋은 사람이었는데도 대통령 욕심이 있었다"고 평가하였다.

3. 성격

온화한 인물로, 그 정도까지 권력에 집착하는 성격은 아니었다고 한다. "419혁명" 초래한 장본인으로서의 비참한 말로는 "악처 박마리아""도를 넘는 내조의 공이 초래한 행이었을지도 모른다."는 평이 있다이승만 정권의 2인자로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다가, "419혁명"으로 몰락하여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고 가문이 절멸했다는 점에서 조선 광해군 때 대북파 영수이자 정권의 2인자로서 막강한 권세를 휘두르다가 인조반정으로 몰락하여 참형을 당하고 멸문지화를 당한 "관송 이이첨"과 비교된다.

또한 그들의 주인이었던 "광해군과 이승만"은 정계에서 몰락한 이후 각각 제주도와 하와이에서 살다가 병으로 사망하였는데, 두 사람은 유배와 망명이라는 차이점이 있으나, 끝내 본토로 돌아오지 못하고, 만년을 도서지역에서 생활하다가 현지에서 병사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4. 이기붕은 이승만의 측근 및 자유당 내에서도 많은 적을 양산하였다.

"윤치영"을 적으로 만들었고, 자유당 경선 과정에서는 "이범석"과 라이벌이 되었으며, 이승만의 다른 측근이자 월남 청년을 대표하던 "이윤영"도 적으로 돌렸다. "윤치영"등은 그의 낙선을 위해 부통령 후보로 출마하였고, "이윤영"은 노골적으로 이기붕을 낙선시기키 위해 부통령에 출마한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윤치영"은 제3대 정부통령 선거에 부통령 후보로 출마하면서, "나는 만송이 부통령으로 당선이 된다면 그를 에워싼 아첨배들의 극성으로 나라의 장래를 그르칠 것이라고 염려가 되었고, 그러한 그들의 파당책 작폐를 예방하려는 뜻에서 내가 속해 있는 대한국민당의 부통령 후보로 나서기로 결심하였다. 당선되리라는 예상 보다는 내가 고약하게 보고 있는 무리들에 업힌 이기붕 후보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낙선시켜야 한다는 하나의 사명감 때문이었다."고 하였다.

1959"이윤영"은 나라의 운이 다 되었다고 생각하고, 이승만에게 진언을 하러 경무대로 찾아갔다그러나 이기붕이 못 만나게 해 놓아, 결국 "이윤영"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섰다대통령 면회를 거절당하자, "이윤영"은 다시 부통령 후보에 입후보하였다주위에서 부통령 입후보는 해서 무엇하느냐고 말리기도 하였다그러나 이윤영은 이기붕을 낙선시키기 위해서 출마한다고 하였다"씨름판에 나가는 사람이 꼭 이기려고 나가느냐? 씨름에 져도 잠뱅이나 찢으려 나가는 거지 이기붕이를 떨구기 위해서다."  

이기붕은 사람을 보내 이윤영에게 돈 1억원을 보내 드릴터이니 사퇴하고, 자기를 밀어줄 것을 제안하였으나 이윤영은 크게 나무라고 해서 되돌려 보냈다이승만의 측근들 중에서도 적을 만들었던 이기붕은 부통령 선거에서 낙선하고 말았다이기붕에게 호의적이었거나 동정심을 보인 인물은 장택상과 민주당의 조병옥허정 등이 있었다.

5. 박마리아 (朴瑪利亞1906~ 960.04.28향년 54)

이기붕의 처(10살 차이)두 아들은 미혼으로 후손은 없다 이화여대 부총장이화여대 영문과 교수친일반민족행위자일제 강점기 교육인여성계의 지도층 인사

•  출 생 : 대한제국 강원도 강릉시    •  학 력 : 1937 - 밴더빌트 대학교 대학원 교육학 석사     •  경 력 : 자유당 교육행정특보위원 이화여자대학교 부총장 →  문교부 특임행정촉탁위원

대단히 인색하고 콧대가 높았다고 한다. "박용만(해방 이후부터 625 직후까지 이승만의 비서)"에 의하면, "굉장한 에고이스트(이기주의), 퍽 욕심이 많고, 남에게 지기 싫어했으며 지나치게 자존심이 강했다, 퍽 인색했었고 그러면서도 콧대는 대단히 높았다. 박마리아는 남에게 자기 것은 쌀 한 톨도 주는 법이 없으면서도, 남이 주는 것은 주는대로 받았다"고 한다"강준만(전북대 교수)""박마리아가 315 선거 때, 국회의원에 출마하려 했던 것을 두고 "국회의원에 출마하려고 했던 점에 비추어 본다면, 박마리아의 과욕 만큼은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평가하였다.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손에서 어렵게 자랐다. 어머니 "고의대""정춘수(감리교 목사)" 집에서 가정부로 일하면서 개신교에 입문, 전도사가 된 인물이다일찍 고아가 된 그녀는 "대관령"을 넘어, "경성"으로 와서 "경성"의 한 교회에서 자랐다"춘수"의 주선으로 "경기도 개성"의 감리교 계열 여학교인 "호수돈여자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이때는 생활이 매우 어려울 때라 "민며느리로 들어가라"는 주위의 권유가 있었으나, 학업에 대한 욕심으로 힘들게 입학했고, 재학 중에는 우수한 성적을 받았다.

"개성"에 살고 있던 "윤봉희(윤치호 딸)"의 도움을 받아 겨우 학교를 마쳤다고교동창의 도움을 받아 "이화여자전문학교"에 입학, 1929"영문과"를 졸업하고 "모교 고등보통학교" 교사를 지냈다. 선교사의 주선으로 미국에 유학하여 "밴더빌트 대학교"에 입학하였다"원용덕(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출신 의사)" 같은 미션계인 "이화여전"에 있던 그녀와 연인 사이였다그러나 미국 유학 생활 중, "원용덕"과 헤어지고, "이화여자대학교 강사"로 재직 중인 1934.12.15일에 "이기붕"과 결혼하였다1934, "밴더빌트 피바디 대학"에서 BA를 취득한 후 귀국, "이화여전"에서 교편을 잡았다.

아들 "이강석""이승만 대통령"의 양자로 입양 보내고 난 후부터, "이승만" 일가와 밀착하여, 남편 "이기붕"을 위해 수직 급상승의 출세가도를 여는 동시에, 자신도 "이화여자대학 부총장이화여대 동창회 회장"이 되어, 교육계는 물론 군부를 포함한 한국사회의 모든 계층에게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1945, "이승만"의 귀국 이후, "프란체스카 도너 여사"의 시중을 들면서 여사와 개인적으로 가깝게 지냈다"이화여대" 인맥을 정관계재계군경의 고위층과 연결시키는 역할을 하였다"박마리아"가 이끌던 사조직 "이수회""이대 인맥"과 고위층의 연결을 주선하는 단체로 급성장했다.

6. 이강석 (李康石1937~ 1960.04.28향년 23)

육군 장교(소위육사 졸업)이기붕 아들이승만 양자      학 력 : 1949 : 경기중학교 중퇴  1953 : 서울고등학교 졸업  1953 : 서울대학교 법학과 중퇴  1958 :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 (14)

"아들에 대한 이승만의 집착""이강석(이기붕의 아들)에 대한 프란체스카의 애정"으로 "이강석"1957.03.26, "이승만"83세 생일에 맞추어 양자로 입적되었다"이승만프란체스카" 사이에 소생이 없었다. "이승만"에겐 전처 "박승선(朴承善1876~191135)"과의 사이에 "이봉수(李鳳秀1896~19048)"란 아들이 있었지만, 미국 체류 중에 병사했으며, "이승만"은 그 죽은 아들을 늘 잊지 못했다고 한다.

"양자" 입적 후, "이강석"과 관련된 추문 역시 들끓었다. 그는 "서울대 법대"를 다녔는데, 학교에서는 이강석의 "부정편입" 문제로 말이 많았다. "서울대 법대생들"이 동맹휴학에 돌입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하자, "서울대 법대"를 중퇴하고 "육군사관학교"로 재입학(14)하였고, 육군 소위로 임관하였다1959"미국" 유학, 05.25"미국 포트 베닝(Fort Benning) 보병학교"에서 군사 교육을 마치고 귀국했다.

7. 가짜 이강석 사건 : 청년 강성병(?)이 이강석을 사칭한 사건 

1957.08.30일 밤, 한 청년이 "경주경찰서장"에게 전화를 걸었다"나 이강석인데" 이승만 대통령의 양아들 "이강석"이라는 말에 "경주경찰서장"은 청년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청년은 "아버지 밀명을 받고 수해 상황을 시찰하기 위해 왔다"라고 말했다"경주경찰서장""귀하신 몸께서 어찌 홀로 오셨나이까"라며, 청년을 최고급 호텔로 모셨다다음 날 "경주경찰서장"은 공무를 제쳐 두고, 청년에게 관광지를 직접 안내했다.

당시 "경주경찰서장""군수시장"과 더불어 "대통령 각하의 아드님께서 여기까지 와주셔서 소인 한평생의 영광입니다"라며, 극존칭을 써가며, 온갖 아양과 아첨을 아끼지 않았었다자신이 "이강석"이라고 자처한 청년은 "경주경찰서장"의 극진한 대접과 경호차까지 제공받아 "경주"를 관광하고, "영천경찰서"에서도 마찬가지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그 청년은 당시 도지사였던 "이근직"이 자신의 아들과 진짜 "이강석"이 안면이 있었으며, 결국 "이근직"에 의해 3일 만에 가짜로 들통나서 체포된다. 검찰과 경찰이 철저하게 보안을 지키며, 이 사건을 그냥 넘기려 했지만, "매일신문 기자"가 검찰에 구속된 "가짜 이강석 사건"을 들춰 특종 보도했었다.

"이강석"을 사칭했던 청년의 본명은 "강성병(姜聖炳22)"으로, "강성병"은 고교졸업 후 가출해 떠돌아 다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양아들인 이강석과 닮았다"는 얘기를 자주 들었다고 한다. 그는 "언젠가 서울에서 이강석이 헌병의 뺨을 치고 행패를 부리는데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을 보았었는데, 한번 흉내내 본 것이었다. 권력이 이렇게 좋은 것인 줄 비로소 알았다"고 말했다고 알려진다그러나 해당 사건이 일어난 지 불과 3년도 채 안 되어서 일어난 "419혁명"으로 인해 "1공화국"이 몰락한 했고, "가짜 이강석 사건"의 범인인 "강성병"은 감옥에서 10개월 동안 복역하고 출소하였으며, 사건 발생 5년 뒤인 1963, "대구"에 위치했던 "유림옥"이란 술집에서 음독자살하면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당시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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