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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 • 현대사)/인물

1공 : 조병옥 (유석ㆍ1894)ㆍ경무국장ㆍ조순형/조윤형 부친

by 당대 제일 2022. 1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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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옥 (趙炳玉ㆍ1894~1960ㆍ66세)"은 "김규식"의 중등제자로, "친일파 경찰 채용"은 "조병옥(경무부장)장택상(수도경찰청장)"등에 의해 추진되었다. "이승만ㆍ김구ㆍ장택상"과 더불어, "반공주의 체제"를 구축했다는 비판도 있다. "안창호"를 대통령감이라고 보았으나, 고문 후유증으로 일찍 병사했고, 결국 "이승만"을 지지하게 된다.

 

1. 조병옥 (趙炳玉1894~1960.02.15향년 66)

독립운동가경찰관정치가교육자4대 대통령 선거 후보ㆍ내무장관(1950)ㆍ민의원(제3대ㆍ1954)ㆍ민의원(제4대ㆍ1958)

•  출 생 : 충남 천안     •  사 망 : 미국 워싱턴 DC 월터리드 육군병원      •  사 인 : 급사암살(?)

•  : 유석 (維石)      •  학 력 : 미국 와이오밍 대학교컬럼비아 대학교 경제학 박사

•  : 노정면 (盧禎冕ㆍ노병선(대한제국 고등관)의 딸)     •  자 녀 : 32- 조윤형(국회 부의장)조순형(새천년민주당 대표)

•  가 족 : - 조인원(趙仁元ㆍ독립운동가) "유중권(유관순 부친)"과 같이 "아우내장터 만세시위(324)" 모의

조병옥

일제 강점기 초반, "도미 유학""독립운동"에 종사하였고, "안창호"에게 감화되어, 그의 "흥사단수양동지회국민회" 일에 적극 참여하였다그 뒤, "태평양 전쟁" 무렵, "수양동우회 사건" 등으로 2차례나 옥고를 치렀다"해방 정국"에서는 "한민당" 창당에 참여한 뒤, "미군정""경찰 총수"를 지냈으며, 1948년 정부수립 후에는 "UN 대표단내무부 장관" 등을 거친 뒤, "이승만"과 결별했다.

"한국 민주당민주 국민당"에서 활동하였으며, 1954"호헌동지회"에 참여하였다"민주당"에 입당, "신익희윤보선유진산" 등과 함께 "민주당 구파"의 리더로 활동하였다1950, "2대 정부통령 선거""부통령 후보자"로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1960, "4대 대통령 후보자"로 출마하였으나, 선거유세 중, 병으로 "미국 월터리드 육군병원"에 입원했다가 서거하였다.

2. 평가

해방 이후, "정부수립에 대한 공로내분 수습민주주의 확립"에 기여했다는 평가가 있다그는 자신이 생각하고 믿는 바를 거리낌 없이 말하고, 행동하는 성격이었으며, 또한 남에게 굽히거나 아첨하는 성격이 아니었으며, 노련한 협상가로 능력을 발휘하였다는 점이 높이 평가되기도 한다"1공화국" 후반 야당지도자 시절, ""의 갈등이 첨예하게 대립할 때, "장택상이기붕" 등과 수시로 만나 회담, 절충을 주도하였으며, 기자들이나 강경투쟁을 요청하는 야당인사들에게 하던 "빈대잡기 위해, 초가삼간 태울 수는 없지 않느냐"는 말은 회자되었다야당 내에서 일부 반발을 사기도 했으나, "협상과 타협이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이라는 태도를 조금도 누그러뜨리지 않았다고 한다.

"미군정" 당시, "친일파 경찰을 채용한 점"에서 "최능진"으로 부터 비판을 받아왔고, "제주 43 사건" 당시 "경찰부분 지휘과잉진압"에 관련된 것도 비판받고 있다"좌파중도파" 세력으로부터 "미군정 앞잡이"라는 비난을 받았고, 민주당 "신파""자유당"으로부터는 "주색풍류객이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공격을 받았다공공연히 주색에 빠졌다는 비판을 노골적으로 들으면서도 그는 태연히 웃었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의 "경찰 실무진"을 채용하여, 논란이 되기도 했다.  "조병옥장택상" "친일경찰 채용" 소신이 드러난 것은 1946.01월에 있었던 "서울시내 8서장 임명"이었다"서울시내 8개 경찰서" "서장"으로 새로이 임명된 이들은 모두 "전직 일제 경찰관"들이었다.

3. 친일 논란

조병옥이 자신의 친일(비호) 의혹에 대해 생전에 직접 해명한 기록도 남아 있다자신의 저서 "나의 회고록, 민교사, 1959"라는 책에서 1946.03.06."대구시보"와의 인터뷰 내용을 술회했다"민족문제연구소" 측 입장에 따르면, "친일파로 분류되는 기준은 자발성적극성을 평가했고, 반복지속성 여부도 참조한다."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조병옥""전시 체제기" 활동 의혹을 받는 지적은 "임전대책협의회"에서 1차례 참여해 강연했다는 것 정도인데, 그런 1~2건 정도로 지적하기는 지나친 지적이다.

"임중빈(문학평론가)" 기고에서 "1941.08.25일 삼천리사 주최, 임전대책협의회에서 죽음으로써 일본에 보답한다는 각계 명사 120명의 의 아래 친일 거두들과 자리를 함께한 조병옥은 자못 비장한 어조의 소신발언으로 부민관 중강당을 제압했다"고 주장했다. 다음은 조병옥이 했다는 발언의 일부다"우리는 오늘 제국의 신민으로서 이 마당에 모였습니다. 조선민중은 아무 요구도 없이 무조건으로 협동하여 전승해서 동아공영권 건설에 매진함으로써, 위정자에게 안심을 줄 것입니다."라 하였다.

2005.09.30, "강정구 교수(동국대)""서울대"에서 열린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주최 토회에서, "미동맹이 없었다면, 친일파 후예들이 정치사에 발붙일 수 없었다."고 하였다"친일파 후예"의 대표적 사례로 "조순형 대표박관용 국회의장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열린우리당 신기남 의원" 등을 언급했다따라서 이러한 의혹논란은 객관적 사실 여부따지기보다 "정치적인 측면"에서 제기되는 성격이 강하다.

4. 흡연관

그는 애연가였다27세에 담배를 처음 피워, 사망 직전까지 흡연하였는데, 감기나 호흡기 질환에는 잘 걸리지 않았다권위적인 "이승만 대통령"이 주재한 "국무회의"에서 담배를 피운 유일한 장관은 "조병옥" 뿐이었다"이승만""국무회의" 주재 시, "국무위원"들의 흡연을 금지하였고, 회의 중 담배를 피우는 "조병옥"에게도 연하지 말라고 여러 번 경고를 주었으나, "조병옥"은 태연히 회의장에서 담배를 피웠다달 밝은 밤에 발코니나 베란다에 나와, 달을 바라보며, 담배를 피우는 것을 평생의 낙으로 삼았다

담배의 묘미와 함께 "기독교인"인데, 교리를 어기지는 않나하는 생각 사이에서 갈등하였다"담배를 피기 시작한 이후부터, 나는 무슨 죄악감을 느끼게 되었으며, 그것이 내가 기독교 신자라는 재의식에서 빚어지는 심리적 작용일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으나, 한 번 피우기 시작한 담배를 끊는 것은 퍽 힘든 일이라 생각하였다 고요한 달밤에 밤늦게까지 공부하다가, 한 대 피우는 담배 맛이란 정말로 진미일 뿐만 아니라 재떨이에 놓은 담배연기가 한 원을 그리며 천장으로 올라가는 것을 멀끔히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치 깊은 산중의 절간에서 불공을 드리다가 스님()이 무슨 무아지경에 도달한 감을 주는 것 같이 생각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나의 담배 철학일는지는 모르나 그렇다고 해서, 내가 담배 예찬자는 결코 아니다 즉 담배는 사람에게 해는 될지언정 이로운 것이 못 되는 까닭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적적할 때, 심심할 때, 무슨 생각이 머리에 잘 떠오르지 않을 때, 으레 습관화되어 담배를 피우게 되는 것이다."

5. 일 화

① "이승만"의 후임 대통령

1950년대, "미국 국무성"에서 "이승만"을 제거하려 하자, "이승만"은 자신이 대통령직을 내놓을 경우, 자신 대신 대통령이 될 인물로 "장면" "조병옥"을 꼽았다그러나 "이승만"은 이 두 사람의 "도덕성능력애국심"(특히 미국에 대한 독립적인 자세)을 의심하였다따라서 그들에게 위태로운 상태에 놓여 있는 나라를 맡기느니, 차라리 욕을 더 먹더라도 자기가 좀 더 오 집권하면서 나라를 보위하고, 그 기반을 다지는 것이 한국을 위해 낫다고 판단했다 한다한편 "민주국민당"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윤보선"은 철저하게 야심을 감추었지만, "조병옥" "윤보선이 크게 드러날 것"이라면서, 그의 속에 뭔가 있다고 하였다그의 말대로, "윤보선" "대통령"이 되자마자, 권력욕을 드러냈다.

② "이승만" 귀국 이벤트

1945.10.16., "이승만"의 환영회를 할 때, "조병옥" "이승만"을 맨 앞의 좌석에 앉게 하도록 건의하였다"이승만은 사실상 평민의 자격으로 환영회에 참석하기로 되었는데 어떻게 앞자리에 앉게 할 수 있겠느냐"  "하지 장군"이 항의를 하자, "조병옥"은 대답하기를, "이승만 박사는 비록 평민의 자격으로 환영회에 참석하게 될 것이지만, 그는 독립운동의 원훈이므로, 당연히 앞자리에 앉아, 여러분을 환영해야 한다." 2일 동안이나 주장하여, 관철시켰다.

"하지 장군"은 결국 "조병옥"의 말에 수긍하고, 자기 스스로 "이승만 박사"를 소개하기도 하였다그리하여 "하지 장군"이 답사를 마치고 하단하자, "이승만 박사"는 만면에 웃음을 띠우고, "하지 장군" 답게 악수하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이어 "조병옥"은 직접 "이승만 환영사"를 낭독했다"이제 우리 한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태평양 전쟁에서 영웅적으로 용전분투한 역전용사 미군을 환영하는 이 마당에 우리는 40년간 우리 한민족을 착취하고 압박하던 이 백아전당(白亞殿堂) 앞에 우리의 자유 독립의 상징인 백발이 성성한 이승만 박사가 바로 이 자리에 나와 계십니다." 하고, "이승만"을 소개하였더니, 회장 안의 수많은 청중들에게서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와 함께 감격의 울소리가 이곳저곳에서 퍼져 나왔다.

박수소리가 끝나는 것을 기다려, "조병옥"은 연설을 계속하였다"이 백아전당은 희고 깨끗이 단장되어 있지만 그 속에서 일보던 총독부의 일본인 관리들은 우리 한민족을 어떻게 해야만 많이 착취하고 일본에 예속되도록 할 것인가 하는 것을 계획하고 집행한 저주받은 아성입니다그러나 이 백아전당의 흰 것과는 달리 우리민족의 자유 독립의 상징인 이승만 박사의 백발은 40여 년 간의 해외의 모진 풍상을 다 겪어가면서 검은 머리가 흰 머리가 되도록 오직 조국의 광복만을 위하여 투쟁한 인생의 산 역사를 말하는 백발의 기록이며 상징일 것입니다.조병옥이 말을 맺었을 때, 다시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쏟아져 나왔다"하지 장군"은 직접 답사와 함께, "이승만 약력"을 직접 소개하였다. "조병옥"에 의하면"하지 장군도 이 우레 같은 박수소리에 압도되어, 자기가 답사를 하지 않을 수 없어, 결국 이승만의 소개를 하였다고 생각한다."고 평하기도 했다.

6. "제주 43 사건 진압회의" 해프닝

"조병옥(경무부장)"과 "김익렬 중령(경비대 제9연대장)"의 난투극

1948.05.05, "윌리엄 딘(미 군정청 군정장관 겸 주한미군 부사령관)안재홍(민정장관)송호성 준장(경비대 총사령관)조병옥(경무부장)맨스필드 대령(제주도 군정장관)"등이 비행기 편으로 "제주도"에 도착했다"43사건 진압"의 해결을 놓고, 오전 12시부터, "제주중학교 미군정청 회의실"에서 열렸다참석자는 "윌리엄 딘안재홍송호성 준장조병옥맨스필드 대령" 외에, "유해진(제주도지사)김익렬 중령(경비대 제9연대장)최 천(제주도 경찰감찰청장)김씨(딘 장군 전용통역관, 목사 출신)"9명이었다.  "최고 수뇌회의"에서 합의점을 찾지 못하면서, "병옥(경무부장)""김익렬 중령(경비대 제9연대장)" 난투극이 발생한다.

회의에서 1번째로 발언하게 된 "최 천(제주도 경찰감찰청장)"

"43폭동은 국제 공산주의자에 의해 사전에 조직 훈련계획된 폭동"이며, 경 대병(大兵)을 투입하여 합동작전으로 철저하게 토벌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어 발언한 "김익렬 중령(경비대 제9연대장)"

무력 위압설득선무귀순 공작을 병용하는 작전을 건의하였다"직접적인 도화선은 밀 무역자 혹은 남로당 공산주의자와 경찰 간의 마찰이나 자세한 경위를 알기 어렵다 폭동자 수가 증가된 것은 빨치산이 우익 인사들을 학살했지만, 경찰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초동 대책과 작전에 실패한데서 기인된 것이며, 이 작전의 방해요소는 경찰의 기강문란이므로 전 제주도경찰을 자기의 지휘 하에 두게 해 달라."는 요구를 한다"김익렬"이 증거로 제출한 사진첩을 들여다보던 "윌리엄 딘(미 군정청 군정장관 겸 주한미군 부사령관)" 흥분하여 사진 자료들을 "조병옥(무부장)"에게 던져주며, "조병옥"에게 화를 낸다그래서 화가 난 "조병옥""김익렬""공산주의자"로 몰면서, 회의장은 난장판이 된다.

"조병옥(무부장)"

"김익렬 연대장"의 설명과 사진첩 등 증거물이 전부 허위조작된 것이며, "맨스필드 대령(제주도 군정장관)""드루스 대위"에게 제출한 자료는 "경찰에 대한 중상모략"이라고 극구 부인했다그러면서 "김익렬 연대장"을 손가락으로 지목하며"저기 공산주의 청년이 한 사람 앉아 있소 나는 오늘 처음으로 국제공산주의가 무서운 조직력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았소헝가리 루마니아 체코슬로바키아 등지에서 그랬듯이 처음에는 민족주의를 앞세워 각지에서 폭동으로 정부를 전복하고 나중에는 본색을 드러내는 것이 국제공산주의자들의 상투수단이요"라고 지적했다

화가 난 "김익렬 연대장""닥쳐라!"하고 고함을 질렀다.

"윌리엄 딘 장군""김익렬 연대장"을 제지하며, 연설을 방해하지 말라고 명령하였다"조병옥(경무부장)"은 계속해서 "김익렬"을 가리키며"민족주의의 가면을 쓴 청년들이 먼 외국에서만 있는 줄 알았더니, 현재 우리나라에도 있소 바로 저 연대장이 그런 청년이요, 우리 경찰의 조사에 의하면 저 청년의 아버지는 국제공산주의자이며 소련에서 교육을 받고 현재 이북에서 공산당 간부로 열렬히 활약하고 있소 저 자는 자기 부친의 교화를 받고 공산주의자가 되었으며 자기 부친의 지령에 의하여 행동하고 있는 것이요"라며, "공산주의자"일지도 모른다며, 의혹을 제기했다.

"윌리엄 딘 장군" "조병옥(경무부장)" "김익렬"의 부친이 공산주의자라고 그럴싸하게 설명하자, 깜짝 놀라며 의심에 찬 눈초리로 "김익렬"을 쳐다봤고, "맨스필드 대령"도 의심하기 시작했다격분한 "김익렬"은 이성을 잃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단상에 뛰어올라 연설하는 "조병옥"에게 달려들었다유도 3단이던 "김익렬"은 흥분한 나머지, 주먹으로 "조병옥"을 끌어내 실랑이를 벌였고, "조병옥"의 복부를 친 후, 멱살을 잡고 내동댕이치려고 하였다.

"김익렬 연대장"의 표현에 의하면"조병옥은 의외로 힘이 장사였다.

당시 50세가 넘었는데도 쉽게 넘어지지 않아 단상에서 격투가 벌어졌다 내가 손에 잡히는 대로 조 박사의 넥타이를 당기니까, 그는 목을 졸리게 되었다"고 한다넥타이로 목이 졸린 "조병옥"은 숨을 못 쉬고, 비명을 지른다.

"최 천(제주도 경찰감찰청장)"이 말리러 올라왔으나,

"김익렬"의 발길질에 급소를 차여, 그도 비명을 르며 쓰러졌다"윌리엄 딘 장군" "송호성 준장(경비대 총사령관)"에게 싸움을 말리라고 고함을 질렀고, "맨스필드 대령(제주도 군정장관)" "안재홍(민정장관)" 달라붙어, "김익렬" "조병옥"을 떼놓으려 하였으나, "김익렬" 역시 고함을 지르며, "조병옥"에게 욕설을 퍼부었다"당신이 일제 시대에 독립운동을 하였다기에 애국자인 줄 알았더니, 자기의 죄상이 드러나니까, 무고한 나를 하필이면 공산주의자로 모느냐. 취소하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며 필사적으로 덤벼들었다.

"송호성 준장(경비대 총사령관)"은 일어서지도 않고 앉은 채로"이 놈 연대장! 누구에게 폭행을 하느냐. 네 놈이 죽으려고 환장했느냐. 손을 놓고 말로 하라", 고함을 친다그러나 말릴 뜻은 없는 듯 입으로만 호령호령했다.

돌아가는 내용의 대강을 눈치 챈 "안재홍(민정장관)"은 손을 놓고, "연대장! 손을 놓으시오. 폭행을 멈추시오 외국 사람들이 우리를 야만인이라고 흉을 보니, 어서 손을 놓고, 말로 하시오"라며 제지했다.

"유해진(제주도지사)"가 단상에 달라붙어 다시 "김익렬"의 손을 떼어 놓으려고 하였으나, 노령이라 역부족이었다.

"김익렬""조병옥"의 몸싸움은 격화되었고, 회의는 순식간에 회의장은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

화가 난 딘 "윌리엄 딘 장군""

김 모씨(딘 장군 전용통역관, 목사 출신)"를 불러, "안재홍""송호성" 지금 무어라 말하고 있냐고 물었다그런데 "김 모씨""윌리엄 딘 장군"에게 "안재홍""송호성 준" "김익렬 연대장"에게 "너는 공산주의자이며, 나쁜 놈이라고 욕을 하고 있다"고 통역하였다.

이성을 상실한 "김익렬 연대장""조병옥"의 넥타이를 붙잡고,

통역관 "김 모씨"에게 달려가, 발길질로 음낭을 걷어찼다놀란 "윌리엄 딘 장군안재홍송호성 준장"은 회의실을 빠져나갔고, 통역관 "김 모씨"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윌리엄 딘 장군"은 대기 경호 중이던 "미군 헌병(MP)"을 불러들여, 장내 질서를 정리하라고 명령했다수 명의 "미군 헌병(MP)" 달려들어, 그 중 2명의 "헌병""김익렬 연대장"의 팔을 양쪽으로 붙잡아 비틀어, "조병옥"에게서 떼어놓고는 강제로 의자에 앉혔다"김익렬 연대장"두 팔은 결박하여 꼼짝 못하게 했다소란은 끝이 났고, "진압 회의"는 결말을 보지 못한 채 종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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