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만 (朴容萬ㆍ1881~1928ㆍ47세)"은 미국 내에서 유일한 "무장독립운동 단체"를 설립하려고, 노력한 점은 높이 평가되며, 1904년 "만민공동회 사건"으로, "한성감옥"에 같이 투옥된 "이승만ㆍ정순만"과 의형제를 맺어, "3만"이라 하였다. "이승만"의 사상적 동지였으며, "이승만"을 "하와이"에 정착시켰다. 그러나 1914년 "독립운동 방법"의 차이로 "이승만"과 갈등을 겪다가, 정적으로 변신한다.
1. 박용만 (朴容萬ㆍ1881~1928ㆍ향년 47세)
독립운동가 (1919- 한성 임시정부(경성) 외무총장ㆍ상하이 임시정부 외무차장에 선출(미취임))ㆍ군인(무장투쟁 운동가)ㆍ옌시산 계열의 국민혁명군 참의(參議)ㆍ언론인ㆍ계몽운동가(유일한의 스승)ㆍ임시정부 불신임 운동에 앞장→ 신천지 계획 (아나키스트)
• 출 생 : 강원도 철원군 철원면 궁전리 • 사 망 : 중화민국 베이징 • 사 인 : 암살 (총격에 의해 사망)
• 거 주 : 강원도→ 경성→ 미국 네브래스카→ 필라델피아→ 하와이 호놀룰루→ 중국 베이징 시
• 호 : 우성(又醒) • 학 력 : 미국 헤이스팅스 대학교 • 종 교 : 기독교
• 처 : 1째- 김해 김씨ㆍ2째- 웅소청(중국 재정부 관리의 딸)ㆍ첩- 중국 여성 / 2째 처 : 웅소청과의 결혼)ㆍ1921년, "북경"에서 정식으로 결혼한 "중국ㆍ한국의 혼혈인"으로 "중국 재정부 관리"의 딸이다. 결혼식엔 "신채호" 등 한인 8~ 9명과 중국인 다수가 참석했다. 이를 두고, "박용만"과 정적관계에 있던 "독립 운동가들"은 "처첩을 두었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 자 녀 : 1남 1녀 (딸 박동옥ㆍ아들 박광원)ㆍ사위 이용화(독립운동가) / 1911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신한민보"의 주필, 1913년 "호놀룰루"에서 "국민보"의 주필로 근무하면서 알게 된, "이용화"에게 "딸 박동옥"의 교육을 담당하게 하였다. 후에 "박동옥"은 자신의 개인 가정교사이기도 했던 "이용화"와 결혼한다.
• 저 서 : 국민 개병설ㆍ군인수지ㆍ아메리카 혁명ㆍ조선말 독본 1ㆍ2권
• 경 력 : 1909 : 한인소년병학교 설립 (네브래스카주 커니에 있는 한인 농장내) → 1927 : 우성학교 설립 (국어학교ㆍ호놀룰루 팔라마)- 직접 편찬한 초등국어교과서 사용 → 1914 : 대조선 국민군단 창설 (하와이 가훌루 아후이마누 지역)ㆍ대조선국민군단 사관학교 창설 → 1919 : 임시의정원 의원ㆍ외무차장 (상하이 임시의정원)ㆍ외무총장 (경성의 한성임시정부)
• 유일한(유한양행 창업ㆍ1895~1971)이 미국에 유학한 동안, 부친이나 다름없는 인물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유일한"은 "박용만"과 대립한 "이승만"을 좋게 생각하지 않았으며, 당시 미주 지역의 인식처럼 "박용만 암살의 배후가 김구의 임시정부라"고 여기고, "임시정부"에도 협력하지 않았다고 한다.
2. 이승만과의 관계
"이승만"은 "박용만"이 "의열단"에게 암살당하자, "의열단"을 강하게 비난하였다. "이승만"의 사상적 동지였으며, "이승만"을 "하와이"에 정착시켰다. "이승만"과 꾸준히 연락하며, 1918년부터 "이승만"에게 미국으로 건너올 것을 권고하였고, "이승만"을 "하와이"에 정착시키는데, 도움을 준 것도 "박용만"이었다. "미주"에서 "이승만"에게 밀려났고, "김구"의 임정에서도 비토당하다가 "의열단원"의 손에 죽었기 때문에, 정부수립 이후 정권이 수없이 바뀌는 와중에도, 좌우 어느 쪽의 지지도 받지 못해 인지도가 낮다. 사후에 "임시정부 반대파"로서, 정적이 많았던 "박용만"은 "임시정부 측ㆍ공산주의 세력"으로부터 일제히 공격을 당했다.
1904년, "보안회"가 주도한 "일제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에 반대하는 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일제에 의하여 "한성감옥"에 투옥되었다. 옥중에서 "이승만ㆍ정순만ㆍ이동녕ㆍ이상재ㆍ이시영" 등과 만나 의기투합, "옥중 동지"가 되었다. 석방된 후, 미국으로 건너가 "네브래스카 주립대학"을 졸업하였으며, 1911년부터 임시정부 수립을 주장하였다. 해외에서 임시정부를 수립하여 무장 훈련을 하고, 독립 전쟁을 일으키자는 것.
당시 하와이에는 이미 5,000여 명의 한인이 이주하여 살고 있었으므로, 하와이로 건너가 1914년 "대조선 국민군단"을 창설하여 군사훈련을 실시하였으며, "대한인 국민회" 결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1909년에 "네브래스카의 커니 농장"에서 "무장독립군 양성"을 목적으로 "한인소년병 학교"를 설립하고, 이후 "대조선 국민군단"을 설립해 지도하는 등 "무장투쟁 운동"을 벌인다. "한인 농장" 내에 "한인 소년병학교(The Young Korean Military School)"를 열어, 한인 청년생도들에게 군사훈련을 실시, 1912년 첫 회 졸업생 13명을 배출하였다.
"이승만ㆍ안창호ㆍ김규식ㆍ서재필" 등과 함께, 1910~ 1920년대의 "미국 내 한인교포사회"의 영향력 있는 인사이자, "재미 한인교민 지도자" 중의 한사람이었으나, "대한인국민회 하와이 지방 총회"의 자금을 둘러싼 "이승만의 공격"으로, 1916.10월 실질적으로 폐쇄된다.
한편 1913년, 하와이에 도착한 "이승만"이 "외교 독립론"을 주장하며 자리 잡자, 하와이 교포 사회는 "박용만 지지파ㆍ이승만 지지파"로 나뉘어 대립하게 된다. "이승만"과의 정치싸움에서 밀린 "박용만"은 주도권을 내주고, "대한인 국민회"에서 밀려나, 1918년 남은 지지자들을 모아 "대조선 독립단"을 창설하였다.
① 이승만과 만남
"강원도 철원"의 평민 가정에서 출생하였다. 출생 년도는 미상으로 1881년생 설이 유력하나, 1882년생 설과 "이승만"과 동년배라는 1875년생 설, 1879년생 설 등이 있다. 보통 그의 출생 년대는 1881년생 설을 채택하고 있다. 1904년, "보안회"가 주도한 "일제 황무지 개간권" 요구에 반대하는 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일제"에 의하여 "한성감옥"에 투옥되었다. 옥중에서 "이승만ㆍ이동녕ㆍ이상재ㆍ이시영ㆍ정순만" 등과 만나, 동지가 되었다. 출옥 후, "숙부 박희병"이 있는 "평남 순천"에 있는 "사립시무학교"로 가서, "유일한" 등의 소년을 가르치다가, 1904.12월 미국으로 건너갔다.
② 미국 망명ㆍ수학ㆍ이승만과 재회
1905.02월,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1905년 "네브래스카 주"에 있는 "링컨 고등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학년을 마치고 중퇴하였다. "미국 콜로라도 주 덴버"로 가서, 노동이민자를 위한 "한인 직업소개소"를 운영하며, "헤이스팅스 대학 정치학과"에 입학한다. 1907년, "헤이그에"서 개최하는 "만국평화회의"에 참여하는 밀사를 돕고자, "윤병구ㆍ송헌주"를 "헤이그"로 파견한다. 1908.03월, "스티븐슨"을 저격한 "장인환ㆍ전명운"의 변호 비용을 모금한다.
1908.07월, "콜로라도 덴버 시 그레이스 감리교회"에서 "해외 애국동지 대표자회의"를 개최하여, "한인군사학교 설립 안"을 제출하여 통과시킨다. 1908.09월, "네브래스카 주립대학"에 편입해, 정치학을 전공하면서, 군사학을 부전공으로 택하여 "ROTC 과정"도 이수하였다. 1908.12월, "네브래스카 주정부"에 "정한경"은 "커니 지방청"과 교섭하여, 마침내 헌법상에 없는 허락을 받아낸다. 그리하여 1909.06월, "네브래스카 주 커니"에 있는 "한인 농장" 내에 "한인 소년병학교(The Young Korean Military School)"를 열어, 한인 청년생도들에게 군사훈련을 실시하였고, 1912년 첫 회 졸업생 13명을 배출하였다.
1910년, "헤이스팅스 대학"과 협의하여, "한인소년병 학교"를 "헤이스팅스 대학구내"로 이전 한다. "김장호"에게 "소년병 학교"의 전권을 맡기고, "소년병학교" 유지를 위해 각 지역에 연조를 받아 보낸다. 1910.10월, "캘리포니아"를 돌아보고 돌아가는 길에 "신한민보의 주필"을 맡기로 결정한다. 1911.02월, "신한민보" 217~ 252호까지 제4대 주필로 활약하며, "무형의 정부 즉 가정부"의 필요성을 설파한다. 이 시기 "아메리카 혁명"(1911.01월 자신의 논문을 한글로 번역, 1914년 발간), "국민 개병설(1911)ㆍ군인수지(1912)"를 집필했다. 1911년, "샌프란시스코"의 "신한민보" 샌프란시스코 지국에 입사하여, 주필로 근무했다.
• 1911.02 : 대한인국민회 기관지인 "신한민보(The United Korean Weekly)" 4대 주필로 취임ㆍ217~ 252호까지 주필로 취임 된 직후, 무형의 정부, 즉 가정부의 필요성을 수개월간 주창하였으나 당시 여론은 이를 받아들이지 못함 → 1913.08 : 대한인국민회 하와이 지방총회의 기관지인 "신한국보"의 주필로 취임ㆍ박용만 취임 후, 신한국보를 "국민보"로 개명 → 1918.11 : 호놀룰루에서 주간신문 "태평양시사(The Korean Pacific Times)"창간. 주필 겸 사장 → 1921 : 대동(大同)발간. 북경 군사통일회의 기관지 1923.05월 당시 폐간된 "혁신보" 주필 → 1925.07 : 호놀룰루에서 태평양연안 국제신문기자대회(07.01~ 15) 한국대표로 참가
③ 이승만과 결별
1905년, 미국으로 건너온 "이승만"은 이후, "박용만"과 꾸준히 서신 연락을 주고받았다. 미국 체류 중, "네브래스카"에서 한 때의 옥중 동지 "이승만"을 재회하였다. 1912.12월, "박용만"은 "하와이"에 먼저 도착하였고, 1913.01월 "필라델피아"에 있는 "이승만"을 "하와이"로 초청한다. 1913.02.03.일, "박용만"과 함께 하와이에 정착했다. "이승만"은 "박용만"의 소개로 "하와이"에 정착한 뒤, "호놀룰루"에 거주하며, 교회 설립과 교육 운동에 주력했다. 그 뒤 "이승만"이 "105인 사건"을 폭로하는 "한국교회 핍박"을 출간하는데 서문을 써 주었고, 이승만의 옥중 저서 "독립 정신"을 번역ㆍ출간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이승만ㆍ박용만"은 "한성감옥"에서 만나, 호형호제하는 사이로 둘 다 독립운동에 뜻을 두고 있었다. 한때 "결의 형제"를 할 만큼, 일생의 동지였던 두 사람은, "독립운동 방법론ㆍ국민회 기금"을 둘러싸고 대립하여 결국 정적이 되고 말았다. "이승만"은 "박용만"의 독립운동에 협력하였으나, 이후 "이승만"이 "무장투쟁론"에 회의를 제기하면서 둘의 관계는 금이 가게 된다. "박용만ㆍ이승만"의 갈등, 또한 "안창호 계열"과의 경쟁, 암투 관계는 1915~1918년까지의 "하와이 교민 집단"과 "미국 내 한인교포 집단"을 "3개 집단"으로 쪼개 버렸다.
3. 무장투쟁론 → 신천지 계획
1919년, 임시정부의 "외무 부총장"에 선임되어 주로 중국에서 독립군 단체들의 통합을 위하여 노력하였으나, 그 뒤 "임정"에 실망을 느껴 "임정 반대자"로 바뀐다. 그 뒤 "무장 투쟁론"을 버리고, 새 계획을 세우는데 그것이 "신천지 계획"이다. "현재의 조선 반도는 지역이 협애하여 도저히 독립군으로 만들기 부족하다. 구조선의 영토였던 시베리아 및 만주, 몽고의 땅을 근거로 하여 조선인을 여기에 이주시켜 발전을 추구하여 사실상 동포의 영유로 귀속하게 할 것이다."
조선 반도는 독립국가로 만들고 지키려하기엔 땅이 너무 좁아서 대신 시베리아ㆍ몽고ㆍ만주를 "고조선의 땅"이었다고 주장하며, 거기서 독립군 기지를 세우자는 사상이다. 그러기 위해 1925년, "하와이"로 가서 동포들을 설득하려한다. 자신이 조사한 "만주"를 설명하여 동북아 대륙은 땅이 넓은데 인구가 적다고 설명한다. 그렇기에 "한 민족이 영주하고 토착하여 자손의 발전을 꾀하기에 최고로 적합한 땅인 것을 의심한 여지가 없다"고 주장한다.
결국 1928년, "박용만"은 "중국 텐진"에 잠입하여, 군사단체 수립을 위한 모금활동을 하던 중, 독립운동가의 손에 암살당했다. 한때 "이규준(이석영 장남)"의 소행으로 알려졌으나, "이규준"은 20살의 나이로 병사하는데 "박용만"이 사망할 때는 "이규준"이 사망한지 1년 후이다. 그러나 암살에 대해선 뒷말이 많은 편이다.
4. 박용만은 친일파?
1928.10.16일, "박용만"은 "베이징"에서 일제의 이간에 의한 "친일파"라는 누명을 쓰고 있었다. 2명의 의열단원 "이해명ㆍ백 모씨"가 "대륙농간공사(大陸農墾公司)"를 찾아와 "조선혁명사업에 쓰겠다."며 1,000만원을 요구하였다. 박용만이 이를 거절하자, 두 사람 가운데 1명이 총을 들어 사살하였다. 그가 숨을 거둔 곳은 "사택 마당"으로, 당시 현장엔 후처인 "웅소청"과 측근들이 있었다.
"하와이"에서 건너와 있던 "독립단원 김문괄"은 현장에서 옥신각신하던 끝에, 왼쪽 손에 총상을 입었고, 그 직후 "하와이 독립단원"으로 북경에 와 있던 "김홍범ㆍ노주현"이 "신한민보"에 기사를 제공했다. (1928.11.15 신한민보 1면)
그리고 암살의 배후는 "김원봉의 의열단"이었다. "김원봉"이 이에 대해 직접 증언을 하였는데, "박용만"이 밀정이었다고 모함하는 내용이었다. 그가 변절하여, "일본의 밀정이 되었다"는 의혹은 "의열단원들"에 의해 제기되었다. 그가 "조선총독부"에 매수되어, "일본의 스파이 노릇을 했다"는 주장이다. 그리하여 변절자를 없애버리기 위해, "이해명"을 보내 총살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일본의 밀정ㆍ스파이 행위를 했다"는 자료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임시정부 반대파"였던 "박용만"을 정적으로 여기고 있던, "임시정부" 측 일부에선 공개적으로 "이해명"을 영웅화했고, "이해명 구명운동"을 펼친다. 이들을 통해 중국 고위층과 연결된 덕분인지 "의분에 의한 살인"으로 인정되어, 징역 4년만 살고 나왔다고 한다.
"박용만 암살"은 당시 "독립 운동계"의 극심한 분열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박용만 암살사건"을 계기로, "미국 내 한인 교포사회"의 "상하이 임시정부ㆍ상하이 무장 투쟁론자들"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심어주는 빌미를 제공하였다. 암살 소식을 접한 "서재필ㆍ안창호ㆍ이승만" 등은 "재 중국 무장투쟁론자들"을 대대적으로 성토하였다.
※ 이구연 (원산 출신ㆍ가명- 이해명ㆍ박인식) : 암살 후, 수사관 에게 자신의 진짜 이름은 "박인식"으로 밝혔다. "의열단(김원봉) 단원"으로, 그의 상관은 공산주의자 "김시현"이었다. "박용만" 암살 이전, 행적은 전혀 알려진 바가 없으나, 암살사건 이후 5년의 수감을 마치고, "임시정부"에 가담하여 활동하다가, 후에 "한국전쟁" 중 "대전 전투"에서 전사한다.
동아일보(1928.10.26일자) 기사에 의하면, "박인식(이구연 가명)등이 그에게 돈 1천만 원을 줄 것을 요구했으나, 박용만이 이를 거절하면서 언성이 높아졌고, 암살의 원인이 되었다. 지난 16일 밤, 중국 북경 숭문외 2조에 있는 대륙농간공사 안에서 박용만 씨가 조선인 청년 두 사람의 권총에 무참히도 참살 당하였다는데, 내용은 가해자가 나타나서 독립운동의 자금으로 쓰겠으니, 1천만 원만 내어 놓으라고 간청하므로, 객청으로 데리고 가서 언성이 높아지고 거절을 당하자, 가해자는 즉시 박용만 씨를 향하여 권총을 발사하여, 3군데 중상을 입힌 결과, 마침내 절명하였다는 바, 가해자의 한사람은 자칭 박인식으로 의열단에 가담한 사람이라 한다.
그는 기미년 초에 상해 임시정부 군무총장의 지위에 있다가 취임하기를 거절하고 바로 북경으로 가서 모종의 운동을 하다가 최근에 개척사업을 하기 위하여 공사를 만들어 활동하던 중, 그와 같이 참살되었다는 바, 그는 일찍이 하와이로 건너가서 여러 사람들과 연락을 취하여 독립운동에 종사한지 20여 년이었고, 금년 4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한다."
5. 의혹
① 일제 협력 설
"일제 밀정"으로 지목되는 이유로는 1928년 그가 "베이징"에 도착하기 전에 "대륙농간공사(大陸農墾公司)"를 운영하면서, 비밀리에 국내에 잠입, "조선총독부 고위 관계자들과 밀담을 하고 돌아왔다"는 주장이다. "김달하"가 "총독부와 연결시켰다"는 설이 있었으나, 사실여부는 확인되지는 않았다. "박용만"과 "독립운동 방법"을 놓고, 갈등했던 "이승만ㆍ안창호"는 그가 밀정에게 협력할리가 없다고 했다. "박용만"의 전력으로 보아, 그렇게 쉽게 "변절할 인물이 아니다"는 것도 그를 아는 사람들의 한결 같은 인식이었다.
"이구연"이 구실로 삼은 "박용만의 변절설"은 "1924년 박용만이 조선총독부 사이토 마코토 총독을 만났다는 것인데, 이 일에 대해서는 박용만 스스로도 자신이 일본 총독을 만났다"고 했다. 이는 당시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기 위한 "삼국(한ㆍ중ㆍ일) 협상"에 "조선민족의 대표"로 선출되어 이루어진 것이라는 증언이 나오고 있고, 당시 "박용만파" 인물들은 이 일에 대해 전혀 동요가 없었으나, 정적관계였던 인물들에겐 좋은 표적이 되었다. "대륙농간공사"에서 일했던 "박용만"의 부하직원에 의하면, "박용만이 총독부 밀정 기후지(木藤ㆍ일본 외무성 촉탁)에게 속아서 돈 30만 원을 지원받겠다고 입국했다가, 지원이란 말 뿐이고, 2만 원의 여비를 받아가지고 돌아온 관계로 "의열단"에서 격분해서 그를 사살한 것"이라고 진술했다.
② 금전 갈등ㆍ일제밀정 논란ㆍ의혹
"동아일보(1928.10.26.일자)" 보도에 의하면, "박인식(이구연 가명)" 등이 그에게 독립운동 자금 1,000만 원만 내놓을 것을 요구했고, 그가 거절하면서 총격이 발생했다고 보도했다. "의열단"은 즉시 반론을 제기했다.
의열단 측 해명에 의하면, "박용만이 20여 년 동안 독립운동에 헌신했고 상해 임정에서도 초대 외무부장, 다음에 군무부장을 역임한 애국투사였다는 것도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박용만이 그간 변절했다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고, 의열단은 은밀히 그의 동정을 감시해왔다. 그는 그때 북경에 와 있던 "일본 외무성 촉탁 기후지(木藤)"란 자와 은밀히 접촉해왔고, 또 국내로 들어가서 "총독 사이토 마코토"를 만나보고, 그 길로 북경으로 오지 않고, 일부러 블라디보스토크를 돌아, 북경에 돌아와서는 개척 사업을 하겠노라고, 대륙농간공사란 것을 만들었다. 그가 조선총독과 만난 것은 일제의 주구가 되어 옛 동지들을 왜적에게 팔려는 의도였음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의열단은 이 추악한 변절자를 그냥 놓아둘 수가 없었다. 의열단은 박용만에게 마침내 사형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그러면서 "박용만에게 군자금 1천만 원을 요구했다가 거절당하고 사살 당했다는 것"은 허무맹랑한 보도라고, "동아일보"를 비롯한 일부 신문을 비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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