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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 현대사)/인물

군인 : 장도영 (1923)ㆍ육참총장ㆍ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by 당대 제일 2022. 1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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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도영 (張都暎ㆍ1923~ 2012ㆍ89세)"은 1961년 "5ㆍ16군사정변"이 성공하자, "군사혁명위원회 의장ㆍ계엄사령관ㆍ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ㆍ 내각수반ㆍ국방부장관"으로 추대되었다. 07.03일, "정변 주체세력"에 의해 해임되고, "장도영 반(反)혁명사건ㆍ반혁명 음모혐의"로 구속되었다. 08.22일 "중장"으로 예편되었다. 이후 "박정희의 중앙정보부"에 의해, "반혁명 혐의"로 기소되었다. 이 때 "장도영"을 체포 연행한 이가 "노태우 대위"였다.

 

1. 장도영 (張都暎1923~ 201289)

군인육군참모총장(장면 내각 2번째)국방부 장관(12)정치가교수ㆍ 516군사정변 직후 - 군사혁명위원회 의장계엄사령관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초대)ㆍ1963년 미국으로 건너가, "위스콘신 대학" 교수(1969~1993)

"반혁명사건"으로 1962.01.10 "사형"을 선고받았고, 1963.03,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5 "형 집행 면제"로 풀려났다 1963, "미국"으로 건너가, 1969 "위스콘신 대학교" 교수를 지냈고, 1993년까지 교수로 재직하였다"미국 플로리다 주 올랜도"에서 "알츠하이머병파킨슨병"의 합병증으로 투병하다가 사망했다.

•  출 생 : 일제 강점기 평북 용천      •  사 망 : 미국 플로리다주 올랜도        •  사 인 : 합병증(알츠하이머병파킨슨병)

•  학 력 : 평북 신의주고등보통학교 일본 도요대학교 철학과 학사 미시간 대학교 대학원 정치학 석사 미시간 대학교 대학원 정치학 박사   •  : 백형숙 (재혼)      •  자 녀 : 41녀    •  수 상 : 태극무공훈장미국 은성훈장

•  경 력 : 1944~1945 : 일본제국 육군 소위  1946~1961.08 : 육군 중장  1961.05~06 : 국방부 장관 (12)  1961.02~06 : 육군 참모총장  1961.05.16~05.18 : 계엄사령관군사혁명위원회 위원장  1961.05.18~07.03 :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1969~1993 : 위스콘신 대학 교수

장도영

 

2. "장도영 중장(육참총장)""진압군"인가? "쿠데타군"인가?

"장도영" 양다리 = 정부군(육참총장) / 쿠데타군(군사혁명위원회 의장ㆍ계엄사령관)

쿠데타 당시, 총 지휘관은 박정희 소장ㆍ쿠데타 직후, 공식 총 지휘관은 장도영 중장(육참총장)ㆍ전면에 내세운 이유 : 장도영은 친미파반공주의자육군의 수장이라는 상징(명분 강화)

516PM 4:30, "장도영"군사혁명위원회 의장계엄사령관 수락 

05.16, "민주당 정권" 하에서의 정치적 혼란을 틈타, "박정희 소장""516 군사정변"을 일으키자 이에 대해 적극적인 반대나, 찬성을 하지 않는 모호한 태도를 보여, "사실상 군사정변을 방조하기도 했다"는 의혹이 있었지만, 본인은 당시 "쿠데타 음모""하루 전"에야 알았고,,"쿠데타 세력"에 대해 "방첩대"를 동원해 조사를 실시했으나 거짓보고로 실패했고, "쿠데타 동조 세력이 아니었다."주장했다. (쿠데타 파악을 못했던 것인지? 막아준 것인지?에 대해, 생존 시에 명확한 대답을 회피했다.)

1961.05.09, "516 군사정변" 1주일 전, "장면 총리"는 확인하기 위하여 "장도영 중장(육참총장)" 불렀다. "장면"이 입수한 정보는 "박정희 소장을 주동으로 한, 일부 군인들이 쿠데타 모의를 진행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4번째 정보였다"장면"은 자신이 입수한 정보를 "장도영"에게 전하고,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인가?"라고 물었다이 말을 들은 "장도영""천만의 말씀이십니다. 그런 일이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한다"장면"에 의하면, "참모총장이 먼저 알아서 나에게 보고해야 될 성질의 사건을, 반대로 내가 참모 총장에게 지시하고 있으니, 책임지고 내사해 보시오." 이러한 내 말에도 "알 아는 보겠습니다만, 그럴 리가 없습니다."는 대답이 반복될 뿐이었다는 것이다.

3. 1961.07.03: 장도영 반()혁명사건반혁명 음모협의로 구속 (노태우 대위 연행)

"516 군사정변" 이후, 표면상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직혁명 내각수반 직"에 있던 "장도영 중장"의 추종세력 44명이 1961.07.03"반혁명음모협의"로 구속됐다내각수반 "장도영""516 군사정변" 당시, "참모총장"으로 "쿠데타군"의 출동을 저지하기 위해, "한강다리" 위에 "헌병" 등으로 구성한 "저지군"을 투입, 총격전을 벌이게 했다"최고회의 의장 겸 내각수반"이 된 뒤에도 "참모총장직 겸임해제 조항"을 삭제키 위해, "최고위원"을 포섭하려 했다이에 실패하자, 측근 세력을 규합하여, "중앙정보부"의 권한을 제한폐지하고, "쿠데타 주동세력을 제거하려 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처음에는 끌려 들어가 듯, "쿠데타 진영"에 참가한 "장도영 육참총장""쿠데타 성공"이 확연해진 1961.05.16일 오후, "군사혁명위원회의장계엄군 사령관직"을 공식 수락하고 취임했다이어 05.19, "쿠데타군"의 평의회인 "국가재건 최고회의의 의장"으로 취임했으며, 20일에는 "임시정부 내각수반국방장관" 자리까지 차지했다이미 "육참총장" 직을 보유하고 있던 그는 형식상 "정부"을 완벽하게 장악했다그러나 그는 "반혁명사건"으로 1962.01.10"사형"을 선고받았고, 이후 "형 면제"로 풀려나, "미국 망명길"에 올랐다.

4. 장도영 육참총장 제거 (김종필 증언)

"장도영 의장"은 가장 경계해야 할 존재 :  5개 직책(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ㆍ내각수반ㆍ국방부 장관ㆍ육군참모총장ㆍ계엄사령관)등 한 손에 있었다.  "육사 5기, 1961.07.03일 박정희 친다" 첩보ㆍ자칫 잘못하면 혁명 결딴날 위기ㆍD데이 새벽, "장도영" 급습ㆍ자택 연금, "왔구먼, 이제 왔어" 체념ㆍ"박치옥" 등 반혁명 세력 44명 체포, JP "혁명, 일사불란해야 할 시점"

"JP"에게 늘 의문의 인물이 있었다"5개 직책(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내각수반국방부 장관육군참모총장계엄사령관)"을 한 손에 쥐고 있던 "장도영"이다그는 "혁명세력"에게 있어서 가장 경계해야 할 존재였다"JP(중앙정보부장)" 그를 체포하기로 결심했다"박정희 부의장"에겐 비밀로 부쳤다.

1961.05.24, "장도영"은 난데없이 기자회견을 통해, "케네디 미국 대통령을 직접 면담하기 위해 미국을 방문키로 했다"고 발표했다. 전날인 23일엔 "박정희 부의장""매그루더 사령관"과 회동하는 등 "미국"이 혁명정부를 인정하도록 하기위해 노심초사(勞心焦思)하던 시기였다.

"장 의장"의 발표는 우리와 사전에 상의 없이 이뤄져, "도대체 무슨 뜻을 품고 있을까"라는 의심이 들었다"케네디 대통령"을 만나서 무슨 언질을 받아, 엉뚱한 일을 벌일지도 모른다는 의구심도 생겼다그는 또 사흘 뒤엔 "비상계엄""경비계엄"으로 바꿨다. 이 역시 우리와 사전 협의가 없었다"장 의장" 속을 알 수 없었다"혁명" 전후 그의 "기회주의적인 행적"은 나의 주시 대상이었다거사를 준비하고 있던 04.10일에도 그는 "박정희 소장"을 통해 내가 작성한 "혁명계획서"를 전달받았지만 끝내 반환하지 않았다.

"516 새벽"엔 한강 다리를 건너던 "혁명군"에게 발포를 명령하더니 오후엔 "혁명 지지" 쪽으로 돌아섰다. 나는 이제 "중앙정보부장"으로서 "혁명"을 흔드는 세력을 눌러야 했다05.31, "장 의장"AP통신과 회견을 통해 08.15일을 전후해 "민정이양을 할 수 있다"는 취지로 발언했다. 그것은 미국의 눈치를 보고 "윤보선 대통령"의 내심을 반영하는 내용이었다.  그뿐 아니라, "장도영"의 인맥이 "최고회의내각국영 기업체"를 속속 파고들어 세력을 확대하고 있는 게 눈에 보였다죽음을 각오하고 이 나라를 "근대화"하겠다고 시작한 혁명이었다나는 그의 언행이 "혁명의 대업을 방해하는 것"이라고 판단했다"반혁명"을 도려내는 악역을 맡아 할 사람은 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최고회의" 구성원은 32명으로 당연직과 외부 인사를 뺀 핵심 주체는 25명이었다그중에서 "장도영(평북 출신) 의장"과 같이 고향을 북한에 둔 사람이 21명인 반면, 남쪽 출신은 4명에 불과했다. 그는 "이북 출신" 최고위원들을 "박정희 소장"에게서 떼어 놓으려 했다"최고회의" 분위기가 "박 소장JP육사 8기 동기생들"의 뜻과는 다르게 흐르기도 했다더 이상 두고 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자칫 잘못하면 "박정희 부의장"이 결딴날 수 있었다"장 의장"에게 집중된 권한을 줄여야 했다이를 위해 06.03"국가재건최고회의""최고회의 의장은 타직(他職)을 겸임할 수 없다"는 조항을 의결했다"최고회의법"에 따라 국정을 총괄할 "상임위원장직""박정희 부의장"이 맡게 되자, "장 의장" 노골적으로 반발했다. 자기와 친한 최고위원들을 불러 "나를 허수아비로 만들 셈인가. 박 장군과 나를 놓고 신임투표를 해 볼까"라며, 분노했다"516"을 전후해, "장 의장"을 중심으로, 군내 "족청(族靑)" 중 일부 이북 출신 인사들은 뚜렷한 세력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족청계""이범석(초대 국무총리)"가 조직한 "민족주의청년단"의 약칭이다.

06.06, "최고회의""장 의장"의 반발을 의식해, 의장이 "내각수반(국무총리 역할)"은 겸임할 수 있도록 "가재건 비상조치법안"을 수정했다하지만 "장 의장""군 지휘권의 상실"을 견딜 수 없어 했다"중앙청의 내각수반" 방에 들어앉아 측근들과 함께 무슨 일을 꾸미고 있다는 정보가 계속 들어왔다.  거사 때, "6군단 포병단장"이었던 "문재준(육사 5) 대령""장 의장"의 측근으로 05.21일자로 "헌병감"이 됐다. 그는 공개적으로 "박 부의장"에게 대들었다06.27, 신임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된 "김종오 장군"에게 비행(非行)이 있다면서 그를 예편 대상자 명단에 올려놓고, "박 부의장"한테 결재를 요청했다그러자 "박 부의장"이 안정적인 군내 환경이 필요하다며, "재고하라"고 지시했는데도 "문재준 헌병감" 막무가내였다.

급기야 "박 부의장""건방진 자식, 혁명은 너 혼자 했느냐"고 호통을 쳤다그렇게 "박 부의장"의 혁명 지도력을 흔드는 일이 여기저기서 잦아졌다"문재준""박 부의장"의 질책을 받은 뒤, "박치옥 공수단장" 등과 만나 "07.03일 박정희와 김종필을 해치우자"고 모의하고 병력 동원계획까지 세웠다. 이 첩보는 사전에 "정보부"의 정보망에 걸려들었다.

나는 "장 의장"을 제거하기로 결심했다. (1961.07.03.) "박 부의장"에게 보고할 것인가, 말 것인가, 무척 고민했지만 결국 보고하지 않기로 했다"인디언 아파치족""미군 토벌대"와 맞서 싸우기 전, "Now you die(너 이제 죽는다)"라고 외치며 달려들었다고 한다. 나는 그런 심정으로 "장 의장"을 겨냥했다"장 의장"은 그런 우리의 움직임을 예감했는지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중앙청 내각수반실" 안의 부속실에 머물렀다. "내각수반실"엔 권총으로 무장한 헌병 10여 명이 늘 그를 호위하고 있었다나는 "중앙정보부" 요원 20여 명을 동원하고, 헌병대의 지원을 받아, 07.02일 오후 "장도영 체포" 지시했다. 이튿날 새벽, "정보부 요원들"의 기습적인 "중앙청 진입"에 헌병들은 저항하지 못했다"장 의장"은 자택에 연금됐다.

그 직후 내가 장 의장 집으로 갔더니, "왔구먼, 이제 왔어", 체념하는 투였다. "각하, 제가 앞으로 어떻게 해 드리면 좋겠습니까"라고 물었다"장 중장""아무것도 하지 않을 테니, 나 미국에만 보내 주게"라고 답했다나는 "좋습니다. 미국에 보내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가시기 전에 약식(略式) 군사재판은 거치셔야 합니다"고 했다. "장 의장"을 연금한 후, "박 부의장의 장충동 공관"을 바로 찾아갔다.

JP = 장 의장을 체포해 집으로 모셨습니다. 이제 군사재판에서 따질 것을 따져야겠습니다. 대신 "미국으로 보내 달라"고 하시길래, "그러겠다"고 했습니다. 각하가 동의해 주셔야겠습니다.     박정희 = (아주 놀란 기색으로 눈이 휘둥그레지며) 아 어쩌려고 그런 일을 벌였나, 그런 일을      JP = 어차피 겪어야 할 혁명의 과정입니다. 놀라실 일 없습니다. 일이 잘못되면 전부 저를 추궁하십시오.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박정희 = 한참을 생각하더니 "그럼, 할 수 없지"라고 했다.

"박 부의장""장 의장"에 대해 고마움과 애틋함이 있었다"좌익 혐의"로 문관으로 쫓겨나 있던 "박 부의장""소령"으로 최종 원직 복귀시켜 준 사람이 "의장"이었고, "보안 심사"에 걸려 강제 예편 위기에 몰렸던 "박 부의장"을 자기 밑의 "2군 부사령관"으로 받아들인 것도 "장 의장"이었다

"박 부의장""장 의장""반혁명 혐의"로 군사재판을 받을 때, "혁명에도 의리가 있다"는 감상을 드러냈다"장 중장"의 연금과 함께 그에게 붙어 "반혁명"을 도모하던 사람들도 모두 체포했다이때 체포된 사람이 44명이다"송찬호(고사포 여단장최고위원)문재준(헌병감최고위원)박치옥(공수단장최고위원)이회영 대령(내각수반 비서실장)안용학 대령(최고회의 의장 비서실장)"등 육사 5기생들이 대거 포함됐다.

"장도영 중장"은 나중에 풀려나 "미국"에 건너갔다공부를 더해서 93년까지 "미시간대학"에서, 교수 생활을 했으며, 2012년 타계했다세상을 뜨기 전, 그는 한 측근을 내게 보내 이런 말을 전했다"나는 박정희나 김종필 당신에게 조금의 유감도 없다."는 내용이었다

"장 의장"과 그 주변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체포는 "516" 이후 발생한 1번째 "반혁명사건"이다"반혁명사건"을 혁명 주체의 내부 분열 혹은 주도권 다툼 같은 권력 투쟁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실 병력동원의 지휘자들이었던 "육사 5기 세력"과 기획행동 실무를 주로 맡은 "육사 8"의 충돌이라는 시각도 있다"장 의장"을 명예롭게 퇴진시킬 순 없었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다

이들은 대부분 거사를 함께한 동지였다그들을 체포할 때, 고뇌와 아픔이 없을 수 없었다하지만 혁명을 지켜나가기 위해, "일사불란함"이 무엇보다 필요한 시점이었다작은 분열이 삽시간에 전열을 무너뜨릴 수 있다. 안타깝지만 당시로선 어쩔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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