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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 • 현대사)/인물

군인 : 김종오 (1921)ㆍ백마고지 신화ㆍ625전쟁시, 춘천 사수

by 당대 제일 2022. 1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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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오 (金鍾五ㆍ1921~1966ㆍ45세)"는 1950년, "6ㆍ25전쟁" 개전 당시, "제6사단 사단장 (육군 대령)"으로 "춘천~홍천 전투" 승리했고,  "백마고지 신화"를 만들었다. (사단장으로, "백마고지 전투"에서 "중공군"과 전투를 벌여 승리)

 

1. 김종오 (金鍾五1921~196645)

일본제국 육군 소위(1944~45)한국 육군 대장(1946~65)ㆍ육군참모총장국가재건최고회의 최고위원ㆍ청주시 부강중학교부강 공업고(, 세종하이텍 고등학교) 설립자

•  출 생 : 충북 청원군 부강면     •  사 망 : 서울 신당동 자택      •  사 인 : 폐암

•  : 산남(山南)    • 학 력 : 일본 주오 대학교 법학과 중퇴(학도병)군사영어학교 1

• 참 전 : 백마고지 전투춘천 전투ㆍ동락리 전투영천 전투현리 전투    • 수 상 : 태극무공훈장 포함 17개 훈장

김종오

2. 백마고지 전투

"625전쟁" , 가장 치열한 격전이 일어났던 곳들 중의 하나인 "백마고지 전투"를 진두지휘하였다1952.10, "철원" 북방의 "395고지(백마고지)"를 확보하고 있던 "9사단""중공군(3개 사단)"공격을 받고, 12회에 걸친 뺏고 빼앗기는 처절한 사투를 벌여, 10.15일 최종적으로 "중공군"을 격퇴, 이 고지를 사수하였다.

그는 적시 적절한 "예비대 투입부대 교대강력한 포병항공 전력을 이용한 입체적인 화력 지원필승의 신념을 고취시킨 정신교육" 등으로 장병들의 사기를 북돋아 줌으로써, "철의 삼각지"를 점령하려는 적의 전략적 목적을 좌절시키는데 성공했다"백마고지 신화"를 창조해낸 그는 이후, 휴전 때까지 "육군사관학교 교장"으로, "보직 정예 초급간부" 육성에 매진하였다.

※ 철의 삼각지 (1951.09~1953.07.13) : 김화ㆍ철원ㆍ평강을 잇는 지도상의 개념

"중부전선"에 위치한 곳으로, 도로망이 여러 곳으로 발달한 전략요충지ㆍ"625전쟁" ,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곳으로, 결국 "김화철원"은 남한의 영토로, "평강"은 북한의 영토로 확정되었다 1951.09, "북한""중국 인민지원군"과 함께, "철의 삼각지" 안의 "백마고지수도고지저격병능선" 등을 집중적으로 하여 대공세를 전개했다. 이곳의 전투는 휴전이 성립되기 직전인 1953.07.13일까지 마지막 공세세가 계속되던 곳이다.

3. 인민군의 남진 저지

1950, "625전쟁"이 발발하자, "6사단"을 지휘, "춘천~ 홍천 전투"에서 사단 작전지역 내에 존재하는 천연 장애물인 "소양강북한강홍천 큰말고개" 등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인민군의 남진"을 저지, 북한의 전쟁 초기 전략을 좌절시키고, 국군 주력부대들이 한강 방어선을 구축하고, UN군이 참전할 수 있을 시간을 버는 데 성공했다이로 인하여 향후 전쟁의 양상을 반전시킬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는데, 그의 공로는 대단히 크다이후 남쪽으로 후퇴하면서, "지연전"을 계속 벌이던 와중 일어난 "동락리 전투"에서 휘하 "7연대 2대대"가 단독으로 적 "1개 연대"를 기습전멸시켜 승리로 이끌었다참고로 이 전투는 "국군"이 최초로 "인민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전투이다.

그 뒤 계속 남하하며, "수안보이화령" 전투 등에서 북한군의 남진을 계속 지연시켰고, 이러한 전공을 인정받아 그는 1950.07.15"육군 준장"으로 진급하였다그 뒤, "낙동강" 부근에 최후의 방어선이 형성되고, 이를 방어하기 위한 "영천 전투"가 벌어지는데, 그의 "6사단""신녕(新寧) 지구"에서 "북한군 8사단"에 재기 불능 상태가 되어버릴 정도로 막대한 타격을 주어, 아군에게 반격작전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공헌했다

덕분에 "김일성"이 직접 "남조선의 사단 중, 제대로 된 사단은 6사단밖에 없으니, 그걸 깨부셔야 한다."는 언급을 할 정도로 피아 모두에게 유명해졌다이후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해, "국군UN"이 북진을 공격적으로 하는 와중, "7연대 1대대"10.26일에 최초로 "압록강 변 초산"을 점령해, "압록강 물"을 수통에 담아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내기도 하였으나, 이 무렵 그는 교통사고를 당해 후송 당했다.

4. 연이은 시련 : 중공군의 대규모 공격 시작

문제는 사단장이 부상당한 때, "중공군이 대규모 공격을 시작했다"는 점이다결국 "6사단""초산"에서 후퇴하다가 심각한 타격을 입었으며, 특히 "7연대"는 엄청난 타격을 입고 병력만 분산 철수해서, 전투력을 거의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다이것이 "김종오 장군"1번째 대패였는데, 일단 책임은 "중공군 개입"을 가볍게 본 "맥아더"를 위시한 "UN군 총사령부"에게 있었지만, "김종오" 입장에서도 정말 기분 좋지 않은 일이었다.

부상에서 회복된 후에는 "3사단장"을 맡았지만, 곧바로 참가한 "현리 전투"에서 패배를 맛보았다패배의 책임은 상관인 "3군단장 유재흥"에게 돌아갔지만, 역시 여기서도 사단이 통째로 붕괴되고 모든 장비를 버린 채, 혼란에 빠진 병력들이 무질서하게 산으로 흩어져서 후퇴하는 등의 추한 모습을 연출했고, 이는 명장으로 이름을 날린 그에게 대단히 수치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후 "중공군"의 남하로 전선이 교착됨과 동시에, "휴전협상"이 진행되자 휴전 후, 유리한 고지를 획득하기 위해 "고지쟁탈전"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1952.05, "김종오 장군""중부전선"의 전략적 요충지인 "철원지역"을 담당하는 "9사단장"에 임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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