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병덕 (蔡秉德ㆍ1916~1950ㆍ34세)"은 일제 패망 시, "육군포병 중좌"로서, 경기도 부평에 있는 "육군 조병창 공장장"으로 근무했다. "야전군" 지휘 경험이 없는 "병기 장교 출신"은 "참모총장"으로서는 문제가 많았다. 1950.06.28일, 새벽 2:30, "한강 인도교 폭파 시", 실질적 책임자이다. 169cm /100kg에 달하는 비만이었다.
1. 채병덕 (蔡秉德ㆍ오시마 헤이도쿠ㆍ1916~1950ㆍ향년 34세)
일본제국 육군 군인(중좌ㆍ중령ㆍ공병ㆍ중포 장교)ㆍ육군 군인(중장 추서)
• 출 생 : 평남 평양부 이향리 • 사 망 : 경남 하동 • 사 인 : 전사 (6ㆍ25 하동전투)
• 별 칭 : 코끼리 (북한 연락부 암호명으로도 사용된 것으로 추정) • 학 력 : 평남 평양종로보통학교ㆍ평양고등보통학교 → 일본 육군사관학교ㆍ일본 육군포병학교 → 대한민국 군사영어학교 1기
• 장인 - 백홍석 (일본 육군사관학교 27기ㆍ중좌 (중령))
• 경 력 : 1937~1945 : 일본군 육군 소좌(중령)ㆍ태평양 전쟁 참전ㆍ육군 조병창 공장장(경기도 부평) → 1948.08월 : 국방부 참모총장 (준장,ㆍ2세)- "육군ㆍ해군"의 통합 지휘관 → 1949.05월 : 국방부 참모총장 직책 변경→ 육군총참모장 (2대) → 10월 : 육군총참모장 해임 → 1950.04월 : 육군총참모장(4대) 겸 육해공군총사령관→ 육군 중장(추서) → 1950.06.28일, 새벽 2:30- "한강 인도교 폭파 시", 실질적 책임자 → 1950.06.30일, "맥아더"에 의해, "육군참모총장"에서 해임→ 경남지구 편성군 사령관으로 좌천
2. 서울사수 공언ㆍ맥아더의 해임건의
1945.03월, "여운형ㆍ조동호"가 조직한 "건국동맹" 세력과 2차례 접촉, 유사시에 "무기 공급에 대한 지원"을 약속하였으며, 148.12월, "국방부 참모총장"이 된 "채병덕 준장" 임명 당시 32세였다. "국방부 참모총장"은 "육군ㆍ해군"의 통합 지휘관이었다. 1949.05월, 이 직책이 없어지면서, "채병덕"은 "육군총참모장(제2대)"이 됐다. 그 해 10월 해임됐다가, 1950.04월, "육군총참모장(제4대) 겸 육해공군총사령관"으로 임명됐다.
1950.06.28일, 새벽 2:30, "한강 인도교 폭파 시", 실질적 책임자이다. 1964년 "한강 인도교 폭파"에 대한 재심에서, "채병덕이 실질적 책임자"인 것으로 결론지어졌다.
1950.06.25일 오후 2시에 열린 국무회의에서 채병덕은, "적 공격은 전면전이 아닌 것 같으며, 이주하ㆍ김삼룡을 탈취하기 위한 책략으로 보인다."고 답했다. 06.26일 오후, 국무회의에서는 "서울 사수"를 공언하였고, "명령만 있으면, 나흘 안에 평양을 점령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기도 했다.
1950.06.28.일, "한강철교"가 폭파되자, "맥아더"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도쿄"에서 날아와, 잠시 "이승만"을 만났을 때, "채병덕의 해임을 건의했다"고 한다. 1950.07.27일 "하동 고개"에서 "인민군 6사단"의 "매복 작전"에 걸려들어, 전사했다.(하동 전투) 훗날 "채병덕 살해 음모"가 제기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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