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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 • 현대사)/인물

군인 : 차일혁 (1920)ㆍ빨치산 토벌대장ㆍ이현상(남부군) 사살

by 당대 제일 2022. 1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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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일혁 (車一赫ㆍ1920~1958ㆍ38세)"은 "남부군 총사령관(빨치산) 이현상" 일파를 사살ㆍ체포하고, 사살된 "이현상 시신"을 직접 화장하여 뿌려주었다 한다. 70명의 결사대원으로 2,000여명의 적을 격파하였다. "(화엄사)절을 태우는 데 한나절이면 족하지만, 절을 세우는 데는 천년 이상의 세월로도 부족하다며, "화엄사 대웅전" 등의 문짝을 떼어내어 문짝만 소각하여, 화엄사 소각을 저지하였다.

 

1. 차일혁 (車一赫1920~1958향년 38)

독립운동가(조선의용대반공유격대)경찰관(총경빨치산 토벌대 대장)충주직업 소년학원 설립자ㆍ"조선의용대(1938~1943)"에서 "팔로군"과 함께 항일 유격활동, 해방 이후에는 "유격대" 조직해 "북한 인민군"과 교전 중 "경찰관"으로 채용되어, "빨치산 토벌대 대장"으로 참전

•  출 생 : 전북 김제군 금산면 성계리    •  사 망 : 충남 공주군 공주읍 금강    •  사 인 : 익사 (수영 도중 심장마비)자살하였다는 설도 있음     •  별 칭 : 차갑수(호적상)차용철(족보상)차철

•  학 력 : 황푸군관학교 (중앙군관학교 황포분교 정치과)      •  참 전 : 중일전쟁한국 전쟁 반공유격전조선인민유격대 토벌 작전      •  수 상 : 공비토벌 기장경무관 추서보관문화훈장 추서ㆍ화랑무공훈장충무무공훈장대통령수장종군기장

•  경 력 : 조선의용대 (1938~1943) 반공유격대 (1948~1950)전투경찰 (1950~1953)ㆍ전북경찰국서남지구 전투경찰대충남경찰국 경비과장ㆍ충주경찰서 서장진해경찰서 서장공주경찰서 서장ㆍ청년방위대옹골연 유격대서남지구 전투경찰대 제2연대

차일혁

학창시절 "일본인 경찰"을 폭행한 사건으로 처벌을 피하기 위해, 1930년대 중반 "중국"으로 망명하여 "황푸군관학교"를 졸업하였으며, 이후 "조선의용대"에 입대하여 1938~1945년까지 "팔로군"과 함께 "항일 유격전" 활동을 벌였다. 해방 후, 귀국하여 "유격대"를 결성해 "북한의 인민군과 싸우던 중 경찰에 특채되어 "빨치산 토벌대 대장"으로 복무하였다다른 "팔로군" 출신이 대부분 "북한 정권"에 협조하지만, 남한으로 귀국한 그는 경찰에 투신하여 한국 전쟁 당시 "반공유격대"를 결성하여, "빨치산 토벌대장"으로 반공산당 활동을 펼치다가 "전투경찰대 2연대장"에 보임되어, "빨치산 소탕작전"에 주력하였다.

"625전쟁" , "빨치산 소탕"을 담당하는 "전투경찰대 제2연대연대장"으로 근무하며, "빨치산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 일파를 사살체포하고, 사살된 "이현상 시신"을 직접 화장하여 뿌려주었다 한다그러나 그는 가급적 귀순을 유도하여, 많은 빨치산의 목숨을 살렸다고 한다그는 "이 싸움은 어쩔 수 없이 하지만, 후에 세월이 가면 다 밝혀질 것이다. 미국과 소련 두 강대국 사이에 끼어 벌어진 부질없는 동족상잔이었다고."라는 글을 "전북일보"에 기고하였다.

그는 "빨치산 총사령관 이현상"을 화장하여, "하동 송림"에 뿌리며 장례를 치러주었는데, 이로 인해 상부로부터 질책을 받아서 부대원들에게 "태극무공훈장"3개나 수여되었지만, 그는 받지 못했다1954, "충주경찰서 서장"으로 발령을 받은 그는 "충주직업소년학원"을 설립하여, 중학교 진학을 못하는 불우청소년들에게 학업기회를 제공하였다"조선의용대""팔로군"과 함께 항일유격전을 펼쳤던 독립운동단체로, "지리산" 인근에서 "빨치산 토벌 시에 공산주의자들에게 온정적이었다"는 이유로 "진해경찰서장"으로 재직시 좌익 혐의로 조사를 받기도 하였다. 이후 "공주경찰서장"으로 좌천된 후, 1958"금강의 곰나루"에서 가족과 함께 물놀이를 하다가 익사하였다.

2. 화엄사 소각 (전남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

" (화엄사) 절을 태우는 데 한나절이면 족하지만, 절을 세우는 데는 천년 이상의 세월로도 부족하다."

1951.05, "전북"에 새로 주둔한 "8사단(사단장 최영희 준장)"과 군경합동 회의 참석차, 그는 도계로 갔다회의에는 "지리산 전투경찰대(사령관 신상묵)"을 비롯한 경찰 지휘관들과 "최영희 준장8사단 참모들" 참석했다. 회의 후 따로 모인 "전투경찰대 지휘관들""화엄사 소각 명령"에 대해 우려를 표했다이 명령은 숲이 우거질 시기인 녹음기에 "빨치산들"이 근거지가 될만한 사찰암자를 소각하라는 것이었다.

"화엄사" 지역은 "8사단(방득윤 대대장)"이 관할하고 있었고, 명령도 "방득윤 대대장"에게 내려진 것이었다. 그러나 "방득윤 대대장"은 명령 수행 문제를 고민하고 있었고, 이를 알게 된 "차일혁 18대대장""방득윤 대대장"에게 해결책을 제안했다"화엄사 대웅전" 등의 문짝을 떼어내어 문짝만 소각하는 것이었다"차일혁"은 명령을 "공비들의 은신처를 없애고 관측과 사격을 용이하게 하자는 것"으로 이해했고, 문짝만 뜯어내어 소각해도 그 목적은 충분히 달성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방득윤 대대장"도 이에 동의했고, 이로써 "화엄사"는 전체 사찰이 소각될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천은사쌍계사선운사" 등 유명한 사찰 등 문화재들에 대한 폭격도 될 수 있는 대로 피했다결국 그는 잇따른 "명령 불이행"으로 감봉처분을 받았다.

3.  이현상 (빨치산 남부군 총사령관) 최후죽음

1953.07.27, 남한 영역에 남은 "유격대"의 지위에 대한 언급 없이, "한국전쟁 휴전협정"이 체결되었다협정 체결 1주일 후인, 08.03 "평양"에서 "박헌영"이 정식으로 구속되고, "리승엽" 등은 처형되었다"남로당" 지휘 계통에 있던 "이현상" "전남제주도경상남도 서부" 지역을 책임지는 "5지구당 위원장직"에서 물러나, "평당원"으로 돌아갔다. "이현상"은 모든 직책을 잃고, 하산을 계획했다거의 같은 시기, "토벌대" "하동군 빗점골"에 숨어 있던 "이현상"을 추적하여 대략의 위치를 파악했다 09.17, "토벌대" "빗점골"을 포위했고, 09.18일 오전11, 서남지구 전투경찰 사령부 제23연대 수색대 33명과 교전을 벌이다가, 지리산 깊은 골짜기(빗점골 합수내 너덜겅 바위)에서 사살되었다.

당시 "이현상"을 사살한 공을 놓고, "차일혁 경무관"이 이끄는 "경찰 수색대" "김종원(일본 하사관 출신여순사건 반란 진압 대대장계엄군 사령관 양민 학살사건 조사 방해장면 부통령 저격 사건 연루) "국군부대" 툼을 벌였고, "이태(빨치산남부군 기관지 기자)"등은 "북한의 지시로 암살되었다"는 소문을 기록한 바도 있어, 정확한 사망 경위는 알 수 없다.

동향 출신의 친구인 "유진산임영신" 등 지인들이 시신을 찾아와 확인했다 그러나 "이현상"의 가족들은 대부분 월북한데다, 남은 친척들은 "한국 전쟁" , 고초를 당해 시신의 인수를 거부했고, 유일한 혈육인 "숙부" 인수를 거부했기에,  "토벌군" 측의 "차일혁" 화장하여, "섬진강" 다리 밑 "하동 송림" 주변 백사장에서 한 스님의 독경과 함께 "섬진강"에 뿌려졌다 "이현상"의 시신은 방부 처리되어 서울로 이송되어, "빨치산"의 최후를 보여준다는 명목으로 "창경원" 도로변에서 바지만 입힌 채, 유품과 더불어 20  동안 전시하기도 했다.

4.  "이현상" 

군경에 의해 사살된 "남한 빨치산의 총수 이현상"의 시신이 갈 곳이 없었다직계가족들은 모두 북한에 있고, 유일한 혈육인 숙부가 인수를 거부했기 때문이다"이현상 사살"의 주역인 "차일혁 총경(서남지구전투경찰대 2연대장)"에게 "정인주 총경(5연대장)"  권유했다"차 총경, 비록 공비의 괴수로 국가를 혼란하게 했지만 그래도 한판 승부를 겨루었던 상대 아닙니까? 정중히 장례를 치러주는 것이 적장에 대한 예의가 아니겠소?" "맞습니다. 비록 공비의 괴수였지만 그도 이제 한 인간에 지나지 않습니다 공비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마지막 가는 길에 정중히 예의를 갖추어 줍시다."

1953.10.08, "차일혁" "2연대 본부" 옆에 있는 "섬진강 백사장"에서 이현상의 시신을 화장했다만신창이가 된 그의 몸 위에 유품인 염주를 올려놓았다"차일혁" "칠불암"이 불에 탄 후, 부대에 몸을 의탁하고 있었던 스님을 불러 독경을 하게 했다"이현상 시신"은 스님의 독경 소리와 함께 하얀 재로 변해갔다이따금 불어오는 강바람을 타고 하얀 재가 날렸다"지리산"에 스며 들어간 후 5년이 지나, "빨치산 총사령관 이현상"은 이제 한 줌의 재가 되어 "섬진강 "에 흩날리고 있었다.

"차일혁"은 철모를 벗고 타다 남은 "이현상"의 뼈를 모아 담았다그리고는 "M1 소총"으로 곱게 빻아 "섬진강"에 뿌렸다다 뿌린 후 권총을 꺼내 허공을 향해 3발을 쏘았다. "~ ~ ~" "이현상"이 마지막 가는 길에 보내는 조사이다"지리산"에서 숨져간 수많은 원혼들에게, 초라한 모습으로 삶을 끝낸 "이현상"에게 보내는 조사였다"차일혁" "이현상"의 수첩에 적혀 있던 한시를 떠올렸다.

智異風雲當鴻動 (지리풍운당홍동): 지리산에 풍운이 마침내 크게 일어,   伏劍千里南走越 (복검천리남주월): 칼을 품고, 남쪽으로 천리길을 달려왔네.   一念何時非祖國 (일념하시비조국): 뜻은 한시도 조국을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고,   胸有萬甲心有血 (흉유만갑심유혈): 마음 속엔 끓는 피가 솟구치네.   < "이현상" "백두대간"을 따라 내려오며, "덕유산"에서 "지리산"을 바라보며, 창작한 한시 >

"차일혁"이 정중하게 예를 갖춰 "이현상"의 시체를 화장한 일이 알려지자, 일부 경찰 간부들이 시비를 걸었다"차 총경~ 빨갱이 시체를 화장해줬다면서? 그것도 중을 불러 염불까지 하게 하고화가 치민 "차일혁"은 큰 소리로 항의했다"죽은 뒤에도 빨갱이고 좌익이란 말입니까? 이제 지리산의 공비 토벌도 다 끝나가고 있습니다 나 역시 많은 공비들을 죽였지만, 그들 역시 같은 민족 아닙니까 내 친척일지도 모르는 것 아니겠소? 당신은 죽어서까지 공비 토벌하러 다니겠소?"

1955.04.01, "지리산" 일대에는 평화가 왔다는 사실을 알리는 "서남지구 전투경찰사령부" 명의의 공고문이 나붙었다"이제는 평화의 산, 그리고 마을. 안심하고 오십시오. 지리산 공비는 완전히 섬멸되었습니다."

5.  "차일혁 (빨치산 토벌대장)"의 수기 : 이현상 최후

"차일혁(빨치산 토벌대장)"의 수기에서 "이현상(남부군 사령관)"의 최후 장면을 살펴보면,  최후는 비참했다. 아군인지, 적군인지, 누구의 총에 죽었는지도 확실치 않다.

"이형련"의 얼굴은 더욱 새파랗게 변해가고 있었다. 이미 치료는 불가능했다 "나중에 우리가 구천에서 만날 때는 민주주의도, 공산주의도, 없는 곳에서 만납시다 이제는 말 안 해도 좋으니, 고개만 끄덕여 주시오나는 지도를 펴서, "이현상"이 숨어 있을 만한 몇 곳을 가리켰다"빗점골(반야봉 남쪽)"을 가리킬 때, "이형련"은 가늘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는 고개를 떨구며,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이형련 : 경성의전 출신해방 후, 광주 홍안과에 근무했음. 625발발 이후 전남도당에서 활동하다가 입산5지구당 기요과 부과장부위원장 "박영발"의 전속 의무관으로 있기도 했다)

"이형련"의 정보를 토대로, "서전사 사령관 실"에서 작전회의가 열리고, 작전지도가 그려졌다작전지도를 그렸던 "작전주임 한영환"은 본 작전이 끝날 때까지, 영창에 가두어둘 만큼, 보안을 철저하게 유지했다. 전방지휘소를 "용강"에 설치하고, 본부를 "쌍계사"로 전진 배치했다"이현상"이 있다고 알려진 "빗점골" "쌍계사"에서 4km 남짓한 거리였다.

1953.09.06, "5지구당 조직위원회" "빗점골"에서 다시 열리고, "5지구당"은 완전한 해체가 이루어졌다. 이로써 "이현상"은 완전히 실권을 잃고, "반 감금상태"에 있었다09.13, "서전사 작전명령 9"가 하달되었다"빗점골"을 완전히 포위하고, 수색대를 잠복시켜, "이현상을 생포한다."는 작전이었다그러나 작전 개시일은 같은 지역에서 작전을 펴고 있던 "국군 56연대"로 인하여, 5일 연기되었다.

국군 측에서도 "전투 경찰"과 거의 동일한 모종의 정보를 입수한 듯했다09.17, "1연대" "반선리(뱀사골 쪽)"에 부대를 배치하여 포위망 형성, "3연대" "구례", "5연대" "함양 마천"에서 포위망을 구축, "2연대 1대대" "주천"에 주둔하여 외곽 경비를, "2대대3대대618부대" "용강"에 집결하여, "빗점골" 일대에 대한 작전을 개시했다.

이미 호위병도 없이, 거의 "감금상태"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이현상"이라지만, 평생을 "공산주의 운동"에 몸바쳐온 한 인간에 대한 호기심으로, 나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계속 작전 상황을 보고 받았다다음날인 09.18일 오전 11시경, "수색대"로부터 전과보고를 받았다"연대장님 어젯밤에 전투가 있었고, 방금 일대를 수색하다가, 늙은 공비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어제 야간전투 중 총에 맞아 죽은 것인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정확하게 등에서 가슴까지 관통한 것으로 보아, 상당히 가까운 거리에서 총을 맞은 것 같습니다"이현상" "7인조 호위병"이었던 "김진영김은석" "선생님 죄송합니다."하고 시체를 부등켜 안고 울었다. "이현상"이었다. "이현상 시체" "쌍계사"에 설치된 "연대 지휘부"에 옮겨 놓았다.

지금 내 앞에 누워있는 이 자가 바로 "이현상"이란 말인가전방 "지휘소장 김억순 작전과장"에게 보고하니, 너무나 충격이 컸던지, 계속하여 몇 번이고, 틀림없는 "이현상 인가?"를 나에게 되물었다그동안 많은 군경들이 이 자에게 희생당하고, "지리산 골짜기"마다 이 자를 잡기 위해, 이 잡듯 샅샅이 뒤졌으나, 자기를 포획할 자는 아무도 없다는 듯이 신출귀몰하여, 군경을 비웃던 "이현상"의 시체를 보자, 감개무량했다.

"이현상의 시체" 40대 후반의 "중늙은이" 모습이고, 줄이 선 "미제 군복바지" "군용 농구화"의 깨끗한 차림의 외양이었다군복 안에는 "일기"와 한시가 적힌 "수첩" "가래(호두와 비슷)"가 있었고, 주머니 속에서 "염주" 나왔다. 그리고 허리춤 깊숙이 "소련제 권총"이 들어 있었다."빨치산 총수"였던 "이현상"이 손놀림을 위해, "가래"를 지닌 것은 이해되었지만, "염주"를 지니고 있었다는 것은 나로서는 의외였다.

5년이 넘게 "빨치산"으로 이 산 저산을 누비며, 신출귀몰하다는 소리를 듣던 그였다북에 있던 동지들이 대부분 숙청당하고, 외로이 "지리산"에 남아, 투쟁하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인생의 무상함을 느꼈던 것일까나는 그의 손때가 묻은 "가래" "권총"을 왠지 간직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오랫동안 겨루어 보고 싶었던 적이었지만, 그가 사살되고 나니, 오랜 친구가 멀리 떠나버린 것처럼 허전해, 그와의 인연을 생각하며 간직하고 싶었다.

나는 "김용식"을 불러, "이현상"의 유품에 "권총이 있었다."는 것을 비밀에 붙이도록 하고, 다른 수대원들에게 "권총이 있었다."는 사실을 발설치 않게 했다나는 우리 수색대가 "이현상"을 죽이지 않았다면, 과연 누가 그를 죽였을까 하는 의문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그는 "평당원"으로 강등되어, 거의 "감금상태"에 있다가, "경남도당"으로 이송되어 가던 중에 사살 된 것이라면, 과연 누가 그를 죽였을까? 근처에서 "국군 56연대 수색대"도 우리와 함께 작전을 했었는데.

나는 "빨치산 내부에서 이현상을 죽인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마저 들었다"박헌영이승엽"의 몰락으로 "이현상" "5지구당"이 해체되고, "이현상" "평당원"으로 강등되어, "호위병"과 격리되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 "이현상"의 주위에는 일부 자신의 추종자들을 제외하고는 온통 "" 뿐이었다. 북한에서도 "박헌영"을 숙청했는데, 그의 심복이었던 "이현상"을 그냥 둘 수 없다고 판단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그러나 시체가 되어버린 "이현상" 만이 알고 있을 뿐, 어느 누구도 시원스럽게 대답해줄 사람은 없었다.

09.20, "김억순 작전과장"은 공로를 내세울 양으로, "이현상"의 시신과 유품을 가지고 "경무대" 향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 "죽은 이현상은 보지 않겠다."고 했다"이현상의 시신"이 명동에 소재한 "경찰병원"에 며칠 안치되어 있는 동안, 그의 "보성전문" 동창들이 확인하였다. 고향 친구며, 정치인인 "유진산"이 그의 시체를 찾아와 "현상아, 너도 늙었구나."라는 한마디를 남기고 돌아갔다이후 "이현상의 시체" "창경원"에서 그의 유품과 함께, 일반시민에게 공개되었다.

09.23, "하동 화개면장 하병기"씨를 비롯한 많은 "화개면민" "2연대" 전원이 "화개국민학교"에서 열린 "이현상 사살 기념식"을 가졌다. 한편 "이현상 사살 공로"를 두고, 경찰과 국군은 서로 공을 주장했다경찰과 국군의 공로싸움은 치열했지만, 그것을 가려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서전사남경사"의 공로싸움은 점차 "내무부국방부"의 갈등으로 번져 급기야 "내무부방부 합동 진상조사단"까지 구성돼 공로를 가리게 되었다오랫동안 논란이 되었던 "이현상 사살"에 대한 공로다툼은 "합동 진상조사단"의 조사로도, 매듭짓지 못하다가,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경찰의 공"로로 결론지어졌다.

"창경원"에서 일반인에게 공개되었던 "이현상의 시신"은 다시 "하동 화개장"으로 돌아왔다"이현상의 시체" "이현상의 숙부"조차 역적이라며, 인수를 거부했다나는 한동안 시체 처리에 고심했다. "숙부"조차 인수를 거부해, 나로서도 난감했다10.08, 나는 "2연대 본부" 옆에 있는 "섬진강 백사장"에서 "이현상 시체"를 화장했다그의 유품인 "염주"도 함께 화장했다. 나는 "칠불암"이 소각되고, "주지"가 피살되어 갈 곳이 없어 우리 부대에 몸을 의탁하고 있는 "스님"에게 독경을 부탁했다.

나는 "이현상의 뼈"를 내 "철모"에 넣고, "M1소총"으로 빻아, "섬진강" 물에 뿌렸다그리고 "권총"을 꺼내, 허공을 향해, 3발을 쏘았다그의 마지막 가는 길에 붙이는 나의 "조사(弔辭)"였다한 많은 그의 인생은 한 줌 재가 되어, "섬진강"을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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